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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9장/ 암연의 시간들.. 세번째..) <13년 전, 실극화>

추림의 풍 |2005.09.27 14:07
조회 202 |추천 0

토요일 밤, 유미와 헤어지고 추림은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다.

그녀를 보내고 잠이 든 새벽녘부터 견딜 수 없는 열기가 들끓었다.

겨우겨우 일요일을 견디고 월요일 날 출근하다가 길가에 쓰러지다 시피 한 추림은 결국

출근하길 포기하고 말았다.

 

이대준이 걱정이 되었는지 일은 하지않고 추림을 찾아왔다가 비명을 질렀다.

현관문을 반쯤 열어놓은 채 신발도 벗지 않은 추림이 모로 누워 있었던 것이다.

 

덩치가 커다란 이대준이 추림을 업고 차에 태워 병원을 찾았다. 추림은 회사에서 지독한

일벌레로 소문나 있었다. 이년이 넘는 동안 결근한적이 한번도 없어서 늘 만근수당 일순

위였다.

 

의사말로는 심한 몸살이라고 했지만 추림이 생각할 때 그것이 아닌것 같았다.

무언가 몸안으로 들어온듯한 느낌이었다. 병원에서 닝겔을 맞고 집으로 돌아온 추림에게

이대준은 정성이었다.

 

대야에 물을 떠오고 수건을 적셔 추림의 몸을 닦아주고 머리위에 얹어 주었다.

기운없이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유미의 손을 잡고 끝없이 드넓은, 눈덥힌 벌판을 걸었다.

온통 순백색의 세상을 추림과 유미는 손을 잡고 걸었다.

그들이 지나온 길 뒤로 두개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오로지 세상에 그들만이 존재함을 일러

주었다.

 

유미를 업고 노래를 흥얼거리자 추림의 목에 깊게 팔을 두른 유미가 얼굴을 등에 기댄 채

살며시 잠이 들었다. 

추림은 끝없이 걷고 또 걸었다. 유미가 깰까봐 흔들림없이 자세를 고정시키려 애썼다.

 

어느순간 유미가 추림에게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추림이 아무리 다가가고 잡으려 했지만 유미의 모습은 멀리 멀리 사라져갔다.

유미가 저 멀리 눈의 벌판으로 사라지자 좌절한 추림이 길게 통곡했다.

 

추림은 길고 서러운 통곡을 토해내며 유미의 흔적을 따라 걸어갔다.

유미가 걸어간 흔적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어디서도 유미는 보이지 않았다.

'유미...... 유미이이이이...... 어딨어......!'

 

힘없이 눈꺼플을 들어올리자 천정의 형광 불빛이 흐릿하게 비춰들었다.

눈가가 축축했다. 꿈에서 유미를 만난것 같았다.

리고 서럽게 운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실로 이어진 가슴아픈 꿈인듯 느껴졌다.

적막한 기운이 맴돌아 방안을 살피자 한쪽벽에 기댄 이대준이 코를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

었다.

 

이렇게 아팠던적이 없었다.

열이 무려 42도까지 치솟았을 정도로 자신이 아파할 이유가 있나하고 생각해 보았다.

주말에 유미와 늦게 헤어졌다. 레스토랑에서 자리를 옮기고 다른 주점을 찾아 거의 일곱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를 알수 없는 아쉬움속에 보낼때 유미는 서글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가면서 전해준 장미꽃 한송이... 잘 간직하라고 했는데...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를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가끔 기억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꾸 그녀가 떠올랐다. 이런 경우가 없었던 추림은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러면서 그 기분이 나쁜것 같지가 않았다.

 

메마르고 거칠게 갈라진 입술을 달짝거렸다. 목이 말랐지만 이대준은 자고 자신은 기운이

없었다. 혀를 오물거려 최대한 건조한 목을 달랬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추림이 낮게 웅얼거렸다.

 

"내가... 너를 좋아하면 그 때... 너에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넌... 뭐가 그리 힘드니......!"

 

미약한 음성이 작은 공간을 살짝 맴돌다 사라지고 오직 적막하고 허무한 기운만이 감돌았

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지금 생각

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 길고도 많은 시간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짧고 아쉽게만 느껴진것은 자신

뿐이었을까!

 

눈가에 맺혀 남아있던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입가에 닿았다. 

씁쓰르한 맛이 나며 짠 여운이 느껴졌다. 문득, 유미의 눈물이 생각났다.

견딜 수 없이 아파보이던 울음... 그렇게 텅빈듯하고 애처로운 서러움은 처음 보았다.

그때 추림은 유미의 곁으로 다가가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가슴

한켠이 쩌르르하고 아파왔다.

 

이건... 혹시 그것이 아닐까? 진정 내가 그녀를...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그녀는 느낌이 조

금 다를 뿐일지도 몰랐다.

 

" 널 내 운명으로... 만들어도 될까... 나 지금 너무 아프다... 유미... 니가 보고싶다......! "

 

추림의 입에서 문득 메마른 독백이 흘러나왔다.

단 두번의 만남...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 만남은 도대체 자신에게 어떤 의미

를 부여한 것일까? 운명인가? 내가 지닌 인연의 수레바퀴속에 그녀가 있던 것일까?

 

<이상한 일입니다. 내가 많이 다친것 같습니다. 혹여 그것이 진한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

랍니다.

신이시여! 내 인생에 그녀를 만나게 한 것은 당신의 허락입니까?

이상한 일이다. 유미를 두번 만났을 뿐이데,,, 그녀가 단순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상하게 그녀를 떠 올리면 가슴 한켠이 너무 시리고 아파지는듯한 느낌이 든다.

조금의 좌절과 슬픔을 느꼈더랬다. 그녀가 울었을 때 아무것도 못해준 내가 조금 미웠고

스스로에게 실망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가 사준 장미꽃 한 송이를 돌려주며 잘 간직하라고 했다. 거울에 꼿아두었던 꽃을 물컵

에 담아 두었다.

장미꽃아... 부디 오래 오래 살아 남아 있기를 바란다.

코끝이 찡해온다. 온통 그녀의 눈물만 떠 오르고 날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을 지

울 수가 없다. 조급해지는 느낌이다. 긴 한숨으로 그녀를 잊으려 애써 보지만 그럴수록 마

음은 더 처연스럽게 괴로워진다. 외롭다! 혼자여서 외로운것이 아닌 마음에 들어온 그리움

때문에 외롭다.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은것이 후회스럽다.

헤어지기전에 쪽지라도 건네줄것을... 지금 늦은 새벽인데 그녀는 자고 있을까?

나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데... 잘자... 유미야...

언젠가... 아주 언젠가 유미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그때까지 내 흔적을 지워지지 않게

잡아주길 바래... 아주 조금만 그렇게 해줘... 나 지금 너무 아프다... 니가 너무 보고싶다...

그냥 이대로 널 그리워 해도 되겠지? 허락해줄거지? 고마워... 나 지금 너무 아프다... 니가

너무 보고싶다... 그래서 가슴이 너무 아프다... 너무 아프다.....!>   

 

그날 새벽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난 추림은 그렇게 일기를 써내려갔다.

창밖에서 차가운 바람이 흐느껴 우는 소리가 구슬프게 흩어지던 날이었다.

 

*         *         *

 

탁자위에 펼쳐진 알록 달록한 일기장위로 오직 단 하나의 낙서만이 가득했다.

 

이추림... 이추림... 추림의 이름이 작고 크게 일기장의 여백을 가득 메웠다.

잘 정돈된 희고 고운 손가락이 또다시 놀려지며 같은 이름을 번복해서 그려나갔다.

 

시간을 힐긋 바라본 유미는 아직 약속보다 십분쯤 시간이 있자 조금 여유로워졌다.

오늘 김석호를 만나주기로 한 날이었다. 화곡동에서 종로까지 오는동안 몇번을 돌아가려

 망설였다.

 

여느때와 다르게 발걸음이 무겁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것이 추림 때문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남자의 생각이 이렇게 지대하게 자리한

적은 아직 없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그날, 추림은 끝까지 웃어주고 편하게 대해주었다.

그 자신의 이야기도 해주었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어 주었다. 세세한 것까지 말해주었는데

하나도 지루하지가 않았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끝내 그는 전화번호나 자신에게 궁금한것을 물어보지 않았다.

자신은 그의 집 전화번호까지 물어보았는데... 어쩌면 그는 그러지 못하는 남자일지도 몰

랐다.

상대를 그렇게 배려하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여자에게 전화번호를 묻는 시시함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인지도.....

 

추림과 같이 있는 내내 마음은 넉넉하고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 

그가 한번쯤 손을 잡아주길 기대했지만 그건 지나친 생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부드럽고 따듯했다. 서두르지 않았고 재촉하지 않았다. 

추림같은 남자는 여지껏 만나보지 못한 유형의 사내였다. 한가지... 그가 때론 조금 거칠게

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지만 그는 늘 한결같았다. 

건네준 장미꽃 한송이의 의미를 그는 알까? 그게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그에게 여러번 기대고 싶은 충동... 그가 강하게 안아 주었으면 하던 그 느낌들...

혼란스러웠다. 차라리 그에게 말할것을... 만나자고 약속하지 못한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은것도 어쩌면 자신은 이미 그를 좋아하고 있는 반증인지도 몰랐다.

 

보고싶어요... 추림... 절 생각이나 하고 있나요... 추림은 누구인가요...

일기장에 그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무질서하게 써내려갈 때 인기척이 들려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 왔는지 석호가 하얀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황급히 일기장을 덥었지만 이미 보았을지도 몰랐다. 난처한 상황이었지만 무시하면 그뿐

이다. 그와 자신은 아무런 사이도 아닌 것이다. 

 

유미는 석호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서 강한 속삭임을 들었다.

유미씨......!

 

'아... 추림... 이런 느낌 싫어!'

 

오지 말아야 할 자리에 온것임을 유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석호가 큼직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오자 도리질을 친 유미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10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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