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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사랑 (21장/죽은자의 슬픈 넋!) <실극화>

추림의 풍 |2005.10.10 17:58
조회 290 |추천 1

차 창에 얼어붙은 얇은 얼음을 쓸어내고 하얗게 서린 흔적을 지워내자 빠르게 지나치는

겨울의 산야와 들판이 보였다.

 

온통 하얀 눈에 뒤덮힌 채 얼어붙은 대지, 침묵의 전언을 전하는 것 같아 추림은 한동안을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거대한 산맥과 높은 산봉우리... 거기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가!

문득, 자신의 삶에 회의가 든 추림은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요즘 자주 이런 허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친것일까! 단 한번도 멈추거나 쉬려 해보지 않는 그였다.

무언가를 지니려 욕망을 꿈꾸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 삶이 되자고 스스로 약속했을 뿐

인데......

 

무소의 물처럼 그렇게 달리는 것!

먼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고뇌를 해보지 않았다.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살

면 그것이 최선의 행복으로 여겼을 뿐이다.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채, 노회한 경험만으로 인생길을 힘겹게 헤쳐 나가시는 아버지.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며 거울을 보시며 한탄하시던 어머니. 오십년 세월을 그렇게 사셨는

데... 얼나나 힘들고 피곤하셨을까.

 

"희생없이 인생을 보람있게 보내려고 하는 일체의 시도는 허무하다! 그와 같은 시도는 인

생개조의 가능성을 오히려 멀리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안일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없어도 무방한 것을 멀리하라... 톨스토이, 인생독

본!"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인생을 논했던 구절을 읇조린 추림의 얼굴에 허무의 기운이 

가득하게 묻어났다.

 

외롭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다른 말이다. 진정 그랬다.

 

아침일찍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추림은 고향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성규마저 피곤해하고 지친 육신을 겨우 추스르며 일그러진 얼굴로 버스에 오를 때 추림의

가슴엔 뻥하고 큰 구멍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코를 나직히 골며 성규가 잠에 빠져있다.

녀석은 많이 힘들었을 텐지만 잘 견디어냈다. 몸은 부쩍 야위고 기운 다한 등불처럼 무기

력해 하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나약함을 의지에 실어 견디어 냈다.

 

터미널에 따라나오신 녀석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놈을 배웅하셨다.

버스안에 말없이 앉아 있던 녀석이 울고 있는것을 추림은 모른척 외면했다.

 

추림이 손에든 손수건의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에 가만히 유미를 떠올렸다.

 

세장의 손수건... 그녀가 몰래 집을 나가고 난 후 메모와 함께 발견한 것들.

생일을 대신한 작은 정성일 것이다. 이름자의 이니셜을 새겨넣고 향수까지 뿌려 놓았다.

 

어제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꼭 할 필요는 없었지만 전화기앞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자신

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돌아오는 주에 보자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녀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이 무언지 그 정체성이 매우 혼란스러웠다.

단 한번도 이러지 않았었다.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주위에 있었어도 자신의 마음을 강렬하

게 잡아 당기는 이가 없었다.

 

운명! 그것이 진정 존재한다면 추림은 유미를 운명이라 여기고 싶었다.

필연이어도 좋았다. 그녀를 기다려보고 싶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자신의 감정에 그녀는 무엇이고 자신이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잠깐 잠이 들었었나보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거칠게 흔들리던 버스의 움직임이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익숙한 서울의 도시 정경이 지나치고 있었다.

 

"일어났어?"

 

성규가 어느새 깨어있었던지 존재감을 알려왔다.

 

"벌써 도착한거야?"

"응. 차가 안 밀리더라. 그런데 너 무슨잠을 그렇게 정신없이 자는거야? 원래 차 안에서 못

자는 새끼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서 휴계소에서 혼자 노닥거렸다."

 

그랬나보다. 원채 잠도 없고 차안에서는 잘 자지 못하는 추림이었다.

두시간 이상을 정신없이 잔 것 같았다.

 

몸이 찌뿌둥하고 무기력한 나른함이 느껴졌다.

 

"야! 정말 갈거야?"

 

성규가 질문을 해와 추림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어딜?"

"이게... 명숙씨안테 간다며? 도착하면 바로 갈꺼냐고?"

 

"아! 가야지. 너도 같이 가 임마!"

"응. 그러자. 본지도 오래됬고... 이거 너무 미안하다. 제수씨 고향 가지도 못했을텐데."

 

정명숙은 고아였다. 믿을 수 없을 만한 미모를 소유한 그녀는 대학을 혼자의 힘으로 졸업

하고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가 장호영을 만난것이 삼년 전이었다. 당시 정명숙은 야간 대학 이학년이었는데 영호

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키웠다.

 

호협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따듯한 마음과 정이 많은 영호는 혼자인 명숙을 극진히 돌봤다.

하지만 장호영의 삶은 그렇지가 못했다.

 

힘든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도 몇년 늦게 입학해서 서너살 아래인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던

그는 결국 고등학교를 포기했다.

서울에서 그가 한 일은 다양하지가 않았다. 그저 돈을 별 욕심에 화류계에 투신 한것이 전

부였다. 그리곤 그것이 지울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화류계에서 이어진 조폭과의 인연들... 전국적으로 활계를 치던 조직폭력에 가담하고 승승

장구를 했다는데 웃기는 말이었다.

 

어느날 그 생활에 회의를 느낀 영호는 발을 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실력과 기본바탕이 우수했던 영호를 그 세계가 자유롭게 놔주지 않았다.

 

죽음... 추림에 의해서 동대문에 자리잡고 있던 조직에서 도망쳤지만 그는 수없이 쫒겼다.

그러다가 어느날 겨울, 그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설악산에서 그의 시신을 발견하고 가장 먼저 연락을 받은 이가 추림이었다.

어떤 연락처도 있지 않았던 그의 주머니에는 유일하게 추림의 서울 주소지와 집 전화번호

만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고 했다.

 

당시 녀석이 죽었을 때 정명숙은 겨우 팔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었다.

녀석이 쫒기는 동안 명숙은 녀석의 씨앗을 홀로 잉태한 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가본지 조금 오래되어 추림은 일부러 구정연휴를 하루더 신청했고 이른 아침부터 서

둘러 상경한 것이다.

 

택시가 석관동을 지나 장희동을 지나쳤다.

곧 종암동 경찰서가 보이자 추림은 택시를 세웠다.

 

슈퍼는 찾기가 쉽지 않았다. 구정연휴라서 서울은 썰렁하기만 했다.

겨우 문을 연 슈퍼를 찾아 성규가 투덜거릴 정도의 많은 물건을 샀다.

집을 떠나올때 엄마가 싸주신 음식들과 더불어 짐이 한껏 늘어났다.

 

도로를 횡단해 한참을 걸어 낮은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되게 춥네. 야! 집은 정확히 알고 있는거야?"

 

성규가 정말 추운지 힘겨워 하면서 투덜거렸다.

작년 여름에 추림은 장희동에 살던 명숙의 이사를 직접 도왔다. 그후로 한번 더 와 보았는

데 조금 헷갈렸다.

 

"여기를 돌아서... 가로등이 나오는데... 방범함이 있었고... 아 저기다!"

"에이 길치인 놈아! 그것도 못찾아서 헤매냐?"

 

몸이 좋지 않은 성규가 메마른 입술을 오물거리며 짜증을 부렸다.

 

"지랄할거면 돌아가 새끼야!"

"어서 가기나 해. 추워서 얼어 죽겠다."

 

언덕진 곳을 비스듬히 오르자 새로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듯 보이는 이층 양옥집이 보였다.

 

주위는 조용하고 어디선가 티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대문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대문이 열려 있어 그냥 들어갔다.

 

건물 우축을 따라 조금 걸으니 바로 명숙의 집이 보였다.

 

"탕탕!"

 

"계십니까?"

 

문을 살며시 두드리고 추림이 말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없는거 아니야? 텔레비젼 소리는 들리는데... 다시해봐."

 

성규가 문에 귀를 대고 말하자 추림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명숙씨! 저 이추림 입니다!"

 

추림이 조금 크게 소리쳤다.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듯해 성규가 조금 뒤로 물러섰다.

 

곧 문이 열리며 누군가 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 계셨군여? 잘 지내셨어요?"

"안녕 명숙씨!"

 

추림과 성규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키가 드물게 크고 상당히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이십대 초반의 여자. 정명숙이었다.

그녀는 놀랐는지 나와서 추림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추림씨... 성규씨?"

 

뜻밖인지 그녀는 확인이라도 하려는듯 추림과 성규를 부르며 눈을 깜박 거렸다.

그리곤 얼굴이 슬퍼지며 곧 눈물을 흘렸다.

 

"이런 명숙씨 벌써 울면 어떻해요."

 

명숙에게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며 추림이 달래주자 명숙이 추림의 품에 기대왔다.

 

"흑... 왜 이제 오셨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

 

추림의 마음도 찡하게 아파왔다.

혼자인 명숙은 명절에 누군가와 같이 지내지도 못하는 존재다. 친구도 별로 없고 친척도

없는 그야말로 사고무친이었다.

 

"미안해요 명숙씨. 일찍 왔어야 하는데... 정말 미안해요."

 

가슴이 울렁거려 참을 수 없는 격정을 느낀 추림이 명숙의 어깨를 세게 감싸안으며 말했다.

그녀에게 유일한 버팀목인 추림!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지만 그녀에게 남은것은 오로

지 작은 핏덩이와 추림이 유일했다.

 

죽고 싶은 날을 보낼때 곁에 있어준 유일한 사람이 추림이었다.

간난아이의 모든 용품을 수개월동안 쓸 수 있을만큼 사다 쟁겨주고 이사할 집까지 돈을 보

태 가면서 얻어주고는 꿋꿋하게 살아달라 부탁한 사람이었다.

 

추림이 명숙을 찾아 온것은 지난 가을 이후 처음이었다.

 

"추워요. 명숙씨 어서 들어가요."

 

추림이 명숙의 어깨를 감싸며 집안으로 떠밀었다.

 

"이런... 죄송해요. 들어가요. 좀 지저분한데......"

 

집안으로 들어오자 훈훈한 기운이 느껴지고 간난 아이를 키우는 집에서나 맡을 수 있는 특

유의 냄새가 기분좋게 풍겨졌다.

 

큰방 하나와 작은 쪽방 하나가 붙어 있어 그리 좁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식구라곤 달랑 아이와 명숙만이 전부인 것이다.

 

"어디보자. 우리 아들 많이 컸다 볼까?"

 

추림이 들어가 씽크대에서 손을 씻고는 바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조금전에 깼어요. 우유를 먹어서인지 기분이 많이 좋은듯해요."

"야 이놈봐라! 눈이 똘망똘망한게 되게 잘났다. 많이 컸잖아!"

 

성규가 아이를 안으려 해 추림이 밀쳐냈다. 손을 씻은것도 아니고 몸이 좋지도 않아서 추

림이 걱정한 것이다.

 

"어디 안아볼까! 어이쿠! 뭐가 이리 무거워 우리 아들 많이 컸네. 아빠랑 목욕탕 가도 되겠

는걸?"

 

작고 하얀 얼굴에 커다랗게 난 눈을 반짝거리며 추림을 바라보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워

서 깨물어 주고 싶었다.

 

장찬! 녀석의 이름이었다. 찬(璨) 은 빛난다는 의미다. 광이나 명처럼 가시적인 의미가 아

닌 자체를, 스스로 닦아가야 빛이 난다는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살기를 바래서

추림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찬의 얼굴은 멋진 호남형이었던 제 아빠 영호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외통은 전혀 하지 않

은듯 했지만 귀와 손가락은 엄마인 명숙을 닮았으니 공평한 셈이었다.

 

추림이 찬을 안아 옹알이를 하며 놀자 명숙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추림도 찬을 안고 얼굴을 보며 영호를 떠 올리자 눈시울이 붉게 달아 올랐다.

 

명숙은 아마 이놈을 보면 죽은 영호가 더욱  떠오를 것이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찬을 안고 서럽게 울며 지내는 시간이 많을 것이다.

 

성규놈이 돌아서서 컥컥거렸다.

사회에 나와 가장 많이 어울렸던 세사람이었다. 정말 아버지 같은 존재는 영호였다.

대범하고 화통해서 심약한 성규를 곧잘 챙겨주고 형같이 리드하던 놈이었다.

 

"어이구! 이놈봐라? 웃네? 아빠해봐. 아...빠아! 어? 말했어요. 정말 말했어? 아닌가?"

"에라이 사기꾼아! 뻥을 칠것을 쳐라."

 

추림이 옹알이짓을 하는 찬이 말한 착각을 느껴 한말을 성규가 부정하며 타박을 주었다.

 

"아닌가? 하긴 그럴리가 없지. 명숙씨! 상좀 차려요. 이놈이 밥이나 제대로 먹었는지 모르

겠네요. 아무거나 잘 먹던 놈이니 그냥 과일하고 포나 올립시다. 오랜만에 나랑 술이나 실

컷 마셔보게 할랍니다."

 

"흑흑. 추림씨... 고마워요. 전... 아무것도 못했어요."

"에이 관둬요! 또 운다. 자꾸 울면 이놈 왔다가 그냥 간단 말입니다. 그 눈물에 반한 놈이지

만 또한 가장 싫어했잖아요. 그만 뚝!"

 

정말 울고 싶은 사람은 추림이었다.

얼마나 힘들게 놈을 보냈는지 명숙에겐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녀 만큼은 아니더라도 소리

없이 몰래 울었던 적이 여러번이었다. 여기서 자신마저 운다면 그녀를 더 나약하게 하리라

참아야 했다.

 

"이게... 빨리 같이안해? 확 버리고 갈까부다!"

"내가 뭘 하라구? 할게 있나?"

 

"가서 저것좀 거들어! 엄마가 보낸주신거 그거 새로 만든거니까 그걸 좀 튀겨라."

"그럼 넌? 이새... 넌 그냥 놀구?"

 

추림이 멀뚱히 안아있는 성규를 몰아붙혔다. 추림에게 욕을 하려던 성규가 미리 언질을 받

은, 거친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금새 말을 바꾸며 따지고 들었다.

 

추림은 오기전에 엄마에게 부턱해서 음식을 새 재료로 조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영호의 잿상이라도 직접 챙겨 주고 싶어서였다.

 

영호의 어머니는 나이 사십이 넘어서 영호를 낳으셨다. 그러니 지금 환갑을 한참 넘기셨

고 기력도 없으셨다.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했고 정신마저 조금 안정적이지 못하셨다.

 

매년 기일 날 영호의 잿밥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추림은 이번 이 일을 하기전에 많이 망설였다. 찾아 오는것조차 명숙에게 부담이 되는것

같았는데 만나면 더욱 영호가 떠오를 것을 우려해서였다.

하지만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이 담소하게 차려지고 추림과 성규가 술을 따라 올리고 잿상 앞에 앉았다.

친구의 상이니 절은 생략하기로했는데 그것은 추림의 결정이었다.

 

-죽은놈, 뭐 이쁘다고 절까지 할까-

 

그 말을 하고 추림은 멍하니 상앞에 앉아서 찰랑거리는 술잔을 응시했다.

 

'좋냐? 편하고? 나쁜새끼... 그렇게 가니까 좋냐? 나쁜자식아... 애새끼는 뭐하러... 미안하

다. 널 편하게 해주지 못해서. 하지만 알지? 늘 생각한다는걸. 시골가서 친구들을 많이 만

났다. 술도 실컷 마시고 놀기도하고... 기억나냐? 중학교 겨울때 군부대에 들어가 닭 훔치

다가 걸린거? 크크... 그때 넌 혼자 도망가고 나만 잡혔지... 비겁한 놈... 넌 늘 비겁해 새끼

야! 그렇게 서둘러서 먼저 가고 치사한 새끼... 나 오늘 여기서 자고갈까? 그래도 될까? 명

숙씨는 봤냐? 애는? 꼭 너 닮아서 나중에 사고뭉치가 될거야. 그건 확실해 내가 보장한다.

성규랑 같이 왔어.

 

올해 눈 엄청 왔다. 지겨울 정도야. 영호야! 나 아무래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 같다.

명숙씨 만큼은 아니지만 되게 근사해. 느낌이 아주 좋아. 그런데 늘 슬퍼하는거 같아서 조

금 속상해. 항상 날 불안하게 하거든. 너안테... 소개해주고 싶은데... 걱정마라 꼭 보여주

고 말테니까... 잘 지내 새끼야... 가끔 명숙씨하고 찬이는 보러 올거야. 넌 갔지만 항상 마

누라하고 애를 보살펴주라. 명숙씨 너무 슬퍼하고 힘들어 한다. 니 마누라만 아니면 내가

데리고 사는건데... 큭큭... 씨발놈! 개새끼! 너 나중에 만나면 나안테 엄청 맞을 줄 알아라.

준비하고 있어. 조금 늦게 갈거지만... 아주 느리게 갈거지만... 만나겠지? 잘 지내... 아 요

즘 조금 힘들다. 니가 예전에 이런 말했지? 힘들면 하늘을 본다고!

그런데 싫다. 하늘에 있는 니가 꼴보기 싫거든... 오늘 명숙씨랑 성규랑 술이나 실컷 마시

다 갈거야. 참! 성규놈 다시 약했다가 나안테 걸려서 죽도록 얻어 맞았다.

뭐라고? 그러지 말라고? 웃기지마! 새끼야. 그러다가 그놈마저 보내면 내가 못산다.

내가 살기위해서는 놈을 되찾을거다. 너같이 그렇게 보내지 않을거야. 이새끼들아!

나좀 마음놓고 살게 해주면 안되니... 정말 지랄맞다! 나쁜 자식들... 잘지내고 있어.'

 

"흐흐......"

 

상앞에 앉아 속으로 많은 말을 되내이던 추림이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기어이 참아내던

한줄기 눈물을 주루륵 흘렸다.

 

성규와 명숙이 놀라서 눈을 치떴다. 단 한번도 추림의 우는 모습을 보지 못하던 그들이었

다. 굳굳하고 돌같이 단단한것이 추림의 대명사였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견디고 절대 울지 않는 남자였는데, 그가 울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추림은 눈가를 훔치고 상위에 놓여진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넣었다.

 

"명숙씨. 여기 큰 대접 하나 줄래요. 아무래도 술잔이 작다고 이놈이 투덜거리네요."

 

갈라진 음성으로 말하자 명숙이 조용히 큰 그릇을 가져와 건넸다.

 

"뭐해요? 음식이나 듭시다. 난 이놈과 한잔할테니... 에이! 관두고 술이나 마십시다. 성규

야! 이리와라. 우리 예전에 하던 방식으로 한잔해보자."

 

눈물이 그렁한 얼굴이 보이기 싫었는지 돌아보지도 않고 추림이 말하자 성규가 희미하게

웃으며 다가와 곁에 앉았다.

 

"자 내가 시작하지. 준비해라 성규야 한다."

"해봐라. 이기는 것을 보여줄테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는?"

"소비에트 연방!"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은?"

"아마존 강!"

 

"한국 13대 대통령은?"

"노태우!"

 

"우리나라 이데올로기의 목적은?"

"민주주의, 자주국방, 통일!"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른 가수는?"

"조용필!"

 

"세계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는?"

"스필머그 감독작 이티!"

 

"국내에서 가장 큰 빌딩은?"

"63빌딩!"

 

"명숙씨의 나이는?"

"... 스믈넷!"

 

"장찬은 몇개월?"

"......?!"

 

"졌다! 마셔라!"

 

그런식이었다. 세명이 모여 한명이 두명 중 한명을 지목해가며 즉흥적인 질문을 하면 상대

는 대답을 하고 대답을 못하면 이렇게 커다란 대접에 가득 부은 술을 벌로 마시는 게임이

었다. 질문의 수는 열이고 열가지 질문을 모두 맞히면 질문한 이가 대신 술을 마시는 방식

이었다.

 

"또 졌어? 미치겠군! 오랜만이라서 긴장했는데... 역시나군."

 

추림은 장영호와 김성규 이렇게 셋이모여 자주 놀았는데 그 열고개 게임을 한번도 져 본적

이 없었다.

 

이기면 계속 질문 할 수 있는데 추림은 아예 대답하지 못할 난해한 질문을 준비하곤 했다.

방금전에도 그랬다. 명숙의 나이를 유도해내고 질눔한 다음 그와 연관된 질문이 나올거라

예상한 상대에게 곤혼스러운 질문을 던지므로서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단 삼초의 시간! 생각할 시간이 부족한 순간이었다. 질문 중 추림이 가장 많이 던지는 것은

경제와 문학부문이었다.

 

추림의 무릎에서 잠이든 찬을 자리에 눕히고 셋은 상에 둘러앉아 수시간동안 술잔을 나누

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명숙의 진로가 화두로 떠올랐다.

아이가 있어 일도 하지 못하고 묶인 상태가 되버려 당장 경제적 문제에 심각한 상황이 이

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어떻게 버티고 추림이 약간의 도움을 주었지만 해

결책은 아니었다.

 

입양을 생각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명숙이 고백하면서 슬프게 울었다.

추림은 그녀와 같이 살면 어떨하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저 생각만 하는데 그쳤다.  

 

답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집에서 일 할 수 있는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그녀는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수년간을 봉제공장 디자이너로 일했는데 그

기술만으로도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지만 역시 아이가 걸림돌이었다.

조금 더 크거나 그랬다면 어떻게 해 볼텐데 아이는 아직 너무 어리기만했다.

 

그러고 보니 유미의 오빠가 그런쪽의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의상을 전공하고 작은 회사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잘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일단 버텨보세요. 제가 어떻게 해 보겠어요. 기운 잃으면 다 끝장이라는 것을 유념하시고

절대 어리석은 마음 같지 마세요. 아셨어요?"

 

술이 올라 벌개진 얼굴로 추림이 다독거리듯 말하자 명숙이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너무 부담되는거 같아서 어쩌지요. 저 너무 뻔번한거 같아요."

"하아! 뻔뻔한거 나중에 갚아주시면 됩니다. 이 녀석 크면 제가 대부가 될겁니다. 그 때 거

절하지만 마십시요. 그거면 됩니다."

 

"대부? 그게 뭐냐? 영화이름 같은데?"

"무식한 놈! 대부란... 관두자. 철없기는 네놈도 마찬가지니 네놈 대부도 되어주리?"

 

"아 글쎄 대분진 대구인지가 뭐냐니까?"

"이놈아 그건 아비의 다른 말과 같은거야. 즉, 보호자나 빽그라운드 같은거지. 많은걸 알려

주고 길을 바로 잡아주기도 하는 그런거다. 특히 너처럼 철딱서니 없는 놈들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이들을 그렇게 부른다."

 

"난 또. 대부라고 해서 무슨 거장이니 큰 인물인 줄 알았잖아? 그거 별것도 아니구만! 명숙

씨 저도 찬이 대부할랍니다!"

"넌 안돼! 네놈이 뭘 가진게 있다고 그런 엄청난! 것을! 하려고 해!"

 

추림이 말에 힘을 강조하며 말했는데도 성규가 실실걱리며 웃었다.

 

"추림아! 추림아! 내가 다른건 다 너보다 못해도 딱 한가지 너보다 잘난게 있다? 그게 뭔줄

아니?"

"글쎄다? 얼굴은 나보다 조금 났는데 그거 말하는거냐?"

 

"지랄... 임마 네 간판이나 내 간판이나 잘나긴 잘났지만 그거가지고 금칠 하기는 싫다. 네

가 너보다 잘난것이 천재적인 음악성이다! 알겠냐?"

"음악? 그렇네? 이제보니 성규 이놈도 잘난게 있었네? 야아... 김성규씨가 다르게 보이네.

어이쿠 음악의 대부 김성규씨를 몰라뵈서 죄송하군요."

 

추림이 익살을 떨자 명숙과 성규가 추림을 바라보며 킬킬 거렸다.

 

"그래 대부해라 해. 음악 잘하면 여자 꼬시긴 좋겠더라. 안그래?"

"자식! 인정하는구나. 하긴 애가 이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울린 여자만 수십명......!"

 

성규가 추림의 말에 좋아라하고 말하다가 명숙이 바라보자 입을 급히 다물었다.

 

"늦었어 임마! 너 딱 걸렸다. 명숙씨 이놈이 이런 놈이에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언제 돌변

해서 대쉬할지 모르니까요."

"치사한놈! 명숙씨 장난입니다. 헤헤. 뭐... 조금 그러긴 했지만 설마 제가 그럴리가 있어요

? 안그래요? 정명숙씨!?"

 

"아니요. 그런데요? 성규씨야 예전부터 알아봤어요. 기타치고 피아노치면서 마이웨이를 부

를때 딱 폼이 그렇던데요? 나 이런 남자니까 누가 나랑 사겨요... 하는 그런 폼요."

 

"아닌데... 전 연주하고 노래만 하면 여자들이 알아서 쫒아다닌다구요. 그것도 제 탓인가 뭐

! 아니잖아요.아! 엄마는 날 이렇게 잘 나셔가지고 오해의 소지를 만드시는 거야."

 

"뭐라고? 에이그 골빈놈아 정신좀 차려라. 그래 아주 잘나서 좋겠다 웬수야!"

 

"히히히."

"호호호!"

 

성규가 자신이 한말이 웃긴지 명숙과 마주보며 웃겨 죽으려고했다.

 

성규가 술에 취해 방 한쪽에서 몸을 늘이고 잠에 빠져 들었다.

추림은 취했지만 견딜만해서 명숙과 상앞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대작하고 있었다.

 

명숙은 그리 술을 즐기지도 많이 마시지도 못해 추림이 서너잔 마실동안 한잔 정도 마시며

어울려 주었다.

 

"겨울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지는군요. 여느때보다 춥고 깊은거 같아서 느낌이 남달아요."

 

취기가 어느정도 올라 나른해진 추림의 음성에 명숙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명숙씨! 기운내세요. 솔직히 불안해요. 어떨땐 명숙씨가 큰 실수를 할까봐 가슴을 졸이기

도 하고 그래요. 부디 제 바램을 저버리시지 말아요."

"사실 좌절할때가 많아요. 너무 힘들고 외롭기도 하고... 혼자 산다는것에 익숙했는데 찬이

가 생기고 나서부터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하아... 그 사람이 그렇게 가지만 않았

다면... 잘 키울거예요. 몸을 팔아서라도 아기만큼은 훌륭하게 키울 거예요. 추림씨 정말 고

마워요. 많은 힘이 되어주셔서요."

 

"전... 할일을 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아마 나 아니더라도 내가 하는 일을 누군가가 대신 했

을 겁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거 같아요. 누군가의 자리를 제가

대신 차지한 것 뿐입니다."

 

명숙은 추림을 말을 되새기며 그에 대해 다시한번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사해 명숙씨. 내 분신이야!- 

 

처음 영호가 추림을 소개할 때 했던 말이었다. 분신... 자기 자신의 또다른 자아!

추림과 영호는 경쟁이라도 하듯 대범하고 통이 큰 사내들이었다.

 

어찌나 그런지 지구가 무너져도 눈하나 깜짝이지 않을 것 같은 사내들이었다.

혼자가 되고 추림을 자주 대하면서 가끔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영호의 모습이 추림의

얼굴위로 겹치면서 그에게 기대고 싶은 충동적 마음을 느꼈고 언제부턴가 자신이 추림을

연모하고 있는것이 아닌가하는 착각을 하곤했다.   

 

빈자리는 채워지기 마련이다. 명숙은 추림이 영호의 자리를 대신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영호에겐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혼자 견디기에는 너무 힘든 세월이었다.

 

두렵고 외로운 상흔이 늘 지워지지 않았다. 아이에게 혼자 말하는 습관이 들어서 자주 그렇

게 말하다가 울곤 할때면 추림이 몹시도 그리웠다.

 

꼭 추림이 그리운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알고 있는 누군가중 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지도

몰랐다. 혼자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영호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대신 추림이 주고 있는것 같았다.

영호와는 알게된지 오래 되었지만 그리 자주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 그의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나서 너무 놀라고 실망스러웠지만 이해하려 했다.

 

영호를 만나지 못하는 시간을 추림을 대신 만나면서 달래곤했다.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신새벽에 추림에게 찾아가도 그는 늘 한결같이 따듯하고 반갑게 맞

아 주었다. 하도 다정하게 대해 주어서 그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건 아닌지 혼자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오히려 추림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웠다.

영호가 죽었을 때... 너무 힘겨워 모든것을 포기하려 하는 심정이었을때... 추림이 자신의

따귀를 때리면서 하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너희의 운명을 오욕스럽고 더러운 것과 맞바꾸려 하지 말아라! 감히 사랑을 하고 그 흔적

을 잉태한 것을 더럽게 짓밟으려 하지 말아라! 죽을 힘으로 살아라!-

 

그때 추림의 눈은 온통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고통스럽고 너무 슬퍼 오히려 명숙이 절망

의 늪에서 편안할 수있었다.

 

이추림... 그를 명숙은 잘안다. 영호가 얼마나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는지 같이 있는 내내 영

호는 온통 이추림의 이야기로 시간을 다 보냈다.

 

그는 왜 그렇게 살까? 남을 위해 자신을 던지면서 투쟁하려 할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것이 추림의 본능임을 알게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접촉이 필요했다.

 

그가 많이 보고싶었다. 영호보다 오히려 더 그리워서 그런 자신의 마음에 심한 배신감과 스

스로를 순수하지 못하다 비난했지만 마음은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

이 무엇일까? 당장 그늘이 필요하고 보호자가 필요함을 깨닫고 명숙은 그 대상으로 추림이

되었으면 싶었다.

 

아비와 어미의 정을 전혀 모르는 명숙에게 영호와 추림은 그 이상의 것을 느끼고 알게 해준

존재들이었다. 이제 영호는 없고 추림만이 남았다.

 

자신의 마음... 그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를 그리워 하는 것은 단지 쉴곳과 보호자가 필

요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은 그를 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혼란은 끝이 없었다.

 

그가왔다. 이렇게 편하고 마음이 든든하다. 그를 잡을 수있는 마술이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다른 여자에게도 웃음을 주고 자신에게 대하는 것처럼 해줄 것이다.

싫다. 그가 다른 이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자신에게처럼 단단하고 큰 의미가 되는 것이 정

말 싫다.

 

말해버렸으면 싶다. 당신을... 곁에 두고 싶다고 말해 버렸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가 영호의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런 마음이 더럽고 순수하지 않아도 좋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고아...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자신은 그런 저주받을 운명을 지니고 나왔을까?

그를... 아니 영호마저 자신이 고아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만날 수 있었을까?

자신이 고아가 아니었으면 추림은 날 다르게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자신의 운명이 그저

저주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하다!

 

결국... 그는 남이라는 이름으로 곁에 남을 것이다.

 

영호씨... 나 너무 힘들다! 넌 왜 추림씨와 친구였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지 그랬니!

 

생존보다 사랑이 강하지 못한 것일까? 내가 감히 추림씨를 좋아할 자격이 있을까?

난 정말 그를 나와 아기의 보호자로서 이용하려는 의지에 의해 좋아하는 것일까?

 

추림씨... 더 머물다 가면 안되나요? 아이의 대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제 욕심인가요?

 

격정에 눈물이 흘렀다. 단 하나! 단 하나라도 의지가 원하는 바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두려웠다. 추림이 가고나면 홀로 남을 자신이 두려웠다.

지금 자신에게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가 어떤 사람이어도 좋았다. 악마라도 좋았고 더러운

병자라도 좋았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존재감만 느끼게 해준다면 모든것이 다 좋을것 같았다.

추림이 빠져 나가고 비워질 자리가 두렵고 슬프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아... 가지 말라요 추림씨...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가 떠나주세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께요! 그저 존재를,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느끼기만 할께요... 조금만

있다 떠나주세요!

 

그때 기적같은 말이 들려왔다.

 

" 나 오늘 건너방에서 자고 갈겁니다. 물론 허락해 주신다면! 이놈과 놀다가 천천히 가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그가... 마음이라도 엿 본 것일까! 즐거웠다. 마음이 산뜻해지고 가벼워졌다.

 

"그렇게 하세요. 찬이도 좋아할 거예요."

 

눈물을 훔치며 명숙이 말했다.

 

"힘들줄은 알아요. 명숙씨! 전 제가 지닌 것 중 가장 큰것을 명숙씨에게 드리고 싶어요.

바보같지만... 멍청하고 쓸데없지만 허허로이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을 드리고 싶어요.

그게 제가 지닌 가장 큰 재산 같아요. 그걸 명숙씨에게 드리고 싶은데... 안되겠죠? 제가 신

도 아니고... 그러니 스스로 만드셔야 합니다."

 

"아니요. 전... 추림시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걸요. 가끔 생각했어요. 추림씨가 어

떻게 지내실까? 언제쯤 올까? 하고 말이에요. 오늘 너무 기뻐요. 명절인데... 너무 외로웠거

든요. 고마워요. 정말 거짓말처럼... 오신것이 믿겨지지가 않았어요."

 

"그전에 오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나몰라라 하는거 같아서. 자주 찾아 올게요."

 

저녁 일곱시쯤 되어서 성규를 먼저 보냈다.

자고 간다고 말하고 나니 거겁한 성규가 도망치듯 가버린 것이다.

녀석이 가면서 돈 오만원을 몰래 두고 갔다. 추림은 그런 성규의 마음씀이 고마웠다.

 

저들도 힘든데 이렇게 마음을 표시한 놈은 이제 정말 어른이었다.

스믈셋이나 먹은 아이였는데 어느덧 그렇게 철이 든 것이다.

 

저녁을 밖에 나가서 먹으려고하다가 아이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추림이 밖에 나가 한시간

이 넘어서 돌아왔다.  

 

정육점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닌끝에 겨우 삼겹살을 사들고 왔다.

 

주방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마신탓에 낮부터 이어진 술이 더해져 그 강하던 추림도

나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취한채로 겨우겨우 몸을 가누어 가면서 아기를 데리고 놀던 추림이 씻고 건너방으로 건너

간 시간이 밤 열한시 경이었다. 

 

눕자마자 코를 골며 추림은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고향에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구정을 보낸 후, 쉬지 않고 곧장 이리로 달려온 탓에 그의 피

로도는 가벼운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오늘 드물게 술을 많이 마셨다.

 

명숙은 열두시가 넘어서 집안의 불을 껐다.

아이가 쌔근거리며 잠들자 명숙은 어두운 방안에 앉아 깊은 상념에 취해들었다.

 

명숙이 살며시 일어나 추림이 잠든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하아!"

 

한숨을 내쉰 명화의 입에서 살짝 거친 숨이 흐르기 시작했다.

 

추림의 코고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보인 추림은 정말 깊게도 잠들어 있었다.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 당신을 빌릴게요. 받아 주실거죠?"

 

나직하게 중얼거린 명숙이 걸음을 옮겨 누워 잠든 추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저 잠시 누울 뿐이다. 다른건 없다. 힘들어서 그럴뿐이다. 그에게... 아니 누군가에게 기

대고 싶을 뿐인것이다. 오늘 하루만 추림씨에게 기대자. 그거면 된거다.

 

이불을 걷고 추림의 곁에 조용하게 누웠다.

몸이 경직되는것 같고 갈증이 심하게 느껴져 왔다. 그리고 어느순간 나른한 육신을 느끼고

긴장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피가 급격하게 돌듯 하던것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머리속이 맑아져 왔다.

하지만 묘한 흥분과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추림이 잠떼를 부리는지 발로 이불을 걷어차며 몸을 비틀었다.

명숙에게 등을 보인 추림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등은 영호만큼 넓지가 않다. 하지만 의미는 더욱 넓었고 깊기만 했다.

추림의 등에 얼굴을 대고 가슴을 가린 채 팔을 붙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잠이 들었으면 싶었지만 쉬이 잠은 오지 않았다.

두시간쯤 지났을까? 아니면 더 지났거나 덜 지났을지도 모른다.

 

추림이 돌아서서 안아주길 바랬다. 다른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 해준다면 힘이 될 것 같았다. 외롭고 힘들었던 시

간들을 보상 받을 수 있을것 같았다.

 

남자로서 느껴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자신도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존재임

을 확인하고 싶었다.

 

자신의 존재와 실체감을 느낀다는것! 그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다른 표현이었다.

죽은듯한 자신! 생멸해버린 존재감! 혼자라는 괴리감! 떨쳐버리고 싶었다.

 

그때 또다시 기적이 일어났다.

 

"명숙씨! 이번 한번만 입니다. 한번만 용서할겁니다!"

 

추림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의 몸이 돌아섰다. 어둠속에서 그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명숙

은 피하기보다 더욱 는울 크게 뜨고 추림을 응시했다.

 

어둠속에서 추림의 눈이 부드러운 빛을 띠며 명숙의 눈을 끌어당겼다.   

 

"아아! 고마워요 추림씨!"

 

명숙이 추림의 가슴으로 몸을 움직여 파고 들었다. 추림이 팔을 내주고 어깨를 감싸주자 명

숙은 더욱 깊이 추림의 가슴에 몸을 묻으려 몸부림을 쳤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깊은 해갈이 풀리는 느낌과 몸이 하늘을 붕 떠 버리는 가벼운 카타르

시스적 희열감이 몸을 지배했다.

 

방이 빙글빙글 돌며 심한 현기증이 일어났다.

입술을 깨문 명숙이 추림의 품에 안겨 그의 몸을 강하게 끌어 안았다.

 

"고마워요 추림씨. 너무 너무... 외로웠어요. 힘들고 고독하고 견딜수 없을만큼 쓸쓸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러는 절 욕해도 좋아요. 더럽고 깨끗하지 못하다고 비난해도 좋아요.

이순간... 이순간 만큼만은 제 의지가 이루어졌어요. 처음이에요. 살면서 나의 바램이 이루

어지고 누군가가 이해해준것이...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이처럼 명숙이 투정을 부리듯 품속에서 깊은 정을 확인하려했다.

 

마음이 저도 모르게 심하게 저려온 추림은 자신의 입장이 너무 괴롭다고 여겼다.

왜 자신은 안될까! 주위에 이렇게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있건만 자신의 의지는 그들을 해

방시키지 못할까!

 

이 여자는 앞으로 수도없는 상처투성이로 살아갈 것이다. 정을 알고 사랑을 맛보고 남자를

알았다. 세상을 경험하고 삶을 살아가야 할 진득한 이유가 생겼다. 

과연 이 여자가 도전해올 모든 시련과 당당히 맞서 이겨낼 수 있을까? 의문이었고 미래형

이면서 현재형이었다.

 

자신에게 의지하고 싶어한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알고 있을까? 그녀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한 여자가 아닌 아이의 엄마라는 입장 때문이라

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엄마의 의미는 단순하지가 않다. 여자이기 이전에 수호해야 할 하나의 존재이다.

무언가를 지켜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커다란 숙제를 지닌 존재이다.

미션! 완성하고 완수해 내야 하는 입장! 명숙은 이미 어머니라는 자신의 존재를 알기에 본

능으로서 추림에게 기대어 오고 있었다.

 

그녀가 추하게 보일리가 없다. 여자로서 대해 버리고 하룻밤 안고 욕망을 채워 버릴까?

추림은 그런 남자가 되지 못했다. 친구의 여자! 지켜줘야 하는 여! 아니다. 단지 그녀는

추림에게 여느 여자들과 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차라리 사랑한다는 감정이 지배적이라면 그렇게 욕망을 채우거나 나눌수도 있지만 추림은

거부했다. 옳지 못해서가 아니다.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행동해야 진정 참 인간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참된 사람이거나 성자

같은 일면이 있어서가 아니다. 삿되게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과 이성이 사고하는 것 중 진

정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어서이다.

 

추림은 당당한 사내다!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당당한 것이 아니다. 

옳지 않은 일을 스스로 이겨 낼 수 있어서 당당한 것이고 깊은 생각을 실천 할 줄 알아서

당당한 것이다. 그뿐이다. 나약한 심성은 유혹에 빠지기 쉽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주범

이다. 추림은 강한 정신력을 지녔다. 부동의 마음을 지닌 그를 당당하게 하고 사내로 만드

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게 잘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움을 받아 들일 줄 아는것이야 말로 지혜로

운 것이다!"

 

천정을 응시하며 추림이 그렇게 말했다.

어떤 책의 구절에서 읽은 것인데 누가 한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욕망은 적을수록 행복하다! 이것은 낡은 생각이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진리이기도 하다!"

 

다시 추림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확실히 안다. 톨스토이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삶은... 사회 생활은 자신의 희생으로서만이 개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톨스토이가 한 말이다. 한때 톨스토이와 예프스키에 심취한 추림은 인상에 남은

말들을 기억하고 있다가 말한것인데 명숙은 침묵만 지켰다.

 

"아셨어요? 산다는 건 슬픈거래요. 하나도 완전한 게 없는데 굳이 완전한 척 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요. 시련을 내것으로 융화시키고 욕망을 절재하면서 인내하면 좀 더 나

은 삶이 되지 않을까요? 사람이 힘들고 슬플때 우는것이 극히 자연스럽듯이 살아가는것에

도 그런 법칙이 있어요. 부정하려 드는것! 우리 뒤에는 무수히 많은 어려움과 날카로운 비

수가 따라나니는 것 같아요. 언제고 빈틈이 보이면 사정없이 공격해 오죠. 그런데 사람들

은그것을 피하려고만 들어요. 왜 피할까? 겨우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비겁하고 졸렬한 것

들이 뭐가 무서워 피할까! 쫒아 버리면 되지. 아니면 익숙하게 맞아 주던가! 왜 자주 맞는

매도 덜 아프잖아요? 그러거예요. 결코 익숙해지지 않을 것들이지만 익숙해 지는 것이 아

닌 자연스러워 지는 것! 그것을 그렇게 융화시켜 버리면 강해져요. 명숙씨 혼자가 아니에요

명숙씨에겐 아주 큰 무기가 있어요. 찬이! 그놈이 명숙씨를 강하고 질기게 단련시키는 무기

가 될 거예요. 기운내세요 이렇게 울기만 하다가는 울보 되겠어요. 바보!"

 

추림이 말하며 명숙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주었다.

추림의 목을 부여안으며 명숙은 추림의 품으로 깊고 깊게 안겨 들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추림이 노래를 나직하게 흥얼거리며 명숙의 어깨를 박자에 맞추어 토닥거렸다.

명숙의 외로움이 그대로 추림에게 옮겨지며 죽은 자의 넋이 슬프게 울어대는 깊은 밤이었

다. 1993년 새해, 명절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22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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