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따뜻하다.
누군가에게 기대어 운다는 건… 이런거구나.. 이렇게 좋은거구나.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에겐 너무 낯선 경험이기에… 소리내어 큰 소리로 울지도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커다란 손으로 등을 토닥여주는 이 남자..
만날 때마다 화를 돋구고.. 위협하며.. 억지만 부리는 사람인데.. 오늘은 왜 이다지도 따스한지…
언제까지고 이 품에 기대어 있고픈 욕심이 들게 한다.
"저.. 이제 좀 괜찮아 진거 같아요. 죄송해요. 옷이.. 젖어 버렸네요.."
"쿡.. 그런걸 걱정할 정신이 다 있고… 확실히 괜찮아 지긴 했나보군."
"…………."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시겠소?"
"아뇨."
너무 금방 대답이 나와 버렸다.
그 후에 이어질 그의 물음이 두려워서…
오늘은 그냥… 지금의 이기분… 그대로… 아무 생각없이 잠들어 버리고 싶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니, 따뜻한 게 들어가면 좀 나아질거요."
혼자 결론 짓고… 어깨에 부드럽게 팔을 두르며 차로 이끈다.
"싫어요! 마시고 싶지 않아요!"
"마셔야만 해!"
"왜요!! 당신의 궁금증을 위해서?!! 내게서 무슨말을 듣고 싶은 건가요?? 난.. 난!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생각하고 싶지 않다구요!!"
"그래서…? 그래서 속으로 꼭꼭 감추시겠다? 생각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되나? 잊혀질 것 같나? 두고 두고 괴롭히지 않을것 같나?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뭐든.. 속으로 삭이고 감추면 병이 되는거요. 문득 문득 생각나... 홀로 기억속에 묻혀.. 괴로워하게 만든단 말이오!!"
"그건… 경험담 인가요?"
너무도 절절히 말하는 그로인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해두지."
흔들리는 눈빛이 너무도 순식간에 스쳐서… 잘못 본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잊혀질 것 같지가 않다.
그를… 믿어 보기로 했다.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종합 운동장 근처의 한적한 공원이었다.
잠시 기다리란 말만 남긴채… 그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후… 양손에 종이컵을 들고 나타난 그는 컵 하나를 입에물고 차문을 열며 들어섰다.
그순간… 밥그릇을 들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가 왜 생각나는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돌렸다.
"자. 코코아요."
"풉. 고마워요."
"거 봐요. 이렇게 바람을 쐬니까 한결 기분이 좋아졌잖소. 그런데… 그 얼굴로 웃으니까.. 좀.. 괴기스러
운데..?"
"뭐라구요?"
"흡! 노려보는건 더 하군.."
"이..!"
"왜..? 또 해삼. 멍게. 말미잘이라 하려고?"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남자… 원래 이렇게 유쾌한 사람이었나…?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고.. 기분 좋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여태.. 회사에 있었소?"
"네."
"누구.. 하민이랑..?"
"… 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남자.. 다 알고 묻는다.
다 알고서… 확인하려 묻는다.
"하민이가… 그러니까… 당신을… 어떻게.. 아니. 이렇게 만든거요?"
갑자기… 예고도 없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소리 없이 떨어지던 눈물은.. 어느새 흐느낌으로.. 그리고 울부짖음으로 변해버리고…
"그래요.. 그래요!! 팀장님이.. 난.. 너무 무서웠어요. 무섭고 겁났어요. 너무 싫은데!! 벗어나고
싶은데.. 내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게 너무 끔찍했어요. 그자식은.. 그자식은!! 개자식이에요!!
오!! 이제 전 어쩌죠? 어떻하면 좋아요. 이제 다신 그를 보고 싶지 않아요. 끔찍해요. 그럼 어쩌죠?
제 일은요? 우리 엄마는요?! 전 이제 어떻해요…흑흑..으윽.."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뱉어버렸다.
"쉬~ 울지말아요. 아니. 차라리 이렇게 속시원히 울어버려요. 고이지 않게… 더 울어버려요.."
머리를 쓸어 주며 위로하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더 크게 울어버렸다.
"저.. 지금.. 너무 챙피해요. 아까에 이어 더 크게 꼴사나워 진거 같아요."
"아니. 그렇지 않소."
"아뇨. 잘 알지도 못하는 당신 앞에서.. 이러면 안되는건데… 우리.. 좋은 사이는 아니잖아요. 아까는
제가.. 어떻게 됐었나봐요."
"그렇다고 나쁜 사이도 아니잖소. 그리고 이러도록 내가 유도한거고… "
"저 좀.. 집에 데려다 주세요. 눕고 싶어요."
"…그러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깐 졸고 있는 그녀를 훔쳐 보았다.
이렇듯 약한 여자를… 여린 여자를…
제길!!! 개자식!!! 가만 안두겠어..
자신이 이토록 흥분하는 이유를… 이가 갈리고 치가 떨리게 분노하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품에 안았을 때.. 무슨 일인지.. 어렴풋이 느낄수 있었지만… 애써 외면 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눈 앞에 있는 나무라도 뽑아들고 하민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힘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쥐고 참아야했다.
어렸을 적..아끼던 장난감을 동네 형들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던 분노.. 죽기살기로 덤벼서… 장남감이
부서지더라도 되찾아 왔던 독점욕…
그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준 이 상황은… 내 마음의 진실을 깨닫게 했다.
한란아는 어느새 내 가슴속에.. 내 여자.. 라고 새겨져 버린것이다.
그런 그녀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준.. 하민이 녀석을 어찌 할 것인지… 지금으로선 자신조차 알 수 없다.
"내일은,, 아니 오늘은 출근 하지 말고 푹 자요. 알겠소?"
극구 사양하는 그녀를.. 7층 문 앞까지 데려다 주며 물었다.
대답이 없던 그녀는 또 한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 선다.
상처 입은 그녀를 보듬어 안고 치유해 주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제 내 마음을 안 이상.. 그냥 둘 수 없다. 허나... 참아야 한다. 지금은…
그녀의 마음이 안정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예후는 책상 위에 놓여진 결재 서류들을 둘러보며 싸인을 해 나간다.
오늘은 무척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아.. 집에 가자마자 옷을 갈아 입고 회사로 출근 했었다.
이제 막 마지막 서류에 싸인을 하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네. 여보세요?"
"사장님! 지금 어디십니까..? 댁에 와보니 안계시던데.."
성하다.
"아. 김비서. 나 지금 회사에 나와 있는데 이제 곧 나가봐야 할것 같네. 내 방에 와서 내가 싸인한 서류좀 검토해 주겠나? 다시 확인할 겨를이 없어서 그러네."
"사장님.. 제가 어떻게.. "
"김성하! 너도 곧잘 하던 일이잖아. ..부탁한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말이 없던 성하는…
"형. 부탁이라면.. 대신 이번 한번만이에요. 형 요새 좀 이상하신거 알아요? 철두철미한 정예후 사장의
이력에 오점을 남기진 않았으면 해요."
"피식. 알았다 임마."
"어떻게 오셨습니까?"
"김하민 팀장 자리에 있습니까?"
"아..네.. 지금 자리에 계신데요.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인터폰을 누르려는 여직원을 지나치며 말했다.
"그럴 거 없소. 잘 아는 사이니까 그냥 들어가겠소."
"아! 잠깐만요! 그러시면 안…"
따라오며 재잘거리는 그녀보다 한발 먼저 노크를 한 후.. 문을 열었다.
"저기.. 팀장님. 이분이 글쎄…"
하민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 이름이 밝혀져 봐야 좋을거
하나 없다.
또 소문만 무성하게 퍼져 나갈 뿐이다.
"괜찮아요. 나가보세요."
"네."
곁눈질로 힐끔 거리며 그녀는 나갔고…
"웬일이야 형? 우선 앉아. 차 뭐할래?"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 앞의 쇼파를 가리키며 말한다.
머리속에 어제 밤... 쇼파에서 있었을 영상이 스치듯 지나가고.. 구역질이 밀려 온다.
뻔뻔한 자식…
"됐다. 그나저나 이 방.. 방음은 잘 돼있냐?"
"뭐??"
퍼ㅡ억!!!
드르륵~!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그대로 쇼파에 주저앉아 뒤로 저만치 밀려난다.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흔드는 녀석의 멱살을 그대로 움켜쥐고 일으켜 세웠다.
"네 녀석이 왜 맞는지는 알고 있겠지?"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한번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윽.."
쓰러지려던 녀석의 배에 한번 두번 세번의 주먹을 찔러 넣었다.
"쿨럭.. 왜.. 왜..쿨럭.."
"이자식!!! 몰라서 물어??"
"으… 왜 그러는 거야.."
배를 잡고 엎드린 녀석의 입에선.. 기막힌 대답이 흘러 나온다.
양 손으로 멱살을 잡고 일으켜.. 얼굴을 맞대고 으르렁 거렸다.
"이 개자식아! 너 란아한테 무슨짓을 한거야! 무슨 짓을 한거냐고!! 그런다고 니 여자가 되는줄 알아?!!
한번 취했다고 니 여자가 되는 줄 아냐고!! 이 쓰레기 만도 못한 자식!! 죽여버릴거야!!!"
무릎을 들어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큭!!!"
쓰러지던 녀석은 내 다리에 매달린다.
"형.. 형.. 큭!! 잠깐.. 잠깐.. 내말 좀 들어봐.."
아침부터 찾아온 예후 형의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무표정한 얼굴 뒤로 잔뜩 화가 난 모습이다.
설마… 어제 밤 일을…?
아니다.. 알 리가 없다.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아무 사이도 아니라 하지 않았는가…?
열에 들떠 그녀를 탐할 때에도.. 그 말만은 똑똑히 들었다.
욱!! 제길.. 정말.. 아프다.
아무래도.. 뼈가 부러졌나보다. 아니면 금이라도 갔거나…
언제나 강했던 형이 부러웠고... 같이 다니면 자랑스러웠었다.
그런데.. 그 주먹이 나를 향하리라곤..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렇게 아픈 거였군…윽..
형도… 란아씨를 진심으로 좋아하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정신이 확 들게하는 말을 들었다.
.. 한번 취했다 해서…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다면.. 형은 지금… 내가 그녀를 가졌다고 생각하는거다.
이것이.. 이것이 마지막 기회 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완전히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쓰러지면서.. 형의 발에 매달렸다.
"형.. 형.. 큭!! 잠깐.. 잠깐.. 내말 좀 들어봐.."
"놔! 이 자식아!! 아직 멀었어!!"
"잠깐.. 형.. 나 정말로 란아씨 사랑해. 그 마음만은 진심이야. 어제는.. 정말… 어떻게 됐었나봐..
나를 봐주지 않는 란아씨 때문에.. 잠시 미쳤었나봐.. 하지만.. 정말 그녀를 사랑해. 정말 죽을 만큼
사랑해. 나도 내가 그런짓을 했다는게 믿기지 않아.. 내 자신을 저주해.. 죽여버리고 싶어..
헌데.. 어떻해.. 사랑이 나를 눈멀게 하는데.. 그 여자밖에 안보이는데.. 어떻해.. 나.. 나좀 이해 해줘.
형 이러는거 예은이 때문인거 알아.. 예은이한테 상처주고 형 믿음 배신한거 정말.. 정말.. 미안해.
그치만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녀만 보이고 쫓게돼.. 그런데 어떻하냐고.. 나.. 용서 안해도 좋아.
그래도 그녀를 포기 할 순 없어.. 이왕 이렇게 된거.. 내가 그녀를 책임져야해. 그녀.. 내가 처음이었어..
형.. 나 용서해.. 제발.. 이렇게 빌께.."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형을 올려다 보았다.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내려다본다.
형.. 미안.. 정말 미안해.. 모두.. 다 미안해.
하지만.. 내 사랑 포기 못하겠어..
이렇게라도 잡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