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그도 양반이었다. 양반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들은 항상 박식하고 기품있고 정의로우며
너그럽게 행동해야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양반일경우다. 나같은 길바닥에 널부러진
소똥보다도 못한것에는 제외되는것이다. 방금전만해도 그렇다. 그저 '고맙다'라는 말한마디만 하면
될것을 상대가 노비이기에 그말을 하지 못하는것이다. 양반체면이라는 명분하에...
원하는것을 들어주겠다니... 그들은 이것을 아래것들에게 배풀수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했겠지.........하긴 나같은 노비한테 후사한다는것만해도 어디인가...훗!'
생각에 잠겨 걷는동안 어느덧 집에 도착해버린 향단은 춘향이에게가 몽룡이 남긴말을 전했다.
"그래? 정말 도련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네."
사실 춘향은 서신을 쓰면서도 이건 도박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었다. 분명 거절당할꺼지만
혹시나하는 희망에 보낸것이었는데 예상외로 그가 승락을 했다.
'이분은 뭔가 다른분이다. 내꿈을 이루어줄 그분일수도 있어'
춘향의 얼굴에서 미소가 비췄다.
"수고했어. 어서가 쉬어."
춘향이에게 인사를 하고 마당을 지나가는데 진주댁이 부른다.
"향단아, 너 밥 부엌에 남겨놨으니까 챙겨 먹어."
부엌으로가 밥을 한숟가락 떠서 입에 넣고 나머지 한손으론 피곤한 다리를 주무린다.
'오늘하루는 정말 길었네... 사실 아까는 그렇게 화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동시에 몽룡의 당황했던 표정이 떠오른다.
'그는 그럴 권리가 있는데... 그는 양반이고... 나는 노비니까...'
같은시각 몽룡은 서책을 읽으려 했다. 그런데 자꾸 아까 향단이와 있었던 일때문에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몇번이고 같은곳을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아까의 향단이의 행동을 몽룡은 이해할수 없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을 하고자했을뿐인데 내가 무슨 기분 나쁜말을 한것인가?
아니.. 그런말은 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그는 엉뚱한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다.
'춘향이 얼굴 한번 보려고 했는데 서신 교환이라니...'
이상하게 얽켜버린 관계때문에 신경쓰인 몽룡은 책을 덮어버리고 내친김에 서신을 쓰기로 작정하고
종이와 붓을 꺼내들었다.
막상 붓을 들었지만 무슨말을 써야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을쓸까 고민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한편을 적었다.
일을 끝내고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펴고 있는데 진주댁이 누런 먼지가 묻은 치마를 툭툭 털며
들어온다.
"뭐가 묻은거에요?"
"응 아까 장독 닦다가 흙이 묻었는가보다. 근데 너 그얘기 들었니?"
"무슨.."
"아랫마을에 홍진사댁에 마님 얘기말야."
"오늘 이것저것 한다고 누굴 만날틈이 없었어요..무슨일 있었어요?"
"아니 그댁에 대감마님 죽은지 한 5년 됐잖아. 근데 수절중이던 안방마님이 어제 그만 그집 하인하고
눈이 맞아서 도망갔대."
"네? 세상에... 남 부러울것 없는 마님이 왜 그랬대요? 하인이랑..."
진주댁은 아직 어린 향단은 잘 모른다는듯 혀를 쯧쯧 찬다.
"이것아~ 여자한텐 부귀영화는 다 필요없어. 자고로 하체 튼튼한 남자가 옆에 딱 붙어있어야 하는겨~
너는 아직 어려서 뭘 몰라~"
진주댁의 말이 웃겨 향단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 아줌마가 좀 가르쳐 줘요. 하체 튼튼한 남자에 대해..호호"
"요것이~"
"하하하하"
그렇게 향단과 몽룡과 춘향의 밤은 깊어갔다.
향단은 물동이를 이고 우물로 향했다. 마을 아낙들 몇몇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좀 모이는 곳이면 양반이든 상놈이든 상관없이 모두 닷세전 하인과 도망쳤다는
홍진사댁마님 얘기뿐이다.
"아 글쎄 둘이 한 이불을 덥고 자고 있더래."
"아이고 망칙해라.. 세상에 그댁 마님은 어쩐대~ 하인이야 죽은 목숨이고."
"잡혔어요?"
아낙들의 말을 들으니 그러한거 같아 확인차 향단은 물어보았다.
"그래~ 요 위 성황당에 숨어 있었대. 좀 더 멀리 도망칠것이지..쯧"
"조용히 말해 이 여편네야~ 누가 들으면 어쩔려고 그래?"
말실수를 했던 아낙은 그제서야 주위를 두리번거린후 아무도 없다는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쉰다.
"내입이 방정이야~"
"그댁 마님과 하인은 어떻게 되는거에요?"
"글쎄 아마도 하인놈은 관아에서 매맞아 죽을것이고 산다해도 그게 산목숨이겠어? 마님은 아마
소박 맞아 친정으로 쫒겨나겠지..."
"그런게 어딧어요? 같이 도망간건데..."
"원래 그런것이야. 양반과 상놈이 괜히 있겠니?"
반상의 법도에 따라 양반과 상놈은 하늘과 땅차이다. 그 둘사이의 연애라는건 꿈도 꿀수없는 일...
그래서 그 금기를 어긴 댓가또한 참혹하다. 향단은 어릴적부터 아니 어미 뱃속부터 알고있던 것이었지
만 이해할수없는 마음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곧 자신이 괜한 생각해봤자 별수 없다고
생각한 향단은 고개를 좌우로 몇번 흔들고는 그생각은 잊어버리려고 했지만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대로 물을 퍼 물동이에 가득 담고는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했다.
동이에 담긴 물은 향단의 마음속에 혼란처럼 넘칠듯 말듯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향단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향단아"
"어? 마당쇠야"
"오랜만이네. 요즘 니댁 아씨는 그네 안뛰신다냐? 그네를 안뛰시니 니 얼굴 보기가 더 힘드네 하하하"
"그래? 참 너두..근데 무슨 용건이라도 있니?"
"아니 니가 오랜만에 뵈서 불러본거야. 다음에 또 보드라고."
향단은 마당쇠를 만나면 괜히 부끄러워진다. 마당쇠가 향단에게 품고있는 맘이 숨김없이 그대로
다 느껴지니 향단이 또한 부끄러워져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마당쇠에 헤어지고 다시 몇걸음 걸었을때 또 향단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마당쇠야 왜 자꾸 부르고 그래~"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서있는사람은 마당쇠가 아닌 몽룡이다.
깜짝 놀란 향단은 인사를 한다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와 동시에 동이에 있던 물이 몽룡에게 쏟아진다.
"쏴~아"
"어머나~ 이를 어째요... 도련님 죄송해요.. 죄송해요..."
몽룡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향단을 보고는 피식 웃음이 난다.
갑작스런 물세례에 피한다고 뒷걸음쳤지만 도포의 앞쪽이 다 젖어버렸다. 하지만 몽룡의 표정은
그리 나쁜기색이 아니다.
"어쩐다 이꼴로 숙부님댁에 갈수도 없고.."
향단은 온몸이 빨개져 몸둘바를 몰라하며 젖은 옷을 손으로 짜고 있다.
"어디 가시던 길이셨어요?"
"그래 아버님 심부름으로 숙부님댁에 가는 길이다."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던 향단이 말을 꺼낸다.
"도련님 그럼 옷을 벗어주시면 제가 말려오겠습니다."
"윗옷을 벗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그것이 이 옆에 빈집이 있어요. 집주인이 얼마전 집안일로 전주에 갔거든요. 거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얼른 말려서 올테니"
몽룡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에 있는다는게 내키진 않지만 별다른 수도 없어 무례함을 무릅쓰고
그러기로 하였다.
방에 들어가 몽룡은 윗옷을 향단이에게 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저때문에 약속에 늦으시는건 아닌지 걱정이옵니다."
옷을 건내받고는 미안한 맘에 향단이 말을 꺼냈다.
"괜찮다. 그리 바쁜일도 아니고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 서두르지 않아도 돼."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