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모님을 졸라 건강검진을 받았다. 무언가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게 분명한데, 건강검진의 결과는 너무나도 건강하다는 것이다. 역시 병원도 믿을 게 못 돼.
“지금까지 의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병에 걸린 게 분명해요.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요!”
이런 말을 했다가 부모님께 맞아 죽을 뻔 했다. 그나마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됐다는 말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걸지도(비록 여전히 못미더워하시지만. 아마 결과가 눈앞에 나올 때까지는 쭉 그러실 거다)……. 아, 희귀병에 걸려 죽어가는 딸내미를 그렇게 심하게 혼내시다니, 야박한 부모님…….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나면 그렇게 구박하지 말고 잘 대해줄걸 하는 후회를 하시겠지.
그런 와중에도 게임 제작 작업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도 회사에서 진행되는 제작 회의에 참석하는가 하면, 종종 승우와 따로 만나 의논을 했다. 사실 반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뭔가 굉장한 일이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차츰 구체화되어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 실체화되어가고 있는 캐릭터들!
죽어가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3
오늘은 아침부터 승우와 만나 스토리 수정 방향을 토론했다. 골치 아프면서도 나름 재미있기도 한 토론을 마치고, 승우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짧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승우가 나를 불러 세운다.
“잠깐만.”
그리고 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내 보인다.
“그게 뭐야?”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야.”
“뭐야? 나, 주는 거야? 그거 비싼 거잖아.”
“이번 일을 단발로 끝낼 게 아니라면 게임도 많이 해봐야지. 일 때문에 주는 거니까, 어울리지 않게 사양하지 마라. 설치할 줄 알아?”
기계치인 내가 알 리가 없다. 잠시 후 승우는 우리 집에 들어와 게임기를 설치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등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의 몸이란 저런 거구나…….’
널찍하고 기다란 등과 어깨, 소매를 걷어붙인 팔 근육의 움직임을 홀린 듯 바라보며, 나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남자의 어깨와 팔을 처음 보는 것처럼. 그것은 작은 움직임에도 역동적인 힘을 드러내 보이며,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어쩐지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질 정도로……. 그것은 술 취한 그 날 밤, 그의 입술에 끌렸던 것과 비슷한 충동이었다.
‘아, 심장이 또 미친 듯이 쿵쾅거리네. 이 이상한 기분은 또 뭐야? 이것도 병의 한 증세인가?’
다음 순간 승우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심장이 멎어 죽을 뻔 했다. 하마터면 방금 살인을 저지를 뻔 했다는 것을, 녀석은 알까? 예민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 그걸 눈치 챌 리 없다. 지금 내 표정을 보고도 응급요원을 부를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괜히 내 방을 두리번거리는 것만 봐도 녀석의 둔감함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설치는 다 끝났다. 그런데 집이 이게 뭐냐? 좀 치워 놓고 살아라.”
아니, 남의 집에 와서 웬 타박? 게임기 줬다고 생색내는 건가? 일 때문에 주는 거라며! 그게 생색낼 일이야?
“하긴, 네가 청소 한 번 하면 남아나는 물건이 없으니……그냥 대충 사는 게 낫기는 하겠다. 그런데 손님이 왔는데 어떻게 차나 과일 대접도 안하냐?”
이제 아예 자기 집인 양 냉장고를 뒤지는 승우. 아니, 저 녀석이 미쳤나? 신세 좀 졌다고 예쁘게 봐주려 했더니 아주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네?
“이런, 이것 봐. 너 밥은 해먹고 사는 거냐? 텅텅 빈 냉장고를 자리만 차지하게 왜 갖다 놓은 거야?”
“내가 너처럼 부르주아인 줄 알아? 이만하면 양호하지, 어디가 어때서! 괜히 남의 집에서 감 나와라 배 나와라 난리네.”
하지만 솔직히 집안이 정신없고, 냉장고가 빈곤한 건 사실이다. 어째서 나는 청소를 하면 할수록 어수선해지는 걸까? 그리고 음식을 먹는 건 좋지만, 그것이 내가 만든 음식일 때는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
“저기…….”
“큰 소리 뻥뻥 치다 왜 갑자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냐? 너 그럴 때 불안하더라. 왜?”
“말 나온 김에 나 밥 좀 해주라. 배고파…….”
사실 내가 만든 끔찍한 밥을 먹을 때마다 얼마나 승우가 해준 밥이 눈앞에 아른거렸던가! 이때가 기회라는 생각에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너도 참……손님한테 밥 해달라는 말이 나오니?”
녀석은 황당하다는 듯 투덜거린다. 그러면서도 냉장고를 뒤져 쓸 만한 재료를 찾고 있다. 그러고 보면 녀석도 은근히 음식을 해먹이며 뿌듯함을 느끼는 가정주부의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여자로 태어났으면 현모양처가 됐을지도……. 그래, 좋아. 기분 좋게 먹어주도록 하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어?
재료의 빈곤함에 비해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역시 음식이란 손맛이구나. 어째서 같은 재료로 만들어도 이렇게 다른 음식이 나오는 거지? 밥이 너무 꿀맛이다.
“그 동안 굶고 살았어? 밥그릇 구멍 나겠다. 좀 제대로 음식 준비 좀 해놓고 살지, 이게 뭐냐?”
“난 너 같은 주부 타입이 아니잖아.”
“뭐? 일껏 밥해 주니까 하는 소리하고는…….”
“정말 그리웠어.”
“뭐가?”
“뭐긴, 네가 해준 밥이지. 딴 게 뭐 있겠냐?”
“보자보자 하니 아주 날 식모로 생각하네.”
간만에 녀석의 얼굴에서 무뚝뚝함이 사라졌다. 반가움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멍멍이를 무릎에 앉힌 승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인다.
“네가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면 어떨까?”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무심하게, 승우가 말했다.
“뭐?”
“사실 우리 집……혼자 살기에 너무 넓잖아. 어차피 이렇게 자주 만나 일도 해야 하는데, 네가 방 빼서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생활비도 절약되고 훨씬 경제적이잖아. 이렇게 못 먹고 살 일도 없고 말이야.”
“말이라고 하냐? 아무리 내가 내놓은 자식이라고 해도, 너같이 시커먼 늑대 같아 보이는 녀석 집에 들어가 살겠다고 하면 우리 부모님 좋아하시겠다. 그리고……은혜랑 지섭 오빠 생각은 하지도 않냐?”
“그런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승우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게 서툴고 어색해 보이는 그의 표정은 처음 본 것 같다. 아, 또 괜히 기분 이상해지네.
“그리고 네가 같이 살기 쉬운 성격인 줄 알아? 뻑 하면 성질 버럭버럭 부리지, 잔소리 심하지……. 내가 워낙 성격이 좋으니까 도 닦는 기분으로 버텼던 거지.”
“누가 할 소리 하는 거냐? 잔소리하게 만든 게 누군데?”
결국 또 분위기는 서로 토닥토닥 말다툼하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래, 이렇게 다투는 쪽이 훨씬 마음이 편하지. 이럴 때는 가슴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는데…….
하지만 편안한 기분은 오래 가지 않는다. 잠시 후 식사를 끝마치고 승우가 돌아가자, 심장의 고통과 두근거림은 다른 때보다 더 심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칼로 저미는 것처럼 아프다.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아무 것도 잃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허전한 상실감은 또 뭘까?
아아, 건강한 몸 하나로 버텨온 이아영의 25년 인생. 이런 아픔은 처음이다. 도대체 병명도 알 수 없는 이 병에서 치유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4
“내 물건 중 뭐 갖고 싶은 거 있니?”
“와, 이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기 좋다. 이거 꽤 비싸다며? 왜? 달라면 줄 거야?”
친구의 죽음이 임박한 줄도 모르고 내 게임기를 탐내는 그녀. 이게 바로 내 가장 친한 친구라는 박경숙이다.
“나 죽으면 갖고 가라. 유언장에 써놓을게.”
“언제 죽을 건데? 이왕이면 게임기가 골동품 되기 전에 죽어라.”
이게 친구한테 할 말인가! 친구가 죽는다는데 위로는 못 할망정! 그러나 화를 내기도 이제 귀찮다.
“그래그래, 걱정마라. 나 죽을 날 멀지 않았으니…….”
“게임 시나리오 작가 된다고 신바람이더니, 또 왜 시답잖은 소리냐? 일이 뭐 잘못 됐어?”
“잘못 되긴.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그런데……나 아무래도 죽을병에 걸린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심장이 아무래도 이상해. 막 지끈지끈 저리기도 하고, 쿵 내려앉기도 하고,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병원에 가봤어?”
“응. 그런데 아무 이상이 없대. 아마 희귀병이라 의사들도 모르나봐.”
“어떨 때 아픈데?”
“그냥……얘기하는 중간에 아프기도 하고. 이상하게 얼굴을 보거나 생각만 해도 아프고…….”
“얼굴? 누구 얼굴?”
“그게…….”
가만히 기억을 떠올려 본다. 그 동안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따져 보니 승우와 연관될 때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
“바보야. 이건 병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련된 거잖아.”
경숙이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단정적으로 말한다. ‘자기가 의산가?’하는 삐딱한 생각을 하면서도 귀가 솔깃해진다.
“그 사람 때문이라고? 알레르기 같은 건가? 그 사람만 가까이하면 거부 반응이 생기는 거야?”
“신체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거라고.”
“정신적? 그럼 심장이 미친 거야?”
경숙이가 나를 한심한 듯 바라본다.
“그 동안 내가 널 참 과대평가했다. 이 정도로까지 바보인 줄은 몰랐거든. 이런 것도 설명해줘야 알아?”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도대체 뭔데! 돌려서 얘기하지 말고 딱 잘라 말해 봐!”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런 거잖아!”
뭐? 사랑? 경숙이야말로 미쳤나보다. 이런 게 사랑일 리 없잖아? 사랑이란 아름답고 따뜻한 건데. 이렇게 기분 나쁘게 아픈 게 아니라고! 더구나 내가 승우를?
“너도 참 느리다. 지섭 오빠랑 사귄 게 벌써 얼만데……이제 서야 사랑에 빠진 거야?”
“지섭 오빠 때문에 그런 게 아닌 걸! 사랑이라니……말도 안 돼!”
“뭐야? 지섭 오빠를 옆에 두고 다른 사람 때문에 그런다고? 진짜 미친 거 맞네.”
경숙이가 괜히 격분하며 혀를 찬다.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고, 너무나 부드럽고 편안한 지섭 오빠. 나한테는 지섭 오빠가 있는데, 내가 승우를 사랑하는 거라니……. 이건 정말 악담이 지나치잖아! 승우는 그저……이제 겨우 원수지간에서 벗어나 친구가 될까 말까한 사이라고. 더구나 녀석에게는 예쁜 은혜가 있고……. 으윽, 또 발작적인 심장의 통증이 시작된다. 분명 심장도 경숙이의 이상한 말에 분노하고 있는 거다.
“그럼 이 게임기 가져가면 안 되는 거야?”
들려오는 경숙이의 아쉬워하는 목소리. 정말 얘가 내 친구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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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괜히 들뜬 기분이 들어서 그런가...오늘 글 쓰기가 너무 힘들었네요^^;
이번 주는 6회를 연재하리라 생각했는데...아무래도 주말에는 글 올리기가 힘들 것 같아요.
더구나 이번 주는 크리스마스잖아요^^
내일이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여러분, 메리크리스마스~!!!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많이 받으시길 바래요~ㅋㅋㅋ
즐겁고 따뜻한 성탄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전 크리스마스 보내고, 월요일에 찾아 올께요^^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