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라디오를 듣기 시작한 것은 12살, 그러니까 국민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아무래도 TV볼 때보단 방에서 라디오 듣는 것이 엄마 잔소리가 덜하더라구요.
처음 들었던 프로그램은 고소영의 FM 데이트였습니다.
고소영씨의 진행에 대해서는 별로 기억나는 것은 없고,
단지 하나 기억나는 에피소드라면,
한참 심은하씨가 마지막 승부의 다슬이로 인기를 얻고 있을 때 이런 루머가 돌았었습니다.
심은하씨가 고소영씨의 FM 데이트에 출연했을 때 생방송 중에 전화연결을 했는데
전화연결을 했던 청취자가 '근데 왜 우리 언니 때렸어요?'라고 심은하씨에게 말해서
심은하씨와 고소영씨가 당황했다더라 하는 루머.
인터넷도 없던 시절임에도 제가 어떻게 그 루머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파다했던 그 루머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심은하씨와 고소영씨가
'우리 프로그램에는 청취자와 전화통화하는게 없는데 말이죠, 오호호호' 하며 웃던게 생각납니다.
고소영씨가 그만두고 박소현씨가 FM 데이트를 맡았을 때부터
저는 본격적으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으로라봤자 저는 일찍 자고 일찍 자는 착한 어린이였으므로 12시엔가 끝나던
김현철의 골든 디스크까지 듣고 말았지만 딱히 오락거리도 부족하던 때였으므로
어쨌든 매일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들었던거 같습니다.
박소현씨 하면 생각나는 것은 4대 왕자병 특집.
당시 공주병과 왕자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었는데
몇몇 싱어송라이터들이 자신들이 왕자병이라는 것을 자처하면서
어느날 4대 왕자병 특집이란 것을 하게 된 것입니다.
4대 왕자병 환자들은 다름 아닌 이 사람들.
박소현의 FM데이트의 바로 뒷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김현철
활동을 잘 안해서인지 독사진 하나 찾기 힘든 유영석
(가장 오른쪽 사람이에요.)
당시 어린 왕자라는 별명과 나름 얼짱다운 외모로 그나마 왕자같은 이승환
한놈만 튀는게 싫어서 객원을 쓴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장호일
(병의 경중순이 아닌 가나다순임을 밝혀둡니다.)
면면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들이 왜 왕자가 아니라 왕자병인지 알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도 내가 왜 잘났나 배틀을 하기도 했던 그들.
고소영씨가 한때 DJ를 했던 것도 놀랍지만 지금은 나름 무게잡는 그들이
함께 라디오에서 노닥거렸다는 것도 놀랍지 않나요?
90년대 초중반의 라디오는 그랬었습니다.
아이돌이 아닌 싱어 송 라이터들이 라디오에 나와서 고정출연하며 웃겨주던 그 시절.
중학교 때는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통해 좋은 음악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Suede의 Beautiful Ones를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통해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충격이란...이 외에도 지금까지 자주 듣는 밴드와 뮤지션의 음악들은 거의
신해철의 음악도시를 통해 소개받은 것들입니다.)
음악도시를 들을 때의 에피소드라면 역시 DJ가 신해철씨에서 유희열씨로 바뀐거랄까요.
라디오를 듣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가장 절망적인 일 중 하나가
매일매일 함께하고 정들었던 DJ가 바뀌는 것입니다.
음악도시도 신해철씨에서 유희열씨로 바뀌었었는데요,
나중에 유희열씨는 그 때 당시 DJ가 바뀐 것으로 항의하던 청취자들 때문에
정말 죽고 싶었다 라고 표현하기까지 했었죠.
지금은 인기 DJ인 유희열씨를 생각하면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네요.
부끄럽습니다만 그 때의 그 수많은 협박편지를 쓴 사람들 중에 하나가 저였습니다.
유희열씨, 그 땐 정말 미안했어요. 신해철 시장님과 너무 정이 드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는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으며 지루한 야간 자율학습을 버텨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3 때인가 림프 비즈킷의 신보가 나왔을 때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엽서를 보내면 림프 비즈킷 관련 상품을 주던 이벤트를 했었는데
야자 시간에 선생님 몰래 엽서에 기껏 그래피티까지 다 그려서 보내놨더니
사서함 번호를 잘 못 적어 보내서 낭패를 봤던 적도 있었습니다.
엽서도 엽서지만 그때의 림프 비즈킷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얼마 전에 이승환씨가 하는 공연에 갔더니 오랫만에 정석원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015B의 노래를 함께 따라부르며 추억에 젖었었더랬습니다.
그 외에도 김원준씨와 이승환씨가 함께 김원준씨의 히트곡
'쇼'를 부르는 것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사실, 김원준씨는 안티에 가까웠는데 추억이라는게 그런가 봅니다.
이제는 라디오를 들으려고 틀어놓아도 집중을 못하지만
저에게도 새벽에 이불 뒤집어 쓰고 라디오를 열심히 듣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라디오를 들었고, 지금 듣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