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림아 이제 가면 언제 또 보니? 너 되게 바쁘다고 하던데.."
티파니를 나온 시간이 새벽 한시 반이었다.
아직 주점들의 불은 여전히 밝고 번적거렸으며 사람들은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추스려 가면서도 끝장 낼 기세로 밤을 즐기려하고 있었다.
낮엔 그리 추운지 몰랐는데 밤이 되니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고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것이 술기운 탓만은 아닌 것 같은 수연이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다가왔다.
추림은 더블 버튼 롱 코트를 벗어 덮어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이놈만 추울 것이
아니었다.
"글쎄...? 자주 연락하자. 시간 나는 대로 내가 애들한테 연락해서 자리를 만들지 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자 수연이 낼름 가로채어 바닥에 던졌다.
"쪼그만 녀석이 담배는.... 끊어!"
추림이 피식하고 웃으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추림보다 한참이나 작은 놈이 그런 소리를 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그 말의 의미는 나이를 뜻하는 것일 것이다.
"임마. 우린 방금 성년이 되었단 말이야. 그리고 나 담배 핀지 사년 됐어. 넌 나보다
한참 작고 말이지."
그러자 수연이 눈을 비스듬이 흘겼다. 이뻤다. 크고 맑은 눈을 지닌 이놈은 화장하면
꽤 시선을 끌만한 미인으로 둔갑할 여자다.
"쟤들은 뭐하는거야? 얼른 가야지."
추림이 저만치 가로등 아래 모여 소란을 떨고 있는 친구들과 그 사이 틈에 낀 유미를
바라보며 묻자 수연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호호! 연애하자고 저 난리다. 강수하고 영훈이 석호 녀석이 아주 푹 빠졌나봐."
그러고 보니 비대한 덩치의 김석호놈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유미에게 걸치려하고
있었다. 강수놈과 영훈이놈은 담배를 빨아가며 뭔가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데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다.
"친구냐? 말이 없더라."
별 무관심하게 추림이 묻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 쟤 인기가 장난이 아니거든. 오늘 어떻게 하다 보니까
같이 오게 됐어."
담배를 손가락으로 아스팔트에 튕겨낸 추림이 수연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너 기억나니? 어릴적에... 그리 어리지도 않았지만, 중학교 이학년 때인가?
그 때 날 엄청 쫓아다녔잖아."
'"피이! 그건 교회 나오라고 그런거지 뭐. 남자가 별걸 다 기억한다 너?"
추림이 입을 다물고 입술 한쪽을 비틀며 웃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수연이 자신을
좋아했었다는 것을. 뭐 학창 시절엔 그런 친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놈도 그 중
하나일지 모른다.
"너 전학가고 한동안 보고 싶더라. 아니 유학인가? 집은 그대로고 너만 나갔으니?"
"실은 나도 생각났어. 서울 와서 굉장히 힘들었거든. 너 생각 많이 나더라.
오늘도 사실은 약속이 있었는데... 강수가 전화해서 너가 온다고 했어.
만나려면 별수있어? 내가 와야지."
"너무 솔직하군. 이제 가야지. 같은 방향인 놈들이..."
"야 이새끼들아! 그만 떠벌이고 구로 방면인 놈들 모여봐! 택시 한대로 움직이게."
추림이 아직도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는 친구들에게 다가가며 소리 지르자 시선이
집중 되었다.
"난 시흥이다. 영훈이 놈도 그쪽이고."
늘씬한 키에 약간 검은 피부를 지닌 김성규가 말했다. 추림과 오랜 친구 사이인 놈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외모를 지닌 놈이다. 나이도 두어살이 많았다. 놈은 지닌
재주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 다루지 못하는 악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타는 누구나 기본이고, 놈은 피아노와 색소폰 트럼펫은 물론이고 바이올린 까지
조금 연주할 줄 알았는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그것을 혼자 연습하고 깨우쳤다는
사실이었다.
놈의 작은 형이 음악에 미친 사람이었는데 그 형을 그대로 닮아버린 놈이었다.
황소처럼 큰 눈이 추위에 얼어 스산하게 빛나고 있는 놈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놈은 체력이 약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평균 남자의 3/2 정도나 될까하는
체력이었다.
"난 구로니까 같이가자. 그리고... 거기 유미씨 어디까지 갑니까?"
추림이 유미에게 소리쳐 묻자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던 유미가 얼굴을 들었다.
살짝 화장한 얼굴이 추위 속에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볼수록 신비감이 드는 여자인 것이다.
'젠장!'
추림을 바라보며 유미가 웃었다. 그러자 저절로 눈웃음이 생겨났다.
묘한 기분이 되자 추림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왠지 그 웃음이 서운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를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저 화곡동이예요."
유미의 음성은 약간 허스키했다. 그렇다고 탁하거나 거슬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로 인해 더 친근감이 들고 편한 느낌이 드는 그런 음성이었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침착했다. 서두름은 없었고 큰 동작이나 불필요한 동작이
절제된 아주 간결한 여자였다. 마치 군에서 특수훈련이라도 받은 듯한 몸짓이랄까?
하여튼 정물같은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화곡동? 난 고척동인데... 같이 갑시다."
추림이 시큰둥하게 대꾸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추위에 놀라고 있는 놈들의 얼굴들을
하나씩 살폈다.
"새끼야. 술 좀 적당히 처먹어라. 아주 폐인이 될래?"
옷차림마저 엉성하게 변해버린 강수의 머리를 쥐어박은 추림이 꾸짖듯 말하자
강수놈이 먹쩍게 웃으며 비틀거렸다.
"몰랐어? 그새끼 이미 폐인이야."
주머니에 두손을 찔러 넣은 석호가 거들고 나섰다.
"너도 마찬가지야 새끼. 살좀 빼던지... 아주 바닥을 구르겠구나?"
비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석호놈은 학창시절부터 친구들에게 아버지같은 존재였다.
추림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역할을 도맡아 했다면 이놈은 단 하나의 역할만
수행했다.
그 큰 덩치로 아버지처럼 친구들을 아우르고 보살핀 것이다. 싸움 잘하고 소위 말하는 깡 좋은 놈이 이놈이었다. 추림과 붙어 다니며 할짓 못할짓 다한 놈이 이놈이었다.
"신발놈! 보태준것도 없으면서... 잘났다."
"야! 다들 잘 들어가고. 공부할 놈 공부하고 공부 때려친 놈들은 일이나 열심히 해라.
거기 성규 너 이 새끼 자꾸 본드불고 가스 마시지 말고. 눈깔이 누렇게 떠서 개눈
같잖아 새끼야!"
추림은 이런 식이었다. 누구누구에게 일어난 일들을 들추어 상기시키고 잘잘못을
대놓고 비판하고 꼬집고 경고했다. 그러면 놈들은 아주 질색을 하지만 힘든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추림을 찾는다.
"니기미. 성기까세요 아저씨! 난 그런적 없으니까!"
성규가 수연과 유미를 번갈아 힐긋거리고 부정하려했다.
"그래? 그럼 곧 마약까지 처먹겠구나. 새겨들어 새끼야! 저번처럼 또 나 불러서
죽느니 사느니 하지 말고. 제발 나좀 편하게 살자 응? 신발 놈들아."
"어으... 추워... 이제 그만 좀 가자! 술이나 더 먹던지?"
가장 먼저 술에 꼴아가지고 헤롱거리던 이주현이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투덜거렸다.
영훈이 놈이 계속 부축하고 있지만 금새 넘어지고 말 것 같은 모습이었다.
"택시!"
추림이 길가로 나서서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잘들 지내라. 야! 수연아! 조심해서 들어가고. 연락해라."
"잘가라. 추림아! 연락하면 만나기는 할거야?"
"연락하는 거 보고 정하지. 야! 김석호? 수연이 가는길에 데려다 줘라."
택시가 멈추고 추림이 유미를 앞좌석에 태우고 성규와 영훈이 타고 마지막으로
추림이 올랐다.
놈들이 손을 흔들고 뭐라 떠들었지만 이미 택시는 한참을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아저씨. 영등포 지나서 시흥 가는 갈림길에 세어주시고요 고척동 동양공전까지
부탁할께요."
".....!"
택시가 도로를 잠깐 달리다가 속력을 늦추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 내리고 녹아버린 눈은 그대로 얼음으로 변해 버린 탓이었다.
"좀 자둬라. 시간좀 걸릴 것 같은데."
바로 유미의 뒷자리에 앉아있는 추림의 코로 옅은 향기가 전해져 왔다.
'장미향인가? 향수는 아닌것 같은데... 좋은데.'
길게 자란 머릿결이 희미한 택시 내부의 불빛에 선명했다. 머리를 다소곳하게 받침에
기대고 앉아있는 유미가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시간이 넘게 걸려 성규가 내리고 택시는 다시 이십분여를 달렸다.
동양공전의 음침한 모습이 지나치고 고척삼거리에서 유미와 추림이 내렸다.
"영훈아 가까우니까 다시 만나자. 조심히 들어가고 전화해라."
"그래. 잘 지내고 다음주나 다시 보자."
"그래 잘가라."
"유미씨 즐거웠습니다. 잘가요."
놈이 유미에게 정겹게 인사를 건네자 유미는 말없이 고개만 숙여 보였다.
택시가 시큰한 기름 냄새를 뿜으며 달려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추림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화곡동이라 했지요? 이길로 곧장 가면 십분거리인데... 잠깐 걷지요. 여기는 택시가
잘 안잡혀요."
조용하고 삭막한 도심을 매서운 찬 바람이 할퀴듯 훑고 지나가자 등 뒤에서 묘한
소리가 울렸다. 마치 귀곡성 같았는데 무섭거나 그런 감정 보다는 괴리감같은
고독감이 느껴졌다. 횡단보도를 건너 주유소를 지나쳤다.
'추운가보네.'
힐긋 유미를 바라보자 핸드백을 손에 준 모습이 잔뜩 웅크려져 있었다.
조심스레 미끄러운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위태로워 보였다.
잠시 유미가 앞장서기를 기다린 추림이 코트를 벗었다.
"그냥 계세요. 택시타고 갈때까지만 그러고 계세요."
추림은 움찔 몸을 떤 유미를 안심시키고 앞장서서 걸었다. 저 멀리 고척 시장의
골목이 보였다. 평탄한 도로가 갑자기 높은 언덕을 형성하고 그 주위로 낮고 높은
건물이 빼곡했다. 도로엔 차들이 드물게 달렸다. 길 양쪽으로 밝혀진 가로등이 왠지
외롭게 느껴지는 새벽이었다.
추림은 길을 걸으며 작고 조용히 한숨을 내 뱉었다.
유미는 하루가 무척이나 길다고 여겼다.
그리 친하지는 않지만 익히 잘 알고 있는 수연을 따라 뜻하지 않은 장소에 갔는데,
그 장소에서 여러명의 낯선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다들 순진하고 착한 남자들이었다는게 그들의 인상이었다. 치근거리는게 싫기는
했지만 그런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익숙하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이 추림이라는 친구... 나이도 어린 남자가 무척이나 성숙하고 어른스러웠다.
누나의 가게에서는 누나보다도 더 어른스럽게 누나를 대했고 일을 도왔다.
간간이 자리하며 나눈 술 동안 추림이라는 남자는 속이 깊고 묵묵했다. 성격은
쾌활하고 명랑했지만 결코 덤벙대거나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매우 어려워 하는 것 같았다.
유식하고 말을 아주 잘하는 친구였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둘만 남게 되었는데
조금은 서먹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곧 집에 들어가야 하지만 들어가기가 싫었다.
집은 답답하고 감옥같았다.
행복이 별반 느껴지지 않는 가정이란 다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대로 즐거운 하루였다. 추림이라는 이 친구에게 술이나 한 잔 더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이상한 여자로 보겠지...'
살짝 비켜 걷는 추림의 얼굴,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지만
무척이나 크게 느껴지는 남자였다. 분위기가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처음 얼굴을 보았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추림은 어딘가 달랐다.
마치 이세상 사람이 아닌듯이 무언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를
바라보며 그곳을 동경하고 있는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이 조금 슬프게도
느껴졌다.
자신에게 별반 관심이 없어 친구 수연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원래 그런 성격이라고 했다. 그런 성격이란 아마도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자신에겐 남자들이 다 하나같이 관심을 보였고 가까워지려 했는데 추림은 예외였다. 그래서 조금 심술이
나기도 한 유미였다. 단 한번도 자신을 바로 쳐다보지 않던 추림이었다. 시원했다.
추위는 싫었지만 가슴에 쌓인 찌꺼기 전부를 걷어내는 듯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추운데 커피한잔 하실래요?"
추림이 조용히 말을 걸어와 유미가 퍼득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시간에요?"
조금 당황한 듯 유미가 물었다. 이 시간에 이런 외진 동네에 문을 연 커피숍이 있을리
만무했다.
"예. 이 시간에는 커피를 마시면 안되는 겁니까?"
웃음을 머금은 추림이 유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는데 어쩐지 장난끼가 묻어있었다.
".....!"
원래 꼬치꼬치 따지며 말 많은 성격이 아닌 유미는 침묵으로 대응했다.
"아! 다왔네요. 제가 자주 이용하는 곳 이예요. 그런대로 괜찮아요 커피맛이."
추림이 어느 건물로 다가가 섰는데 그 모습을 바라본 유미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멋지지 않아요? 운치도 있고? 자리걱정 하지 않아도 되니 신경도 안 쓰이고 겨우
한잔에 몇천원씩 하는 커피보다는 경제적으로 싸니 절약도 되고,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풍경들도 구경하고... 이런 곳을 명당이라고 하는 겁니다."
추림이 선 곳은 오층 높이의 상가 건물 입구였다. 그 입구에 커피 자판기 두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는데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깨끗한 상태였다.
유미가 쓴 웃음을 지었다. 내심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 싫어 추림이 커피 마시자 할때
작은 기대를 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전 블랙으로 항상 두잔을 마셔요. 유미씨는 어떤걸로?"
이미 오백원짜리 동전 두개를 넣고 버튼 하나를 누른 추림이 물었다.
"저도 같은걸로 주세요."
커피를 뽑아 건네받자 따듯한 온기가 얼어있는 손안 가득 느껴졌다.
"전 집으로 향할 때 가끔 이렇게 이곳에서 커피를 마셔요. 바로 여기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말이에요. 두잔을 마시고 담배 한대를 태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이십분
쯤 걸리는데, 그동안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떠올리고 내일을 생각하죠. 이곳에서
술에 취해 잔적도 있어요. 아주 익숙한 곳이예요."
추림이 자판기 옆에 대리석 난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그곳에 앉았다. 차가운지
바로 일어서며 엉덩이를 털었다.
"무슨일을 하세요? 수연이 그러는데 굉장히 열심히 일한다고 하던데..."
"전 수필가나 국문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도 아니면 작가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공부하는데 소질이 없는 놈이 전혀 엉뚱한 꿈을꾸는게 이상하더라고요. 아니 공부는
좀 했는데 하기가 싫었죠. 그러다가 내게 재주가 뭐가 있을까하고 헤매다가
어느날 보니까... 기계 프로그래머가 되어 있더라고요.
아세요? CNC라고 자동선반 같은 건데 저희 회사에서 국내에 단 여섯대밖에 없는
괴물 같은 놈을 소유하고 있어요. 항공기나 대형 선박에 들어가는 부품을 정밀하게
그랙픽을 통해 생산해 내는 놈인데 그 실험과정에 매력을 느꼈죠. 우리나라에서도
스므명도 채 없는 기술이래요. 운이 좋았어요.
과정을 익히고 있어요. 말하자면 실습생인데... 사실은 거의 다룰 줄 알아요. 아주
재밌어요. 위험하기도 하지만... 뭐 다 그렇죠."
하는 일이 뭔지 물었는데 별걸 다 말한다 생각한 유미는 고개를 끄덕여 화답해줬다.
"유미씨. 슬퍼 보여요.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예?... 네에..."
갑작스런 추림의 말에 무슨 의미인지 헷갈린 유미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놀라셨군요. 그렇다는 거예요. 유미씨 모습이 그렇게 느껴졌어요. 미안해요.
이런 말해서."
"아니예요. 미안할 필요 없어요."
"많이 춥네요. 이제 들어가셔야죠? 오늘 즐거우셨어요?"
"네. 그런데로요. 친구들이 잘해주었어요. 재미도 있었고요."
"좋은 놈들입니다. 거친게 흠이지만 순박한 놈들이예요."
"수연이랑은 친하셨어요?"
추림이 길게 내뿜은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문득 유미가
물었다.
"그녀석... 친했어요. 꼬마라고 불렀는데... 한동안 날 아주 따라다녔어요.
교회 나오라고... 몇년만에 봤는데 많이 변했더군요."
웃음을 머금은 추림이 회상이라도 하듯이 하늘을 멍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가끔 만나서 자기 학창시절이나 친구이야기 할때면 어김없이
추림이라는 사람이 끼더군요. 그래서 조금 궁금했어요."
커피잔을 볼에대고 온기를 느끼며 유미가 조금의 관심을 보였다.
"프흣... 녀석... 그래 어때요? 수연이 거짓말을 아주 잘하던가요?"
"예. 굉장한 거짓말쟁이예요. 추림씨 보니까 이야기를 너무 못한 것 같아요."
마주 웃으며 유미가 말하자 추림이 머리를 극적거렸다.
"좀 변하긴 했지요. 그런데 그거 칭찬입니까?"
"그렇게 들리셨어요?"
"아니 뭐...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걱정하겠어요."
"네. 가야지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유미가 대답했다. 추림은 웬지 자신이 잘못한거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추림이 길가로 나서서 택시를 잡으려 했다.
"제가 알아서 갈께요."
유미가 미안한지 말리고 나섰다.
"거기 계세요. 남자에게 민망함을 주려고 하시는군요."
그러자 유미가 뒤로 물러서서 가만히 섰다. 다시 봐도 어른스러운데가 있는 남자였다. 이제 갓 스무살이면 아직 치기가 한참 가시지 않았을 텐데도 그는 달랐다.
말하는거 하며 행동도 그랬다. 매너도 있었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하나에서 열까지 챙기려 하는 남자는 소심하고 대범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유미에겐
세심하게 느껴졌다. 실지로 그는 당찬 구석도 있었다. 친구들이 하지 못하는 말이나
행동도 서슴없이 하곤 하는 모습을 몇 번 보았다.
"타세요!"
오분정도 지나고 택시가 겨우 한대 와서 섰다. 코트를 벗어 추림에게 건넬 때 유미의
손과 추림의 손이 살짝 스쳤다. 그 순간의 스침이 지나치는 동안 유미는 추림의 손이
따듯하다고 느꼈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달아올라 이상해진 기분을 느낀 유미가 성급히 택시에 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를 모르지도 않는 자신인데 겨우 그 짧은 스침에 이런 느낌은
굉장히 당황스럽고 낯선 경험이었다.
"즐거웠어요. 잘 지내시고 건강하세요. 잘가요.!"
반쯤 내려진 창문으로 만원짜리 지폐를 넣어주며 추림이 한 말이었다. 얼른 돈을
집어 들어 전해주려하자 추림이 뒤로 멀찍이 물러서며 손을 흔들고 환하게 웃었다.
유미는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택시가 요란하게 출발하자 그 두근거림은 더
심해져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뒤를 돌아보자 코트를 손에 든 추림이
저 멀리서 손을 계속 흔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뭔지 모를 감정이 마음 깊숙이 느껴지고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추림이 곧 보이지 않자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은 유미가 한숨을
내쉬며 두 볼을 감쌌다.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 전 상황 때문인지 두 볼에서 열기가 후끈거렸다.
눈을 감아 조금전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유미는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