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대학을 다니고 같은 교정을 거닐며
같은 강의실에서 호흡하고 스쳐 지나갔던 친구에게.
당신이 날 모르지만 난 당신을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당신이 권위적인 총장과 탐욕스런 재단 관계자들과
얼굴을 붉히며 싸우던 그 모습을 난 아직도 컴퓨터 구석 한켠에
파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수해 때문에 폐허로 변한 비닐하우스를 일으켜 세우려
남쪽 지방에 갔을 때 나 역시 옆에서 소심하게 당신의 일손을 거들
었습니다. 약간의 딴짓이었지만, 그런 봉사의 손길을 메모하고 사진
으로 담아 놓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세계경찰을 자부하는 패권주의자들의 부대에 뛰쳐들어갈 때
엉거주춤 카메라를 들고 따라 달려들어갔습니다. 예상치 못하게도
당신이 그 사람들의 국기를 불태울 때 놀란 가슴과 눈동자로,
떨리는 손으로 그 장면을 담았습니다. 당신이 체포되어 질질 끌려갈
때 나는 단지 카메라를 들고 있었기에 같이 가지 않는 점이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양심이 찔려 애써 외면한 채 또 한번 셔터를 눌러버
렸습니다.
많은 이들이 당신을 나무라합니다.
심지어는 당신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이기도 한 사람들 마저,
이제는 당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따스함이 대지를 감싸 거리를 거니는 것만으로
희망의 향기가 전해지는 이 때에,
그러나 이제는 당신의 뜨거움이 죽어지내는 이 계절에,
그 때 당신이 그토록 저항했던 것들이 망령처럼 되살아납니다.
권위적인 총장과 탐욕스런 재단 관계자들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들을 '소생'하는 썩은 땅은 아직 음지에
서 호흡하고 있습니다. 적은 실적이지만 커다란 권위로 나와 당신으
로 부터 더욱 많은걸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몇 년 전의 그들에게
볼펜을 집어던지던 당신의 극단적 행동을 기다리는 건 절대 아니라
오.
당신이 사랑하고 진심으로 달려가 도와준 동네 주민들과 시골 어귀
분들은 자꾸만 진전되는 탐욕스런 '자유'의 힘에 억눌려 우리의 기
저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하루에 수백만의 시민을 날라주
던 기관사 아저씨들과 여성 근무자들은 작은 신분에 너무 많은 걸
요구한다고 하여 민주주의 투쟁의 상징이자 사형집행을 받았다 살
아남은 신화적인 인물에 의해서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젠 그들 마
저 대다수의 시민들의 찌푸림을 받고 있습니다.
당신이 혐오하듯 나 역시 혐오하는 '세계경찰'을 자처하는 패권주의
적 무리들은 한술 더 떠 더 넓은 곳, 더 안전한 곳에 더 위험한 기지
를 건설하고 좀 더 유연한 전략과 좀 더 비싼 무기들로 우리들 뿐 아
니라 동북아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뜨거움이 죽어지내는 계절에
우리의 동시대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많은 시간 동안 혼자 질문 해보았습니다.
언제나 주변에서 구경하듯, 곰곰히 생각만 하며 탁상공론을 일삼는
소심한 나를 용서해주오.
하지만 때로는 조금 차분해 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과 내가 다르듯, 그리고 저런 의문이 생기듯,
우리 모두의 모습은 그 차이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경계선은 그렇다 치더라도,
권위적이라고 느껴지는 인물이나 체제를 무조건 적으로 악마화하는
이분법적인 잣대는 이제 더 이상 만 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우리 모
두를 한 가지 표정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단지 약자의 편에 섰다는 것이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는 약 20년 전
의 상황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나버렸습니다. 과거의 투쟁의 역사를
신화화하는 회고적 담론에 안주하거나 권위적인 자와 패권주의적인
자를 그저 악마의 이미지로 박제화 하는 한,
당신 역시 언젠가 당신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스스로 외면하고
그저 기성체제의 한 축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지금의 체제를 밑바닥에서 떠받치고 있는, 우리 모두의 얼굴과
당신의 편에 선 이 구경꾼 친구에게 우리 모두가 투쟁하고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해주오. 생각의 차이에 인간적 차이를 두어버리는 이념
의 표딱지를 먼저 버린 채로 진실은 오직 진실에 의해 그리고 사랑
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교환되고 교류될 수 있다고
그리고 당신의 그런 행동이 이제 껏 불거졌던 모든 불합리와
부조리와 비참에 대해 진실로 화해할 수 있음을 함께 알아가 주길
바라오. 청년의 행보가 계속되길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