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방안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오전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추림은 더 잘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오늘 가 볼곳이 있음을 깨닫고 일어나기로 했다.
팔이 저려온지 한참이 지났지만 추림은 그대로 누워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팔을 베고 품에 깊숙히 안긴 채 선주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꿈군것 같구나.'
내심 그런생각을 떠올리자 웃음이 나왔다.
새벽녁에 선주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추림은 그녀를 안아주고 귓볼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다독거려 주었다. 그녀의 마음이 너무 굳건해서 애를 먹었지만 추림은
본능이 원하는 욕구를 이겨냈다.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추림은 선주에게 시간이 지나고 그저 그런
사람이었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차분히 남아
있기를 언한 추림은 선주에게 끝가지 친구로 남아주길 종용하고 설득했다.
그 결과가 지금 추림의 품에 안겨 잠든 선주의 모습이었다.
추림이 끝끝내 거부하자 선주가 마지막 자존심으로 내 세운것이 그것이었다.
안겨 누운 상태에서도 그녀는 집요하게 추림을 탐하려 했지만 추림은 이미 부동심을
되찾은 상태였다.
나직하게 숨을 고르며 잠든 선주에게 옅은 향이 기분좋게 전해져 왔다.
아랫도리가 불끈해짐을 느낀 추림이 실소를 흘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닌것은 아니지만 몸은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슬며시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는 추림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선주는 겨우 팬티와 브래지어만 하고 있었다. 다시 보아도 멋진 몸이다.
아마 그녀의 남자친구가 생긴다면 속된말로 횡재쯤 한것으로 보아도 좋을듯했다.
거실로 나오던 추림이 깜작놀라 자리에 멈추어 섰다.
"일어나셨어요?"
언제 일어났는지 지선이 주방 한쪽에서 커피를 타고 있었다.
극도로 조심했는지 그녀의 인기척은 방에 있던 추림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예. 잘 주무셨어요?"
말하면서 추림은 불편한 마음이었다. 그녀도 지금의 사정을 알 것이다. 같이 간밤에
누웠던 선주가 사라진곳이 어디인줄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대충 상황쯤은
짐작할 것이지만 아마 사실과는 다른 생각을 할 것이 분명했다.
"커피 한잔 드려요? 이 커피 국내에서 흔하지 않은 것인데 신기하네요."
대준의 누나인 이금선이 여름에 호주를 다녀온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름도 낯설고
맛도 전혀 다른 커피를 선물로 가지고 왔었다. 찬장에 넣어두고 한번인가를 타
마셨는데 지선의 눈에 띤 모양이었다.
"네. 한잔 주세요."
화잘실로 들어가면서 추림이 말하자 뒤에서 그의 모습을 힐긋거린 지선이 다시
추림의 방쪽을 바라보고 응큼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선주가 안보이네요?"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지선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막 양치질을 하려던
추림은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는것 같았다. 밤새 어쩌면 자신과 선주의 말을 다
들었을지도 모른다. 큰 소리를 낸것은 아니지만 혼자사는 추림의 집이 커봐야 얼마나
클까? 겨우 방 두개에 주방겸 거실은 네평 남짓이나 될까?
추림이 욕실에서 나와 지선이 건네는 커피잔을 들고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무일도 없었으니까 괜한 오해 마세요."
추림은 일단 못부터 박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의 일이란게 서로 마주만
보아도 부풀려 지는 것이라서 내일쯤이면 아마 그녀의 친구들에게 이야기가 전해
질지도 몰랐다. 별소리 다 나오고 금새 눈 덩이처럼 불어나서 간식 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요? 이상한데요?"
"뭐가 아상합니까? 전... 선주가... 아! 관둬요. 힘들어 죽을뻔 했단 말입니다."
추림이 맥빠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지선이 참지 않고 연신 웃다가 말했다.
"사실 어제 밤에 선주가 제게 말했어요. 모두 다 말했는걸요. 모르셨죠?"
"예... 네에? 아니! 다 말했다고요? 말리지 그랬습니까?"
"어머? 제가 왜 말려요? 저 좋다고 하는일을 말리면 누가 상 준데요?"
장난끼가 다분한 얼굴이고 말 조차 그런 기색이 가득한 지선의 말에 추림은 기운이
모두 빠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치솟는 기운을 억제하지 못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도대체 여자들은 알기나 할까? 추림은 지선이 자지 않고 새벽녘 내내
방에서 벌어지는 일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고 생각 하자 얼굴이 달아 올랐다.
"추림씨. 그냥 선주 좋아해주면 안돼요? 이쁘고 집안 좋고 결정적으로 걔는
순진하다고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구애를 하는지 아마 모르실거예요.
그런 얘를 추림씨가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웃긴지 알기나 해요?"
"저도 선주가 좋은데요? 제가 언제 싫어한다 했습니까? 이쁘고 집안좋고 결정적으로
순진한 선주를 전 아주 좋아합니다. 지선씨가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그런게 아니라... 선주 마음을 받아 들이라고요. 요즘 시대가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어떤년이 밤에 알몸으로 사내품에 안기려 하겠어요? 그 정도 순정이면 열녀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권리 정도는 있다고 보는데... 안 그래요? 전, 추림시에
대해 지겹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제보니 다 엉터리예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멋이 없어요."
지선의 말처럼 선주의 행동과 말은 추림에게 정말 과할 정도의 열정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어제 지선의 마지막 부탁마저 들어주지 않았다면 그녀의 마음은 큰 상처가
남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품에 안겨 누운 채 새벽내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는지
추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먼저 잠이 들어 버렸을 정도였다
선주가 추림을 좋아하는 절반만 추림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아마 이미
그 둘은 사귀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추림의 마음은 굳강하기만 했다.
추림은 선주의 모든것이 부담스럽고 서먹한데가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의 마음만큼은 받아 들이지 못했다.
둘의 조건을 놓고 비교한다면 추림은 자신에게 그녀는 과분한 존재라 여기면서 또한
꼭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단지 추림은 선주가 친구로 혹은 좋은 사람으로 관계하길 바랄 뿐이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큰 위험요소가 되는 것이다.
추림에게 선주는 그런 여자였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그녀의 입장이겠만
그것 자체가 하나의 비논리가 되는 것이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상처
받을지 몰랐다. 좋아하지 않으면서 좋다고 말할 추림도 아니지만 단 한번도 선주와의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불안정 한것. 추림은 조금씩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정말 선주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언젠가 그녀는 자신으로 인해 힘들어 할 것이다. 추림이 우려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한쪽은 거부하고 다른 한쪽은 원하기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혹자들은 외사랑도 사랑이라 말하지만 그 고통을 느껴본다면 아마도 그렇게 쉽게
미사여구를 구사하지 못하리라.
지선은 탁자에 팔을 기대고 젖은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추림을
가만히 했다. 그녀에게 추림은 평범한 남자였다. 길을 걷다가 추림같은 남자는 아마
열명쯤 만나도 이상 하지 않을 그런 평범한 사내였다. 단지 겉모습이 그랬다.
키가 큰것도 아니고 학벌과 집안이 예사로운것도 아니었다.
친구 선주가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정말 궁금했지만 처음 영등포에서 설핏보고는
그저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 자신보다 덩치가 월등한 여러 사내들을 아이 다루듯 제압하고 말하는 폼이란 정말
영화 에서나 보았던 광경이었다. 비범하고 어찌나 허허로운지 그에게선 온통 자유와
드넓은 초원의 향기가 느껴졌다.
친구들과 내내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그는 허술하거나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주도했고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 여러 친구들이 보기드물게
취하도록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도 그의 덕이었다.
배려하고 사람을 다독거리는 인품은 타고난듯한 성품인듯 느껴졌는데 그와 나이차가
안나는 친구중 한명은 그에게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흡입력을 지녔다.
그를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일단 알고나면 이렇게 빠져드는 매력을 지닌
사람은 정말 흔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까지 우겨서 남게 된것도 그에대해 더 알고
싶은 호기심 때문일 정도로 그는 정말 재미있는 남자였다.
처음 지선이 추림을 보았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었다고 했다. 처음 보는순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보석을 찾은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었는지 하루종일 선주를 놀리고 다녔었다. 보는 순간에 사랑에 빠진 사람이 정말
존재하고 그 사람이 자신의 친구라는게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배 안고파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불러도 대답도 않고."
추림이 말하자 지선이 손가락으로 선주가 잠든 방을 가리키며 킬킬 거렸다.
"이런! 그만하세요. 지선씨가 더 나쁜건 알고 계시죠? 가만있자... 제가 기가막힌
북어국을 끓여 드릴께요. 잠시 기다리세요."
"어머! 그 유명한 추림씨의 음식맛을 보여 주시겠다고요?"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지 지선이 손뼉을 마주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너무 기대는 말아요. 나도 내가 해먹는 밥이 맛있는지는 모르니까!"
"그게 아니던데요? 세상에서 드물게 맛나는 식사를 했다고 하던데요?"
"분위기 탓이겠죠. 사실 제가 손 재주는 조금 있는 편이죠. 히히."
"기대할께요. 제가 뭐 거들어 드려요? 잠도 얻어자고 밤새 재미난 구경도 제공했는데?"
"......!"
냉장고를 열어 있는 음식 재료를 모두 꺼내고 추림이 팔을 걷어 부쳤다.
"지선씨! 파를 그렇게 손질하면 어떡해요? 상한 부분만 떼어내고 대부분은 버릴께
없어요."
추림의 셔츠를 헐렁하게 입은 지선이 거든다고 나섰는데 하는 일이 엉망이었다.
집안일과 관련된 일은 전혀 해보지 않은듯 엉성하고 서툴기 그지 없었다.
"파까는 것도 잔소리예요? 대충하면 되지?"
"모르는소리. 음식을 먹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음식을 장만하는게 중요합니다.
더구나 파는 선인들이 먹는 야채였으니 더 버릴게 없는 겁니다."
"선인요? 그게 뭔데요?
갑자기 추림이 선인이란 말을 꺼내자 지선이 궁금한지 하던 일을 멈추고 물었다.
추림이 그녀를 바라보다 얼른 고개를 다시 돌렸는데 추림의 남방을 입고 있는 그녀의
옷차림이 가관이었다. 단추를 달랑 가운데 두개만 채워 가슴이 거이 드러나 보이고
입은 반바지는 남방 밑단에 가려져 마치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것이다.
"선인이란 산 사람 즉, 도사(道士) 를 일컫는데 고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도를 닦는
이들은 파를 즐겨 먹었다고 해요. 왜 그런지는 몰라도 파를 아주 귀중한 아채로
여겼다고 합니다. 많은 야채중에 파만큼 버릴것이 없거나 강한 기운을 지닌 식물이
드물다네요. 어떤 음식에도 들어가고 쓰임새로 여겨지잖아요. 너무 흔해서 그 다양성을
무시당하는데 지선씨도 그러고 있잖아요."
"별걸 다 아시네요? 그런건 어디서 들었어요?"
정말 신기한지 지선이 추림에게 가까이 붙으며 묻자 추림이 얼른 거리를 벌렸다.
"어느 책에선가 읽었는데... 하도 오래되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지선씨 저기가서
좀 쉬실래요? TV 보시던가요."
짖꿎게 웃으며 지선이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삐딱하게 선 자세로 추림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장난칠 기세였다.
"싫은데요? 추림씨 심심하니 이렇게 제가 놀아 드릴께요. 사실 선주보다 제가 더 낫지
않아요? 뭐 다들 그러긴 하지만."
"그러세요? 왜 전 선주나 지선씨가 무서운 여자 선생으로 보일까요?"
"......!"
농담을 받아치자 지선이 씽크대에 기대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썹이 살짝 일그러
진 채 추림을 홀기자 추림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추림씨? 저 여기 자주 놀러와도 돼요?"
지선이 물어오자 추림이 하던일을 딱 멈추고 어깨를 움찔 떨었다.
추림은 속으로 설마하는 생각을 하며 제발 아니길 기도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저 이사가야겠어요."
* * *
김성규가 살고있는 시흥은 서울 변두리에 속한 곳이어서 택시에서 내리자 거리는
한산하고 낮은 조용했다. 날이 무척이나 추워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것이다.
김성규는 추림의 오랜 친구로 천재소리 들으면서 끝내 그 천재성을 살리지 못한
어리석은 놈소리 듣는 친구였다.
추림과 각별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었지만 성규는 심약하고 소심한 성격탓에 늘
겉돌고 외로움을 자처하는 놈이었다.
성규의 애인에게서 전화 온것이 삼일전이었다.
예상대로 녀석은 아직 제갈길 못찾고 긴 방황과 방탕에 빠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약에 취한 채 잠들어 있거나 아니면 술에 쩔어 있을지도 몰랐다.
"선주야. 지선씨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
추림이 성규에게 오면서 그녀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꿈쩍도 않고 기어이 따라왔다.
부담되고 귀찮기도 했다. 내색하지 못했지만 아침을 먹고 잠깐 이야기 하는 동안에
이미 갈곳이 있다 말했는데 어거지를 부리면서까지 따라오려는 그녀들이 얄미운것이
사실이었다.
"알아서 갈께. 조금만 더 있다가. 추림은 친구 만나고 나와. 우린 근처 찻집에서
기다리지 뭐."
"전. 선주와 같이 갈꺼예요. 그러니 제게 뭐라고 하지는 마세요."
인상을 살짝 일그린 추림이 화난 표정을 지었는데도 그녀들은 막무가네였다.
"좋아. 마음데로해! 하지만 얼마나 걸릴지는 나도 몰라. 지루하면 그냥 돌아가."
"알았어. 애도 아닌데 뭘."
간밤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잠을 달게 잤는지 선주의 얼굴은 환하고 밝아 보였다.
어쩌면 방학중인 그녀는 아예 눌러 붙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한
추림이었다.
"저기 위쪽에 레스토랑 있거든. 로마라고... 거기서 기다려."
"네에 알겠습니다."
그녀들을 얼른 떼어놓고 추림은 좁은 골목을 들어서 잠깐 걷자마자 곧 성규의 집에
도착했다. 열려진 낡은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 마당안쪽으로 고만고만한 집들이 마치
개미집처럼 늘어선 모습이 보였는데 실지로 이런 집을 개미집이라 불렀다. 영세한
사람들의 주거공간이란 늘 이렇듯 초라하고 작은것인것을 추림은 이해 할 수 없었다.
무려 팔백만이라는 인구가 모여사는 서울에서 이런집이 수천채가 넘는데 그들
대부분은 집과 아주 닮은 모습으로 살아갔다.
성규의 집은 가장 오른쪽에 있었는데 그곳은 집을 이룬 건물 자체를 반쯤 돌아간
곳에 위치했고 여기 있는 집들 중 가장 넓은 공간이었다.
사람 두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 딱 맞을 골목을 담벼락 따라 들어설 때
누군가가 맞은 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명화씨?"
추림이 성규의 애인인 이명화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네자 마주오던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흑... 추림씨 오셨어요."
"......?"
낡은 스웨터를 입고 청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어딘가를 나가는듯 보이던 명화가
울음 을 쏟아내며 추림을 반겼다. 몇걸을 다가서자 추림의 품에 뛰어들어 명화가
서럽게 울었다. 추림의 얼굴이 매섭게 일그러졌다. 직감적으로 성규의 모습을
그려내고 상황을 유추한 추림은 슬며시 화가 치밀었다.
"새끼가... 명화씨 진정하세요. 어딨어요? 방에 있어요?"
"흑흑... 예. 추림씨 저 어쩌지요?"
명화가 억지로 눈물을 참아가며 말하자 추림은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왜요? 일단 들어가요. 그리고 이거요."
추림은 근처 슈퍼에서 사들고 온 과일 보따리와 한말이나 사들고 온 쌀을 내밀었다.
코가 벌겋게 변한 명화가 추림이 건네는 것을 민망하게 받아들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작년 봄부터 동거를 시작했지만 단 한시도 이 여자는 편하거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추림이었다. 그렇게 말렸지만 서로 좋다하며 합친 살림은 엉망이고 놈은 돌보지
않았다.
"들어가세요. 지금 자고 있어요."
명화가 추림에게 방을 가리키며 낮고 좁은 부엌으로 들어가 버렸다.
추림은 방안에서 코고는 소리가 성규의 것임을 들으면서 신발을 벗고 방문을 열었다.
방 두개로 이루어진 성규네는 한 방은 살림방으로 다른 하나는 성규의 작업방으로 쓰고
있었는데 온통 기타류의 악기와 노래책으로 가득했다.
성규의 직업은 밤무대 가수였다. 그리 유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김광석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놈의 꿈은 인정받는 업소 무대가수였다.
파리하고 거칠한 얼굴의 성규는 지독한 술냄새를 풍기며 곯아떨어져 있었다.
방안은 엉망이었다. 살림을 처음 차릴때 추림이 사준 여섯자 짜리 원목 두쌍 중
하나의 문에 금이 가있었고 화장대의 거울은 절반쯤 깨져있었다.
널부러진 술병과 잡다한 쓰레기들은 명화마저 살림을 포기했는지 현재 이들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다.
인상을 일그린 추림이 자고있는 성규에게 다가가 왼쪽팔을 걷어 올렸다.
보였다. 수십군데에 달하는 바늘 구멍이 혈관이 지난는 곳마다 아물거나 새로 생긴
듯한 흔적이 뚜렷했다.
"개자식!"
추림의 입에서 광폭한 욕이 터져 나왔다. 막 주방과 이어지는 문으로 찻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 들어서던 명화가 놀랐는지 멈칫거렸다.
"김성규! 일어나! 개새끼야!"
쩍!
누워있는 성규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긴 추림이 소리치며 성규의 가슴팍을 잡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