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男女戀愛白書 [남여연애백서] -03

양윤정 |2006.05.22 09:33
조회 644 |추천 1

 


3장.

만남.

“그남자와 나, 악연인가? 필연인가?”



오늘 역시 여은이의 옷으로 쫙 빼입은 여진은 자신의 탁월한 코디에 찬사를 보내며 지하철역사에 들어섰다.

오늘의 포인트는 요 광택나는 구두.

여은이가 요번달 받은 월급으로 산 새 구두였다. 겁없이 여은이의 새구두까지 신고나온걸 보아하니 오늘밤도 서씨집안엔 한 바탕 소란이 날것으로 예상된다.

‘여은아. 나중에 내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서 대박 터지면, 다 갚아주마’

광택나는 구두를 보며 자신감에 차 있는 여진은 전철에 몸을 실었다.

삼성역에서 내린 여진의 발이 빨라진다. 5시까지 면접인데 20분이 오바된것이다. 광택나는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오르는 여진은 발 뒤꿈치가 서서히 아파져옴을 알았지만 뛰는걸 멈출수는 없었다. 딱총맞은 촉새에게 면접날부터 찍히기는 싫었으니까.

8번출구를 빠져나와 100m쯤 오다보면 진주오피스텔이 보인다고 했지?

하지만.. 높디 높은 빌딩숲에서 진주오피스텔을 찾는건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것과 같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100m를 뛰고 또 뛰어봐도 진주오피스텔은 보이지 않았다.

광택나는 구두엔 흙먼지가 쌓여 광택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은 고사하고 오늘밤 서씨집안에 두 자매의 피바람이 예상된다.

어렵사리 진주오피스텔을 찾은 여진은 딱총맞은 촉새에게 8번출구에서 100m가 아닌, 6번출구에서 200m라고 똑똑히 알려줄 참이다. 생고생을 하면서 찾아왔는데, 면접에서 떨어트리기만 해봐라. 씩씩대며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며 옷매무새를 여미던 여진은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은 엘레베이터 앞에서 또한번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아뿔싸! 이런걸 머피의 법칙이라고 하는가? 고장이란다. 내부수리중이란다. 비상계단으로 올라가는 여진의 등가엔 땀이 베인다. 만일하나, 정말로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내 기필코 이놈의 진주오피스텔을 테러하리..

걸음이 무거워진다. 발이 터질것만 같다. 아마 뒷꿈치에 물집이 잡혔을테고, 새구두의 구두굽은 반쯤 달았을터다. 여은이의 무시무시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아직 3층이나 더 올라가야하는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보는 여진의 얼굴이 영화속 살인마 스크림의 얼굴처럼 일그러진다.


복도끝. 새구두의 아픔에 힘겨워하는 여진은 “LO비젼”이라고 써있는 문패를 발견하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여진은 방금 들어왔던 곳이 “LO비젼”이 맞는지 의심부터 들었다. 분명, 8층에서 우측으로 꺾어 복도 끝이라고 했고, 설명해준데도 잘 찾아왔다. 문앞에 LO비젼이라고 써있는 문패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런데, 이곳은... 이곳은....

보기에도 침이 꼴까닥 넘어갈 만치 낯 뜨거운 정사의 장면의 포스터들이 사무실 벽에 여기저기 붙어 있는 이상하디 이상한 사무실이었다.

왜! 저런 포스터들이 붙어 있는것인가. 왜? 왜?


“혹시, 서여진씨?”

등 뒤에서 들리는 낯선 목소리를 듣는 동시, 여진은 이곳이 어떤 곳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딱총맞은 촉새가 자세한건 만나서 얘기하자며 자꾸만 전화로 얘기하는 걸 피했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LO비젼’이라는 회사 이름이, 소리 내어 읽으면 “에로비젼”이라는 것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실어줄수 있는 작가가 되리라, 다짐했던 여진은 이곳에서는 절대 꿈과 희망을 실어줄수 있는 대본은 쓰지 못할 뿐더러,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삼류포스터가 즐비한 이곳에선 단 일 분도 서 있고 싶지 않았다. 잘못찾아온거 같다고 등 뒤에 서 있는 딱총맞은 촉새에게 제가 원하던 곳이 아니라고 정중히 인사드리고 나오자 그리 결심 한 여진은 빙그르 돌아섰다. 하지만 돌아선 순간, 여진의 머리털은 삐죽 설수 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벗어나기 힘들거라는 위험한 상상. 왠지 이곳에서 평생 동안 야리 꾸리한 글만 써대야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다.

등뒤에 서 있던 딱총 맞은 촉새의 생김새는, 한마디로 깍두기였으니까.

저건, 딱총맞은 촉새가 아니라, 대포 맞은 코뿔소라고!!


“잘 찾아왔네. 우선 저기 앉아서 얘기하자고..”

여진은 두툼한 손가락에 끼어진 용무늬 반지가 참으로 인상적인 코뿔소의 손바닥에 의해 사방이 꽉 막힌 회의실로 억지로 끌려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회의실 역시 낯 뜨거운 포스터들이 사방에 도배되어 있었고, 책장엔 성인물 비디오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냥 씬 50%는 베드신으로 나가니까.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타 영화사랑은 좀 다르거든? 다른 영화사는 그냥 싸구려 필름에, 싸구려 배우들에, 싸구려 대본으로 영화를 찍지만, 우리는 아니야. 우리는 최고급 필름을 쓰고, 배우들도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하거든. 그런데 필름만 좋고, 배우들만 좋으면 뭘하냐고, 영화의 꽃 시나리오가 좋아야지.. 안그래? 섹스신 하나도 고급스러워야해. 여관방이 아닌, 호텔방에서 정사를 치루고..올 로케이션으로다가 일본에서 찍을거야. 어때? 괜찮지?”

대포맞은 코뿔소가 하는 말들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다만 울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웃을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여진은 그저 신세한탄만하고 있었다.

“실장님, 밖에 남자배우 오디션을 보러왔습니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가씨의 독한 향수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사무를 보는 아가씨라고는 절대 보이지 않는 진한 화장과, 야한옷이 다시한번 이곳이 어떤곳인가를 절실히 인식시켜주었다.

서여진, 드디어 바닥까지 가는구나. 쨍하고 해뜰날이라고? 비포장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렸다고? 엠병할.. 이게 뭐냐고, 이게.....


“들어오라고해. 안 그래도 여기 작가분도 와있으니까. 두분이서 같이 보면 좋겠군. 서작가가 쓴 대본에 오디션 볼 배우니까 잘 보라고... 여배우는 이미 정해졌어. 황지나 알지? 이바닥에서는 꽤 유명한데.. 아휴. 내가 걔 스카웃하느랴 똥줄이 닳았지. 닳았어.”


정신이 몽롱해져간다. 대포맞은 코뿔소의 손가락에 보이는 황금 용무늬 반지가 두세개로 보인다. 만약, “전 이런일 못합니다” 큰 소리치고 일어난다면 대포맞은 코뿔소는 “지금와서 무슨 소리냐, 나랑 장난하는거냐”며 황금용무늬 반지를 낀 커다란 손으로 한방 맞을게 불보듯 뻔하다. 한대 맞으면 전치 5주 정도는 나올거 같은데...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인지라, 똥마려운 강아치처럼 몸을 비비꼬던 여진은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안그랬다간, 눈앞에 있는 계약서에 “서여진”이라는 싸인을 해야 하니까.

뭐가 좋을까. 뭐가좋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방법은 없다. 아무래도 저 계약서에 싸인을 해야할거 같다.

여진이 이곳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향수 냄새 독한 사무실 아가씨와, 그 뒤로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아마, 오디션을 본다는 남자 에로배우인가 보다.

이런 제기랄, 내 28년 살다살다 에로배우랑 마주 앉게 되다니. 내가 쓴 시나리오의 첫 남자배우는 조인성 내지는 강동원으로 낙인찍어놨었는데, 이름없는 에로배우가 내 시나리오의 첫 남자배우가 될지 누가알았겠나. 여진은 서럽기 그지 없다.


“자네, 서작가 옆에 앉지.”


멀대 같이 큰 에로배우주인공은 코뿔소가 가르키는 자리에 앉았고 여진은 더이상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이 연속으로 들이닥치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만 푸욱 숙이고 있었다.


“아이고. 남자배우 얼굴한번 자알 생겼네. 몸도 그럴싸하고~ 근데 하체가 좀 약한거 같군. 성인물 비디오에서 제일 중요한건 요 아래란 말이지. 풀샷으로 잡을땐 괜찮은거 같은데, 바스트쇼트는 좀 빈약해 보일거 같은데. 뭐 그거야 지금부터라도 관리하면 괜찮긴 하지만..”

참으로 듣기가 민망한 말일세. 허나, 코뿔소가 극찬하던 남자의 낯짝과 몸매, 그리고 빈약한 하체가 궁금하긴 하다. 여진은 슬며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본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터라 여진의 시선은 하필이면 그곳을 향했다.

‘쩝. 내 보기엔 튼실하기만 하네.’

“좋아, 오늘 당장 계약하지. 서작가는 요기다 싸인하고, 자네는 잠시만 기다려. 곧 계약서 가지고 올테니까. 둘이 얘기 좀하고 있으라고..”


코뿔소는 계약서를 가지러간다며 회의실을 나갔고, 나란히 앉은 여자와 남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옆에 앉은 남자야 작정하고 온 거라 계약서에 도장 찍기만을 학수고대하겠지만 여진의 입장에선 이시간, 이 현실이 너무나 버겁다. 코뿔소가 계약서를 가지고 저 회의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서여진의 인생은 바닥으로 치닫는다.

안돼! 그럴순 없어. 내 평생을 섹스씬 50%가 되는 삼류 대본을 쓸 수는 없어. 빠져나가야 한다.무슨일이 있어도!

여진은 결심한다. 내가 이자리에서 저놈의 코뿔소한테 맞아서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리.

발가락을 꼼질대며 슬며시 구두를 벗기시작하는 여진.

엘레베이터는 분명 고장났을테고 다시 8층이나 되는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선 맨발로 뛰는것이 낳을터. 뒤도돌아보지 말고 뛰는거다. 뒤에서 콧뿔소가 쫓아와도 이 악물고 뛰면 살수 있을것이다.

신발을 벗은 여진이 슬금슬금 엉덩이를 빼고 일어섰다. 옆에 있는 남자가 모르는 척만 해준다면 여진은 이 계획에서 성공할수 있을것이다. 제발 옆에 앉은 남자가 오지랖 넓은 남자가 아니기를...

하지만, 여진의 계획은 처음부터 휘청거린다. 막 자리에서 일어난 여진의 손목을 강하게 부여잡는 남자의 손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이..이거 놔요. 이 손 안놔요?”

조용하게 하지만 무언의 협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속삭이지만, 남자는 그럴수록 손을 강하게 부여잡는다.

“놓으란 말이야. 제발..”

협박이 애원이 된다. 눈물이 나올 거 같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놔주세요. 제가.... 아무래도 잘못 찾아온 거 같거든요. 전 이런데인지 모르고 온건데. 그냥 모르는척 해주시면 안돼요?”

“달리기 잘해요?”

“네? 건...왜..”

“말해 봐요”

“글쎄요.. 백미터를 이십초에 뗬나?”

“젠장. 앞으론 10초에 뗘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여진의 손목을 확 이끌고 회의실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딱 마주친 코뿔소의 커다란 몸을 툭 치고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뒤에서 어딜가냐고 코뿔소가 따라나 오자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뛰기 시작하는 남자와 여자.

그렇게 여진은 남자의 도움으로 30분간의 공포 속에서 탈출 성공했다.



복잡한 빌딩의 뒷골목에 와서야 남자는 여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덕분에..”

이남자 아니였으면, 평생 ‘에로작가 서여진’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살뻔했으니, 여진은 숨을 고르고 있는 남자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뭐, 굳이 이 남자의 덕분만은 아니었다. 이남자 없이도 여진은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그곳을 빠져나왔을테니까. 허나, 결과론적으로 봐선 이 남자의 공이 매우 크다.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에로배우주인공자리까지 버려두고, 탈출작전에 동참해주었으니 고맙고 미안하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하기에 여진은 남자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저때문에 어떡해요? 지금이라도 가셔서, 오디션 보세요.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웠습니다.이 신세 잊지 않을게요”

“됐어요. 뭐, 나도 그런데 취미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댁이 고마워 할 필요도 없고, 미안해 할필요는 더더욱 없어요. 젠장할, 시간만 낭비했네.”


여진에겐 관심도 없다는 것처럼 말하고는,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정장에 먼지라도 묻었을세라 탈탈 털어대는 남자의 행동에 여진은 괜히 머슥해진다.

50%정도 이남자가 꽤 멋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던 착각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주 잠시잠깐, 이남자가 나한테 관심이 있나 착각속에서 허우적거렸던것도 사실이고, 아주 잠시잠깐, 내손을 붙잡고 뛰었을때 내 심장도 뛰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그게 아니였니? 제기랄! 결국 나혼자 쌩쇼한거군! 착각은 자유라고 하지만, 방금한 착각은 서여진 삶에서최악의 착각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지금 이상황에서 이런말 하기 참 뭣하지만 이 남자 꽤 낯이 익다.

여진의 손을 잡고 엘레베이터 고장으로 비상계단을 뛰어내려와 높디높은 빌딩숲의 어느 외진곳에 와서야 여진의 손을 풀어주던 이남자가 잘은 기억이 안나지만, 어디선간 꼭 한번 만났던 남자같았다.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은 나지 않았고, 물어볼까? 말까? 몇번을 망설였지만, 남자는 앞서 뛰고 있었고, 여진은 뒤따라 뛰오고 있는 상황이라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우리 어디서 만난적 있나요? 낯이 익어요~” 라고는 말할수 없었다. 만약 뒤통수에 대고 그리 물었다면, 작업녀로 오해를 살테니까. 하지만 그냥 길가다 봤겠지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낯이 익었고, 궁금한건 못참는 성격인지라 여진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우리 어디서 만난적 있나요?”

“아니요.”

“그래요? 어디서 본 얼굴인데..”

“흔한 얼굴 아닌데, 내 얼굴..”


여드름자국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를 다섯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하는 남자로 인해 여진의 한쪽 눈썹이 꿈틀댄다. 세상엔 제 아무리 날고 뛰는 의사라해도 고칠수 없는 병이 3가지가 있단다. 향수병, 상사병, 그리고 온국민의 적 왕.자.병!!!

저남자 , 생긴건 기생오라비처럼 생겨 먹어가지고, 거기다 말하는 뽐새 역시 정이 안간다. 뭐 물론, 좀전까지만해도 저남자가 멋있어보인건 사실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댁때문에 그런 고생한건 아니라는 그말 한마디에 멋있어보이던 그가 금새 왕자병걸린 기생오라비로 전락해버렸다.

괜히, 낯이 익다는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저남자에게 자기한테 관심있어서 찝쩍대는 작업녀가 되기 싫었던 여진은 이쯤에서 헤어지는게 피차 낳을듯 싶었다. 뭐, 저남자 역시 그걸 바라고 있을테지만-


“그럼 전 가볼께요.”

“네. 그러세요.”


아직도 안갔냐는듯 말하는 남자에게 고개만 까닥 숙이고 돌아서려는 순간, 여진의 머리속에 카메라의 후레쉬가 터지듯 떠오르는 한컷의 필름.

그 필름속에 등장했던 남자의 얼굴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과 오버랩된다.


“혹시...한강대교?”


1달전이다. 자살한다고 한강대교를 찾았을때, 그곳에서 만났던 남자.

‘시간이 약이다, 죽을거 같이 아프지만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명언을 남겨서 여진의 기억속에 가끔씩 떠오르곤 했던 남자.

60억의 인구중에 반은 남자, 반은 여자일터. 거기다 모든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서울에서 이남자를 또다시 만나게 될줄이야 꿈에선들 상상했겠냐만은 그래도 다시만난 이남자가 조금은 반갑기는 하다. 이만남이 악연인지 필연인지 잠시 헷갈리긴 했지만 말이다.

여진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남자 역시 여진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기억을 떠올리려 했고, 기억이 떠올랐을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웃어버린다.그 웃음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상당히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비웃음이라는걸 여진은 알았다.


“아. 그때 그 여자? 안죽고 살아있었네.”


악연이다. 별 기색없이 내뱉은 저남자의 말투와, 비웃음에 여진은 그리 결론 내렸다. 이건 악연이라고..

거기다, 여진의 화를 돋구는 말들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작가에요? 에로작가?”

“저기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그런데 인지 모르고 왔다니까요.”

“에이. 그걸 누가 믿어.”

“댁이야 말로 꿈이 에로배우였나봐요?”

“나야말로 그런덴지 몰랐거든요.”

“퍽이나..”


여진이 잔뜩 비꼬는 투로 말했다. 어차피 악연인거 끝까지 가보자고. 누가이기나.


“안믿네. 메일이 왔더라구요. 영화배우 뽑는다고. 그것도 주인공으로..”

“주인공 맞아요. 에로배우 남자주인공.. 잘어울릴거 같던데..뭐 하체는 좀 빈약하지만..”


한방 먹였다. 십년묵은 체증이 가시는듯하다. 여진에게 기세좋게 당한 남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이 보였으나, 잠시후 여진을 빤히 쳐다보며 아까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픽 웃어버린다.


“아까 곁눈질로 내 아랫도리 몰래 훔쳐보는걸로 봐선 댁이야말로 잘 쓸거 같던데..잘어울려요. 한번 써보지 그래요?”

“뭐라고요?”

“침넘어가는 소리까지 다 들었는데..요즘 많이 외롭나봐.”


토마토처럼 쌔빨갛게 변한 여진의 두 볼이 씰룩거리며 남자를 노려본다.


“눈에서 레이져 나오겠네.”


내가 그때 저놈을 죽였어야했어.

여진은 그때 저놈의 입을 꿰메서 한강에 밀어버리지 못한게 한이 되었다.

저놈의 주둥이를 꽁꽁 묶어서 물고기 밥으로 줘버렸어야 하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좀 특이했던거 같은데. 아,맞다. 여진족.큭”


상종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말을 섞은 내가 바보지.

여진은 남자의 말을 꿋꿋이 묵살하며 지하철역을 찾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새구두가 쓸린 뒷꿈치에선 피가 흐르는지 발바닥이 끈적끈적하다. 한발자국 걷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거기다 처음엔 관심없다는 식으로 여진의 존재를 무시하던 남자가 이제는 흥미롭다는 듯, 아니, 놀려먹는게 재밌는듯 옆에서 쫄랑쫄랑 쫓아오며 자꾸 여진의 신경을 긁어댄다. 하긴, 그때도 오지랖이 오죽 넓었었나...


“요즘은 살만한가봐. 이렇게 일자리도 구하러 다니고.. 그땐 세상 다 포기한 사람같던데.”

“........”

“근데, 에로작가는 너무했다. 아무리 세상살기 각박해도 그렇지.”


발은 아프지, 지하철역은 아무리 찾아도 안보이지, 옆에선 자꾸 딴지를 거는 남자때문에 짜증은나지, 여진은 폭발하기 일부직전이었다. 일진 사나운 하루다. 최악의 하루다.


“이봐요. 상관말고 그냥 가던길 가세요. 네?”

“난 지금 내 갈길 잘 가고 있어요. 왜요? 내가 댁 쫓아가는건지 알았어요?”


옆에서 쫄랑 쫄랑 쫓아오는 남자도 지하철을 찾고 있었나보다. 또한번 머슥해진 여진은 한번만 더 말을 걸면 저놈의 주둥이를 꼬매버리겠노라 다짐했고, 어렵게 찾은 지하철역의 계단을 내려갔다. 몇 발자국 뒤따라 오던 남자가 조용한걸 보니 방향이 다른 모양이다.


퇴근시간이라 인산인해를 이룬 지하철은 숨도 못쉴만큼 사람들로 가득했다. 자리라도 남으면 앉을텐데, 자리는 커녕 서 있기도 불편한 어정쩡한 자세로 있으려니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거기다 발은 아파 죽겠는데, 사람들은 사정봐주지도 않고 여진의 광택이 사라진 구두를 밟아댄다.

시간이 흐르자,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갔다. 여진은 하이에나처럼 두눈에 광기를 띄우며 빈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전방 5m앞에 빈자리가 포착되었다. 절대 자리를 뺏길수 없기에 자리로 돌진하는 순간 여진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가 있었으니, 그 남자는 재빨리 여진이 겨우 찾아낸 자리에 풀썩 앉아버렸다. 자리를 빼앗겨버린 여진은 망연자실 할뿐이다. 분명 내가 먼저 맡은 자리인데, 감히 겁없이 내 자리를 탐한 자가 누군가 확인하는 순간, 망할! 또 만났다.


“어? 아까 안보이던데.”

젠장!

“같은 방향이었구나. 어디까지 가요?”

제기랄!

“다리 아파요?”


철봉에 온몸을 의지한채 기대고 서 있는 여진이 보기 안쓰러운지 편안한게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가 그리 묻는다. 다리 아프냐고... 여진은 양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보이는 저남자가 행여 양보를 하겠어? 또 놀려먹으려는 수작이겠지 하는 마음에 모르는척 했지만, 내심 양보해줬으면 하는 바램으로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남자를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피곤에 지친몸은 자존심따위는 필요없는 모양이다.


“앉아요.”


그런데 이게 웬일!~ 레이디퍼스트인건 아는지 선심쓰듯 여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남자에게 약간의 의심은 들었지만 지금 당장 발가락이 터지기 직전이기에 여진은 자리에 앉을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내가 왜 이자리에 앉았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이남자, 여진이 앉은 자리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는 또다시 여진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는 중이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게 있는데...그때 정말 죽으려고 했어요?”

“......”

“하긴 술이 왠수지. 술만 먹으면 앞뒤 생각도 못해. 우리 나라 사람들, 그래서 문제야 문제.쯔쯧.”

“제가 딴데로 갈까요?”

“됐어요. 나 곧 내려요.”


빨리좀 내려라. 이자식아! 여진은 학수고대한다. 눈앞에서 깐죽대고 있는 이 남자가 다음역에서는 내리기를.. 내리기를..

허나, 곧 내린다는 이남자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여진의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내리자 기다렸다는듯이 자리에 앉아버린다.


“에휴. 오늘도 공쳤네. 또 어디가서 오디션을 보나. 이번엔 정말 잘될 줄 알았는데.”

“.......”

“댁도 오늘 하루 공쳤죠?”


대꾸해주는이 하나 없는데 혼자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남자가 조금은 안되보이긴 한다.

여진은 남자에게 예의상 대꾸라도 해줄까 싶었지만, 관두었다. 괜히 또 당할거 같다. 저남자의 말빨에.


“삐졌어요?”

“.....”

“아까 놀려서?”

“....”

“보기보다 소심한 구석있네. 거 성격좀 고쳐요. 입은 댓발 튀어나와서 꿍해있는거 보기 안좋아요.”

“좀 조용히 좀 해줄래요?”

“내 입가지고 내가 얘기하는데 누가 뭐라 그러나?”

“.....”

“생명의 은인한테 그럼 못써요. 벌받아요. 내가 그때 댁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저 때문에 무슨 고생을 했는데요?”

“댁이, 잠들어버렸잖아요. 사람이 술먹고 정신 못차리고 쓰러져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가버릴수도 없고, 남녀가 유별한데 여관에 데려 갈 수는 더더욱 없고.댁 업을 만큼 힘이 충만하지도 않고, 댁 덮칠만큼 나 눈 낮지 않으니 사람된 도리라면 그냥 있어 주는 수밖에 없잖아요. 안그래요?”

“아, 그러세요. 그래서 지금 생색내는거에요? 그렇담, 그냥 경찰에 신고하지 그러셨어요?”

“우리 나라 경찰 술취한 댁 집까지 데려다 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 아니거든요.”

“참 오지랖도 넓으시군요. 경찰이 해주지 못하는걸 해주고..”

“칭찬 아니죠 그거?”

“맘대로 생각하세요.”


뒤틀어질대로 뒤틀어진 여진의 마음은, 여러번 남자의 몸을 과녁 삼아 화살을 쏘아대고 있는 중이었다.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넉살 좋은 이남자, 자신이 여진의 생명의 은인인마냥 너스레를 떨고 있는 중이다.

여의도 역에서 잠시 정차한 지하철이 다시 긴 터널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지하철은 이래서 안좋다. 풍경도 없고, 빛도 없다. 사방천지가 암흑이다. 그나마 사람들도 반쯤 내린 텅빈 지하철이라 여진은 이시간이 무료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말에 조금씩 대꾸를 해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정말 작가에요?”

“에로작가는 아니에요.”

“에로작가 말고.. 그냥 작가선생. 맞아요?”

“.....뭐, 작가는 아니고 작가 지망생.”

“그렇구나. 잘 되면 나중에 댁이 쓴 시나리오에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할수도 있겠네요.”

“그런일은 없을거에요. 난 에로영화는 안쓸테니까.”

“듣고 보니 기분 나쁘네. 아직도 날 오해하고 있나본데, 정말 아니거든요.”

“.......”

“내가 울 아버지 이름에 먹칠할일 있나? 에로배우하게..아마 모르긴 몰라도 내가 에로배우 주인공에 캐스팅 됐다고 하면 울아버지 졸도할거에요. 아니지, 당장 호적에서 파버린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럼 에로배우 둔게 자랑이겠어요?”

“점심때 꽈배기 드셨어요? 그만 좀 꽈대요.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처음부터 시비를 걸고 넘어진게 누군데. 이미 사람 기분 다 긁어놓고, 갑자기 왜 친한척?


<이번정차할 곳은 마포. 마포역입니다 내리실문은..>


“그럼 전 가볼께요. 조심히 가세요.”


마포역에 당도했음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울리자마자 여진은 미련없는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앞으로 다가섰다. 빨리 집에가서 이놈의 구두를 벗어던지고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그럼 오늘 쌓인 피로는 풀리겠지.

족욕탕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때 등뒤에서 여진의 어깨를 남자가 톡톡 건드린다.


“여기서 내려요? 나도 마포역에서 내리는데. 묘한 인연이네. 안그래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 여진의 미소짓고 있던 입가가 살짝 떨려온다.

분명, 이 남자와 나 사이에 액이꼈음이야..


“시나리오는 언제부터 썼어요?”

지하철에서 내려 개찰구를 나올때 까지도 여진과 남자는 동행했다. 그리고 쉬지 않고 말을 걸어댄다.

“건 왜 물어봐요?”

“궁금해서.”

“궁금할것도 많네.”

“참 성격 한번 까칠하네.그거 노처녀 히스테리죠?”

“.....”

“언제부터 썼어요, 시나리오. 내가 그쪽에 좀 일가견이 있어서 그래요. 나한테 잘보이면 다리 놔줄수도 있는데.”


네놈의 오지랖이 그쪽까지 뻗혀있을 줄이야...

남자는 대단한 빽을 가지고 있는거 마냥 과시댔지만, 여진은 별 반응이 없다. 다만 빨리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을 뿐이다. 발바닥이 거의 마비가 되어가는 정도였다.


“소개시켜줄까요? 울아버지?”

“미안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아무리 급해도 말만한 아들이 있는 할아버지랑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요”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누가 그런 소개 말했나?”


기가차다는듯 남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고, 여진은 또한번 자신이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하지만, 뜬금없이 아버지를 소개시켜주겠다는데,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한심하다는듯 아직까지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 남자를 남겨두고 여진은 앞서 걸었다.안그랬으면 쪽팔림에 일그러져 있는 여진의 표정을 틀켰을테니까.


“울아버지 소시적에 시나리오 좀 썼는데. 아마 신입작가들은 울 아버지가 양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서문희작가 알죠? 그 작가도 울아버지 제자였다죠? 그리고, 최우진작가도 울아버지랑 호형호제하는 분이고.”


여진의 발이 멈춘다. 그러자 여진의 보폭에 맞춰 뒤따라 오던 남자의 발도 멈춘다. 뭔가 구미가 당기니 말을 했나보다. 침을 꼴까닥 삼킨 여진이 옆으로 돌아본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남자의 매우 바람직하게 생겨먹은 얼굴을 마주보며 약간은 의심 가는 음성으로 남자에게 묻는다.


“아버님...성함이...”

“왜요? 이제야 관심 있어요?”

“말해봐요. 빨리”

“이자, 선자, 복자.”

“이, 이선복? 댁 아버지가 이선복 선생님이라구요?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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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올릴게요..

월요일이 다가오네요.

이번주 즐겁게 보내세용.~


추천수1
반대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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