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이란 안식과 휴식을 준다. 거기에 고향이 마치 그림같거나 동화같은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고향의 벌판과 산 그리고 강은 하얀 눈으로 뒤덮힌 채 마치 동화 속 그림같았다.
지난 명절 때 추림은 고향에 오지 않았다. 그러니 근 일년여 만에 고향에 왔으니 느낌이
남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도착하고 잠깐 자고 일어나 집 근처를 조용히 걸으면서 정겨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
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보러 시내로 나갈까 했지만 부모님과 형제들이 우선이라 집에서 조
용히 보내다 서울로 갈 생각이었다.
집 앞으로 펼쳐진 너른 강과 소나무군으로 이루어진 솔밭 그리고 낮고 아기자기한 산들...
시내와 이십분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마치 산속 깊이 자리한 마을처럼 조용하고 고
요한 적요만이 가득한 마을이었다.
강뚝을 걸으며 추림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마음껏 만끽했다.
불과 삼사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 강에서 미역을 감고 고기도 잡아 가면서 놀았는데 어느새
시간은 추림에게 사회에서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입에서 새하얀 수증기가 허공으로 가득 퍼지며 사그라졌다.
그리웠다. 지난 시간들이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지고 소중하게 간직하지 못한것 같은 생각
이 들었다.
예전 일들을 떠올리며 추림은 입가에 작은 웃음을 매달았다.
포기했거나 포기해야 했던 과거... 타인에게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서러웠던 가슴을 부여
잡고 이를 악물며 참아야했던 시간은 진정 힘들고 고되었었다.
"이젠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지... 내 모습은 이렇게 변했는데 너희들은 언제나 변함이 없구
나!"
아스라히 보이는 강과 산들, 숲과 작은 길들을 응시하며 추림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형! 형아......!"
저 멀리서 막내 동생이 뛰어오며 추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추림이 상념에서 벗어나
바라보니 작은 꼬마 둘과 약간 덩치가 큰 한 녀석이 눈길을 거칠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
추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생들이다. 아침에 집에 도착하고 나니 녀석들은 집에 없었다. 이제야 들어오고 찾아 나
선 모양이었다.
"와아! 형!"
막내 녀석이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품에 안겨 들었다.
"추림형!"
"왔구나 형아야!"
금새 다가든 세 녀석이 추림을 에워싸고 팔과 허리를 껴앉고 난리 법석을 떨어댔다.
"요놈 많이 컸구나! 이제 형보다 힘이 세겠는걸?"
여섯살 차이나는 막내 추영을 들어올려 눈앞에 시선을 맞춘 추림이 기분좋게 웃었다.
"형 너무 보고 싶었다. 씨이 왜 이제왔어!"
추림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리로 허리를 감은 막내 추영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투정을 부
렸다.
"형 우리 안 보고 싶었어?"
둘째 동생 추신은 추림보다 네살이 적다. 작고 귀여운 얼굴의 녀석은 몸이 매우 야위어 보
였다.
"어이쿠. 우리 추신도 이렇게나 많이 컸구나. 어쭈? 요게 조금 컸다고 형안테 인사도 안하
네? 오랜만에 씨름한번 할까?"
추영을 안고 추림이 추신의 머리를 마구 헝크러 트린 후, 바로밑 동생인 추용의 머리에 알
밤을 먹이려 하자 추용이 몸을 놀려 피해 버렸다.
막내 추영의 몸이 많이 무거웠다. 이제 열네살... 어느새 그렇게 커버린 것이다.
추림은 동생들과 눈길을 걸으며 정답게 장난도 치고 추용과 잡담을 나누었다.
"헤헤. 그래서 내가 대표로 나가서 이등했어. 마지막에 이등을 내가 따라잡았다. 상도 받았
고 특기생으로 육상부에 들었어."
막내 추영이 자신이 벌인 도내 체육대회 때 일을 신나게 자랑하며 으쓱거렸다.
"그래서 우리 막내가 이렇게 컸구나? 요놈 이 형보다 더 크면 혼내준다!"
"난 키가 더 클거야. 마이클 조던이나 스카티 피펜만큼 커서 농구 할거다."
"지랄하네. 새끼야 걔네는 별루 안커! 데니스 로드맨이 더 커 임마! 아무것도 모르면서."
둘째 동생과 막내가 실랑이를 벌이며 몸싸움으로 장난을 쳤다.
그들을 웃으며 바라보던 추림은 마음이 아련하게 아파왔다. 힘들때 이놈들을 몰래 뒤로하
고 집을 떠났던 자신이었다. 당시엔 치기만이 전부였던 꼬마들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부
쩍 자라 있었다.
"형. 왜 그렇게 피곤해 보여? 힘들어?"
추용이 추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렇게 말하자 추림은 과연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놈이
역시 형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잠을 못잤거든. 그러는 넌 학교생활은 할만하냐?"
"그저 그렇지 뭐. 참 나 미술부에 들었어. 나도 몰랐는데 미술쪽에 내가 재능이 있다고 하
데?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얼굴에 여드름이 군데군데 나있는 홍안의 소년이 된 추용은 예전의 그 추용이 아니었다.
이놈은 형제들 중 가장 똑똑하고 재능이 많다. 어려서 병을 알아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대신 뼈가 굵고 후천적으로 운동에의해 단련된 둥근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추용은 턱걸이를 서른개 이상이나 하는 강골이었다.
초등학교 때 부터 전교 일등은 물론이고 군과 도에서도 무슨 경시대회에는 모두 참여했고
입상을 했다. 무척 활동적이고 낙천적인 추용은 추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며 성장했다.
추림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가 언제는 가장 격렬한 토론의 상대가 되곤했다.
중하교 무렵 추림은 갓 중학교에 입학한 추용에게 문학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 후로 추용은 추림이 읽었다고 하는 모든 소설과 문학집을 어떻게든 구해 읽었
는데 나중에 추림이 강제로 하지말라 말린적이 있었다.
글에 빠진 자는 현실과 비현실에서 갈등하고 세상을 배우고 철학을 엿보게 된다.
자아와 영혼이 비틀거리는 고통을 느낄수도 있는데 추림도 그랬었다. 국내의 문학 작가
들과 국외의 많은 작가들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러가며 펴낸 작품들... 추용이 다시 그 과
정을 되풀이 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만 뜨면 글을 접하려 하고 못보면 불안해 한다. 읽고 또 읽으므로서 작가의 메세지와 철
학적 사고를 훔쳐 배우려 하고 작은 지혜를 섣불리 담으려한다. 그리곤 활자 중독증 따위
에 걸리는 것이다.
-글이란 것은 즐거움이 없다면 죽은 것이고 진실이 배제된 것이다. 그런 느낌이 없다면 굳
이 읽으려 들지 말아라!-
당시 추림이 추영에게 한 말이었다.
이제 그 무지함에서 벗어난 추용은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 있지만 유년이 지나갈수록 그
영향은 지대해 질 것이다.
추신과 추영이 눈을 뭉쳐 던지고 도망다니면서 눈놀이 삼매경에 정신이 없었다.
"담배 태우냐?"
추림이 담배를 입에 물고 묻자 추영이 씨익하고 웃기만 했다.
"새끼가 태우는구나! 뼈삭아 임마. 조금씩 피워라! 자 한대 피워봐라. 이럴줄 알고 양담배
사왔다. 니 가져 선물이다."
추림이 말보로 레드를 통째로 건네자 우물쭈물하며 추용이 망설이자 추림이 바지 주머니
에 넣어주었다.
"어쭈? 제법 자세가 잡혔다 너?"
"내나이가 몇인데? 형은 초등학교 때부터 피웠잖아?"
추용이 손안에 담배를 교묘하게 숨겨가며 피우는 모습이 귀여워 추림이 놀리려하자 추용
이 어른스럽게 대꾸했다.
"그땐 애들 장난이지. 그게 뭔줄이나 알았냐?"
"형 서울 생활 재밌어?"
추용이 담배를 절반도 피우지 않고 손가락으로 튕겨 던져버리며 물었다.
"아니. 그저 그래. 거기가 재미있어서 있는 곳이냐? 이곳에 있지 못하는 놈들만 가는곳이
서울이다. 학교는 잘 다니지? 괴롭히는 놈들없고?"
"누가? 난 가끔 형이 내 형이라는게 안 믿겨져. 선배고 뭐고 알아서 피해다니는데 누가 괴
롭히겠어. 심지어는 선생들도 안 때리더라. 정말 되게 웃겼어."
추용은 추림에게 작은 상처가 있었다.
예전 추림이 고등학교를 자퇴할 때 추용은 겨우 중학교 이학년이었다. 집안도 매우 어렵고
힘들때였다. 어머니가 하시던 음식점을 처분해야 할만큼 힘들어 어머니는 고향과 조금 떨
어진 곳에서 식당을 새로 여셨는데 집에 올 시간조차 없으셔서 밥을 해먹고 다녀야 할 만큼
힘들고 피곤한 때였다. 위로 누나들과 형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집을 떠나 있었
다.
세동생이 추림에게 의지하고 있던 때였는데 어느날 추림이 서울로 떠난다고 했다.
그때 추용은 울며 가지 말라고 며칠을 매달렸다. 막내와 둘째 추신도 그랬지만 추용과 의
미가 달랐다. 추림이 없는 빈 자리를 대신 채워야 할 입장. 작은일이라도 꾸리고 나간다는
것은 힘들고 쉬운것이 없다. 그일이 추용에게 떠맡겨 진 것이다.
추림은 당시의 상황과 주위의 부담감이 견딜수 없어 며칠만에 고향을 몰래 등졌지만 가는
순간까지 추용에게 말했었다. 이른 새벽 터미널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을 때 서럽
게 통곡하던 추용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수가 없었다.
그것이 추용이 사춘기를 맞으며 보내야 했던 날들에 상처가 되어버린 것이다.
매정하고 냉정한 형! 그립고 의지하고 싶은 형! 있을땐 몰랐는데 없고나니 못내 아쉬움을
주는 형! 든자리보다 난 자리가 더 크게 느껴진다 했다. 추용에겐 추림이 그 비고 난 자리
보다 더 크고 허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추용은 추림을 존경하면서 무서워했고 좋아하면서 항상 멀리하려했다.
초등하교 다닐때 몸이 약한 추용을 추림이 업고 다니곤 했다. 손을 잡고 십리가 넘는 길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서 걸어다녔고 점차 커서는 추림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모방하
려 애쓰곤했다.
추용에게 추림은 어쩌면 스승이고 친구며 벽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건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가갔다 생각했는데 형은 더 멀리 달
아나 있었고 점차 진화하듯 변해갔다.`
추림이 서울로 떠났다가 처음 고향에 왔을 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바라보지도 않던 추
용은 추림이 떠나고 나서 무려 일주일을 앓아 누웠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토
록이나 참고 견뎌내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무구보다 더 학인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무척 힘들고 외로
웠을 것이고 수없이 울며 날을 보냈을 것이다. 그것들을 쏟아내야 하는데 토해내지 못하고
강제로 막고 있던 억압들이 추림이 가고나자 온전히 병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추림이 묵묵하게 먼 산을 바라보는 추용을 응시하며 웃다가 다가가 안아주었다.
녀석의 눈시울이 붉어진것이 지금의 심정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은듯했다.
"임마. 형입에서 미안하단 소리 안나오는거 알지? 가자! 형이랑 술이나 한잔 하자. 술먹는
비법을 전수해주마. 억!"
추림이 추용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길을 걸으려하자 추용이 머슥한지 추림의 옆구리를 팔
꿈치로 툭 쳤다. 엄살을 부리며 추림이 죽겠다고하며 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와아... 같이가 형!"
"거기안서!"
추신과 추영이 눈밭에 뒹굴에 축축해진 몸으로 달려오며 소란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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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난 고기를 굵은 소금에다 찍어 먹어야 제대로 먹는거 같아. 그거좀 주세요."
추림이 마당에다가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술을 준비하자 동생들과 아버지까지 모였다.
큰누님과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으신 어머니를 어떻해든 끌어들이려 추림이 자꾸 추근거
렸지만 어머니는 꿈적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한잔 받으세요. 이게 임페리얼이라는 놈이예요."
"이놈아 이거 비싼건데 뭐하러 이런놈을 사와. 소주나 한짝 사오지."
"아버진 모르면서 창피하게 맨날 후진거만 찾고 그래요."
추용이 업그레이드되어 출시된 새 임페리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아버지의 말씀에 볼멘
소리를 했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추림의 추림이 따라주는 술을 즐겁게 받아 드셨다.
"추용아. 잔을 너무 높이 들지 말고 이만큼... 그래 이렇게 두손으로... 오른손에 잔을 쥐고
왼손은 오른손을 바쳐라.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고개는 약간 숙이고... 천천히 받고 고개를
돌려 입을 축여라. 옳지... 그리고 입을 열지 말아라. 다물어서 예를 표하고 자신의 잔이나
혹은 상대의 잔... 어른의 잔에 술을 따를때는 무릎을 꿇거나 한쪽 다리를 세워라. 서면 좋
겠지만 항상 상대보다 몸이 높거나 굳은 상태인건 예의가 아니다. 몸이 상대보다 높을때는
상대가 앉아 있고 자신은 서 있을때 뿐이다. 이걸 주도의 -서-라고 한다. 진짜 예는 다음
부터인데 중국에서는 석잔의 뜻을 친구나 동지를 의미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반잔을 꺽어
마시는 것은 최소의 도리를 지킨다는 의미다. 대작하는 이보다 먼저 취하지 말것! 자작하
는 습관을 버릴것! 마지막 잔을 가급적 비우지 말것! 이것을 꼭 지켜라. 자 이젠 마셔봐라."
추림이 추용에게 크라스에 술을 절반쯤 따라주고 이것 저것 설명해주자 귀를 기울이고 있
던 추용이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아버지. 이놈이 눈치를 살피는데요? 임마! 난 열세살 때 아버지가 주시는 술을 처음 먹었
다. 이씨 가문에 그런 배짱없는 놈 안키우니까. 어서 마셔! 사내놈이 눈치는."
"어여 마셔. 형도 어른인데 주는 술을 고맙게 생각하고. 술앞엔 애고 어른이고 없는 법이
다. 세상 다 이해못해도 술먹고 하는 행동은 임금을 욕해도 용서가 된다고했다. 어디가서
진짜 그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그걸로 된거다."
아버지가 부더럽게 추용을 바라보시며 부담을 덜어주셨다.
추림은 가끔 아버지에게 불려 앉힌채 술잔을 비우곤 했는데 그것이 불과 열 서너살 무렵
부터였다. 그러니 추림의 술 경력도 잛은것이 아니다.
그제서야 추용이 술잔을 입에대고 입안으로 쏟아부었다. 이미 마셔보았겠지만 형과 아버
지 앞에서는 처음이라 긴장했을 것이다.
마시는 폼이 제법 경력이 되는지라 아버지는 대견하게 바라보셨고 추림은 미소를 지었다.
"잘들해. 아주 잘해. 자식하고 동생에게 술이나 가르치고! 좋은건 가르치지 못하고 독먹는
기술만 가르치고 있어 아주."
어머니가 쟁반에 만들고 있던 설 음식을 담아 오시며 한소리하셨다.
"참! 엄마도. 언제고 마실건데 기왕이면 근사하게 배워 둬야지 마누라도 잘얻지. 엄마도 한
잔할거유?"
"치워 이놈아! 포도주 없어?"
결국 싫지는 않으신 어머니가 즐겨 드시는 포도주를 찾자 막내 추영이 잽싸게 숨기고 있던
포도주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야가 왜이리 늦나? 눈 때문에 차가 박히나부다. 전화라도 하지 속타 죽겠네."
늦고 있는 형 추산을 기다리시는 엄마는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계셨다.
"형만 있나? 난 자식도 아니야? 알아서 오겠지 뭘 그렇게 죽어라고 기다려요."
"이놈아 너도 오기전엔 똑같았어? 쉰소리 그만하고 한 잔 더 따라봐라."
술을 즐기시지 않는 어머니는 개끗하게 비워낸 술잔을 앞으로 불쑥 내미셨다. 기분이 좋은
듯 보여 추림도 기뻤다.
추림이 식구는 열명이나 되는 대식구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빼면 형제가 여덟이나 되는데 막내 누나는 일지감치 홍콩으로 시집을
갔는데 국제 결혼을 했다. 아마 올해도 오기는 힘들 것이다.
형과 둘째 누나만 도착하면 가족은 다 모이는 것이다. 큰 누님은 군 소재지에서 따로 살았
는데 올해는 집에서 명절을 세기로했다. 매형도 그것을 바랬는데 매형은 형제가 없고 부모
는 일찍 세상을 등지셔서 현재는 혈혈단신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셔서 방으로 들어가셨다. 즐거우셨는지 약주를 과하게 드셨지만 크게
취하지는 않으셨다. 커디션이 보기드물게 좋다고 추용이 말했다. 녀석도 네잔쯤 마시자 얼
굴이 붉어지고 눈에 기운이 빠져보였다.
뒤늦게 합류한 매형과 술을 나누고 시간이 좀 지날무렵 추림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어머니! 저희들 왔습니다!"
열명도 더 되어 보이는 추림의 친구들이 떼로 몰려 들었다. 마당에서 막 자리를 비우려 할
때 놈들이 들이닥쳤다. 오자마자 넓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절을 올리며 단체로 인삿말을 합
창하자 집안이 떠나갈 것 같았다.
"이놈들! 내가 온건 어떻게 알고? 이새끼들이 누가 오래? 거기 너 오랜만이고? 어쭈 이리
안나와? 숨어? 형안테 절들해라 아우들아!"
"새끼야 니온다는 소문 시내에 다 퍼졌다. 난리다 지금."
강수와 석호도 왔고 영훈이도 왔다. 그외 친하다 하는 놈들이 대부분 몰려왔다.
"오랜만이다. 추림아."
"이놈 촌티 다 벗었구나? 참 오랜만이다."
친구들이 서로 다가와 손을 내밀고 말을 붙히려 경쟁을 벌였다.
"어머니 여기 한상 부탁해요!"
"대충 주세여. 이쁜 저희들도 아닌데!"
"떡국은 꼭 주세요!"
놈들이 큰 건너방에 모여 앉아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술판을 벌이려 작심한 것 같았다.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행동들인데 과거에도 이랬다. 넓은 추림의 집은 늘 친구들이
몰려 들었고 명절이 되면 이렇게 가장 먼저 찾아오곤 했다.
놈들이 사들고 들어온 보따리가 장사해도 될만큼 많았다.
"야! 이거 추용이구나? 막내 이리와봐라 엉아가 용돈 줄께!"
석호가 추용과 동생들을 불러 지갑을 열고 호들갑을 떨었다. 추림의 동생들은 때아닌 호기
를 맞아 좋아 죽어가는 얼굴이었다. 예전부터 가깝게 지낸 탓에 이런 모습은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추림아! 우리왔다!"
밖에서 다시 누군가가 추림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왁자한 소란이 들려왔다.
"어? 민석이 왔나보다. 어디간다고 빼더니 결국 왔나보네."
"그새끼 안 끼워 줄려고 했는데, 자식 죽어라고 따라 다니는구만!"
"내가 볼 땐 니가 더 죽어라고 따라다니는 것 같은데? 아닌가?"
"맞아! 하핫!"
"뭐라구? 이새끼가? 너야말로 그만 쫒아다녀라. 지겨워 질라구 한다."
"조용해 새끼들아. 어른들 계셔."
마구 소란을 떨며 놀아나자 추림이 꽥하고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주방에서 어머니에게 넙죽 절하는 새로운 친구들이 보였다. 여섯명이 다시
온 것인데 그 중에는 수연과 성규도 있었고 민석과 두명의 동창 여자 친구들도 보였다.
"성규야. 오랜만인데 너 안색이 안좋구나? 추림에겐 이야기 들었다 같이 왔다고?"
"예 어머니. 감기가 낳지 않아서 고생하느라... 뭐 금방 좋아질거예요. 건강하셨죠?"
거짓말이지만 말 할 수는 없었다.
"나야 건강하지. 엇그제 엄마 만났는데 니 걱정 많이 하더라. 열심히 일해서 엄마좀 편하게
해드려. 불쌍한 양반이니까."
"예 어머니. 노력할께요."
"그래 어여들 들어가봐. 술들 마시며 놀다가."
"성규형!"
"형 왔어."
동생들이 나와 성규에게 매달리며 반가워하자 성규가 막내와 추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
었다.
"햐 우리 꼬맹이들 많이 컸네? 추신아 기타 잘 배우고 있어?"
"아니... 안돼요! 줄도 없구... 모르는것 투성인데요."
"그래 가기전에 형이 주고갈께."
"와아! 고마워요 형!"
추신은 예전에 성규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기타를 가르쳐 달라고 사정해서 성규가 직접 한
달인가를 가르쳤는데 제법 흉내를 낼 줄 알았다.
"수연이 왔구나? 어서들 와라. 들리지? 난리도 아니다."
"잘 지냈어? 난 서울서 보고 내려오려 했는데... 다시보니 반갑네."
"추림아 우린 보이지도 않아?"
"맞아 괜히 온 것 아니야?"
"정신이 널 얼마나 보고싶어 했는지 넌 모를거야. 이리와라 한번 안아보게. 그리고 날 짝사
랑한 우리 주근깨소녀 서영희! 아직 날 사랑하시나?"
추림이 오랜만에 보는 여자 동창들에게 장난을 치며 맞아주었다. 추림의 환대에 즐거워진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자 방안이 난리가 나버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있고 분위기가 그렇게 몰입되고 있는 것이다.
싹싹한 친구인 박재성이 술상을 직접 챙기면서 잔소리를 해댔고 벌써 취기가 있는 놈들은
담배를 피어대며 정신없이 떠들어댔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서울 생활과 친구들의 대학 진학이 주된 관심이었다.
술상이 차려지고 술잔이 오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큰댁에서 어른들이 오시고 고모댁에서도 오셔서 난데없는 전쟁통 같
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바빠진 엄마와 큰 누님, 동생들이 죽어나가고 추림도 이곳 저곳
을 오가며 분위기를 맞추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형과 작은 누나가 도착했다. 당연히 친구들은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해서 형과 누나가 거
의 강제로 붙잡혀 들어왔다.
"자 합동 인사!"
석호가 친구들을 일렬로 세우고 외치자 놈들은 서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사랑하는 누님 인사 드립니다!"
"추산 형님 오랜만에 뵙니다!"
두이름이 동시에 섞여 인사가되고 형과 누나가 맞인사를 하자 놈들이 형과 누나를 술판에
끌어드렸는데 상황상 빼려하자 놈들이 난리를 치며 야유를 보냈다.
"어휴... 이거 동생 잘못둬서 피곤해 죽겠네! 이놈들아! 좀 살려줘라 응?"
"동생인 추림에게 당한거 다 가져 가세요 형님!"
"열잔만 마시면 보내 드릴께요."
"석호야... 강수야... 나 술마시면 안된단 말이야. 너희들도 알잖아 누나 술 못마시는거?"
"에이 그런게 어딨어요? 술장사 하시면서 못마시는게 말이되요?"
"맞소! 어서 술을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연호가 울리며 커다란 냉면 대접을 억지로 쥔 형과 누나가 울상을 지었다.
형 추산은 안다. 후배들 중 추림의 친구들이 대가 가장 강하고 성정들이 억세다는 것을.
그건 유난한 일이었는데 무섭다는 선배들도 추림의 동창들 만큼은 건들지 않았다.
"언니! 흑기사요!"
그때 수연이 보다못해 자청하고 나섰다.
"아휴. 우리 이쁜 수연이 고마워. 나중에 가게로 오면 언니가 스테이크 꽁짜다!"
"반칙이다... 아니다. 누님 제가 할께요! 저 주세요."
석호가 부정하려다가 얼른 같은 편인양 거들려하자 친구들의 주먹이 퍼부어졌다.
"억! 저게 사람이냐? 저 가시나좀 봐라? 저걸 다 마신다!"
"너 몰라? 수연이 주당인거? 이새끼가 정보가 늦구만? 망우리가면 술먹다 뒈진 귀신들이
수연일 언니 누님으로 모신단 소문 못 들었어?"
수연이 당차게 큰 사발에 담긴 술을 벌컥거리며 원샷으로 끝내려하자 친구들이 눈이 튀어
나올만큼 놀란 얼굴이 되어서 강수가 한마디 농담을 던졌다.
"추림 너... 너 나중에 좀 보자... 으... 속아파!"
형 추산이 술을 마시고 놈들에게 풀려나오면서 추림을 노려보았다. 오자마자 빈속에 술을
솓아 넣었으니 열불이 나고 있을 것이다.
"째째하긴. 그거 가지고 동대문 바람둥이 이추산이 엄살을 부려?"
"이새끼야 난 어제부터 술만 처넣구 아무것도 안 먹었단 말이야!"
추림의 말처럼 형 이추산은 동대문구 근처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매너남으로 통했다.
수준급 당구 실력과 노래 가창 실력을 무기로 주말 밤마다 거리를 누비고 다녔는데 추림
이 만나보고 알고 있는 형의 친구라는 여자만 여섯이나 되었다.
"형 누가 찾아왔어!"
그때 막내 추영이 들어와 손님이 왔다고 말해 추림은 또 누가 왔나 싶어 밖으로 나갔다.
안방에서 어른들이 친구들 만큼 소란스럽게 노시고 계셨다. 고스돕 판이 벌어진 것 같아
아마 오늘 밤은 편히 잠들기 힘들 것이다.
썰렁한 기운을 느끼며 밖으로 나오니 오토바이를 세우고 서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형! 저 형만인데 오랜만이예요?"
추림이 다가가니 낮익은 얼굴이었다. 소개를 받고나니 일년 후배인 형만이가 맞았다.
덩치가 커서 후배들 중에 노는 놈으로 통해 추림에게 몇번 혼난적도 있는 친구였다.
"어 그래. 잘 지냈냐? 그런데 어쩐 일이야? 너두 술 고프냐?"
"형 그게 아니라... 저어 큰일 났어요?"
형만이가 머뭇거리며 어두운 안색을 하다가 그렇게 말해 추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큰일? 그래 일단 들어보자."
"형 지금 시내에서 난리가 났는데... 저어... 전현아 아시죠?"
형만이의 말을 듣던 추림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현아를 추림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보다 추림이 그녀를 훨씬 더 깊은것 까지 알고 있었다.
현아는 추림과 결혼할꺼라며 초등학교때부터 따라다니던 여자 후배였고 동생과도 같은 여
자였다.
"그런데?"
추림이 굳은 얼굴로 반문했다.
"그게......"
"날 알면 그렇게 말 못하겠지? 토씨하나 숨기지 말아라. 다 말해라. 현아가 어떻게 된거고
니가 여기에 날 찾아올 정도로 심각한 거냐?"
"네. 형. 현아하고 친구들이 레드스타에 있었는데 선배들이 찝적댔어요. 취해서. 그런데 못
보던 놈들도 있고해서 우리가 말리다가 조금 전에 막 싸움이 났어요. 그런데 현아가 덤비
다가 맞아서 코피가 터지고... 쓰러지고... 명준이 형이 있다가 형안테 가보라고 해서 왔어
요. 어쩌지요?"
형만이의 얼굴엔 초조감이 가득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타지에서 온 사람들일 것
이다. 창피한 일이다. 자신들의 앞 마당에서 밀린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학생들에게도 부끄
러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추림의 귀엔 그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 걱정되고 자극
되는 것은 현아의 일이었다.
명준은 추림과 동창이었고 그리 친하지은 않았지만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말리고 어쩌
고 하다가 결국 상황을 가라앉히지 못했을 것이다. 형만이가 여기에 온 이유가 그것이다.
"여자들이 몇명이냐? 놈들의 수는? 누가 거기 대표로 있냐?"
"여자들은 네명이고 그새끼들은 한 열명쯤 되요 두다리 위 선배들이 세명이고... 지금 대표
는 정건인데 밀리고 있어요?"
"정건이가? 그놈 여기 왜 있어? 춘천으로 이사 간 놈이?"
"다시 이사 왔어요. 정건이도 깨졌구... 칼도 들었고 도끼도 들어서... 빨리 가봐야 하는데."
말을 들어보니 심각했다. 연장까지 들었다고 하면 지금 레드스타 주점은 패쇄됐을 확률이
높고 경찰의 개입은 날아갔다고 봐야했다. 조그만 동네지만 사건이 많고 인구밀도가 비교
적 높은 편인데 관할 파출소의 인원은 서넛이었다.
이놈들은 체질적으로 경찰을 피하는 놈들이라서 무지하게도 싸워줄 사람만 찾아 다녔다.
발전이 없는 녀석들이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방법은 법에 맏기는 것임을 모르는것도 아닌
데 습관화 된 행동이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기다려라. 곧 나오마."
"형 지금 가야되요! 죽을지도 몰라요!"
돌아서던 추림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형만이를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은 부분이 나온것이
다.
"이새끼 한마디만 더 숨겨봐라! 너부터 작살내주마!"
"사실은... 정건이가 한방 먹었어요. 허벅지에요. 피를 엄청 흘렸는데... 칼에 먹혔어요. 빨
리가서 도와줘야 하는데."
추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숨길것을 숨겨야지 이놈은 정말 멍청한 놈이었다.
"넌 여기서 석호를 불러내서 뒤로 따라와라. 석호만이다. 그놈 말고 다른놈안테는 숨겨!
오토바이는 내가 가져간다. 서둘러라!"
추림이 형만이가 타고온 오토바이에 올라타며 말했다.
"석호형이요? 알았어요. 빨리 갈께요. 조심해요. 무식한 놈들이니까!"
추림이 형만이의 말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시동을 켜고 곧 출발해 버렸다.
초조해진 형만이가 석호를 불러내려 다시 집 입구를 바라보았다.
(20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