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씨가 옴팡지게 춥더군요.
도장에서 땀흘리고 그대로 나왔다가
제대로 얼어죽을 뻔 했습니다.
손에는 아이스크림까지 들고 있었는데...
모두들 감기조심하시고
건강한 한해가 되시길...
=========================== 그래도 아이스크림 끝까지 다 먹었다 =====================
의사
- 눈 밑에 난 상처는 다소 통증이 있겠지만
아슬아슬 하게 뼈 위를 스친 정도라
한 2주면 가라앉을 겁니다.
딱 1cm 정도만 비껴 위치에 맞았으면
광대뼈에 구멍이 났을지도 모르겠군요...
본래 파출소에서 나오면
조용히 집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민아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득바득 병원에 가자고 떼를 쓰는 통에
난 예전에 손등을 꿰맸던 병원에 와서 치료를 받고 있다.
민아가 야간응급실 접수창고에서
내가 곧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통에
많이 민망하긴 했지만...
나를 위해 이렇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행복하고 고마웠다.
의사
- 그 외에.... 왼팔은 두 군데에 금이 가서
붓기가 빠지는 데로 깁스를 해야 할 겁니다.
오늘은 우선 반깁스를 하시고....
기억 - 음... 그건 집에 쓰던 게 있습니다만....
의사
- 허허, 그럼 그걸 쓰셔도 되고요.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오른쪽 손등인데
이거 참... 뭐라 말하기가 그렇군요.
반쯤 아물었던 상처가 뜯어지는 바람에
완전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봉합은 안 될 겁니다.
굳이 하려면 뜯긴 부분을 제거하고
다시 봉합해야 하는데....
그냥 자연치유 쪽이 나을 겁니다.
창구에서 드레싱 연고랑 붕대를 드릴 테니까
꾸준히 관리해 주세요.
특히 감염에 주의하시고...
기억 - 아.... 예.
의사 - 어깨랑 가슴 쪽엔 별 통증이 없나요?
기억 - 딱히 이렇다 할 건....
내 진료를 맡은 의사는 진찰을 하는 내내
=어이구 딱한 녀석= 이라고 말하는 듯 했지만
난 이정도면 곱게 끝난 거라 생각하며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부어오른 얼굴도, 금이 간 팔도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을 수 있는 상처다.
손등엔 어느 정도 흉터가 남을 수밖에 없겠지만
원래 없던 상처도 아니고...
무엇보다 파출소에서 무사히 나왔다는 게 어딘가?
어쩌면 망치를 휘두른 그 녀석에게
고마워해야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잠시 후 치료를 마치고
이곳저곳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치료실을 나서는 길.
밖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황급히 내게로 달려왔다.
민아 - 괜찮데? 괜찮아? 괜찮은 거야?
기억 - 응. 말했잖아. 별 거 아니라고....
민아 - 별 게 아니긴! 얼굴이 이지경이 됐는데..
기억 - 아아아아, 만지지는 마.... 건드리면 아파.
민아 - 미, 미안...
손수건 한 장을 꼬깃꼬깃 손에 쥔 채
힘없이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는 그녀의 모습에
난 괜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원산폭격을 하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께 전화를 했어야 하는데....
그래도 앞으로 전진만은 정말....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비교적 멀쩡한 오른팔로 어깨를 보듬어주자
그녀는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며 바짝 몸을 기대왔다.
민아 - ......
그녀는 내 심장소리를 더욱 가까이서 느끼려는 듯
가슴에 귀를 대며 눈을 감았다.
=꾸르르르륵....=
그 순간 내 뱃속에서 들려오는 위액의 파도소리.
가슴에 고개를 붙이고 있던 그녀는
그 살아있는 진동까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기억 - ..... 미안.
갑자기 내 자신이 몹시 혐오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다소 민망한 분위기 속에
우린 근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이미 저녁을 먹었다는 그녀의 말에
비빔밥 하나를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 사이
그녀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민아 - 왜 싸웠어?
기억 - ....그러게 말이야.
민아
- 그런 식으로 말하지 좀 마!
그러게 말이야, 뭐 어쩌다보니, 누가 아니래...
지금 남 이야기 하는 게 아니잖아!
갑자기 버럭 역정을 내는 그녀.
..... 그녀의 말이 맞다.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이 내게
=왜 그랬어?= 라고 물으면
그렇게 남의 일처럼 대답하게 되었다.
어차피 진지하게 생각해봐도
별 다른 이유가 없거나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민아 - 왜 싸웠냐니까.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재차 이유를 캐묻는 그녀.
그녀는 진지했다.
아마 나 자신보다 더.
기억 - ........ 미안.
그 때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한참 망설이던 난
그렇게 말을 마무리지어버렸다.
그냥 조용히 묻어두자...
아직 마음속에 남아있는 쓰린 감정의 잔흔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민아 - 하아......
내 대답 아닌 대답을 들은 그녀는
정말 막막하다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점원 - 비빔밥 나왔습니다.
뒤에서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던 점원이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
재빨리 그릇을 놓고 사라졌다.
묵묵히 숟가락을 들어 밥을 비비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누군가 노리고 시작한 일 같다는
음모론적인 직감이 자꾸만 들었다.
뭐 지금 상황에서 누구라고 해봤자
누구 밖에 없지만.....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다음 날.
나란히 수업이 끝난 나와 그녀는
함께 연습실을 찾았다.
기억 - 안녕하십니까.
부원들 - ........
기억 - 하. 하. 하.
처참한 내 몰골에 연습실 전체가 침묵해버리는
당황스러운 사태를 맞이해
어색한 웃음을 웃고 있을 때
연출이 제일 먼저 내게 물었다.
연출 - 너.... 민아랑 싸웠냐?
........
이 인간이 아직 술이 덜 깼나....
지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민아 - 풋..... 크흠, 큼.
조용한 분위기 속에 혼자 웃음을 터트린 게 민망했는지
헛기침을 삼키다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
난 슬쩍 웃음을 지으며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기억 - 아뇨, 어제 일이 좀.....
김씨 - 오옷!! 기억아!!
허씨 - 이야~ 설마 했는데 진짜 너였구나!
내가 사정을 설명하려는 찰나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김씨와 허씨가 내 말을 끊었다.
양쪽에서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서서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두 사람.
김씨 - 어제 버스에서 17대 1로 싸웠다면서?
허씨 - 그것도 흉기를 든 녀석들이랑....
김씨 - 총까지 들고 있었다던데.... 그건 아니지?
허씨 - 발차기 한방에 유리창 깨고 튕겨나가고 그랬다며?
김씨 - 어떻게 된 거야, 조폭이랑 붙은 거야?
이 사람들이 단체로 왜 이래....
현실을 직시하라고 현실을!!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 거야?
기억
- 남자 셋이랑 시비가 좀 붙었던 것뿐이야.
총은 무슨 얼어 죽을....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민아도 함께 있는 마당에
소문이 부풀려져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던 난
손을 휘휘 내저으며 김씨와 허씨의 공세를 일축했다.
그런 내 반응에 맥이 빠졌다는 듯
궁시렁 거리며 돌아서는 그들.
허씨
- 아..... 남자가 갑빠가 있지...
원래 이런 건 좀 뻥튀기를 해야 맛인데.
김씨
- 진짜 재미없는 놈이라니까...
말세야 말세, 에휴....
....... 아무래도 그들은
소문의 진상을 거의 알고 있으면서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띄워
내가 허풍을 떨게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자칫 말려들었으면
두고두고 놀림 당할 뻔 했다.....
기억 - ...... 그런데 그 이야기 어디서 들은 거야?
김씨
- 응? 몰랐냐? 소문 쫙 났어.
셔틀버스에서 싸움 났었다고...
허씨 - 애들이 사채 이자 얼마냐고 물었다가 싸웠다며.
민아 - .... 그래서 싸운 거였어?
기억 - 아.. 아냐, 그 말 때문에 싸운 거.....
허씨 - 어? 그럼 왜 싸운 건데?
점점 혼잡스러워지는 분위기에
보다 못한 연출이 끼어들었다.
연출
- 자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모두 자리에 앉아.
지금부터 다음 연극에 대해 설명하겠다.
사정상 공연까지 시간이 얼마 없어.
민아 - 예? 다음 연극이요?
갑작스러운 그의 발언에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장난 끼 어린 얼굴로 주변을 휘- 둘러보던 그는
박수를 두 번 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연출
- 다음 연극은.... 연극부 최초의 뮤지컬로
기억이가 주연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억 - 예? 그게 무슨....
연출 - 뮤지컬 제목은... 오페라의 유령.
.......... 지금 얼굴 한쪽이 묵사발 났다고 놀리는 건가.
부원들 - 푸핫핫핫!!
연출 - 자자, 모두 분장비를 아끼려면 서둘러야 한다고!
연출의 유머에 연습실엔 거듭 폭소가 터졌다.
비록 내 얘기긴 했지만
워낙 활기찬 분위기에 덩달아 웃음 짓고 있을 때
연습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안군
- 여어 무슨 일이 있기에 이렇게....
응? 기억이 너 얼굴이 왜 그러냐?
기억 - 하하..... 아.....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한껏 위로 솟아있던 입술 끝이
단계적으로 뚝뚝 떨어져
무표정으로 돌아서는 게 느껴졌다.
안군
- 어라, 왜 그런 얼굴로 보냐?
내가 뭐 잘못 물어봤나?
만약 어제 조그만 증거라도 잡았다면
지금 바로 주먹이 날아갔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억 - 어제 일이 좀 있어서요.
안군 - ..... 술 마시고 계단에서 구른 거야?
기억 - 아뇨, 그냥 시비가 좀 붙어서....
안군 - 흐음.... 뭐. 심각한 건 아니고?
기억 - 2주면 낫는답니다.
안군 - 음... 그래. 빠른 쾌유를 빈다.
기억 - 감사합니다.
지금 한 순간만....
대한민국이 법치국가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