男女戀愛白書
[이별이 슬픈건 헤어짐의 순간이 아닌 그 뒤에 찾아올 혼자만의 시간 때문이다. ]
1장
배신은 쓰디쓴 소주의 첫잔과도 같다
늦은 새벽.
24개의 한강다리 가운데 자살소동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는 한강대교.
멋들어진 한강의 야경이 오늘따라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아무래도 이 야심한 새벽녘, 이 다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 예감이 적중하기 무섭게 저만치서 여자의 하이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려온다. 이 늦은 새벽에 겁도 없이 한강대교를 찾는걸 보니 이 여자, 뭔가 저지를 것만 같아 보인다.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의 그림자가 갈피를 못 잡고 비틀거린다. 반쯤 풀린 동공. 그 안에 넘쳐흐르는 눈물. 여기 오기 전에 얼마나 울었는지 마스카라는 번져 투명해야할 눈물이 땟 구정물이 되어 볼에 얼룩져있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입에선 쉴새없이 고상하지 못한 욕이 터져나온다. 잘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말끝마다 “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걸 보니, 이여자를 울린 상대는 남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네가, 네가 날 버려? 나쁜놈, 천하의 못된놈, 개만도 못한 인간. 우웨웩”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는 여자. 목을 길게 내빼고 위에 남아 소화되지 못한 음식물을 모두 꺼내어 흐르는 강물에 쏟아낸다.
‘젠장, 오늘 물고기들만 포식하게 생겼군.’
손바닥으로 입술을 쓰윽 닦아내며 어둠에 쌓인 검은 강물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선 또 눈물이 흘러넘친다.
<헤어지자->
2006년 꽃피는 춘삼월.
여자는 남자에게 축구공 차이듯 뻥~ 차이고 말았다. 그것도 만난지 2년째 되는 날에 말이다.
오늘을 위해 한 달 동안 공들여 준비한 선물을 꺼내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이유를 물었다. 왜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거냐고, 그것도 오늘 같은 날에..
참으로 뻔뻔한 대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 무슨 삼류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구질구질한 레파토리란 말인가. 요즘은 써먹지도 않는 낡디 낡은 구식드라마의 일부분.
생각같아선 뺨이라도 후려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어버려 움직일수가 없었다. 다만, 눈에선 눈물 한방울이 멋드러지게 떨어질 뿐이다. 이 역시 삼류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비참한 여주인공의 최후 모습이라는걸 알기에 여자는 그 비참함에 얼룩진 눈물만은 닦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미안하다. 그동안 많이 고민 했어. 나도 어쩔수 없었어. 둘 중 한사람을 선택해야 한다면 난 정인이를 선택하고 싶어. 미안하다.”
정인이? 그 백여시 같은 년 이름이 정인이니? 애인 있는 남자를 꼬셔낸 백여시 이름이 정인이었니? 이름도 이쁘네.. 기분나쁘게 이뻐, 빌어먹을.
“넌 잘 이겨낼 거야. 강하니까. 하지만 정인이는 아니야. 약한 여자야. 내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여자야. 그 앤 내가 없으면 안돼.”
하. 잘 이겨 낼 거라고? 넌 강하다고? 누가 그래? 대체 누가 그러냐고!
백진우, 오늘이 무슨 날인지나 아니? 우리가 만난지 730일째 되는 날이야. 내가 오늘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손가락 마디가 굵어서 바느질은 곧 죽어도 못하는 내가 백진우, 널 위해 한달 내내 밤을 새워가며 십자수까지 만들어 왔는데.. 우리의 사랑이 고작 이거였니? 백진우, 말해봐. 말해봐. 이 못된 자식아!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 목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꺼내보지도 못한 말을 남긴 채 여자는 더이상 비참해지기 싫어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남겨두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배신…. 믿었던 남자에게서 처절하게 당해버렸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옛 명언이 있었던가? 그 명언, 누가 만들었는지 기똥차게 잘 만들었네. 2년 동안 한자리에 조신하게 박혀 있던 돌을, 듣도 보도 못한 짱돌이 그 자리를 넘봐? 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혼자 포장마차에 들어 앉아 우동국물과 소주를 시켜놓고 씩씩대고 있는 여자는 1시간만에 소주 3병과, 우동국물 4그릇을 비워냈다.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오르고, 당장이라도 내 남자를 꼬득인 그 백여시를 찾아가 그 머리털을 죄다 뽑아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숨이 막혔다. 처절한 배신에 가슴이 저며왔다. 심장이 돌덩이 처럼 굳어버리는것 같았다.온몸에 흐르는 피가 순 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였다.
미친 듯이 사랑했다. 이십칠년만에 찾아온 사랑이었다. 명동 한복판에서 칠칠맞게 코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에게 괜찮냐며 손수건을 건내주던 남자의 걱정스런 눈빛을 본 이후로 백진우 그 남자를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수가 없어서, 그보다 더 많이 사랑했었다. 그를 위해, 그만을 위해 태어난 여자처럼 일생동안 순정바쳐 사랑할 것을 맹세했었다. 아무리 독하고 강한 여자라해도 백진우 앞에서 만큼은 지고지순한 여자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그런데… 고작 백여시 같은 여자로 인해 조강지처를 배신하겠다니. 이게 말이돼? 말이 되냐고~
백진우, 네가 더 바쁜놈이야. 백여시 보다 네가 더 나빠, 이 개자식아! 그래, 조강지처 버리고 간 니놈, 어디 잘먹고 잘사나 두고보자. 니들 사랑, 내가 밤마다 저주를 내릴거야. 나버리고 간놈, 천리도 못가서 발병나라고 백일기도 드려줄테니까 그때까지 어디 잘먹고 잘 살아보라 그래. 에잇 못된놈!
입안에 고인 침을 한데 모아 땅바닥이 백진우의 얼굴인양 퉤 뱉고 나자 어느정도 진정이 되었다. 하지만, 청승맞은 눈물은 계속 떨어진다. 청승맞은 마음은 열 번 스무번 날 버리고 간 그 남자에게 욕을 하고 있음에도 그리워했다.
눈물 한방울 떨어질때마다 소주 한잔. 두방울 떨어지면 소주 두잔. 나중엔 폭포수처럼 쏟아지자 아예 소주병을 들고 마셨다. 옆 사람들이 “저여자 뭐야”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던지 말던지간에 마지막 소주의 한방울까지 입속에 탈탈 털어내고 나서야 여자는 포장마차를 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속이 뒤집어 질 듯이 울렁거린다. 눈알이 빠질 듯이 눈물은 흘러내린다. 거친 욕과 그리움이 썩인 말들이 주절주절 입에서 튀어나온다.
지금 기분이 어떻냐고? 딱 죽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실연의 상처가 죽음을 택할만큼 크냐고묻는다면 물론NO. 여자는 취해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아무리 배신의 상처가 클 지언정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법한 여자다. 백진우라는 남자의 말처럼 강한 여자였으니까. 허나, 술은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 소주 4병을 마셨으니 이미 술에 지배당한 여자는 술이 이끄는대로 한강대교까지 걸어오게되었고, 술이 이끄는대로 검은 강물이 출렁거리는 다리위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다.
“나쁜놈. 어디 나 죽고도 네가 그 여시같은 년이랑 웃으면서 사는지 두고보자. 내가 다른건 다 참아도 백진우 네가 딴년이랑 바람피는건 못참겠다, 이말이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어. 어디한번 오뉴월에 내리는 서리한번 맞아봐라, 이 배신자야.”
도로위를 질주하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한강다리 난간에 매달려 있는 그녀를 잠시 비추다 사라졌다. 순간, 여자의 눈에 비친 헤드라이트 불빛이 저승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보이는건 왜일까? 저문으로 들어가면 모든것이 환하게 빛날것만 같았다. 눈이 부시게 빛나는 빛이 모든 기억들을 사라지게 만들것만 같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미련의 구질구질한 기억까지도 싸그리다 사라질것만 같았다.
중심을 못잡고 있는 한쪽 다리를 들어 난간에 올렸다. 하이힐앞굽이 검은 강물위에 위태롭게 걸쳐 있었다.이제 남아있는 오른쪽 다리만 들어올리면 오늘 맛본 치욕은 저 강물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찬란했던 사랑도…. 구질구질한 그리움도….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놈의 빌어먹을 미련까지도….
후욱, 깊은 숨을 들이 마시며 마지막 선택을 끝낸 여자는 입술을 질끈 베어물었다.
“아버지 엄마, 이 못난 딸 먼저 갑니다. 우리집 강아지 띨구야, 미안하지만 이제 네 밥은 니혼자 챙겨먹어야 겠다. 참, 내동생 서여은, 네가 내 몫까지 부모님께 효도 좀 해라. 아~ 미래의 서 작가. 빌어먹을 백진우 자식 때문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마지막으로 백진우, 넌 내가 처녀귀신이 되는 한이 있어도 가만 안둘거야. 그 불여시랑 너, 내가 처녀귀신이 되어서라도 떼어놓을거야. 알았니? 알았니? 이 못돼 처먹은 자식아!”
마지막 유언까지 남겨두고 덜덜 떨려오는 오른쪽 다리까지 들어올리려는 순간이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가로수 저끝에서 남자의 푸념섞인 노랫소리가 여자의 귀에 들려왔다.
참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노래이면서도 속이 후련 해지는 노래이기에 죽으려 했던것도 잠시 잊은 여자는 그 노랫소리에 홀려 타박타박 걸어오는 그림자를 호기심 가득 담긴 눈으로 주시했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고개를 푸욱 숙인 남자가 여자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거리를 보아하니 저남자도 술이 떡이된 모양이다. 웬지 황천길 가는 동지 한명 생긴거 같았다.
조금씩 가깝게 다가오는 남자.
한발자국. 두발자국. 세발자국.
난간에 한발을 올리고 서 있는 여자의 앞까지 오고나서야 남자의 발도 멈추었다.
한강대교에서 맞딱트린 술취한 여자와 남자. 두사람의 묘한 탐색전이 시작된다. 호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고, 또렷히 뜨려고 노력하지만 술기운 탓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다리에 매달려 있는 여자를 찬찬히 훑어내리고 있는 남자. 그리고 뭐 이런놈이 다 있냐는듯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여자.
지루한 탐색전이 끝나자 혀꼬인 목소리로 남자가 먼저 말을 붙인다.
“끅. 당신은 누구신가요?”
“.....”
“당신은 귀신인가요?”
귀신? 지금 나보고 귀신이냐고?
귀신이냐고 묻는 남자의 말에 여자의 안면근육에 강한 경련이 일어난다.
“..저기, 저 귀신아니거든요. 그리고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술 많이 드신거 같은데 참견말고 그냥 가던길 가세요?”
여자가 작위적인 미소를 새겨넣으며 말했다.
“끄윽. 참견? 나 참견한적 없는데.”
“지금 참견 했잖아요!”
“지금? 참견안했는데.”
“이봐요, 그냥 가세요. 빨리 가라니까요.”
“허허.. 이 귀신봐라. 잘 가고 있는 길에 먼저 나타난게 누군데, 이 먹물귀신아.”
뭐? 머...머먹물귀신?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남자로 인해 여자의 곧은 이마에 내천(川) 자가 새겨졌다.
서여진, 참자. 참자. 참아야돼! 여기서 이 정신나간 놈이랑 상대하지 말자. 난 내 갈길만 가면 되는거야.
여자는 어금니를 꾹 깨물며 목끝까지 올라오는 울분을 억지로 참아냈다. 생각같아선 오늘 맛본 치욕들을 이놈에게 대신 퍼붓고 싶었지만 상대는 덩치가 산만한 사내였고, 더구나 술로인해 정신이 반쯤 나간 위험한 취객일뿐이였다.
“이봐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 귀신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귀신이 아니면 너는 누구냐?”
“그...건 알아서 뭐하시게요.”
“너는 누구냐고!!!!!”
갑자기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남자.
동시에 우두득 이를 가는 여자.
그리고, 한강대교에 감도는 싸늘한 한줄기의 바람.
1초동안의 짧디 짧은 침묵.
“누구야. 너는 누구야. 언능 정체를 밝혀라!”
“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귀신이 아니면 너 외계인이냐?”
“귀신도 아니고 외계인은 더더욱 아니거든?”
“그럼 뭐야. 네 정체가 뭐야. 넌 어디 별에서 왔어?”
“.......”
“네 이놈! 언능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여진이다. 왜!”
난데없이 정체를 밝히라는 남자의 말에 손을 허리에 세우며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도 부르짖는 여자.
“뭐? 여진족?”
“이 사람이 증말~ 이름이 여진이라고, 서여진..마이 네임 이즈 여진 서!!!됐냐?”
“누가 당신 이름 물어봤냐고요, 난요, 댁의 정체가 궁금했었다구요!”
뒷목을 부여잡으며 할말을 잃은 여자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이남자, 정말 골 때린다.
“사람이면 사람이라고 말을 하던가. 난 또 희한하게 생겨서 외계인이나, 귀신인지 알았지.”
사람 약을 올리는지 비실비실 웃어대고 있는 남자 때문에 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여자는 더는 참지 못하고 옷소매를 걷어붙혔다. 그래, 어디 나 죽고, 너 죽어보자. 한풀이하는거야. 하느님께서 백진우한테 퍼붓지 못한거 이놈한테 퍼부어주라고 내려주신거야. 감사합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술취한 이놈, 백진우라고 생각하고 흠씬 두들겨 패주자.
우드득,우드득, 여자는 손가락 마디에 힘을주었다.
그런데, 무슨일인지 정신나간 놈 마냥 비실비실 웃고 있던 남자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어라?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남자.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는 남자로 인해 여자는 일단 당황할수 밖에 없었다.
“하아.”
땅이 꺼질 정도로 긴 한숨을 내쉬며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는 남자.
아까의 방정맞은 태도는 오간데 없고 잔뜩 가오를 잡은 남자로 인해 아직까지 사태파악이 안된 여자는 남자의 시선이 멈춘곳으로 눈을 돌렸다. 출렁거리고 있는 검은 강물...남자만 아니였다면 난 벌써 저 곳에 몸을 던졌겠지...
“저기 깊을까?”
“...아마도.”
“빠지면 정말 죽을까? 아프진 않을까?”
“댁도 그게 궁금해?”
여자도 한강다리에 몸을 기댔다.
겨울 바람이 불어와 여자의 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다.
“떨어지기전에 먼저 정신을 잃는다네. 아프긴 아플거야. 바닥에 떨어지는거랑 충격이 비슷하다니까.”
“여진족아. 너 저기에 떨어지려고 했지?”
“건 왜?”
“먼저 떨어져봐.”
“뭐..뭐라고?”
“너 먼저 떨어지고 말좀해줘봐. 아픈지, 안아픈지.”
“하. 이 남자 봐라.”
“말해줘. 말해줘.응?”
“아프면, 아프면 어쩔건데?”
“생각 좀 해보려고.”
“생각?”
“내가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걸랑. 뭣하러 아픈데 뛰어내려? 너 먼저 뛰어내리는거 보고 나도 뛰어내리려고. 안아프면 말해. 나도 따라 뛰어내릴테니까.”
“너 바보니?”
“아니.”
“그럼 왜이렇게 개념이 없니? 당연히 아프지. 그리고 어떻게 아픈지 안아픈지 말을해주니? 떨어지면 바로 이세상 하직인데.. 좀 생각 좀 해보고 말하지 그래?”
“지금 나 무시하는거야?”
사이좋게 다리난간에 기대 검은 강물을 바라보던 그들이 이번엔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기 시작한다. 혀가 꼬일대로 꼬여서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해대면서 말이다. 누가 그랬지? 술먹은 사람들의 혀꼬인 소리는 술먹은 사람만이 알아듣는다고. 이들이 딱 그랬다. 다른 사람들은 도통 이해 못한 말들을 나름대로 잘 해석해서 듣고 있는듯보였다.
“방해하지말고 저리비키시지.”
여자는 잠시 자신이 하려던 일을 이남자로 인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걸 깨닫고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귀찮은 남자를 탁 밀어냈다. 그리고 아까 했던것처럼 다리 하나를 낑낑 올려들고 난간에 올라섰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한다는 소리.
“아프면 말해라.”
뻔뻔스럽게 말하는 남자를 고개만 돌려 째려보는 여자. 내심 남자가 원망스러워지는건 왜일지..
뭐하는 짓이냐며. 이러면 안된다고, 생명을 중시하라며 끌고 내려와야하는게 정상인데 아프면 말해달리니. 저거 진짜 바보아니야? 너야말로 저승사자 아니니? 됐다. 신경쓰지 말자. 어차피 죽으려고 했었잖아. 저놈만 아니였으면 벌써 일을 치뤘을텐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술이 조금씩 깨기 시작했는지 정신을 지배했던 술기운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죽음도 무섭지 않다고 생각한게 언젠데 지금은 내가 왜 이러고 있는건지, 이러면 안되는데 수시로 감정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눈 앞에 검은 강물이 보이자 눈을 꼬옥 감았다. 그리고 백진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여진을 버리고 딴년한테 간 남자. 서 여진이라는 이름보다 정인이라는 그 백여시의 이름을 더 애틋하게 부르던 남자.
또다시 배신의 추억들이 영상처럼 머리에 그려진다. 마지막 희망의 지푸라기마저 매정하게 뿌리치고 떠난 그 놈이 무어가 좋다고... 그래 죽어야지. 죽는걸로 복수해줘야지.
여자는 나머지 다리까지 난간에 올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열만세고 뛰어내리자.
하나, 둘. 셋. 넷. 다섯,여섯 일곱 여덟 아홉... 아홉반.. 아홉반의 반.
그때였다.
“참. 여진족아, 미리 경고하는데 겨울이라 한강물 디게 차가울거야. 아마 꽁꽁 얼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난 안되겠다. 그냥 여진족 혼자 뛰어내려라. 난 다음에 해야겠어.참 그거 알아? 물속에서 건져낸 시체는 토나오게 역하다는거...온몸이 팅팅 불어서 얼굴도 못알아본다던데? 이건 그냥 내가 넓은 아량으로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그냥 수면제를 먹는건 어때? 깔끔하잖아?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오지랖도 넓은 남자.
사람 약을 바싹 올리는 남자.
추운지 팔짱을 끼고 건들건들하게 서서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만 보고 있는 남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여자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 팔을 걷어붙혔다.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했지만 도저히 참고 견딜수가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놈부터 죽여놓은 다음에 죽을 생각이 굴뚝처럼 피어올랐다.
“야. 너 죽을래?”
눈에 쌍씸지를 켜고 남자의 코앞에 다부지게 주먹을 들이 미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남자.
“어. 나 죽고싶어. 여진족아 , 니가 나좀 죽여줄래? 한강물은 차가워서 도저히 못 뛰어내리겠으니까 니가 신나게 두들겨 패서 나 좀 죽여줘. 응?”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반응에 흠칫 놀란 여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부지게 쥔 주먹도 스르르 힘이 풀려버렸다.
“내..내가 왜 널 죽여야하는데?”
“니가 방금 죽여준다며.”
“내..내가 언제?”
“이 여진족, 발뺌하는것좀 봐. 방금 그래놓고서.”
“......”
“됐다. 맞아죽는것도 아프겠지? 어디 안 아파프게 죽는 법 없나?”
“그런 방법 있음 나 좀 알려줘봐.”
“휴~그냥, 딱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이 정신없는 남자에게도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 하긴, 이 늦은 새벽에 한강다리를 찾아와서 죽겠다는걸 보면 필히 이놈도 뭔가 사연이 있겠지. 뭘까? 이놈의 사연은….
여자는 바람처럼 나타난 남자의 존재가 갑자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왜 죽고 싶은지 물어봐도 돼?”
“왜, 궁금해?”
“궁금하다기 보다는....말하기 싫음 말고.”
“아- 여자의 변심은 나랏님도 구제를 못한다고 하던데...”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를 못한다겠지. 이 개념없는 남자야!
“배신당했니?”
“어? 어떻게 알았지? 나 오늘 진짜 배신당했는데. 미아리에 돗자리 깔아도 되겠네, 이여자”
진지해야할 상황속에서도 농담을 하는 남자에게서 배신이라는 말하나에 동지애가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배신. 배신. 배신!!!
믿었던 사람에게서 날아든 칼같이 아픈 감정. 이 남자도 지금 나처럼 가슴이 저밀테지.. 밀려들어오는 외로움이 나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리게 만들테지.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것이겠지.죽음까지 불사하는 그 미련곰팅이 같은 사랑에 절절거리며 생을 마감하려 하는것이겠지... 나처럼....
자신과 같이 이남자도 배신의 아픔을 맛보았다고 생각하니 여자는 남자에게서 이상하게 동질감이 느껴진다.
두사람은 검은 강물은 잠시 뒤로 묻어둔채 다리에 기대 앉아 달리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늘이 만난지 2년째 되는 날이었어. 그런데 그 나쁜 자식이 다른여자 생겼다고 뻔뻔하게 말하는거야. 이게 말이돼? 하. 웃겨 정말. 어떻게 그럴수가 있니? 2년이야. 2년. 지랑 나랑 먹은 밥그릇수가 몇갠데. 지랑 나랑 걸었던 그 길이 몇키로고, 지랑 나랑 찍었던 사진이 수백장인데. 지랑 나랑 함께 했던 추억이 얼만데.. 고작 얼마만나보지도 못한 여자한테 가버려?”
가방안에 넣어둔 먹다남은 소주를 꺼내 벌컥벌컥 마신 여자는 반쯤 남은 소주병을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마셔. 마시고 너두 다 털어놔봐. 배신당했다며. 우리 서로 다 털어놓고 편안하게 가자. 여자가 바람폈니?”
“....”
“바람폈어?”
재촉하는 여자의 질문에 한참 후에야 입을 떼는 남자.
진지함이라고는 어울릴거 같지 않은 남자가 사뭇진지하다. 그래서 더 진지해보인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그래서 헤어지자고. 그래서 알았다고 했지. 난 내가 사랑 이라는게 뭔지, 사랑이 아픈건지 잘 몰랐거든. 그냥 사랑해 이 말한마디만 하면 아. 사랑하는구나, 사랑이라는게 이런거구나. 그냥 그랬어. 그냥 만나면 심심하지 않았어. 선물하나에 행복해하는 그애가 보기 좋았어. 내 말한마디에 웃고 우는 그애가 귀찮을때도 있었지만, 예뻐보일때도 있었어. 꽃향기 가득한 그애의 품이 너무 좋아서 그 품에 안겨 잠이들었던게 편안하다 생각한적도 있었어. 그냥 그랬어. 이게 사랑인지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살았어.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도 덤덤했어.아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어. 내가 해야할 말을 그애가 대신 해줬기에 다행이다 싶었어. 정떨어져버릴 정도로 차갑게 그앨 보냈어. 내가 그애한테 그러면 안되는데. 그럼 나 정말 벌받는데.. 이렇게 끝을 내서는 안됐는데.. 끝까지 상처를 남겨주고 끝내는게 아니였는데...지금와서 후회가 돼. 이런감정..뭐니? 여진족이 말좀 해줘봐. 죽도록 미안해서 가슴이 답답한 이 감정, 이 느낌이 뭔지....”
남자는 왼쪽가슴을 치며 물었다.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모른채 살았다. 사랑받는것에만 익숙한 남자였다. 그래서 헤어짐은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니었다, 아팠다. 명치 끝을 망치로 두들겨 맞은것처럼 아파왔다. 왜 그런것일까? 내가 과연 사랑이라는것을 한 것일까? 듣고 싶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이 빌어먹을 마음을 알고 싶어졌다.
“사랑했네, 너 그 여자 사랑했어. 다만 자만심에 빠져있는 네 사랑이, 콧대만 높았던 네 사랑이 그걸 뒤늦게 깨달았던거 뿐이지. 사랑이란게 그래. 옆에 있을땐 모르고 그 사람이 떠나면 그제서야 아~ 이게 사랑이였구나, 느껴져. 그래서 사랑은 아픈거야. 조금만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행복했을텐데. 그렇게 후회하지만 사랑은 기다려 주지 않아. 자만심에 빠진 사랑은, 콧대만 높은 사랑은 혼자만의 이기적인 사랑이니까..”
“쳇, 그걸 지금 깨달아서 뭐해. 이미 딴놈한테 갔는데.”
“맞아. 이미 딴년한테 갔는데 그놈의 사랑타령해서 뭐하냐. 에이 나쁜자식.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라.”
“에이. 나쁜년. 나아니면 죽겠다고 해놓고 고새 바람을 피다니. 다시 찾아오기만 해봐라. 내가 받아주나..”
서로의 연인에게 욕을 퍼대며 위로를 해주는 남자와 여자...
하지만 여자의 눈에는 금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갑자기 밀려오는 그리움에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 터질것만 같았다. 닭똥같이 굵은 눈물방울이 콧잔등을 타고 내려오자 여자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
“나는 말이야.. 백진우 그자식이 다시 돌아오면, 잠시 한 눈팔았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하면.. 받아줄수는 있는데..”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라, 이 못된놈, 나쁜놈이라 아무리 욕을 퍼부어대도 미칠듯이 밀려오는 그리움에 목이 메이는건 어쩔수가 없는 모양이다. 떠나간 사랑, 사랑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운놈 무어가 그립고, 목이메이냐 미련하다 할지 모르지만 여자는 할수만 있다면 떠난 그 남자,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 그 남자가 다시 돌아와 발병난 다리를 다시 고쳐줄수 없느냐고 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고쳐줄수 있다고 생각했다.일년이 걸리건 십년이 걸리건 기다릴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미련하고 구질구질한 자신의 사랑에 실의를 느끼며 꾸역꾸역 눈물을 토해낸다.빌어먹을 사랑 따위 개한테나 나주라고 백번천번 생각하지만 가슴시릴만큼 그가 보고싶은건 어쩔수 없는 모양이다.
“추해보여..”
“알아. 나 추해보이는거.. 근데 눈물이 나는거 어떡해.”
끄억끄억 울고 있는 여자의 옆모습을 보던 남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지 버리고 딴 여자한테 간 남자 뭐볼게 남았다고 저러는건지.. 한번 돌아선 마음, 한번 식은 애정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것인데... 사람의 마음은 그런것인데....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고 있는 달과 별을 올려다보던 남자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피식 웃어버린다.자신에게 내뱉는 비웃음이였다. 여자한테 추해보인다 말했만 정작 추한건 바로 자신이라는걸 알리기 위한 비웃음.
허전했다. 그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술을 마셨고, 어쩌다 보니 이 늦은 새벽 한강대교를 건너게 되었다. 그리고 다리 난간에 위태하게 서 있는 한여자를 발견했다.
사랑에 배신당해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 여자.
남자는 그런 여자가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온갖 안좋은 수식어들을 헤어진 남자의 이름 앞에 붙여놓고 죽이네 살리네 깽판을 쳤음에도 결론은 그럼에도 사랑하노라 주절거리는 여자의 사랑이 미련해보이기도 하면서 어쩐지 안쓰러워 보였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여자에게 건내주었다.
“코풀지 말고 그 눈이나 닦아. 너 디게 드러워. 땟구정물 투성이야. 세수도 안하고 다니니?”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코를 팽~ 풀어버리는 여자.
“야야 코풀지 말라고 했잖아? 아 드러워. 드러워.”
코푼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남자에게 돌려주려는 여자의 손을 매정하게 밀어내는 남자의 찡그린 표정에 여자는 손수건을 남자의 얼굴을 향해 던져버린다.
옆에서 발악을 해대는 남자를 본체 만체 하며.
“네가 치인 이유를 알겠다. 뻔하지. 너 니 애인한테도 이런식으로 대했지?”
“.........”
“여자는 꽃과 같아서 매일매일 물을 줘야해. 그래야지 향기나고 예쁘게 피지. 물도 안주고 매일 구박만 하면 그 꽃 말라서 시들어버려. 너같은 놈 만난 그 여자 누군지 모르지만 진짜 불쌍하고 안됐다. 아마 말라 비틀어질데로 비틀어졌을꺼야.”
“웃기셔. 너나 잘하시지 그러세요. 여자는 꽃과 같다고? 푸하하하. 이 먹물귀신 어떻게 꽃이랑 여자랑 같냐?”
“ .. 그놈이 그랬거든.. 그 백여시는 내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단 한번도 나에게는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어. 항상 난 그놈한텐 강한 여자였으니까. 지독히도 독하고 강한... 그런데 그거 아나 몰라? 그놈 만났을때만큼은 나도 꽃처럼 활짝 피었다는걸. 강한 여자도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약한 여자가 되는걸. 그놈은 알까 몰라...”
“아주 소설을 쓰시지 그래.”
“으이그.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마.”
“여진족 넌 분명 할미꽃이였을 거야.”
“뭐?”
“여잔 꽃과 같다며... 그러니까 넌 할미꽃.”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화내지마. 그래도 꽃중엔 할미꽃이 제일 예쁘니까.”
“됐거든요. 이 싸가지에 밥 말아먹은 인간아.”
한참을 사색에 빠져 있는 여자의 염장을 지를대로 지르는 남자.
이남자랑 대화하다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여자는 관자노리를 짖누르며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부볐다. 이대로 쓰러져서 잠을 자고 싶었다. 집에가서 잠을 자야지 하면서도 쏟아지는 잠은 피할수는 없었다. 하긴 휘영청 뜬 달도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으니까..
긴 하품을 하며 여자는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욕심내도 가질수 없다는게 뭔지 이제는 알거 같아.”
“......”
“뭐냐고 안물어봐?”
“..안궁금한데..”
“좀 물어봐주면 안돼니?”
“그래, 그게 뭔데?”
“사람의 마음.. 그것도 이미 다른곳을 향해있는 사람의 마음.. 이기적인 내 욕심.”
그말을 끝으로 여자는 가누지 못한 고개를 남자의 어깨에 기댄채 잠에 빠져들었다. 씨커멓게 번진 눈가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것도 모른채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아파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이 여자 머리 디게 무겁네. 머리에 뭐가 든거야.”
어깨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다는걸 느낀 남자. 아까부터 한자세로 가만히 있었더니 어깨가 저려왔다. 그럼에도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러고 있는지는 남자 자신도 몰랐다. 술기운인가? 그냥 자신이 위로가 되어줄수 있다면 위로해주고 싶었다. 같은날 사랑에 배신당한 동지애 때문일까? 아니면, 어디선간 그 아이도 이렇게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어깨를 내어준것일까.
모르겠다. 왜 이러고 있는 것인지... 다만 마지막에 여자가 한말들이 머리에 맴돌 뿐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욕심내도 가질수 없다는게 뭔지 이제야 알았어..>
<사람의 마음....이기적인 내 욕심...>
[정후씨. 나 이제 정후씨 그만 만날래.]
[또 그런말 하는거냐? 넌 그말 지겹지도 않니? 이번엔 내가 또 뭘 잘못했는데? 어제 약속 못지켜서? 내가 못나간다고 말했잖아. 미련하게 기다린 네 잘못인데 왜 또 트집 잡는거야, 사람 귀찮게.]
[아니. 그것때문에 이러는거 아니야. 미련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난 정후씨 기다릴때가 제일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왜 또이러는데?]
[힘들어.]
[힘들어?]
[응.]
[왜? 뭐가?]
[정후씨 사랑을 의심하는 내가 힘들어.]
[힘들면 안하면 될거 아니야]
[그래서 이제 안하려고. 그만하려고.]
[뭐?]
[나도.. 이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만나려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아닌, 날 사랑해주는 남자 만나려고.. 정후씨 때문에 그동안 나 많이 아팠어. 겉으로는 행복하게 웃고 있어도 속은 썩어서 문드러질대로 문들어졌어. 마음에 병이 생겼어. 정후씨 때문에.]
[.......]
[사랑받지 못하는게.. 얼마나 가슴아픈건지 알아? 정후씬 알아? 사랑하는 남자의 등만 쳐다보는게 얼마나 사람 미쳐버리게 하는지 알아? 난 이제 알거 같아. 그래서 그만하려고.. 지쳤어. 힘들어. 그만 아프고 싶어.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 좋을대로해..]
[........]
[.........]
[나... 안잡아?]
[........]
[나...정말가?]
[......가... 너 하고 싶은대로해...]
[마지막까지 이러는구나. 나쁘다. 정후씨 정말 나쁘다..]
[나 원래 이런놈인거 몰랐어?]
[알아.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난 정후씨 사랑했고, 다 알면서도 사랑했는데... 이젠 그 사랑에 지쳤어. 나 혼자 욕심내서 정후씨 사랑했는데, 이젠 그 욕심이 모두 헛된 욕심인지 알아버렸어. 세상에서 가장 갖기 힘든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던데.. 난 단 한순간도 정후씨 마음 갖아본적이 없었어. 아마 평생을 가고 정후씨 마음 갖기 힘들테지...]
[행복해라.]
[응. 행복할꺼야... 노력할꺼야...]
너무도 쉬웠던 이별이었다.
잡아달라고, 네가 잡아준다면 난 아무대도 가지 않고 해바라기처럼 늘 너만 바라봐주겠다던 간절한 그녀의 마지막 눈빛까지 처절하게 무시해버리고 남자는 돌아섰다.
‘아무리 노력하고, 욕심내도 갖을수 없다는게 있다면 그건 사람의 마음. ‘
여자는 단 한순간도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 사랑에 지쳐 그 마음에 상처를 입어 남자를 떠나려 한다. 이젠 상처 받기 싫어서... 이기적인 사랑에 지치기 싫어서...
하지만 모른다. 사랑에 치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남자의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을... 차마 잡을수 없음을 알기에 그 사랑을 보낼수 밖에 없던 남자를, 여자는 알지 못했다.
“그래 행복해라. 두번다신 나 같은놈 만나지 말고, 너 좋다는 남자 만나서 잘먹고 잘살아봐라. 그래서 항상 웃는 모습으로.... 항상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줘라.”
한강대교를 쏜살같이 달리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리 난간에 기대 잠든 남자와 여자의 얼굴을 간지럽히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하늘 높이 떠있던 달은 어느새 지고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제부로 이세상은 끝나기를 바랬음에도 오늘도 해는 떴다.
“으음...”
살속으로 파고드는 추위에 여자는 몸을 움츠린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는곳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따뜻했다. 포근했다. 바람의 향기 일까? 코끝에서 기분좋은 향이 퍼진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이대로 조금만더... 자고 싶다. 조금만더... 조금만더....
더듬거리는 여자의 손가락이 이불과도 같이 포근한 남자의 옷 안으로 들어간다. 손바닥에 닿는 누군가의 매끈한 맨살. 그리고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손가락마디들.. 두근두근,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소리.. 그리고... 그리고.....
“꺄아아악.”
탄탄한 남자의 가슴을 떡 주무르듯 주물던 손가락이 순간 굳어버리며, 뜨기도 힘든 눈을 번쩍 뜬 여자는 한강대교가 떠나가라 소리를 냅다 질러 버린다.
세상에, 세상에 이럴수가!!!!!!
“미쳤어. 미쳤어. 서여진. 너 정말 돌았어. 돌았다구.”
좀전까지 남자의 가슴을 주물거리던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기억하려 했지만 이미 편집되어진 기억은 여자를 미치게 만들었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고 찾아온 곳이 한강대교. 그래 여기까지는 기억이 난다. 내가 죽으려고 했던가? 그래, 그러려고 겁없이 여기까지 온것이겠지.그런데 왜 안죽고 여기서 자고 있는거지? 아-모르겠다. 모르겠어. 건 그렇고 이놈은 누구야. 누군데 내 옆에서 자고 있는거지? 아.. 머리 복잡하다.
여자는 깊게 잠들어버린 남자의 얼굴을 경계해가며 살폈다.
세상 모르게 잠든 남자.
누구지? 누굴까... 누군데, 내 옆에서 자고 있던거지? 그리고 왜 난 이 남자의 가슴을......
서여진, 너 설마..욕..구..불...만이니? 배신당한것도 모잘라 이젠 욕구불만까지. 대단하다. 대단해. 서여진!!! 여자는 애꿋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순간,
“뭘봐. 이 여진족아.”
남자의 눈꺼플이 살포시 열리며 방경 10cm에 위치해 있는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여자가 뒤로 엉덩방아를 쪘다.
“아함~ 잘잤다.”
크게 기지개를 켠 남자는 어깨가 결린지 두어번 어깨를 돌려주다 인상을 찡그렸다.
“젠장. 바위덩이가 아주 어깨를 깔아뭉게놨네.”
그때, 여자의 머릿속에 필름처럼 지나가는 어제의 기억들.
아리랑 민요를 부르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남자로 인해 죽지도 못하고 구구절절 신세한탄이나 늘어놓았던 자신의 모습! 실연 당한게 자랑인냥 쉴새없이 떠들어대며 청승맞은 눈물이나 흘려다던 추태! 목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여자의 눈가에 작은 경련이 일어난다. 이럴때 쪽팔린다고들 하나?좀전까지만 해도 편집됐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자 여자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아니, 여기서 쥐구멍 찾기는 힘들테고, 백미터를 몇초에 뛰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체력검사했을당시 백미터를 십오초만에 뛰었는데, 죽자사자 뛰면 십초면 되겠지? 그래, 뛰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뛰자. 쪽팔려 죽겠으니 우선 뛰고보자. 다시는 한강대교는 쳐다보지도 않겠다. 아니, 한강대교가 있는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쌀것이다. 물론 이남자와 있었던 어제 일 역시 잊을 것이다.
건 그렇고, 내가방.. 가방은 어딨지?
“여진족아. 우리 해장국이나 먹으러 갈까? 어깨 빌려줬으니까 니가 쏘면 난 고맙고..”
“가방... 내가방...”
정신이 없는 여자에겐 남자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 한시라도 빨리 가방을 찾아서 줄행랑을 쳐야했기에.
“너 어제 대단했어. 죽어버리겠다고 난간에 매달려있는걸 내가 억지로 살려낸거잖아. 나 아니였으면 지금쯤 물고기 밥이 되었을껄? 생명의 은인한테 보상금은 없어?”
“가방..가방..아 저기있다.”
구석에 내동댕이 쳐 있는 가방을 줏어든 여자의 입에 미소가 퍼진다. 이제 뛰자. 뛰자.
그리고 마악 도움닫기를 하려하는 순간.
“아무리 실연의 상처가 크다고 해도 죽으려는 생각은 마라.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약!! 지금은 죽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
남자의 마지막 말이 여자를 붙잡았고, 가방을 굳게쥔 여자의 손이 떨린다.
“당신이...당신이...뭘 안다고....”
잘난척하는 남자의 설교따위는 더이상 못들어주겠다.
시간이 약이라고? 알거든.. 그건 나도 알거든.. 그런데 그를 잊는 그 시간 동안의 괴로움은 어쩔건데? 죽고 싶을만큼의 외로움은 어쩔건데?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욱신욱신거리는건 어떻게 참을건데? 의사가 고쳐준데? 약을 먹으면 다 낫는데? 아니잖아. 그 긴 시간동안 아무것도 할수가 없잖아. 그래서 죽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인데.. 내가 죽던 말던 네가 무슨 상관인데..
“시간이 약이라고? 아니... 그건 아파보지 못한 사람들의 변명일뿐이야.”
“그래도 살아.. 사랑에 버림 받아도, 그럼에도 살아. 우리는...”
“미안하지만, 그딴 충고 하나도 안고마워.”
한걸음씩 앞으로 걷는 여자의 다리가 후들거린다. 바보같이 다른사람에게 약점따위나 들키고.. 망신, 망신 이런 개망신이 어디있담.
여자는 그렇게 뛰지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한채 난간에 의지한체 한발한발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런 여자의 뒷모습을 남자는 한동안 바라보았다.
2006년, 3월의 마지막날...
여자와 남자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안만날거라, 대한민국 서울하늘 아래에서 다시는 마주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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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어주세요..
꼬리말.....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