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遺産)
어젯밤 늦게부터 내리기 시작한 겨울비는 아침이 되었어도 그칠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엄청난 피해를 몰고 왔던 폭설과 강추위가 어느새 따뜻한 날씨로 바뀌더니 오늘은 겨울비가 내리고 있어 어느새 봄이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으나 우편물을 배달하러 나갈 시간이 되었어도 비는 그치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지 계속해서 내리고 있어 비를 맞으며 우편물을 배달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저는 하는 수 없이 비옷을 챙겨 입고 언제나 저와 함께하는 빨간 오토바이와 함께 우체국 문을 나섭니다.
그리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우편물을 배달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오후 1시가 넘어섰는데 그때서야 내리던 비가 천천히 그치면서 간간이 구름 사이로 햇볕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겨울 가뭄 때문에 봄 감자를 파종하지 못했던 농민들이 이제 마음 놓고 봄 감자를 파종할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달려온 곳은 전남 보성 회천면 군농리 금강마을입니다. 저는 금강마을에서 소포 하나를 배달하려고 마을 뒤쪽에 있는 두 번째 집 대문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오토바이 적재함에서 약으로 보이는 소포 하나를 꺼내 들고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감님께서 얼른 방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비까지 오고 있는디 고생해 쌓네! 돈은 안줘도 된가?”하고 물으십니다. “아니? 무슨 돈을 말씀하시는데요?” “지난번에 다른 사람이 약을 갖다 주면서 돈을 달라고 그러데!” “택배 요금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요금은 소포 보내신 분이 이미 다 지불하셨어요.” “이~잉! 그런가? 고생했네!” 하시며 영감님께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래서 저는“어르신! 안녕히 계세요!”하고 영감님 댁 대문을 나와 해안도로가 길게 이어진 객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우연히 바라보았는데 그곳에는 저도 처음 보는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해안도로와 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에 넘실거리는 바닷물 대신 하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더니 건너편 서당리 은행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뒤 덮고는 바위산을 따라 하늘로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그 순간 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추면서 산에 서있는 나무들이 마치 황금색으로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빛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어느새 햇볕이 구름 사이로 숨어버리자
높은 산에 머물고 있던 안개들이 길게 띠 모양을 이루며 천천히 하늘로 빨려 올라가는 듯 올라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아~아~아!”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저의 등을 ‘툭!’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제 25~6세 정도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손에 우편물 서너 장을 들고 저에게 “아저씨! 앞으로는 이 우편물 저의 집으로 배달하지 마세요! 제가 이 우편물을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하는 겁니다. “아니? 제가 우편물 배달을 잘못했나요?”
“아니요! 잘못한 게 아니라 이 분은 저의 아버지인데 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우편물을 받아야 합니까? 그러니까 이제부터 이 분에게 우편물이 오면 모두 반송시켜주세요. 아시겠지요? 그리고 이것도 반송시켜주시고요!” 하며 저를 한번 쳐다보더니 손에 들고 있는 우편물을 저에게 넘겨주고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인상이 어떻게 생각하면 무엇인가 저에게 하소연하고 싶은 것 같은 인상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저에게 항의하고 싶은 것 같은 인상 같기도 하여
“참! 이상한 청년 다 봤네!”하며 청년이 저에게 넘겨준 우편물을 보았더니 그 우편물은 모두 신용보증회사에서 발송한 우편물이었습니다. “청년의 아버지가 신용보증회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무슨 사연이 있기에 청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도착된 우편물은 모두 반송시켜 달라고 하는 것일까?”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저는 다시 방금 전 소포가 도착되었던 영감님 댁으로 들어가 그 청년에 대하여 물었더니 영감님께서 자세히 그 청년에 대하여 설명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원래 그 집은 큰 부잣집이고 이웃 사람들과 나눠먹기를 좋아하는 인심 좋은 사람들이었어! 그런데 집안이 망하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 아버지가 무슨 장사를 한다고 객지로 나갔어! 농사만 지어도 편히 먹고 살만한 집안인데 어느 날 갑자기 장사를 한다고 하니까 마을 사람들 모두가‘부자가 더 무섭다!’고 한마디 씩 하였는데 어느 날부터 그 사람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한거야!”하시며 이야기를 해 주신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객지에 나가 장사를 하면서 처음에는 주 1~2회 정도 집으로 돌아오다 다음에는 2주에 한번 정도 그리고 다음에는 한달에 한번 정도로 집으로 귀가하는 날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 사람에게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네 신랑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하더라!”라는 소문이었는데 그 청년의 어머니는 “설마!”하는 마음으로 그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청년의 아버지가 귀가하셨는데 지금까지 한번도 휘두른 적이 없었던 폭력을 어머니에게 휘두른 후
다시 장사를 하러 간다며 집을 나가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야금야금 재산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처음 논이 팔려나가고 그 다음에는 밭이 팔려나가고 그런 식으로 재산은 줄어들고 그리고 아버지가 귀가하시면 그날은 그야말로 온 마을이 떠나가도록 살림 때려 부수고 어머니 구타하는 일이 갈수록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청년이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어머니께서 그만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말았다고 합니다. “신랑이라고 집에 들어오면 마구 때려 부수고 살림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망해가는 바람에 아마 화병에 죽었을거여!”그런데 어느 날 청년의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오셨는데 그때는 상당히 깊은 병에 걸려있는 상태였고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청년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청년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갑자기 집으로 날아온 빚 갚으라는 독촉장 그리고 압류라고 쓰인 빨간 딱지가 온 집안과 남은 재산에 도배하고 결국 모든 살림은 송두리째 빼앗기고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청년의 아버지가 어질러 놓은 빚이 청년을 괴롭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르신! 그럼 지금 그 청년이 살고 있는 집은 누구 집인가요?” “그 집? 그 집은 그 사람 처지가 하도 딱해서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모아서 살라고 마련해 준 집이여! 다행이 그 사람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많이 쌓았거든 그런 다음 돌아가셨어! 그러니 자네도 생각해 보소! 그 사람 재산이 있으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아버지가 다 망해먹고 돌아가셨는데 그러니까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여! 그 많은 논과 밭 그리고 재산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으니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는가?
그러니까 자네도 저런 일 겪지 않으려면 행여 바람피우려고 생각도 하지 말게! 알것제!” “알았어요. 어르신 그리고 저는 원래 바람피울 줄도 몰라요.” “이 사람아! 너무 장담하지 말어! 그라고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여! 그러니까 늘 조심해야 되는 것이여! 알았제?”하시는 영감님의 당부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며 저는 다음 마을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리고 한 순간의 잘못된 남자의 외도가 단란하고 행복하였던 한 가정을 얼마나 처참하게 파괴시키는가를 실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