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시작되다
“아니...형~~~ 내가 언제 이런 얘기 한 적 있냐고... 그러니까 하는 말이지... 어...그래...진짜 왜 그래? 이러다가는 내가 제 명에 살 수가 없단 말이야... 어쨌든 이 일을 벌인 것은 형이 장본인 아니야? 형도 어느 정도 책임의식을 가지고 신중하게 생각 해봐...응... 그래..”
평소 같으면 이런 휴일 늦잠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리 없는 시원이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자신의 방문을 꼭 닫고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그 통화 대상자는 강실장...
최근 2년 동안은 김매니저가 장시원을 담당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시원의 데뷔부터 함께 해 온 이가 강실장이다. 그래서인지 시원은 강실장에게는 친형처럼 언제나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는 법이 없이 솔직했다.
강실장이 몇 년을 겪어 온 바람둥이 시원이 한 여자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강실장 역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 당황스러움을 앞서는 것이 있었으니 사악한 마음 즉, 시원을 약 올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니.. 천하에 무서울 것 없던 강시원이 이게 무슨 얘기야? 그리고 나야 지극히 정상적인 연애를 해서 결혼한 사람인데, 나에게 무슨 노하우가 있다고 나한테 이래?”
“진짜.. 형.. 정말 이럴꺼야?”
시원의 목소리가 부탁에서 협박으로, 협박에서 다시 애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쿵~~
시원이 강실장과 통화를 끝내고 나오는 방문 소리에 놀라 꾸벅꾸벅 졸던 홍이가 머리를 테이블에 찧는다.
“야.. 졸리면 그냥 푹 자.”
연신 하품을 참지 못하면서 눈을 부비며 잠을 쫓는 홍이가 안쓰러워 시원이 한마디 한다.
“나, 헬스클럽 간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시원이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이야기한다.
“음.. 그래.. 나는 커피나 한잔 더 마셔야겠다. 계속 커피만 들이켰더니 아휴~~속쓰려.. 시원아! 오는 길에 우유 하나만 사다줘.”
“넌 커피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보약 들이키듯 매일 마셔 대냐?”
평소에도 유독 커피를 많이 마시는 홍이다. 평소에도 속 쓰리다는 이야기를 습관처럼 하면서도 항상 홍이의 손에는 커피가 들려있다.
“알았어... 알았어.., 장시원 너는 별로 나이도 먹지도 않아서 이렇게 잔소리야? 암튼 까먹지나 말구 사와. 참 그리고, 꼭 저지방 우유로 사와!”
[편의점]
헬스클럽에서 한 시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요즘 들어 홍이가 옆에 없으면 무슨 일이든 재미가 없어진다. 평소에 시간만 나면 찾았던 헬스클럽이었지만, 오랜만에 들려서도 내내 시계만 바라보다 우유를 사오라는 홍이의 한마디에 계속 신경이 쓰여 운동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전에 없이 서둘러 나가는 시원이 이상했는지 담당 트레이너의 눈빛이 무엇인가 시원에게 계속 질문을 담고 있었지만,모른척 하고는 결국 홍이의 부탁한 일에 대한 중요성을 절감하며 편의점 냉장고 앞이다.
그리고는 편의점 냉장고 앞에 동상처럼 몇 분인가를 서있다.
‘Low Fat.... Low Fat...’
우유의 종류도 많고, 용량도 제각각이다.
도대체 무엇을 사가야 하는 것인지...
시원의 집 근처 편의점 직원은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 TV를 통해 보아 왔던 [스타 장시원]이 맞는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장시원이 근처에 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살아 있는 장시원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우연히 들린 편의점에서 시원을 만난 여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핸드폰 카메라로 시원을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변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몇 분간 꼼짝 않고 냉장고 앞에 서서 고민하고 있는 시원이다.
드디어 시원이 고민 끝에 고른 우유를 한손에 들고, 좋아진 기분에 주변 사람들에게 장시원답지 않은 친절로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함께 찍어주는 팬 서비스까지 한다.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딩동...]
계속되는 초인종 소리에도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
자신의 손으로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니 갑자기 집안에 홍이가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선뜻 문을 열지 못하는 시원이다.
문을 열고도 한참을 망설이며 집 안으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홍이랑 함께 지낸 지 이제 한 달 남짓이다. 그런데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너무나 익숙하다. 술 취한 후배 녀석들이 와서 잠시 자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던 시원이 변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홍이는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따뜻한 봄 햇살을 받으며 잠들어 있었다. 그 눈부신 햇살에 홍이가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에 시원은 넋을 놓고 홍이를 바라봤다.
꽤 깊이 잠이 들었는지, 그가 들어오는 것도 눈치 내지 못하는 홍이다.
따뜻한 햇살이 홍이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잠이 들어 홍조가 든 뺨,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 표정이 모두 담겨있던 눈도 살포시 잠으로 내려 앉아 있다.
아기같은 그녀의 숨소리에 시원이 그 달콤함을 이기지 못하고 홍이에게로 다가갔다.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본다.
“꿀꺽..”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부드러운 홍이의 볼이 주는 따뜻함에 그의 손에 닿자 시원은 홍이가 주는 설레임과 긴장감이 그의 주위를 맴돈다.
홍이의 이름만큼이나 빨간 홍이...
그 참을 수 없는 달콤함이 시원을 계속 시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래.. 딱 한번이야. 진짜... 딱 한번만...’
시원이 조심스럽게 홍이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십 오년이나 걸린 입맞춤이었다.
“야...진홍... 다음에는 이런 모습 나한테 보이지 마라. 다음에는 진짜 참을 수 없을지도 몰라...”
짧은 도둑 입맞춤 뒤 그의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리고는 괜히 무안했던지 자고 있는 홍이를 흔들어 깨운다.
“야~~~ 야~~~ 진홍!!! 일어나.. 여자애가 누가 업어 가면 어쩌려구 틈만 나면 자냐? 자긴? 아님 차라리 편하게 방에 들어가서 자던지...”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부스스한 얼굴로 시원을 바라보는 홍이다.
“자.. 여기 우유..”
머리를 긁적이며 시원이 봉지에 든 우유를 건넸다.
[고칼슘 우유]...
“야~~~ 장시원.. 너 글씨 못 읽지? 내가 저지방 우유 사오랬지, 누가 고칼슘 우유로 사오랬어?”
“뺄 살이 어디 있다고 저지방 우유야? 삐쩍 말라가지고... 너가 무슨 이팔청춘도 아니고 몸매 관리할 일이 있어? 너처럼 이제 나이든 여자들은 살 뺄 걱정보다는 골다공증을 걱정해야 한다구..”
사갖고 오라는 저지방 우유가 아닌 고칼슘 우유를 잘못 사들고 온 주제에 잘도 핑계를 둘러대는 시원이 어이없다는 듯이 홍이가 바라본다.
시원은 혹시라도 사온 우유를 바꿔오라고 할까봐 홍이 손에 쥐어 줬던 우유를 빼앗아 컵에 한잔 가득 따라서 건넸다.
얼마나 고민하며 홍이를 위해 처음 골라 온 우유이던가?
처음에는 홍이가 사오라던 저지방 우유를 사려했지만, 뺄 살도 없는 홍이에게 고칼슘 우유가 더 잘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몇 번을 고르고 고른 우유이다.
홍이는 이런 시원의 행동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피식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시원이 건넨 우유를 시원하게 들이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