-새로운 인연(8)-
회갈색의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군데군데 흩뿌려진 나무껍질의 흰 얼룩무늬는, 마치 뿌연 안개가 나무숲을 감싸 안은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만약 높은 지대에서 나무숲을 주의 깊게 내려다본다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백여 그루의 나무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듯하지만, 진에 대한 지식이 약간이라도 있는 이라면, ‘......아!’ 하고 탄성을 내지를 것이 틀림없다. 모든 나무들은 원형과 팔각이 기묘하게 섞인 기하학적인 형을 이루며, 묘하게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보통의 나무들보다 더 곧게 그리고 더 높이 뻗은 한 그루의 중심목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리고 지금 숲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그 물푸레나무 앞에는, 땀에 젖은 곱슬머리를 손으로 훔쳐내는 작은 소년이 있다.
“오랜만이에요~ 하아! 하-아~!”
소년은 급하게 뛰어온 모양이다. 자그마한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몸을 숙인채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그 옆에 선 하얀 털의 개 역시 주인을 쫒아오느라 힘들었는지 혀를 한자만큼 내빼고 헉헉거리고 있다. 여느 개와 다른 점이라면 한쪽 앞발로는 나무를 짚고 다른 발로 땀을 닦으며, 나머지 두 뒷발로 서있는 것이랄까? 그 개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년은 두 손바닥을 나무줄기에 가만히 갔다댔다.
쑤-욱!
회갈색의 나무줄기에서 무엇인가가 불-쑥 솟아 올라오는 듯하다.
넓은 이마와 매부리코, 그리고 깊은 눈빛의 나이가 지긋한 노인장의 얼굴형태가 쑤욱 밀려올라왔다. 회갈색의 나무줄기에서 솟아 올라와서인지 노인의 얼굴 전부도 같은 색을 띠고 있다. 마치 솜씨 좋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나무에 잘 다듬어 놓은 양각조각 같다.
서서히 하지만 완연히 사람의 형체를 갖춘 얼굴은 목 부근까지 나무에서 솟아 올라왔다. 그리고 거기서 딱 멈추었다. 그의 길고 숱 많은 수염이 날려 소년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오랜만이구나.. 껄껄..」
소년의 눈높이에서 형상을 갖춘 노인의 얼굴은 사람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허허로운 웃음을 흘리고 있다. 소년도 반갑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에~! 오늘은 우리.. 누나와 함께 왔어요!”
「알고 있다. 그녀는 신목들의 선택을 받은 존귀한 분. 」
“헤헤.. 오늘 집에 손님이 두 분이나 오셨어요.. 그리고 누나랑 전 여기에 왔고요~.”
「......」
노인의 얼굴은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답이 없다. 하지만 말을 잇는 도화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누나는 지금 화살을 만들 나무를 고르고 있어요. 저는 그 틈에 할아버지를 보러 왔고요.”
대청마루에 선 작약과 백아의 곁으로 조용히 현이 다가왔다. 백아는 현의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수혈(睡血)을 짚어 드렸어요. 쉬시게 두시어요.”
백아는 잠시 흔들렸던 눈빛을 거두고는, 이내 무심히 가을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작약은 말없이 현에게 몇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나긋나긋한 머리칼을 고운 이마와 뺨 뒤로 쓸어 넘기는 노파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너는 괜찮은 게냐?”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몇 번이고 혼절하고 실신을 거듭했던 현이다.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무렴요. 전 괜찮은 걸요. 걱정하시지 마시어요...”
“현아. 이제 도화는, 아니..우리는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
짐짓 뒷짐을 진채로 백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현을 돌아보지도 않고 여전히 창공을 향한 채다. 작약의 두 눈도 현의 얼굴을 향했다. 현은 제 어깨에 올려진 쭈글쭈글한 작약의 손을 자신의 하얀 손으로 잠시 힘 있게 쥐고는, 슬며시 그 손을 물리쳤다. 노파의 팔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녀는 작약과 백아를 지나쳐 대청마루 아래로 내려갔다. 마당한가운데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 모금의 가을하늘을 입에 담은 그녀의 숱 많은 눈꺼풀이 스스르 닫쳤다. 그녀는 두 팔을 허공으로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한참을 하늘을 더듬던 현의 두 손엔 은은한 녹색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한참 진녹색으로 진해졌던 그 빛이 다시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팔을 내린 현은 또 다시 말없이 운해를, 아니 그 너머를 한참이나 힘없이 응시했다. 활짝 개화한 한 떨기 해당화같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녀의 뒷모습을, 작약과 현은 말없이 응시했다. 그들의 두 눈 깊숙이 경외감이 가득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여기에 와서 모든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이제는 때가 이르렀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란..?”
“........”
백아는 조용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아이가 이곳을 떠나야 할 날이 된 것이어요.
저는 그 길을 밝혀 드려야 할 의무가 있구요...“
“그 아이라면... 우리 도화 말이냐?”
“네에. 거성과 함께 큰 주성(主星)이 북으로 궤를 옮겨 갑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여정이 될 것이어요.”
“우리 도화가 대체 어디로 떠난다는 말이냐.. 그 어린 것은, 우리 부부 외에는 천하에 의지할 곳 없는 가련한 녀석이다...”
말을 내뱉는 백아의 얼굴이 흙빛으로 어두워졌다. 자신들이 혹여나 아이를 내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또한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픈 말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하나뿐인 자식과 헤어질 것이라는데 어느 부모가 태연할 수 있겠는가.
“붉은 기운의 그분과 함께 하실 거여요. 험한 여정이기도 하지만,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기도 하지요.”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이라?”
백아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되물었다. 그의 작은 눈이 한층 더 가늘어 졌다. 작약의 눈 또한 어떤 결연한 의지로 굳게 빛나고 있었다.
“ 더 이상은 아셔도 아니 되고, 안다하셔도 모르실 일이에요. 묻지 마셔요. 이르면 오늘 밤이면 연유를 아시게 될 거에요.
소북에서...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군요.“
도화의 앞에 버티고선 회갈색의 물푸레나무가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나뭇잎이 눈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바람한점 없었건만 이상한 일이었다. 도화도 신기한 듯 나무 중앙의 노인의 얼굴을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는 중이다.
푸걱.
나뭇가지 하나가 땅위로 툭 떨어졌다. 기묘하게 생긴 모양이다. 노인의 기다란 수염 몇 가닥이 나뭇가지를 감아쥐고는 곧 소년의 작은 손에 쥐어주었다.
「이것을 그분께 전하라」
마음속의 울림이 도화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더 커진 눈으로 소년이 되물었다.
“누나에게요?”
「그래... 나는 큰 신이 아니니 깊이 알지는 못한다. 허나 장백산이 내게 구슬피 울며 말하는 구나. 이제 곧 너와 그분이 떠날 것이라고. 」
“네?? 저와 누나가요?”
「......」
노인의 얼굴은 아무 대답 없이 슬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즐거웠구나. 허허허... 만년을 이 자리에 뿌리박고 있었다만, 날 알아보고 말을 거는 인간은 네 녀석이 처음이었다. 」
“이상해요. 제가 보는 모든 것을 엄마나 아빠나 누나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해요.”
「그건 당연한 이치이지. 내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더냐. 먼 옛날 태고적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그리하였다고. 」
“흐음...”
실상 도화는 몹시 섭섭했다. 이리저리 흰둥이와 산을 헤집고 다니다가, 여기에서 나무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도화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고, 때론 공부도 가르쳐 주었다. 좋은 스승이자 말벗이었고, 또한 이미 도화 녀석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가족과 같았다. 그건 신목도 마찬가지였던 듯 나무의 표정 곳곳에서 아쉬움이 베어났다.
4개월 전 누나를 살짝 이곳으로 데려왔고, 누나는 여기 물푸레 나무숲을 보자마자 뛸 듯이 기뻐했다. 덩달아 도화도 같이 기뻐했던 것은 말할 나위없는 일이다. 한 가지 덧붙여 나무 할아버지는 신목들이 누나를 선택했다고 했다. 자신의 누나가 귀한 대접을 받자 도화도 덩달아 신이 났다. 하지만 지금 나무는 소년에게 이별을 고하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선물을 안기고 있다. 도화는 나뭇가지를 꼬옥 움켜쥐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이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도화는, 아직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도화야! 여기서 머 해? 누나가 한참 찾았잖아..이 말썽꾸러기!!”
한영이었다.
한영은 도화를 찾아내고는 작은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녀석을 찾아다녔다. 하긴 길을 잃을 걱정은 없는 녀석이었지만, 혹여 험한 짐승이라도 만났을까 걱정이 되어, 나무를 고르던 중 그 일을 내팽겨 치고 도화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한참을 헤맨 끝에 저 쪽 큰 나무 아래에서 혼자 중얼 중얼 거리고 있는 도화를 발견한 것이다. 유난히 시력이 발달한 그녀다. 도화는 나무 아래에서 흰둥이를 옆에 두고 계속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도화는 화난 표정의 한영과 나무 할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봤다. 인자한 표정의 나무 할아버지는 한영을 보더니, 크게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도화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저 분을 잘 부탁한다...」
마지막 말을 남긴 나무의 얼굴은 다시 원래대로 쑤욱 제자리로 들어갔다. 중심목은 다시 평범한 다른 나무와 같이 돌아간 후다. 도화는 이내 한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무를 돌아보았다. 한영은 나무와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는 어리벙벙한 표정의 도화를 보고 웃음을 짓는다.
“왜 그래? 나무에 신기한 곤충이라도 있든? 녀석...”
한참 한영을 빤히 올려다보던 도화는 체념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아니야, 됐어.”
“큭. 싱겁기는... 어서 올라가자. 엄마 걱정하시겠다. 이 녀석아!”
한영은 도화의 숱 많은 곱슬머리를 이리저리 흩트려 놓은 후 녀석의 손을 잡아끌었다. 빠른 걸음으로 그들은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듯 두발로 잘 걷는 흰둥이가, 그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멀어져가는 숲 쪽으로 도화가 자꾸 뒤돌아보았다. 그리곤 나무 할아버지가 준 선물을 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쑤욱
그들의 모습이 작은 점이 될 무렵 물푸레나무숲 한가운데의 중심목에 두개의 눈동자가 음각으로 패어졌다. 세월의 깊이를 짐작하게 하는 늙은 노안이다.
「이제... 다시 깊은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군......」
눈동자가 서서히 닫히고, 신목은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