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쿠 압력 밥솥의 예약기능_ 이런, 이런! [펌]
스프링
|2006.05.23 00:48
조회 1,439 |추천 0
스스로 온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는 바람에 30대 중반의 자취 프로로 공인 받은 나는 오래 전부터 심각한 고민을 하나 안고 있었다. 도에 지나치게 건강에 유의하는 나는 ‘백옥 같은 쌀밥이 건강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뱃속 깊이 새기고 있는 터라, 짙은 갈색의 현미를 빵빵하게 섞어서 지은 밥을 먹어왔다. 하지만, 세상에 모든 것을 취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법! 현미밥이란 게 몸에는 상대적으로 좋다고는 해도 물리적인 골치거리가 하나 있는데, 이는 바로 내가 가진 빨간색 밥솥에서는 현미라는 것이, 아무리 미리 불려둔다고 해도 여간해서는 잘 안 익는다는 것이다.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목욕탈 때수건 같은 까칠함이란!
지지난 주 어느 날 저녁에도 땡글땡글함이 심히 떨어지는 현미가 가득한 밥을 먹으면서, ‘낙엽 찌꺼기를 섞은 듯한 이 노무 밥을 먹는 게, 명랑한 건강생활에 과연 도움이 되기나 하는 건가?’ 하고 심각한 의문으로 기분이 침잠해 있었는데, 마침 별생각없이 이리저리 돌리던 리모콘이 동아TV(란제리 쇼를 자주 해 주는 아주 바람직한 채널)를 지나서, 리홈압력밥솥을 판매하고 있는 ‘**홈쇼핑’을 잡아 주었다. ‘현미밥이고 잡곡밥이고 다 잘 되고, 각종 찜 요리까지 간편하게 한다’ 라는 쇼핑 호스트의 말을 듣는 순간, ‘므흣, 바로 이거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30대 중반의 암울한 솔로라고 해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삶의 질이 심히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홈쇼핑에서 방송하는 상품은 항상 홈쇼핑의 홈페이지에서도 판매한다는 생활의 지혜를 아는 나는, 간단히 **Mall에 접속하여 주문을 내려 했는데, 리홈은 너무 비싼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베러비잉(better-being)은 포기하고 그냥 웰비잉 모드로 쿠쿠 6인용 압력밥솥(백색)을 전격 주문하였다. 이제는 나의 방 한쪽에 빵실하게 자리잡게 된 하얀색 쿠쿠.
며칠 전 심심풀이로 쿠쿠의 기능들을 추가로 살펴보니 사용 방법도 무지 간단한 예약기능이 눈에 띄었다. 내가 이걸 이용할 생각을 진작에 왜 못 했을까. 현미 한 컵에 백미 세 컵을 넣어 4인분을 준비하고는 6:30으로 예약을 하고 책이나 보면서 뒹굴 거리다가 새벽 1시가 좀 지나 잠이 들었는데… 한참 자는데, 꿈결인가 실제인가, 갑자기 여기저기서 기차소리가 칙칙폭폭 나고 방 안에는 하얀 매연이 가득하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밥 냄새는 수증기를 타고 흐르고.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을 직감한 나는 일단 창문을 활짝 열고 나서 급히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그랬더니, 아, 허무하게도 배불뚝이 하얀색 쿠쿠는 침대 옆에서 온 몸으로 울고 있고, 시계는 이제 겨우 6시를 가리키고. 당연히 평소 6시 30분에 울리는 알람 시계와 휴대폰은 다소곳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고. ‘아, 이게 다 뭐야. 무슨 예약 기능이 이래!’ 하고 분개하고 배신당한 마음을 다잡으며 설명서를 다시 읽어보았더니, “예약하는 시간은 그 시간에 밥을 먹고 싶은 것을 나타냅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이런! 30대 중반의 허무한 또하루가 너무도 일찍 시작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