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반가워요.'
남자의 눈이 찬미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그건 그녀만의 착각일까?
하지만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투명한 햇살처럼 따스하게 미소짓는 남자에게 찬미는 왠지 대답해 줘야 할것만 같았다.
'나도 반가워요.'라고….
자신의 기억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눈앞의 남자는 처음보는 찬미에게 한없이 따뜻하고 애정어린 웃음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왜일까? 이 사람은 도대체 왜 나에게 이토록 눈부시게 웃어주는 것일까? 마치 모든것을 알고 있다는듯한 눈길로…. 조금의 거짓도 없이 너무도 정직한 표정으로…. 처음보는 당신의 미소를 내가 훔치고 싶어질 정도로…. 왜 나에게? 찬미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다. 대답을 들을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아무런 미동도 없이, 한마디의 대화도 없이 그저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는 그들의 등뒤로 들려오는 자신을 찾고있는 미경의 목소리에 의해 못박히듯 남자에게 박혀있던 여자의 시선이 그제서야 다른곳으로 옮겨갔다.
"찬미야!"
이제서야 왔는지 미경의 손엔 멀리서 보아도 묵직해 보이는 짐들이 양손 가득 들려있었다. 찬미는 자신의 친구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미경이 서있는 병원 로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 따뜻한 미소 만큼이나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들려왔다.
"당신을… 다시 만날수 있을까요?"
생각지도 못했던 남자의 물음에 찬미의 느린 걸음이 멈춰졌다. 그리고 아직도 얼굴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품을수 없는 태양처럼 맑아 보이는 이 남자에게 난 뭐라고 대답 해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 이 남자에게 난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일까?
영원처럼 긴 것 같은, 혹은 찰나처럼 짧은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찬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채 남자에게서 멀어져갔다. 찬미의 마음이 그럴수 없이 복잡했다.
"누구니? 아는 사람이야?"
혹여 성민이 보낸 사람이 아닌가 싶어 병실에 들어서자 마자 미경은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이제야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찬미였다. 그런 그녀를 또다시 흔들어 놓을까 싶어 미경은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이 아슬아슬 하기만 했다.
"모르는 사람이야, 내가 떨어뜨린 담요를 주워줬어. 그런데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찬미는 미경의 질문에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난또…. 너 병원밥 싫어 하잖아. 밑반찬좀 해가지고 왔어."
"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데 뭐하러 이런걸 해가지고 왔어…."
보자기를 풀어 맛깔스럽게 만들어온 반찬통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집어 넣고 있는 미경을 바라보며 찬미는 새삼스레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다시는 않볼것 처럼 그리도 냉정하게 내치더니 그래도 친구라고 살뜰하게 자신을 챙기는 미경의 모습에 찬미는 죄인처럼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다. 자신을 향한 애정이 담뿍 담긴 그녀의 착한 눈동자를 미안하고 죄스러워 차마 똑바로 마주 볼수도 없었다.
"됐네요, 아가씨! 많이 먹고 기운차릴 생각이나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듯 미경이 더욱 환하게 웃으며 냉장고에서 빨간 빛이 고운 사과 하나를 꺼내들고 찬미가 앉아있는 침대끝에 걸터 앉아 사각사각 깍아냈다.
"나 이번주에 퇴원해. 선생님이 그래도 된대."
들릴듯 말듯 작은 목소리로 얘기하는 찬미의 말에 사과를 깍던 미경의 동작이 딱 멈춰졌다. 그러나 금새 아무일 없다는듯 예쁘게 깍은 사과 하나를 집어 찬미에게 건네주며 지나가듯 무심하게 물었다.
"어디로 갈거니? 아파트로 들어 갈꺼야?"
"……."
찬미는 미경의 물음에 대답이 없었다.
어디로 가야하나…. 성민과의 추억이 곳곳에 베어있는 방배동 아파트로 돌아가 난 살수 있을까? 그의 기억을 지워내며 아무일 없다는듯 난 살아갈수 있을까? 그와의 이별을 예감했던… 그이의 얼음처럼 차가웠던 마지막 뒷모습을 보았던 그곳에서 난 견뎌낼수 있을까?
찬미는 저릿한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가슴에 자신의 작은손을 가져다 대며 벌써부터 눈물이 차올라 붉게 충혈된 눈을 힘겹게 감았다. 그렇게 감겨진 그녀의 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와의 추억에 눈뜨게 하고 있었다.
견뎌낼수 없이 아프고 지독하리 만큼 간절했던 그날의 기억을...
"자고가요."
찬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넥타이를 메고입는 성민의 뒤에서 그의 허리를 가는 팔로 감싸 안으며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미안한듯 그녀에게 내일오겠다 약속하며….
"안돼는거 알잖아. 내일 올께."
성민은 자신의 허리에 감겨있는 찬미의 팔을 풀어내며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의 상의를 집어들고 곧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때….
"사랑해요."
"!"
그녀의 말에 현관으로 향하던 성민의 걸음이 딱 멈춰 버렸다. 그리고 환청 같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한번 그의 귓속을 아니, 그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랑해요, 성민씨. 사랑해...."
구지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에 베어있는 가슴시린 그녀의 눈물이 느껴져 성민은 차마 찬미의 얼굴을 마주 바라볼수 없었다.
"미안해요… 사랑해서 미안해요… 내가 이러면 당신이 힘들다는거 아는데 한번쯤은 소리내어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그냥 들어 줘요."
사랑한다는 그녀의 고백에 그의 넓은 어깨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그런 성민의 등뒤에서 찬미는 이루어 질수 없는 간절한 소망 하나를 가슴에 품고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매일 내게서 등돌려 나가는 당신의 넓은 등에 대고 마음속으로 매일 같이 소리쳤어요.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거 뻔히 알면서도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현관문을 닫고 나가기전 당신이 나를 바라보며 사랑한다 말해 줄것 같아서 당신이 돌아가고 나서도 땅속깊이 뿌리내린 나무처럼 몇시간씩 문앞에 서있곤 했어요. 내게 염치없다 말하고 미쳤다 소리쳐도 좋아요.
당신 옆에 있을수만 있다면 평생을 그늘 속에 살아도 좋아. 당신 아내자리 탐내지 않을께요. 당신의 아이들에게 누가 된다면 나 아이도 안낳을께요. 그러니까 나… 성민씨 옆에 있게 해줘요. 제발 당신 여자로 살게 해줘요."
찬미는 자신의 눈동자를 뜨겁게 데우고 있는 눈물을 참고 또 참으며 한번도 소리내어 말하 지 못했던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힘겹게 털어 놓았다. 그러나….
딸깍!
찬미의 애닳은 고백에 그는 얼굴한번 보여주지 않은채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무엇을 기대 했을까? 그에게 대답을 듣고자 말한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끝임없이 밀려오는 서운함에 그녀는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을 떨구어 내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는 알고 있었는 지도 몰랐다. 그는 떠나고 자신은 남겨질 것이라는걸….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남자, 욕심내어서도 마음에 품어서도 않되는 사람, 하지만 아무리 닫아놓고 단속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소리없이 예고없이 그녀의 가슴은 성민에게 지배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와의 사랑을 남몰래 키워왔던 그곳에서 찬미는 첫번째 이별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떠나버린후 멈춰버린 시간, 생기 넘치게 뛰기를 거부하는 심장, 텅 비어버린 눈동자, 어느것 하나 살아숨쉬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찬미는 조금씩 조금씩 생명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조금은 멍한 눈빛으로 성민이 나가버린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찬미는 스스로에게 마법을 걸듯 그는 돌아올 것이라고, 태양처럼 따뜻한 웃음, 아름다운 얼굴에 가득 머금고 굳게 닫혀버린 저 문을 열고 그는 나에게 들아올 것이라고 찬미는 바라고 또 바랬다.
그녀의 애처로운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신 것일까?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적막한 방안을 한순간에 가득채웠다.
찬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를 찾은 사람은 성민이 아닌 그의 수행비서 강주석 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성민이 아니라는 허탈함? 혹은 안도감? 찬미 자신조차도 알수없는 그녀의 마음이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냐고….
찬미는 복잡한 자신의 심정을 애써 감추며 자신을 향해 깍듯하게 인사하는 강실장에게 얘기했다.
"들어오세요."
거실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말 없이 앉아있었다. 공기처럼 가라앉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것은 강실장 이었다.
"받으십시요."
며칠사이 몰라보게 헬쓱해진 찬미의 모습에 한참을 망설이던 강실장은 미리 준비해온 통장을 그녀에게 어렵게 내밀었다.
"……."
'이게 내 사랑에 대한 당신의 대답인가요?' 찬미는 자꾸만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추스르며 원망가득한 눈동자로 강실장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말은 없었나요?"
찬미의 물음에 강실장의 얼굴에 안타까운 연민의 빛이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사장님 성격… 누구보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강실장은 착찹한 심정을 애써 감추며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강실장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끝어질듯 끝어질듯 애처롭게 이어지는 찬미의 목소리가 돌아서려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티포투… 내일저녁 일곱시에요."
"……?"
무슨 말일까? 강실장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수 없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읽어냈는지 찬미가 다시한번 입을 열었다.
"마지막 이라고… 오실때까지 기다린다 전해주세요."
찬미의 말에 알겠다는듯 그녀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이내 그녀의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카페에서 찬미는 그와 두번째 이별을 했다.
"찬미야?"
걱정스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미경의 목소리에 찬미의 눈동자가 그제서야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디로 갈거냐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바다…. 바다가 보고싶어…."
그래, 당신을 닮은 바다를 보러 갈꺼야. 사납게 파도치는 시리도록 차갑고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러갈꺼야.
그리고….
그곳에서 당신과 마지막 이별을 할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