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을 꼭 일주일 앞두고 추림은 병원에서 권하는 입원 연장을 거절한 채 억지로 퇴원하
고 말았다.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고 봉합도 풀어야 하지만 다시는 병원을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나머지 문제는 혼자서 감당할 생각이었다.
지선의 집으로 지내러 간 선주가 없는틈을 타서 혼자 퇴원할 생각이었지만 선주대신 다른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대신했는데 며칠간 보이지 않던 이시연이 귀신같이 찾아왔다.
우연이었지만 그녀는 다 알고 있었다는듯이 행동했다.
점심나절에 퇴원해 곧바로 회사에 들러 인사를 하고 오후 세시무렵 집으로 돌아가려했다.
하지만 난감한 일이 벌어져 버렸다.
찰거머리같은 이시연을 떼어낼 방도가 생각나지 않은것이다.
말해도 듣지도 않았고 정중히 부탁해도 나몰라라 식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함께 돌아온 추림은 그동안 선주가 말끔히 청소해 놓아 깨끗한 집이
마냥 정겹게 느껴졌다.
"남자가 사는 집치고 제법 깔끔한데? 어디보자 이쪽은 작은방이고 여기가 추림씨 방? 화장
실이 너무 좁은거 아니야?"
그리 크지 않은 집안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이시연은 추림을 무척이나 신경쓰이게 만들
었다.
"얼라? 이거 냉장고가 왜이래? 거지가 살아도 이거보다는 더 세간살이가 많겠네. 흠. 그래
도 술은 충분하네. 이봐요. 이추림씨! 우리 맥주한잔 어때?"
물어볼 필요도 없으면서 굳이 물어보는 저의는 또 뭐람. 술이란 술은 죄다 꺼내어서 식탁
위에 올려놓은 시연은 남은 야채와 소새지등을 꺼내 후라이팬에 요란하게 복아댔다.
추림은 아직 불편한 다리로 절룩 거리며 욕실로 들어가 대충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받고나니 선주였다.
"응. 그냥 왔다. 있으면 뭐해. 더 치료할 것도 없고 견딜만 한걸... 그래... 응. 내일쯤? 지선
씨시랑 같이 온다고? 축하는 무슨 축하... 같이 밥이나 먹자. 아픈데는 없고? 알았어. 그래
아직.. 먹어야지. 아니야 혼자 있어... 뭐좀 하느냐고. 그래 내일보자."
병원에 전화를 해서 퇴원한 사실을 알고 전화한 것인데 여러번 했단다.
조금 실망하고 원망하는 소리도했다. 그동안 고생을 많이한 선주였다.
병수발을 드는것처럼 어렵고 지루한 것이 없다. 선주는 거의 삼주를 불평없이 잘 견디어
낸 것이다.
"이리오시지? 설마 싫다고 하지는 않겠지?"
준비가 다 되었는지 이시연이 팔 소매를 걷어부치고 식탁에 앉았다.
추림은 저 도깨비같은 여자가 무서웠다. 도대체 막무가내의 전형같은 저 뻔뻔하고 무신경
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추림의 성격도 문제였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라고 말할 명확하고 직선적인 성격이 못된다. 일단 지켜보고 판단
해 나가는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추림이 식탁으로 다가가 앉자 마치 주객이 바뀐듯해 자세가 어색했다.
이시연이 맥주병을 들어 추림의 잔에 맥주를 한가득 부어주고 자신의 잔에도 한잔 따랐다.
"자 건배하지. 이추림씨의 퇴원을 축하하는 의미쯤이면 좋겠지?"
"됐습니다. 난 어서 빨리 시간이 가달라고 건배하고 싶은데. 싫으면 말고요."
"사내가 째째하기는! 뭘그리 뚱해가지고. 퇴원하는 날 혼자보다 이왕이면 둘이 낳고. 더
기왕이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랑 같이 하는게 낳지 않겠어?"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리며 추림에게 짐짓 야한 포즈를 취해보인 시연이 너스레를 떨었다.
오랜만에 마시는 맥주여서 시원하고 싸한맛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상처가 덧 날까 마시지 않을까 했지만 과거에도 이런적이 있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추림은 추림대로 생각할 것이 있었고 이시연도 그런 모양인지 그저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
다. 귀찮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이시연은 추림에게 생명의 은인같은 여자였다.
내색하면 은인을 무시하고 야박하게 구는 못된 인간이 되는 것이어서 추림은 참을만큼 참
아 주기로했다.
"내게 혈육은 언니 하나밖에 없어."
이시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추림은 잠자코 있었다.
"언니알지? 몽마르뜨 사장 말이야. 나랑 나이차이가 많이나. 열한살 차이나니까 무척 많은
셈이지. 원래 나와 언니사이에 두명의 형제가 더 있었어. 사고였지. 아버지도 엄마도 오빠
와 한명의 언니도 자동차 사고로 모두 죽었어. 큰언니는 없었고 당시에 나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어. 그게 한 이십년 되었나?"
가슴아픈 사연이다. 몽마르뜨 사장을 알고 있다. 자세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알고는 있
었다. 그렇게 나이가 많게 보이지 않았는데 듣고보니 생각보다 많다.
시연은 집안 내력을 이야기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한다.
하지만 강한 여자다. 자신의 아픔을 충분히 견딜 정도로 단련이 된 여자인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까 난 아직 철부지였어. 언니가 날 키웠어. 살기
위해 별짓을 다했지. 술집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오로지 나 하나를 잘 키우기 워해 희
생한거지. 내겐 엄마같아. 언니의 고통으로 얼룩진 땀과 피로 난 일류대학까지 졸업했고
사회에서 말하는 화이트 칼라쯤 되는 직장도 얻게 되었어."
도대체 무슨 말일까?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간추리면 안될까? 꼭 저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어야 할까?
내게 뭘 이해해 달라고 그러는 것일까?
"난 내가 어른이고 언니의 품에서 벗어난줄 알았거든. 헌데... 아니었어. 언니가 결혼한데
너무 웃긴 사실이었어. 언니가 늦은 나이에 결혼한다고 하면 축하해줘야 하는데... 난 그러
지 못했거든. 언니를 빼앗긴다는 생각도 들었고 혼자 남겨진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이제
난 혼자인거지. 언니의 보호를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거야. 나도 놀랐어. 내가 언니의 보호
아래 얼마나 커다란 힘을 빌려가며 살았는지 알게 되었어. 너무 놀랍고 충격이었어."
"그러니까. 언니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저 당연한 일로 여겼다가 이제 언니가 새로운 모습
으로 살아간다니까 갑자기 언니의 그늘이 얼마나 커다랗고 필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이거
지요? 혼자될것을 생각하니 두렵고 막막해지기도 하고 이제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어렵다 이겁니까?"
조금 답답해진 추림이 대충 시연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빠르게 정리해 버렸다.
이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말을 왜 하는줄 알아? 미친년 같은 짓거리임을 알면서도 하고 싶었어. 나 추림에
게 정식으로 프로포즈 하는거야!"
"......?"
추림은 입을 딱 벌리고 멍청해진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가 씨익 웃고 말았다.
프로포즈? 남녀가 배우자가 될 이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구체적인 정의!
그 프로포즈? 이거 웃기지도 않잖아? 무슨 농담을 저렇게... 너무한거 아니야?
"어려서 늘 혼자놀았어. 놀아줄 사람이 없었던거지 제법 잘 살았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시
고 무척 어려워졌지. 언니는 공부다 일이다 늘 바빴고 날 돌볼 여유가 없었어. 그러니 나
와 놀아줄 시간이나 있겠어? 다른 아이들처럼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다는것도 아니고...
자라면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무섭더라고 날 누가 욕하고 손가락질 하는것 같아서.
그래서 내게도 아빠나 오빠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했지. 꿈이었어. 크리스마스때가 되면
늘 소원을 비는게 똑같았어. 내게 힘쎈 남자한명만 곁에 있게 해달라고 말이지."
이해가 간다. 무언가가 없거나 부족한 이들이 바라는 공통적인 염원이다.
그것이 가족이라는 존재감을 필요로 느낄때는 더욱 집착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시연은
그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요? 그런 남자가 생겼어요?"
"아니... 아주 오랫동안 그런 남자를 만나려 햇는데 못만났어. 그러다가 만났어."
"그거 아주 다행이네요. 물론 힘도세고 강하겠지요? 람보처럼 싸움도 잘하고 근육도 멋지
고 그런 남자겠네요?"
추림이 장난을 섞어 표현하자 이시연의 눈빛이 반작거렸다. 강하게 힘을 준 눈으로 추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았지. 아주 강하다기 보다는 뭐랄까? 아주 에너지가 넘치는것 같았거든! 열정도 느겨
졌고 두려움을 모르는것 같았어. 칼을 든 덩치가 커다란 사내들과 홀로 싸우는데 난 숨이
멎는것 같았어.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굴강함이 있었고 눈빛은...
잘확인이 안됬지만 아마 활화산처럼 불탔을거야. 난 느꼈어. 저 남자구나라고! 어릴적부터
내가 원하고 동경하던 남자가 바로 저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거든."
"......!"
자신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추림의 미간이 좁혀지며 시연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장난하는것도 아닌것 같다. 너무 진지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고 있다. 정말일까?
"그가 누굽니까?"
마치 사무적인 투로 추림이 냉냉하게 물었다.
시연의 눈이 웃고있다. 이번엔 장난이다. 확실했다.
"추림씨. 아니 추림! 추림에게 날 조금만 알게 해줄 시간을 주면 안될까? 이게 너무 황당하
고 어처구니없는 짓이라는거 알아. 내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내 성격은 이래. 난 온통 투
쟁하면서 살았어. 부족한게 많고 없는것 투성이라서 남보다 서너배는 더 노력해야 했고 인
내해야 했거든. 지면 안된다는 강요를 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았어. 그러다 보니 성격
도 이렇게 변했어. 직전적인게 아니라 기회다 싶으면 놓치지 않는 뻔뻔함으로 말이지."
절대 안된다! 현재 주위에 있는 사람만으로도 감당하기 버겁다. 이 여자마저 주위에 있게
된다면... 어렵다. 어려워진다. 싫다. 제발 날 내버려 두라고.
"친구! 우정! 그외엔 불가! 이게 내 마음입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렇습니다. 지금 한 말씀 못들은 것으로 할께요."
"그래? 미래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현재는 친구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좋았어! 기회는 있
다는 거네. 더이상 바라지 않겠어. 대신 자주 찾아와도 되겠지?"
얼굴이 밝아진다.
낙척적이기 보다는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전형적으로 긍적적인 성향이 짙은 여자다.
성격은 좋다. 자신의 장단점을 알고있고 추진력이 무척이나 강하다. 개성도 있었다.
"좋아요. 하지만 엉뚱한 일을 벌인다면 모두 무효화 시키겠어요. 전 아직까지 당신을 모르
고 믿지 않으니까요."
"무효화 시킨다고?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는거야 지금? 엉뚱한 일은 때에따라서 달라지
겠지? 한번 두고볼 일이다."
여전히 방글거리며 웃는 이시연의 마음속에 도애체 뭐가 있는지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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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뒤, 선주가 다녀가고 조용한 때를 맞이하고 있었다.
출근을 시작했지만 일할수는 없었다. 정시에 출근해서 점심때까지 빈둥거리듯 하다가 돌
아오는것이 전부였다.
회사에서는 쉬라고 했지만 기를쓰고 나가기로했다.
오랜만에 산책하듯 시내를 걷다가 서점에 들러 몇가지 도서를 구입했다.
한동안 절룩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집 근처 아파트단지 공원에서 발견한 공중전화를 보고
여기저기다 전화를 했다.
시골집에다가도 했고 성규와 명숙씨에게도 전화를 했다.
그동안 정기적으로 연락되던 것이 끊겨 걱정들을 많이하고 있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여보세요? 석호구나!"
석호에게 전화를 하니 바로 받았다. 오랜만이라 반가웠다.
-누구 추림이냐? 너 이새끼! 어쩐일이야? 어디갔다가 이제 나타났어?-
"응 조금 바빴다. 어디좀 일이 있어서 다녀왔어."
반갑게 호들갑으로 전화받는 석호에게 조금 미안해진 마음이 들었다. 꼭 사실을 숨길 필
요는 없었지만 굳이 이야기 하지 않기로했다.
"잘 지내냐? 애들하고는 자주 만났고?"
-으응... 그렇지 뭐. 연락도 하고 만나기도 하고 그랬어. 너 연락이 안된다고 다들 걱정하
던데 정말 무슨일 있는거야?-
사실대로 이야기 할까? 아니다 지금 말하면 꼴만 우습게 된다. 친구끼리 별것도 아닌것을
숨긴 것이 되는 것이다. 안하는 것이 좋겠다.
"묻지마 임마! 형님이 바쁘다면 그런줄 알아야지 새끼가 계집처럼 말이 많아."
-씨발놈! 잘났다. 나중에 나안테 들켜서 뻥이면 너 죽는다! 어디냐?-
"응 집 근처야. 회사 일찍 끝나고 서점에 들렀다가 뭐좀 사고 시간나서 전화하는 중이다."
-추림아! 너 혹시 유미하고 통화해 보았냐?-
추림이 순간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여기서 그녀 이야기가 왜 나올까? 말하기 싫다는 생각
이 들었다. 유미... 지난번 한번 연락해보고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도 되었고 무작
정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만했다.
"아니. 연락해보지 않았다. 그건 왜 묻는데?"
-그냥. 야! 추림아. 나 너안테 할 말있다.-
듣고싶지 않은 생각이 든다. 불안하고 웬지 들으면 들으면 안될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머리속과 마음 한구석에서 거부하라고 맹렬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말해봐. 또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거야?"
-아니... 그게 말이다... 그게......-
뜸을 들인다. 이럴경우는 대개가 좋은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가슴이 거칠게 뒤기 시작했다. 어떤 예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에이 씨발! 되게 답답하네. 야! 이추림! 나 너안테 고백할 거 있어. 그냥 확 말하는 거니까
그냥 들어! 나 유미 좋아해!-
머리속이 아찔했다. 이거였나? 아니다. 결코 이것이 아니다. 기분이 붕 뜬듯 하지만 이 사
실에 이렇게 가슴이 뛰놀지는 않는다. 다른 뭔가 있다.
"으응... 그래? 좋아할수도 있지 뭐."
애써 한 말인데 너무 힘들게 흘러 나왔다.
-그리고... 우리 같이 잤어. 지난번에 만나서 그렇게 됐다야.-
우리같이잤어... 우리같이잤어...우리같이잤어...우리같이잤어......!
무슨말이지? 같이 잤다는게 무슨 말일까? 사람은 당연히 자는거잖아? 그런 말인가?
뭐지? 왜 가슴이 이렇게 쑤시고 칼로 도려내는것 같지? 왜 이러지?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
에 힘이 빠진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둡다. 왜... 이럴까? 지금이 저녁인가?
"......?"
-추림? 듣고있냐? 새끼가 놀랐냐? 헤헤. 뭐 진즉에 그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더구만.
앞으로 사겨 볼 생각인데 어떠냐 니 생각은?-
내 생각? 그건... 몰라! 모르겠어... 아무것도 떠오리지가 않아... 나 왜이러지? 주저앉고 싶
어. 쉬고싶어. 목마르고... 앞이 안보여!
"어어... 뭐... 니가 알아서 해야지. 난... 잘 모르겠다."
-그래? 나중에 같이 만나자. 나 지금 바쁘거든. 일해야 돼서 말이야. 내가 집으로 전화할께
잘 지내고 어디 아픈데는 없지?-
"으응... 그래 잘 지내. 수고...하고. 나중에 만나자."
전화가 끊어졌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부딪히고 지나친다.
바람아! 너는 아니? 나 지금... 울고싶다... 어디 울만한데 없을까?
멍하게 길을따라 걸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따리가 저려왔다. 절뚝거리며 조심스레 걸어야 하는데 다리의 고통도 잊은채 무작정 걸었
다. 암울한 거리... 죽어버린 도심... 서글프게 보이는 하늘......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파트와 거리를 경계짓는 높고 두꺼운 담벼락 밑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쭈르륵......!
눈물이 흘렀다. 가슴이 너무 아파와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았다.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
고 쥐어뜯어 보았다. 입술에서 피가 흘러 나왔다. 세차게 베어문 입술이 터지고 덩어리진
피가 뭉쳐서 흘러 내렸다.
"컥억... 컥컥... 커어억!"
아아아......!
힘들어... 죽고싶어... 가슴이... 가슴이 답답해! 아파 너무 아프다!
숨이 막혀온다. 컥컥 거리며 숨을 힘껏 내쉬려 했는데 안된다.
그랬구나! 유미... 네가 그랬구나!
말하지 내가 싫다고 말하지. 왜 말하지 않았어. 아니 싫다고 말하기 힘들면 내게 널 보이지
말지 왜! 왜! 왜! 도대체 왜? 뭐야? 그건 다 뭐였어?
퍽! 퍽! 퍽!
겨울동안 잠든 나무둥치를 주먹으로 계속해서 후려갈겼다.
주먹이 깨지고 피부가 벗겨져 버렸다. 피가 흘러도 추림은 멈추지 않았다.
퍽! 퍽! 퍽! 퍽!
"으아아아......!"
추림의 입에서 고통스런 고함이 터져 나왔다.
힘껏 지르고 또 질렀다. 눈에서 눈물이 쉴새없이 쏟아진다.
운다. 그가 울고있다.
당당하자! 순수하자! 정직하자! 옳바르자! 삿되지 말자! 믿음을 갖자! 약해지지 말자!
그런 그가 울고있었다. 자신의 일로 단 한번도 운적이 없는 남자가 운다!
비통하고 비감한 마음이 든다. 서럽고 슬프고 아프다.
사랑했다. 처음으로 진정 사랑했다.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했고 또 사랑하자 했다.
연락이 안되었지만 기다리자했다. 믿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올곧게 신뢰를 나눌것
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젠가 버젓한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 여겼다.
그런데... 넌 나를 외면하는구나... 왜 그랬니 왜! 하필 그놈이니? 왜 내 친구인거니 왜?
난 네게 결국 그런 남자였구나...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남자였구나!
눈물을 훔친 추림은 어둑해져오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미... 그녀의 얼굴이 멀리 구름사이에서 아른거리는듯 했다. 여전히 슬픈 표정을 지은 채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듯 했다. 그리웠다. 너무 그리워 미칠것 같았다.
사랑... 이렇게 끝인가......! 좌절하는 것인가... 난 여기서 멈추어야 하는가!
"후후훗!"
하늘을 바라보던 추림의 입에서 툴툴거리는 웃음이 흘러 나왔다.
"... 그래. 알았어 유미씨. 대신 정말 행복했으면 싶어. 늘 웃어야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 우는것 보다 웃는게 이왕이면 낳잖아? 고개... 고개를 늘 힘껏 들고 상대를 바로 보는
거야. 해봐! 노력하면 될거야. 이거... 하나만 기억해 줄래? 어딘가 널 아주 그리워하고 기
억하는 한 남자가 있다는거 그걸... 기억해 줄래? 나... 아주 오래된 것 같아. 널 알게된게
아주 오래된것 같아. 하지만 더 오래 기억할건데... 그래도 되는거지? 웃어... 그게 보기가
좋잖아. 웃어... 웃어... 미안해...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독백이 느리게 오래도록 이어져 나왔다.
서점에서 구입한 책들이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손에서 여전히 피는 흐르고 눈물은 천천히 흘렀다.
"하늘에선 비익조가 되게 하시고 땅에서 연리지가 되게 하소서... 하늘과 땅은 유구해도
그 끝이 있건만! 이 한은 끊어질 날이 없구나!"
재천원작 비익조!
재지연위 연리지!
천장지구 유시진!
차한면면 수절기!
문득, 추림의 입에서 허무한 시가 읇조려졌다.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였다. 당대의 시성 백거이의 장한가였
다. 그 장한가의 일부를 중얼거린 추림이 다시 웃었다.
"후훗!"
툴툴거린 추림의 몸이 비틀거렸다.
너무 많은 심력을 소모했다. 기운이 없었다. 생이 소멸해가듯 추림의 몸은 빠르게 지쳐가
고 있었다.
무엇으로 마음을 잡을까? 이렇게 힘든것이구나! 이럴줄 알았으면 사랑하지 않는건데...
신이시여!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저십니까! 그녀를 사랑하게 하셨으면 다 갖을 수 있도록 하
실 것이지 왜 이런 얄꿎은 운명을 부여하신 겁니까! 당신을... 원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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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전화벨이 수십번도 더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조용한 집안은 온통 암울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냉장고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것만이 유일하게 현실을 반영하
고 있을 뿐이었다.
십수개의 소주병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닥에 몸을 세우처럼 웅크린 추림은 눈을 반개한 채
멍하니 흐려진 촛점으로 어두운 방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가 째질듯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추림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곧 다시 가라앉았고 의미없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뚜르르르......
전화가 또 걸려왔다.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지만 추림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듯했다.
채각... 채각... 채각......
마음속으로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수천번도 더 세었다.
백 단위전에 엉크러지고 말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세고 잊어먹으면 다시 시작하는 것을 반
복했다.
이런적이 없었다. 결단코 이렇게 무기력하게 쓰러진적이 없었다.
처음 서울에 왔을때 무척이나 어렵고 거친 환경에 맞딱드리고서도 절대 지치거나 포기하
지 않았었다.
폭력과 굶주림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목숨이 위협받던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무엇보다 힘들었고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웠다. 유미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희망을 갉아 먹었고 생을 무참히 짏밟았다.
그녀가 자신을 외면하고 다른이와 함께했던 순간이 기억되어서 미칠것만 같았다.
자신이 이렇게 옹졸했던가!
그녀는 결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그건... 어쩌면 실수일수도 있고 강압일수도 있다.
그녀는 여자였다. 힘앞에 초라한 존재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어쩔수 없었을지도 모
른다. 하지만 왜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것인지 통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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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며칠이 지났지만 시간의 흐름을 잊어먹어 버렸다.
수염이 거칠게 자라고 몸이 곳곳이 가려웠다. 그러나 철저히 망각에 빠져버린 추림은 서서
히 자신을 죽여가고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멀건 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술만 쏟아넣은 위장이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대준이 찾아와 호통을 치고 간 기억이 가물거렸다.
기운이 없었다. 문득, 선주가 그리워졌다. 그녀만은 자신을 사랑해줄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고 이기적인 생각이 들었다.
"으허허허......"
신음과 함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너무 초라하고 바보스럽다. 이제 그만 잊어도 되는데... 그럴수록 기억
은 강해지고 마음은 괴물처럼 변해갔다.
전화코드를 뽑아버려 더이상 씨끄러운 전화벨을 듣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좋다.
소란스럽거나 갑작스런 소음에 자주 놀라곤했다.
나 왜 이러지? 이게 나인가?
나뒹굴던 술병이 다섯으로 줄어있었다. 어제 대준이 찾아와 청소를 하고갔지만 추림은 기
계처럼 술을 탐했고 의지하고 있었다.
남은 술들을 혀로 핧아가며 마시고 병을 내던졌다.
벽에 등을 기댄 추림의 눈에서 다시 투명한 눈물이 새어 나왔다.
힘들다... 뭐가 이리 힘들까.
이제 그만 쉬어버릴까? 사실 그동안 무척 피곤했잖아.
영호자식... 그렇게 가버리고... 성규녀석 잘할 수 있겠지. 명숙씨 한 이십년쯤만 부지런히
살면 좋겠어... 선주 너에겐 굉장히 미안하다... 모두 잘할수 있을까?
엄마... 보고싶다! 엄마나 보러갈까? 많이 늙으셨는데... 아버지... 건강하셔야 하는데... 걱
정이든다... 병이라도 있으신건가?
누구안테 돈을 빌려 주었는데... 누구였더라? 얼마나... 모르겠어 기억나지 않아.
추림의 눈이 스르르 감기고 벽에 기댄 채 잠이 들어 버렸다.
무척 초췌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추림이 잠에 빠진지 이십분이 지났을 무렵,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욱! 냄새!"
이대준이었다.
"들어오세요. 정말 엉망인데 이해하세요. 이새끼 이거 완전 폐인이 되어버렸어요."
이대준이 뒤에다 대고 말했다. 그런데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은 뜻밖에도 김수연이었다.
"세상에! 추림아......!"
김수연은 목에두른 목도리를 풀며 들어오다가 추림을 발견하고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추림이 퇴원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시 연락이 두절되자 지난번 처럼 조른 수연이 운좋게 이
대준과 통화하고 그녀가 추림과 시골 친구라는 사실에 이대준이 혹시나 도움이 될까싶어
부른 것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수연이 방안을 둘러보고 추림을 자세히 확인하고 나서 너무 놀라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믿을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추림이라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수많은 친구들의 우상이었고 거목과도 같은 친구였다. 절대 쓰러지지 않을 부동의 존재였
고 흔들리지 않을 거벽이었다.
"일주일째 저러고 있어요. 미치겠어요! 말해도 안듣고 때려도 소용없고, 이유를 말해 말래
도 말해 주지도 않고 술만 찾아요. 운거 같은데?"
대준이 추림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다가 말하자 수연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곤 입술을 깨물어 격해지려는 마음을 억눌렀다.
이추림! 너 왜 이러고 있니?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니?
수연은 까칠하고 검게 변한 추림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희미하게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미세하게 느껴지는듯했다.
오른손에 엉성하게 둘둘말린 붕대가 지저분하게 검붉은 피에 물들어 있었다.
"저기... 혹시 유미인가 하는 여자 알아요?"
"예에? 유미요?"
대준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수연이 도리어 반문했다.
"몇번 그 이름을 불렀는데, 자면서 잠꼬대 비슷하게 중얼거리더라고요. 막 소리도 지르고
사람 맞아요? 여자지요? 이놈 여자때문에 이러는건가?"
수연은 그제서야 추림의 모습이 왜 이렇게 변해야 하는지 짐작이 갔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막연하게 뭔가 떠올랐다.
유미! 결국 그 친구 때문인가? 그런데 왜? 무엇때문에 이러는 걸까?
머리속으로 유미를 떠올리며 추림과 연관을 짓던 수연의 눈에 일기장으로 보이는 노트가
보였다.
"전 나가서 뭐좀 사와야겠어요. 식사 안하셨죠? 이놈 일어날때까지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요? 맥주도 한잔 할래요?"
"제가 할게요."
"아니요. 손님이잖아요. 그냥 계세요. 집이다하고 생각하시고."
"네 그럴게요. 죄송해요."
여긴 지난번에 들러 자고 간적이 있어 낮설지가 않은 곳이다. 추림의 형이라 자처하는 저
키 큰 남자는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93년 2월...
병원에서 퇴원했다.
아직 퇴원하면 안된다 의사가 말했지만 돈 낭비 시간 낭비 같아서 그냥 억지를 부렸다.
오늘은 그녀에게 전화하면 통화할 수 있을까?
그립다.
이유가 무언지 알수가 없다. 날 피하는 것일까?
하다못해 전화라도 할 수 있을텐데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아주 중대한
일이 생긴건지도 모른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이 겨울 무척 소중하고 아름답다 여겨지는데 부디 그 감정들이 산
산히 부서지지 않기를 바란다.
93년 2월...
이시연이라는 여자... 참 황당하고 놀라운 여자다.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훌륭히 자신의 길을 당당히 개척해나가고 있는 여자다!
오늘 무척 이상한 일을 겪었다.
이시연 그녀가 내게 반했다고 하며 프로포즈를 신청해 온것이다.
장난인 줄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란다. 난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너무 난감했지만 곧 냉
정히 그녀에게 대했다. 우정과 친구 그것이외엔 난 도저히 달리 맺을 수 없는 인연인가 싶
다.
오늘도 그녀에게 연락이 없다. 그녀... 도대체 무슨일이 있는 것일까?
그리움이 가슴에 못이 되도록 박히고 있다. 차라리 먼저 찾아가 볼까 싶지만 혹시 그녀가
그것을 싫어할까봐 참고 있다. 너무 힘들어진다. 내일은 연락이 되길 기대해본다!
93년 2월...
좌절감... 배신감... 슬프다.
오랜만에 무척 많이 울었다. 유미가 날 기만하고 속인걸까?
날 사랑한다 말한 그녀인데... 하필 석호와 같이 밤을 지새었을까?
석호... 내게 그런 말을 하지 말지... 가슴이 산산히 부서져 내리는것 같다.
너무 힘들어 쓰러져 버리고 싶다.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깊은 잠에 들고 싶다.
다시 눈물이 흐른다. 그토록 참아내던 이것이 왜 이토록 흔하게 쏟아져 내리는 걸까!
단 한번만이라도 그녀를 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것 같다.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려고 신은 그녀를 사랑하게 했나보다.
그녀를 잊기로 했다. 아니 혼자 마음속에서 사랑하기로했다.
그녀가 행복하고 웃기를 빌고 또 빌었다. 내 슬픔과 고통을 그녀에게 절대 보이지 않기로
했다.
유미씨... 행복하게 사는거예요? 아셨죠? 미안해요 진작 만났더라면 더 사랑해주고 웃게
만들어 드리는건데... 너무 미안해요 이만큼밖에 사랑해드리지 못해서...
웃어요... 그리고 가끔 절 기억해 주세요. 아주 조금만요. 전 늘 기억할거예요.
잘있어요... 유미씨!
일기장을 본 수연이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맺힌 수연은 일기장을 덮으며 비틀거렸다.
추림을 바라보며 수연은 웬지 모를 감정에 휩싸였다.
그가 유미를 사랑하고 있을 줄이야!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추림의 저런 모습이 더 싫었다.
추림은 저러면 안되는 친구다. 늘 웃어주고 힘차고 밝아야 하는 친구였다.
그가 힘들어 하고 방황하면 누가있어 그 자리를 대신 한단 말인가!
추림에게 다가간 수연은 추림의 머리를 쓸어오리며 입을 열었다.
"바보... 그냥 찾아가 보지... 너 이러면 나 슬퍼진다 추림아... 이러지마... 기운내라 응?"
수연의 나직한 음성이 방안 허공에 부서지고 추림은 깨어날 줄 몰랐다.
죽은듯이 잠든 추림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에 복잡한 감정들이 파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32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