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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15장/ 손을 내민 허수아비..) <실극화>

추림의 풍 |2005.10.06 05:18
조회 277 |추천 0

밤이 되어가자 도시는 죽음같은 적막속에 갇혔다. 아스팔트를 할퀴고 지나가는 칼바람과

빌딩숲에 부딪히는 스산하고 괴괴한 소리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집안으로 불러들이며 외출

할것에 대해 경고하는듯 했다.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 추림은 선주를 겨우 떼어내 집으로 돌려 보내고 여덟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와 오늘도 술을 마셨지만 그리 마음편한 자리가 아니었기에 추림은 자기전에 술을 한

잔 마시고 잘 생각으로 오랜만에 집 근처 단골 카페에 들르기로 했다.

 

빌라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도로를 따라 인도를 걷다가 저 멀리 전화부스가 보였다.

이대준에게 전화라도 할까하는 심정이 들어 힐긋 전화부스들이 늘어진 곳을 바라보던 추

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회색코트를 입은 한 여자가 전하부스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밤에 여자가 그런 모습으로 나다닐 형편이 아닐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상하게 신경이 자극되었다.

 

전화부스를 지나치려다가 다시 그곳을 바라보던 추림의 발길이 멈칫거렸다.

얼굴을 두손으로 가린 채 무릎에 대고 있는 상태인 여자의 모습이 낮익게 느껴졌다.

이상한 생각이 든 추림이 조금 다가가 유심히 그 여자를 바라보다가 너무 놀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유미씨?"

 

추림이 전화부스로 다가가 여자를 확인하려는듯 그렇게 말하며 조금 더 다가가자 추림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유미씨! 여기서 뭐하시는.......!"

 

확실히 유미였다.

추림의 부름에 고개를 쳐든 유미의 얼굴이 크게 확대돼고 온통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이 추위에 질려 파랗게 변해 있었다.

 

"......!"

 

말을 잊은 추림이 코트를 벗어 유미에게 덥어주며 그녀의 팔을 잡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유미가 추림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다가 잠시 비틀거렸다.

 

유미의 두 어깨를 잡고 정면에 세운 추림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생기고 눈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안으로 오므려 격정을 참고 있는 유미는 눈물이 글썽한 두 눈으로 추림을 원망어리

게 바라보았다.

 

"걸으세요. 이게... 휴우! 제가 손을 잡아드릴께요."

 

추림이 조금 거부하는 유미의 손을 강제로 잡아 허리에 붙히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침묵과 함게 길을 걷자 저 멀리 카페 몽마르뜨가 보였다.

 

'모르겠군! 이건 도대체 정신이 없구나.'

 

속으로 하루의 길었던 일과와 현재의 일을 뒤섞어 생각한 추림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

고 피곤한 심정을 억눌렀다.

가슴이 거칠게 뛰던것이 조금 가라앉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나던 대상이었

는데 이렇게 보게 되자 기쁨보다는 그녀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자신을 기다렸을 것이다. 집근처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수십번쯤 했을 것이고 두시

간쯤을 기다렸을 것이다. 바보같은 짓이었다. 차라리 어디 주점이라도 들어가 있을 것이지.

 

몽마르뜨는 파리의 명소인 몽마르뜨 언덕에서 이름을 빌려와 고풍스럽고 아늑하게 인테리

어를 한 아담한 카페였다.

추림이 이곳에 스므번 이상을 다녔지만 늘 조용하게 오갔으므로 주인과 종업원들과는 그

리 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안면은 충분히 트고 있는 상태였다.

 

술과 식사할만한 고기류의 안주를 시키고 붉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추운곳에 있다가 따듯한 곳에 들어오게 되니 유미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그녀를 조용히 응시하던 추림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그녀가 작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서운하고 그리웠던 여자였던가!

자신에게 조금더 뻔뻔한 면이 있었다면 보고 싶었노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유미씨. 저를 기다린 겁니까?"

 

유미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린 추림이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유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추림을 살작 바라보았다.

감동이 몰려들고 가슴이 뿌듯해진 추림은 티를 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

 

"얼마나 거기에 있었습니까?"

"여섯시 반에 왔어요. 추림씨 집을 찾다가......"

 

"......!"

 

세상에나... 그럼 한시간 반이나 밖에서 떨었다는 이야기다.

추림은 그녀의 그런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미씨!"

 

추림이 유미를 부르자 유미가 추림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추림의 부드럽고 따듯한 눈길

과 미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이런일에 매우 서툽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 전... 이렇게 행동하

지 않을 겁니다. 아마 아주 거칠게 유미씨를 대할지도 몰라요."

"......?"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그 의미는 대충 짐작이 가는 말이었다.

유미는 그를 기다리던 내내 힘들고 바보같았던 마음이 한순간에 눈녹듯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십번을 더 돌아가자 다짐하면서도 마지막으로 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결국 추림을 만난 것이다. 기분이 좋았고 감격스러웠다. 이렇게 보게되자 그토록 힘들었던

몇시간과 일주일 내내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까맣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됬군요. 참 못난 놈이 되어 버렸군요 제가. 사실은 친구에게 다녀오

는 길입니다. 아주 친한 친군데 문제가 심각한 일이 생겨서 그것을 좀 해결하느라고요.

유미씨도 아시죠? 김성규라고 악기를 기가막히게 잘 다루던 그 이국적인 생김새의 친구

말입니다. 그놈에게 다녀 왔습니다."

 

추림이 화재를 얼른 돌려 그녀와 공유 할 수 있는 꺼리를 찾아 내었는데 대상이 성규가 되

어 버렸다. 사실이었고 그녀도 알기에 슬쩍 이야기를 내비춘 것이다.

 

"네에. 그러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원망만 실컷 하고 있었어요."

"다음에... 기회가 되고 허락하신다면 유미씨와 어딘가를 같이 가고 싶어요. 그런 생각이 들

었어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는 마시고요."

 

진정 그런 마음이지만 추림은 유미가 자신이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을 생각하지 않

고 있다고 믿었기에 큰 의미는 두지 않으려했다.

 

'그가 날 좋아하는걸까?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거야.'

 

추림의 말이 너무 애매한 것이라서 유미는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자신을 좋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평범하지만 알고 지내자고 하는 것인지 차라리 속 시

원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자 한잔 하시면서 식사는... 대충 하셔야 겠네요. 어쩌지요? 제가 너무 서둘렀나 보네요."

 

유미가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추림이 식사대용로 부실하게 안주가 나오자 미

안한 마음을 표현하니 유미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전 됐어요. 별로 생각도 없고. 술이나 마시지요 뭐."

"아! 다행입니다. 그러세요. 술은 제가 실컷 사 드릴께요."

 

추림이 임페리얼을 유미의 잔에 얼음과 섞어 흔들고는 건네고 우유와 음료수도 잊지 않고

직접 챙겨주었다.

 

"자 건배해요! 아니 건배는 나중에 하고. 제가 유미씨를 기다리게 한 죄를 사하는 건배를

먼저하죠? 어때요? 그럼 근사한 밤이 될 것 같은데요."

"좋아요. 대신 다음에 절 기다려 주신다고 약속해 주세요."

 

환하게 웃으며 유미가 밝게 말하자 추림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기꺼이 그렇게 해 드리죠. 정말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딴소리 하지 않기예요?"

"피잇. 그러지도 않을 거면서! 안믿네요 이추림씨!"

 

유미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퉁명하게 말했다. 추림이 손사레를 치며 얼굴을 과장되게

굳히며 얼른 말했다.

 

"아닙니다. 전 반드시 그렇게 기다릴 겁니다. 아마 내일이라도 그렇게 될지도 몰라요. 한

번 속아 보실래요? 아니 내기할까요? 기다리면 제가 이기고 안 그러면 유미씨가 이기는

것으로 하고, 조건은... 이기는 사람의 모든 부탁을 들어 주는 것으로 하지요. 어때요?"

 

역시 이남자는 늘 신선하고 위트가 넘치는 남자였다.

침울한 분위기를 어느새 활력있게 변화시키고 상대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옷을 갈아 입

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미는 마음이 매우 기꺼웠다. 추림과 함께라면 어디서 무엇을 하던 좋을 것 같다는 생각

이 들었다.

 

"좋아요. 꼭 들어주기예요? 제가 이기면 추림씨는 각오하는게 좋을 거예요. 자 건배해요."

"기대하세요. 틀림없이 제가 이길 거니까요! 자 건배! 추림이 유미씨를 기다리게 한죄를 영

광으로 생각하게 하소서!"

"뭐예욧! 아니 그런 건배가 세상에 어딨어요? 무슨 이단교 집회도 아니고!"

 

추림의 건배 구호가 다소 엉뚱한데가 있어서 유미가 심통을 부리자 추림이 눈을 찡긋거리

고는 단숨에 술을 비워냈다.    

 

"사실... 유미씨가 보고싶었어요. 이상하게 생각났습니다. 아무나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

가 바람둥이쯤 되겠지만 다행이도 전 바람둥이 기질은 없나 봅니다. 마치 유미씨가 제게

마법을 건 느낌이 들었어요. 늘 기다리게 하고 그리워 하라고 말입니다. 제말이 이상하지

는 않습니까?"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힌 추림이 유미를 정면으로 바주보며 솔직하게 말하자 그만 고

개를 푹 수그린 유미의 머리가 끄덕거렸다.

그녀 특유의 자세다. 고개를 절반쯤 숙이고 이마와 옆 얼굴만이 살짝 드러나는 모습.

 

"저 지금 기분 정말 좋아요. 사실은... 저도 추림씨가 생각 많이 났는걸요. 전 추림씨가  제

게 몹쓸 병을 주었는지 알았어요. 한 남자만 생각나게 하고 그리워 하게 하는 그런 병 말이

예요. 어쩌지요? 이게 병이면 굉장히 심각하다고 하는데."

 

추림의 입에서 소리없이 커다란 웃음이 번졌다. 그건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같은 심

정인 동시에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구체적인 것이나 조금 더

깊은 속내는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제가 고등학교를 그만둔 일에 대해 혹시 들어 보셨어요?"

 

추림이 전혀 색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유미가 현재 느끼고 있던 감정에 파탄이 생기고 곧

그의 말에 열중할 자세로 돌아갔다.

 

"예. 대충 들었어요. 친구의 누명을 대신 썼다고... 맞는 이야기예요?"

"뭐 대충 비슷해요. 친구놈 셋이 육성회비를 털었는데 걸렸어요. 도망치다 내게 왔는데...

셋이 병신되느니 혼자 병신 되는게 낫다 싶었지요.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 제가 학교에서

강한 압력에 못이겨 자퇴를 하고나서 다짐한 일입니다. 들어 보실래요?"

 

추림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연에게 들었을때도 그가 참 바보같은 남자구나라는 생각을 하

고 지금 다시 그런 생각을 하던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저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친구든 사랑하는 사람이

든 이웃이던 간에 저와 인연이 있다 싶은 사람은 진정으로 지켜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아마 그 생각이 초등학교 오학년 때인가 조금씩 들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크게 싸우고 난 이후의 일일 겁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그런 멋진 일을

저지른 거구요."

 

바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렇게 표현한담. 추림은 자신의 정상적인 학업을 포기해

야했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까? 아닐것이다. 누구보다 힘들었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다만 선택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대범함을 지녔을 뿐일 것이다.

 

"만약 제가 조금 더 커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과 가정을 이루게 된다면 절대 아프거

나 슬퍼하지 않게 하고 싶었어요. 그러기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마음이 날 사랑하는 사람

보다 더 크고 깊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마음이 이상하게 변했나봐요.

매번 새로운 여자들을 만나고 부딪힐 때 마다 먼저 이여자에 대한 내 마음을 물어봐요.

이 여자는 어떻니 저 여자는 어때 하고 말입니다. 별로 큰 반응이 없었습니다. 보고싶은 대

상은 있었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어요. 전 선을 이렇게 긋고 사람을 대해요.

그리고 그 선을 절대로 넘지 않아요."

 

추림이 자신앞에 놓여진 컵과 컵 사이에 손가락으로 줄을 쭈욱 그으면서 말했다.

금새 그 의미를 이해한 유미였다. 아마도 그는 마음이 원하지 않는 행동은 철저하게 지켜

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의지와 깊은 마음이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삼가는 사람.

 

유미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유미 그녀 자신이 원하는 것이다. 추림은 그렇게 한다고 믿음을 주고 있었다.

 

"전. 만약 누구를 좋아하게 된다면 한 천년쯤 좋아하고 싶고 백년쯤은 보며 살고 싶어요.

제가 지난번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말해 드린다고 했던 말 기억나시는지 모르겠지만.

곧 말해 드릴수도 있을듯해요. 한가지만 말해 드리겠어요. 그 사람은 이상하게 슬퍼 보이

고 늘 기운이 없는것 같아요. 여기까지만 말해 드릴께요. 다 말하면 싱겁잖아요."

 

자작으로 술을 따라 마시는 유미의 마음은 복잡했다. 직감적으로 자신인것 같았지만 그럴

수록 더 궁금해지고 의심이 드는것이 사람 마음이고 아닐 것이다라는 부정을 깔아 놓는것

도 사람 마음인 것이다.

 

심장이 조금전부터 이상하게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거푸 술을 두잔이나 따라 마셨는데 진정이 되지 않았다. 추림이 속 시원하게 말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인연이 아니어도 좋아요.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저와 그렇게 인연이 아니어도 좋지만 전

사랑한다면 평생을 사랑하고 싶어요. 유미씨. 저기 저 그림 보이세요?"

 

추림이 유미를 부르며 손가락으로 가게 내부에 걸린 액자그림을 가리켰다.

유미가 그곳을 바라보니 중간 크기의 복고풍의 액자에 유럽 복식을 한 여인이 정숙하게

앉은 모습의 그림이 걸려져 있었다.

 

곱슬머리를 차분하게 빗어 늘어뜨리고 표정없는 얼굴의 삼십대로 느껴지는 여자 그림이

었다. 물감을 어둡게 풀어 그려진 여인의 모습은 꽤나 분위기 있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 여인이 누군줄 아세요?"

"아니요? 전혀요?"

 

이 남자는 늘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전혀 엉뚱한 질문과 말로 준비되지

않은 상대를 난처하게 하곤 했지만 그리 부담되거나 어려운건 아니었다. 오히려 신선하고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안토니아 브렌타노라는 여자예요. 천재 음악가 베토벤이 평생을 두고 사랑한 여자랍니다.

그녀는 베토벤을 사랑하고 베토벤은 그녀를 더 사랑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 지

지 않았답니다. 안토니아 브렌타노가 다른이와 결혼을 했지만 베토벤은 상관하지 않고 그

녀를 죽을때까지 사랑하며 그리워 했다고 합니다."

 

추림도 이곳에서 그 그림을 보고 우연한 기회에 알게된 비화였다.

 

별걸다 알고 있는 추림이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중요한것이 아니고 추림은 그 베토벤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렇게 사랑하겠노라는 의미였다.

 

"참 대단하지요?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게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주 오랜동안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거예요. 정말 내가 이 여자를 사랑하는구나!

이런 마음이 죽고 싶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도록 기다리는 거예요. 지금 제가 느끼고 있

는 어떤 감정은 제가 처음으로 느껴보는 겁니다. 아마 더 시간이 지나면 전 말할거예요.

당신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유미는 사랑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 중의 한명이었다.

진짜 사랑을 믿지 않는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을 자신을 믿지 않았다.

사랑이 이성간의 교감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녀는 그런것을 지긋하게 격어 보았다.

결국엔 등을 돌리고 먼저 떠나는 남자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육체였지 한명의 여자가 아

니었다. 유미가 사랑을 시작하려 하면 남자들은 믿음을 저버리고 떠나가 버렸다. 

 

두렵고 신뢰할 수 없는 대인적인 사고방식이 그녀가 지닌 가장 큰 장애였다.

좋다거나 호기심이 생긴다면 그것은 멋진 이성으로서지 반드시 사랑으로서는 아닐것이다

라는 것이 유미의 믿음이었다. 어쩌면 지금 추림조차도 그런 이들 중 두드러지게 호감이 가

는 이성일지도 몰랐다.

 

유미는 말하자면 허수아비 같았다. 살아있지 않지만 살아 있는듯해 조류에게 착각을 주고

두려움을 주는 그런 존재. 생명이 없으면서도 존재하는 양 흉내 내려하고 위선을 부리는 그

런 허수아비 같았다. 그녀의 마음이 그랬다.

절대 남자를 믿지 않으면서 늘 만나고 다니며 언제고 쓸모없어질 자신이 두려워 서두르고

기를 쓰고 진짜 흉내를 내려는 존재 같았다.

 

자신을 믿지 않지만, 알고 있지만, 인정하지 않는 진짜를 흉내낸 피조물 허수아비!

 지치지도 않고, 지쳐 있지만, 결코 지치려 하지 않는 숨없는 존재 같았다.

 

그녀가 추림을 생각하고 떠올리며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허수아비의 그런 심정인지

도 모른다. 그저 서 있지만 다가오는 존재에 대해 자신을 부각시키고 인식시켜 강하게 기

억되게 만들고 싶은 정체성!

 

유미는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믿지 않지만 믿는양 보여주고, 느끼지 않지만 느끼고 있다고 거짓하고, 진실이지 않지만

정말인것 처럼 속이는 위선! 그녀 자신도 그것이 싫었지만 이미 허수아비의 심정을 지닌

그녀의 움직임은 그렇게 얼룩져 있었다.

 

추림이 그립고 다르다고 느끼면서도 그녀는 늘 의심하고 고뇌했다.

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그릇된 편견과 사고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술이 다 비워지고 다시 한병을 시키고나자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유미는 취기가

상당히 오르고 있었다.

 

"추림씨는 주위에 여자들이 꽤 있을듯 한데 그녀들과 자거나 깊은 관계를 가져보지 않았

어요?"

 

술취한 김에 과감해지기로 해쓴지 유미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주위에 누군가들이 많다고 이롭거나 편한건 아닙니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외롭다는 증거

고 여자가 많다는 것은 한 여자에게 몰두하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바람둥이라도 주위에 여자를 여러명 두고 살아가진 않습니다. 자 여기서 질문입니

다. 제가 즐거운 남자이고 바람둥이 일까요?"  

 

추림도 다소 술기운이 올라 약간 나른한 얼굴로 말하자 눈이 반쯤 내려앉은 유미가 고개를

힘없이 도리질쳤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지는 않습니다. 전 다 괜찮은데 부모님이 그런 것들을 물려 주시지 않

은것 같습니다. 모질지 못해요. 여자 문제는 더 그런데 제가 쑥맥이라서 그런것이 아니라

두려운가 봅니다. 여자를 함부로 대하면 어쩌면 큰 죄를 짓는거 같은 그런 두려움 말입니

다. 전 이성에 대한 편견과 이분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스타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

도 합니다."

 

"거짓말! 수연이 그러는데 아주 많다고 하던데... 요즘 어떤 남자가 그래요? 무슨 추림씨가

이시대의 마지막 순정파도 아니고... 제가 아는 남자들은 전혀 다르던걸요."

"제가 바로 그 순정파인가 봅니다! 천만명에 하나 나올까 하는 진짜 순정파! 그건 확실할

겁니다."

 

추림이 장난끼어린 말투로 말하며 테이블위에 놓인 술병을 들어 비어있는 유미의 잔에 술

을 채워 주었다.

 

"저는요 믿지 않아요. 남자들의 말, 행동 모두 믿지 않아요. 결국 추림씨도 같은 남자가 될

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확신하세요?"

"확신하는게 아니라 전 용기도 없어요. 어쩌지요 이거? 용기도 없고 믿음도 주지 못해서."

 

"언젠가 시험해 볼거예요. 그런줄 아세요! 수연이가 부러워요. 친구들이 많고 든든한 누구

도 있는것이."

 

시무룩한 음성으로 유미가 기운없이 말하자 추림이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미씨. 세상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 중에는 서로에게 깊고 두터운 우정으

로 친구가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만약 유미씨에게 정말 믿음이 가고 좋은 남자가 생긴다

면 그를 존경하는 평생의 친구로 두고 싶습니까? 아니면 연인으로 대하고 싶습니까?"

 

상당히 깊이가 있는 질문이었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생각해 봄직한 질문이었지만 그런 상

대가 생기기전에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일단 그런 남자가 생겨 보기라도 했음 싶네요."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닙니다. 전 대인관계는 아주 심도있는 싸움같은거라 생각해요.

상대를 나에 맞추는 것은 폭군이 할 자세고 나를 상대에게 맞추는 것은 성군이 할 일이며

나와 상대를 고루 맞추어 나가는 것은 현군의 그것입니다. 친구든 연인이든 같은 겁니다.

제가 본 수연은 현군에 해당되니 녀석은 아주 똑똑하고 마음이 넓지만 그만큼 어리석기도

합니다.

친구라는 부담과 압박때문에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외면하고 상처받기 쉬울테니까요.

여기서 대인이나 연인 관계를 대입시켜 표현한다면 가장 우수한 자질은 폭군에게 있습니다.

상대를 나에게 푹 빠지도록 만드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나 대인 관계에 있어 가장 현명한

행동입니다. 고도의 심리전술인 셈인데 세계를 지배했던 인물들이나 고금에 이른 이름 난

바람둥이들이 가장 선호했던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전 그러지 못할것이 너무 뻔하지만 말입니다."

 

턱을 괴고 팔을 테이블에 기댄 유미는 조금전 부터 추림이 흔들려 보이기 시작했다.

빈속에 서둘러 독한 양주를 마신것이 상당한 취기가 된것 같았다.

그의 말을 애써 이해하며 들으려 했는데 제대로 정리되지가 않았다. 둔중한 느낌들이 무겁

게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저 잠시요. 화장실 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않아 무척

이나 힘들었다.

 

"조심하세요 유미씨!"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뛰쳐나갈 기세로 추림이 걱정스럽게 소리쳐 말했다.

휘청거리며 걸음을 걷는 유미가 손을 들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흔들었다.

 

유미가 안전하게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추림은 걱정스럽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두병째 시킨 술이 두어잔 정도 남아 있는것을 확인한 추림은 그것을 모두 자

신의 잔에 따르고 두모금을 마셔 양을 줄여 놓았다.

 

시간을 보니 열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피곤했다. 오늘 있었던 일도 쉬운일이 아니었고 어제 저녁의 일도 그랬다.

추림은 요즘 이상하게 바쁘게 일이 돌아간다고 느끼고 있었다. 새해들어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정작 자신의 일은 뒷전이고 남의 일에 너무 깊게 관

여하고 있는것 같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싶었다.

 

'팔자가 이렇게 생겨 먹었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 실없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성규의 일이 떠올랐다. 지금 놈은 어쩌고 있을까하고 생각하니 슬며시 걱정이 생기기 시작

했다. 오늘 그정도까지 혼나고 울기까지 했으니 며칠정도는 참아줄 놈이었다. 아마 며칠이

더 지나면 다시 망가질 놈이지만 이젠 그놈의 일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화장실에 간지 이십분이 지나도록 유미가 돌아오지 않자 두대의 담배를 피우고 남은 술을

비워낸 추림은 오분쯤 더 기다리다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종업원을 불러 유미의 확인을 부탁하려 했는데 가게안은 손님도 없이 조용했다.

손님은 자신들이 유일했던 것이다.

 

하는수 없이 추림이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홀을 가로질러 화장실 앞으로 다가간 추림은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

어 잠시 서서 귀를 기울이다가 이상한 생각에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자 전용 화장실이라서 그런지 깨끗하고 넓직했다.

두개의 칸막이로 나뉘어진 첫번째 칸을 슬쩍 열어보니 유미가 없었다. 그래서 두번째 칸의

문을 아주 조금 열어 보았다. 문은 조금의 소리와 함께 부드럽게 열렸고 안쪽으로 쏠렸는지

문이 기우뚱 거리며 기울어져 버렸다.

 

그리고 내부의 정경이 드러났다.

 

"......!"

 

추림은 말을 잃고 얼굴을 굳혔다.

청바지를 내리려 했는지 아니면 올리려 했는지 모르지만 유미는 바지를 입었지만 완전하

게 차려 입지 않은 모습으로 양변기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칸막이에 얼굴을 대고 입을 약간 벌린 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었다.

짐작은 했지만 설마했는데 직접 확인하고 나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에휴! 추림아 어째 오늘 일진이 이렇게 험하냐 그래!"

                                                                                                           (16장에 계속)

 

드리는 말씀: 어제 14장에 댓글을 달아주신 노로긴 하신 분의 정성이 감격스러워

늦은 시간에 글을 올립니다. 에휴... 추림 오늘 일진 되게 사나워요. 감기 걸려 죽을거

같고 보고싶은 사람도 못보고... 전화하니 냉기가 좌르르~~ 술마시다가 글 올리고 술

마시다가 글 올리고 했어요. 로그인을 하셔서 추천도 하시고 하셔야지요!

제가 쪽지라도 보내야 할텐데.... 글 읽는 분들 행복하시고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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