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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 종교중독

교독기 |2006.05.15 12:56
조회 476 |추천 0

한국 기독교는

 

본질적인 신앙이 아닌

 

종교적 행위에 중독됐다는 뉴스앤조이의 글..

 

기독교 분들이여, 성경과 각종 해설서 대신

 

뉴조를 읽고 바른 시각을 가지시길/./.

http://www.newsnjoy.co.kr/

 

그대들의 입맛에 맞게 성경말쌈도 있삼..

 

***

종교 중독

 

유성오(kierkeka) [조회수 :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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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행 7:51~54)

 

120kg이 넘던 서 모 씨는 체중을 줄이기 위해 하루 4시간씩 힘겨운 운동에 열중했습니다. 그 결과 살을 50kg이나 뺐지만 과도한 운동으로 인해 허리디스크와 관절염을 앓게 되었고 급기야는 이틀에 한 번 꼴로 기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또한 이 모 씨는 마라톤 100회 완주를 목표로 매주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인대를 다쳐서 쩔뚝거리고 있지만 부상도 뛰어야 낫는다고 믿는 그는 3시간 안에 풀코스 주파를 목표로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마라톤 선수들도 풀코스 완주는 1년에 2차례 정도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매주 풀코스를 뛰는 과도한 운동이 결코 건강에 보탬이 될 리가 없습니다. 병원진단 결과 그의 무릎인대 손상은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해 시작한 운동이 건강을 도리어 해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운동에 열중하다보니, 너무 과도한 운동으로 인해 오히려 각종 신체질환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급기야는 가정생활과 직장생활까지 지장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운동 중독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흔히 가정에서는 내놓은 사람 취급당하기가 일쑤이고, 심지어는 운동 때문에 직장생활까지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과도한 운동을 하게 되면 우리의 몸은 고통을 덜기 위해 베타 엔돌핀을 분비합니다.

 

강도 높은 운동으로 인하여 거의 체력이 바닥난 상태(숨이 멎을 것 같은 상태)인 죽을 고비(Death point)에 이르면, 베타 엔돌핀이 급격하게 분비되면서 세컨드 윈드 상태(Second wind: 운동 중에 고통이 줄어들면서 운동을 계속하게끔 하는 의욕이 생기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베타 엔돌핀은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물질로서 마약과 화학구조가 유사한데, 진통효과는 우리가 먹는 진통제보다 40~200배 정도로 매우 강력하다고 합니다. 이 베타 엔돌핀의 분비로 인한 진통 효과와 행복감이 운동 중독을 유발하는 원인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다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종교적 행위입니다. 성경 읽기, 기도, 예배 참여, 십일조 등을 성실하게 하는 사람을 보고 '믿음이 좋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들 평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이 되도록 교인들을 육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많이 운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적 지향점이 교회에서 요구하는 종교적 행위들을 잘 수행하는 데 맞춰져 있다는 얘기입니다.

 

종교적 행위가 신앙의 본질은 아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이 자랑한 것도 종교적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당시 요구되던 금식과 십일조라는 종교적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였습니다. 세리들은 감히 금식과 십일조 같은 종교적 행위를 자신들처럼 하지 않는다는 바리새인적 우쭐함이 그의 마음속에 담겨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세리를 죄인이라며 멀리 했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세리인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예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구원의 선포가 삭개오의 종교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행위에 대한 고백을 계기로 행하여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찾아온 젊은 관원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께 영생의 길을 묻자, 예수께서는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계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모두가 사회적 행위를 규정하는 내용들입니다. 그 청년이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지켰다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를 향해 직격탄을 날리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어쩌면 부자 청년은 자신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도 성전 제사와 금식과 십일조 같은 종교적 행위에 열심인 사람이었기에,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나름대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를 향하여 예수께서는 그의 사회적 행위를 따져 물으셨습니다. 그가 의젓하게 걸치고 있던 종교적 열심과 행위는 제쳐 둔 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보다 철저하게 사회적 행위의 실천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에 참석하고, 십일조 헌금 드리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표는 아닙니다.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과 같은 종교적 행위 자체가 우리 신앙의 본질일 수는 없습니다. 그저 기도에 대한 열심을 키우고, 성경을 더 많이 통독하고, 헌금을 더 많이 내려는 시도를 가지고 신앙의 성숙을 말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러한 종교적 행위는 일종의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 싸움을 위한 훈련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종교 중독에서 벗어나 말씀대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계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곧 세상과의 전쟁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 대신에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세상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 있는 세상과의 싸움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 무기가 바로 기도이고, 말씀입니다. 종교적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며 세상의 법과 싸우기 위한 수단이지 신앙의 목표가 아닙니다.

 

이런 종교적 행위 자체가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종교적 행위 자체를 신앙의 목표로 간주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종교 중독의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행위를 우선시하다가 진정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종교적 유희에 빠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리고, 오직 기도에 대한 열의와 성경 통독과 헌금 액수 증가에 대한 성취감에 취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의 강도를 높이려는 시도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그의 가정에서도, 그의 직장에서도, 그가 사는 마을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에 따른 실천적 행위는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 투기와 탈세와 불법적 행위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렇게 얻은 재산과 지위로 십일조도 많이 하고, 교회당도 비싸게 짓고, 담임목사의 생활수준도 올려 줍니다. 기도에 대한 열심과 예배 참여와 헌금 액수와 성경 통독 횟수를 계산하며 자신의 신앙 정도를 저울질합니다.

 

스데반의 눈에 비친 당시 유대사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계명)은 받았으나 그 율법대로 살지는 못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종교적 유희에 몰두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제사와 금식과 십일조가 자신들의 의(믿음)를 드러내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얼마나 더 성전 제사와 금식과 십일조에 열심을 내는지 서로 비교해가며 경쟁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만 하고 지킬 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는 종교적 행위에 몰두하느라, 신앙의 진정한 목표인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삶을 잃어버린 종교 중독자들이었습니다.

 

유성오 / 자유기고가

 

2006년 05월 10일 10: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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