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도 어느덧 지나가고
이제 다시 악몽이 시작되려 하네요.
남은 희망은 5월 5일 어린이날이 금요일이라는 것.
4일만 눈 딱 감고 참아 보렵니다.
========================== 화이팅 ========================
공연이 끝난 무대엔
공허한 바람만 휑하니 스치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 있었던 화려한 축제가
허망한 봄날의 꿈인 듯
기진맥진한 몸을 아무 곳에나 뉘이며
각자의 마음을 추스르는 사람들.
박군 - .......아...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죠.
김양 - 그러게 연습 때 좀 더 열심히 하라니까....
박군
- 에휴....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누나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아무래도 설득력이 부족하네요.
김양 - 메야?
별 다른 의미 없는 대화들....
서로의 아쉬움을 어떻게든 달래려는 나름의 자기 위안.
난 대기실 한쪽에 눕다시피 기대 앉아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기억 - .........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게
용하다고 할 정도의 나른함...
딱히 어느 곳도 보고 있지 않은 흐릿한 시야엔
방금 전까지 내 앞에서 절규하던
선희-민아의 모습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부르르르.....=
갑자기 찾아온 냉기에 몸이 떨렸다.
몸 안에 꿈틀대던 격정적인 감정들이
급속히 흩어지며 찾아오는 리바운드....
활활 타오르던 감정의 벽난로엔
어느덧 검회색 잿더미만이 남아
주홍빛 불씨를 스실스실 사그라뜨리고 있었다.
기억 - .......
그렇게 연습실 한쪽에서 풍화되어 가고 있는 내 팔에
낯익은 온기가 전해져 왔다.
민아 - ...... 잘했어.
이제는 선희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
언제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나의 그녀가 옆에 앉아 있었다.
기억 - 아....... 아하하.
그녀에겐 참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 그걸 모두 늘어놓을 여력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단 한번,
그녀에게 입 맞출 수 있었을 뿐....
저녁 무렵, 뒤풀이는 뜨거웠다.
티켓판매가 없었던 탓에 메뉴는 부실했지만
간만의 공연에 들뜬 사람들의 기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연출 -연극부의 무궁한 영광과 발전을 위하여!!
회계 - 건배!!
연출
- ........캬아아아!
어차피 내 인생에 토요일은 없었어!
금요일에 술 마시고 눈 뜨면 일요일이야!
자, 다들 나와 함께 달리자!!
-오오오오!
아무래도 1차에서 몇 명 정도 보내 버리는 게
회비를 아끼는 길이라 생각했는지
연출과 회계의 알콜로드는 평소보다 더욱 가속되어 있었다.
연출
- 자자, 우리 MT 때 추억을 되살릴 겸
게임 한 번 어때?
회계 - 오! 그거 좋지 브라더!
그 속도를 티 안 나게 올리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게임.
3·6·9, 타이타닉, 고백점프를 비롯한
벌주 먹이기 게임은
사람들을 급속히 알콜의 수렁에 빠트렸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회계와 연출의 암수에 걸린 첫 번째 희생자는 민아였다.
민아 - 에헤헤헤..... 또 걸렸네.
기억 - 그, 그만 마셔~.
민아
- 에헤이!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
기억 - 아이고... 죄는 또 무슨 놈의 죄야!
결국.....
술자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 만취상태인 그녀를 부축해서 술집을 나서야 했다.
그녀는 더 마실 수 있다고 극구 버텼지만
이 이상 술자리가 계속되면
내가 제대로 그녀를 바래다 줄 자신이 없었다.
잠시 후 전철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올라가던 중 그녀가 나를 불렀다.
민아 - 파하.... 기억아.
기억 - 응.
민아 - 업어죠....
기억 - ......... 응. 업혀.
비록 취중일망정
그녀가 내게 이런 부탁을 해주는 건 반가운 일이었다.
그동안 사이가 많이 가까워졌다곤 해도
그녀가 내게 뭔가를 부탁하거나 보채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억 - 하나 둘, 어차....
술을 좀 마시긴 했어도 그닥 취하진 않은 듯
난 일전보다 가뿐하게 그녀를 업을 수 있었다.
민아 - ........ 무거워?
기억 - 아니, 가벼워.
민아 - 다행이다......
조금 긴장한 듯 내 어깨자락을 잡고 있던 그녀는
내 대답을 듣고야 안심이 됐는지
두 팔을 느슨하게 내려 목을 감싸며 머리를 기대왔다.
사락- 하고 미끄러져 내려와
귓가를 간질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기분 같아선 손을 올려 한 번 쓸어 넘기고 싶었지만
그 촉감이 마냥 싫지는 않았기에 그냥 계속 가기로 했다.
민아
-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느릿한 걸음으로 오르막을 오르는 길.
그녀가 속삭이듯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녀의 평소 생활과
마냥 무관하진 않은 듯한 노래 가사...
민아
- 나 홀로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그럴 땐 이야기를 나누자~ 거울속의 나하고....
술기운에 나른하게 늘어진 목소리로 부르는 캔디는
만화 주제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서글픈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난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기억 - 공주님, 도착했사옵니다.
민아 - .......
기억 - ........공주님?
노래를 다 부르고 잠들어 버린 건지
내 부름에 그녀는 아무 응답도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기억 - 아, 맞다. 한나는 집에 있겠구나.
캔디 주제가에 몰입한 탓에
조금 늦게 한나의 존재를 기억해낸 난
그렇게 중얼거리며 초인종을 누르려 했다.
민아 - ...한나 없어.
하지만 초인종을 향해 손을 뻗기가 무섭게
돌아오는 민아의 대답.
민아
- 오늘 밤에 신입생 환영회 있댔어.....
내일 아침에나 올 거야.
기억 - 아.....그래? 그럼 저기.... 다 왔으니까 내릴래?
민아 - .... 싫어.
기억 - 그럼?
민아 - ...... 몰라.
기억 - ........ 이대로 좀 더 있을까?
민아 - ... 응.
아직 전철이 끊기기까지는 시간이 좀 있다.
근처에 한두 바퀴 돌고 나면
민아도 술이 좀 깰 거고....
그 때 되서 들여보내도 늦진 않을 거다.
그렇게 그녀를 업은 채 집 근처를 빙빙 도는 동안
머릿속엔 그녀가 부르던 캔디 주제가가 떠나지 않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속으로 가사를 따라 부르는 사이
입안에 점점 강하게 느껴지는 쓴 맛.
그건 그녀에 대한 연민과 더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쁜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한 질책이었다.
곧 막차시간이 다가왔다.
기억 - ...... 이제 들어가야지.
민아 - 싫어....... 싫다구.....
기억 - ...... 나도 집에 가야지. 좀 있으면 전철도 끊기는데.
민아 - ....그럼 방까지 데려다 줘.
그것이 현재 수용할 수 있는
최선의 합의점이라 생각한 난
그녀가 열어준 대문을 지나 방으로 향했다.
민아 - ...... 미워.
기억 - ....... 미안.
어두운 복도에 불을 밝히며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녀는 책망하듯 내 귀에 속삭였다.
차라리 나도 이것저것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취했으면
아무렇게나 엎어져 잘 테니 별 문제가 없겠지만 (아마도)
그녀 혼자 만취상태에 빠진 이상
맨정신으로 그녀 옆에 있는 건 지나치게 위험하다.
짐승이다 늑대다 말을 해도 그게 남자다.
그녀가 섭섭해 하더라도
지금은 자리를 떠나는 게 맞다.
아무리 취했어도 약속은 약속인지
내가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자
민아는 얌전히 손을 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민아
- 삐질 거야. 반드시 삐질 거야.
내일이 되도 절대 안 까먹어....
그 와중에도 그녀는 나에 대한 원망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지만
지금의 섭섭함은 내일의 고마움이 될 거다.
...... 적어도 내 생각엔.
기억 - 코트는 벗고 자야지.
민아 - ...... 응.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코트와 양말을 벗겨
방 한 쪽에 치워둔 난
책상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앉았다.
막차 시간까지 앞으로 10분.....
5분 정도만 더 있다가 나가자.
민아 - ....... 손잡아줘.
기억 - 응.
그동안 계속 업혀 있었던 탓인지
벌써부터 잠기운이 솔솔 풍겨오는 그녀의 목소리.
그녀는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는 듯
작은 손가락을 부지런히 꼼지락거리며
내 손을 고쳐 잡았지만
그 힘은 1초 1초가 다르게 약해져
난 곧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이제 가자. 그렇게 결심했던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긴 했지만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살짝 키스라도?
본래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지금 키스 정도는 별 문제가 없을 듯 했기에
난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었다.
-찰칵-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기계음.
흠칫 놀라 돌아본 그곳엔
예의 가벼운 옷차림을 한 한나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한나 - 에헤..... 어두워서 잘 나오려나 모르겠네.
뭐...... 뭐하는 거야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