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때 본 것을 마지막으로 두어달 만에 보는 희경의 어머니는 변함이 없었다. 나인의 방문에 소리 없이 맺힌 눈물을 집게 손가락으로 살짝 훔치는 것도, 희경의 방을 향하는 나인의 등을 오른손으로 가만히 두어번 쓰다듬는 행위도, 참고 있던 눈물을 희경의 방에 도착하자 왈칵 쏟아내는 것도 여전했다.
단지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요즘은 왜 방문이 뜸해지냐는 원망섞인 눈초리뿐. 병원을 왔다갔다 하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1주에서 2주로 그리고 한달로 이제는 두어달만에 한번씩 기념일이나 연휴때만 방문하게 된 나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민망했던지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질 못 한다.
나인이 창가에 있는 책상쪽으로 다가갔다. 작년부터 어머니는 희경의 방을 정리 할 것이라고 했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물건이 정리되고 없을테니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나인을 방안으로 밀었지만 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리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깨끗해지는 것 같다.
막강 섹쉬 최희경. 못난 둥이 정나인.
책상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칼로 새긴 글씨를 검지 손가락으로 따라 읽으며 나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희경은 친구라기 보다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워낙에 어릴때 부터 몸이 약해 남들 보다 작은 몸집이기도 했지만 20이 넘어서도 어린애 같은 코맹맹이 소리에 툭하면 토라지고, 울고, 이처럼 유치한 글귀로 나인을 놀려대며 재미있어한 까닭이다. 나인이 희경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기 위해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줄라치면 희경은 손뼉을 치며 깔깔 웃어댔었지.
"그래도 그렇지. 막강 섹쉬는 좀 심하지 않았냐?"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공기에 부딪혀 허공에 떨림을 만들어 냈다. 3년이다. 벌써 3년이나 지나버렸다. 아니 이제 3년 밖에 안 지났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살 줄 알았더니. 밥을 먹을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없어 그냥 그렇게 말라 죽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너무 빨리 희경의 생각에서 벗어나버렸다. 이래선 안되는 거다. 누구보다도 내가 이래선 안된다. 내가 죽였으니까. 나 같은 살인자가 이렇게 숨쉬고 길을 걸어선 안된다. 삼시 세끼 잘 먹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우연히 부딪힌 잘생긴 남자에게 얼굴도 붉히면서 새로 나온 립스틱을 바르는 일 따윈 해서는 안된다. 죽어 잿가루가 하늘에 뿌려진 너를 두고 내가 혹시 죽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하루를 보내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은 있어선 안된다.
나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참아 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주먹을 쥐어 봤다. 손바닥에 손톱이 아프게 파고 들었지만 통증은 손이 아니라 가슴에서 왔다. 심장이 너무 아팠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인이 그대로 주저 앉아 두 손을 얼굴을 감쌌다. 붉은색 립스틱이 손가락을 타고 구겨진 얼굴에 번져갔다. 조그맣게 들썩이던 어깨의 운동이 점차 커졌다. 터지는 울음을 참느라 끄윽거리는 소리가 연신 입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배신 하지 말랬잖아!"
죽기 전 희경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가슴을 후려쳤다. 머리가 빙빙 돌아가며 귀가 울렸다. 답답해진 가슴으로 숨을 쉴 수가 없어 주먹으로 가슴을 치지만 희경의 목소리는 나인을 놔주질 않는다.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천장이 빙빙 돌았다. 어지러운 머리 한가득 희경의 울음소리가 들어찼다. 이미 희경은 꿈에도 생각하기 싫은 기억 저편으로 나인을 내몰고 있었다.
처절하리 만치 춤을 추던 붉은 꽃. 눈을 멀게 할 정도로 비릿한 냄새를 풍기던 붉은 꽃잎들이 나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진 그것들은 나인의 발 앞에 생전의 모습 그대로 희경의 모습을 붉은 칠로 그려 놓는다. 이건 꿈이야. 하지만 손을 뻗자 부서진 희경의 몸이 한가득 들어온다. 웅성거리는 구경꾼들과 하얀 가운의 사람들. 비정상으로 온 몸이 휘어진 채 똑바로 나인을 바라보던 희경의 눈동자. 그대로 희경을 안았다. 원망섞인 희경의 눈동자를 피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커질수록 희경을 안은 나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웅얼거리는 입에 무언가가 들어와 비릿한 향을 내 뿜었다. 뜨거운 그것은 얼굴을 타고 흐르기도 했다. 닦을 수가 없었다. 입에 고인 핏물을 뱉어낼 수도 없었다. 어깨를 붙든 누군가의 손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촛점 잃은 눈은 나인을 지배해 희경을 안은 손을 풀려하지 않았다. 나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
머리카락이 뽑혀져 나갈 정도로 세차게 흔들었건만 영상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오오 맙소사. 희경아 제발 이제 그만해."
희경은 멈추지 않았다. 생기 잃은 나무처럼 늘어져 있던 그녀의 조각난 몸이 뱀 처럼 꾸물 거렸다. 그리고 고개 숙인 나인의 귀에 숨을 뱉었다. 그렇게 그녀는 나인의 몸 석 구석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있었다. 시린 숨에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해졌다. 오히려 안도가 된다. 난 벌 받는거다. 이렇게 댓가를 치루는 거다. 차라리 잘 된거야. 이렇게 같이 떨어지면 누구도 슬픈 사람이 없다. 원망 담긴 눈을 차마 감지 못 하고 하늘로 가는 것도, 혼자 남아 죄책감에 눈물 흘릴 일도 없는 거다.
그때 였다. 차가운 볼에 뜨거운 손이 닿은 건. 한 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나인을 향해 뚜껑 열린 판도라 상자가 내려온 것은 바로 그때 였다.
"나인아"
진후였다. 변함 없이 선한 얼굴로 진후가 나인의 볼에 감싸쥐고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3년 전 나인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빛나던 눈이었는데. 생기 없는 검은 눈이 거기에 있었다. 나인이 훅하고 숨을 강하게 물아 쉬었다. 영상이 희미해져가고, 붉은 꽃도 사라졌다. 그리고 원망하듯 자신을 쳐다보던 희경의 눈도 없어졌다. 뱀처럼 자신을 감아 돌던 희경의 몸도. 나인의 입이 움찔거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 하지만 덩어리가 목이 걸린 듯 쉽사리 뱉어내질 못한다.
"괜찮아."
사시나무 처럼 몸을 떠는 나인을 진후가 힘차게 끌어 안았다.
"나인아 괜찮아."
병든 새 마냥 나인이 진후의 품에 안겨 울음을 죽인다. 그의 가슴에서 들리는 심장소리와 다독이는 그의 손길에 떨리던 몸이 빠르게 안정을 되 찾아갔다. 힘이 빠진 눈꺼풀이 힘없이 내려 앉았다. 실로 오랫만에 느끼는 편안함에 소용돌이 치던 머릿 속이 정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인은 진후의 팔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나인아?"
"말도 안돼"
편안함을 느끼다니. 친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놓고, 그 자리에서 그리 행복 할 줄 알았니? 날카로운 희경의 비명소리가 가슴에 울려 나인을 갈갈이 찢어 놓았다.
"나인아!"
자신을 부르는 진후를 뒤로 하고 나인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닿은 맨 살이 돌에 찢겨 피가 흘러 나왔다. 격한 통증이 비단 발 뿐만 아니라 온 몸 구석 구석에서 퍼져왔다. 숨이 차올라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뛰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몸 자체가 감히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내 탓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난 벌 받아야해. 이렇게 멀쩡하게 있어선 안되는거야. 그의 가슴에 안겨 행복한 숨소리를 내선 안되는 거야! 차라리 죽어버려라. 이렇게 뛰다가 심장이 터져 죽어버려라! 그냥 이대로 죽어버려 정나인! 죽어버리라구!
그때였다. 정신없이 뛰어가던 나인이 갑자기 퍽 소리를 내며 뒤로 나뒹굴었다. 미처 앞에 있던 방해물을 보지 못 한 것이었다.
"이봐. 눈을 어디다 달고 있는거야!"
퉁명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바닥에 뒹군 나인의 머리위로 들려왔다. 하지만 나인은 얼굴을 들어 그 남자를 볼 생각도 일어나 흙으로 범벅이 된 옷을 털어 낼 생각도 안한다.
"이봐. 야!"
"아파요."
"뭐?"
"너무 아파요"
"야. 너 왜그래?"
"내가 지금 너무 아파요."
맙소사. 희경아 너 정말 죽은거니? 너 정말 죽은거야? 아파 나 심장이 너무 아파.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넘어져 다친 엉덩이가 아파. 아까 전에 다친 발이 아파. 하지만 제일 아픈건 쉴새 없이 조여오는 심장이야.
나인이 큰 소리로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