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사태의 역사적 의의
조찬용
|2006.06.15 13:34
조회 147 |추천 3
◈ 무신사태의 역사적 의의
(1728년 무신사태 고찰, 2003년, '아이올리브'에서 발간)
무신사태(소위 이인좌란)는 당론의 국왕선택에 따른 권력투쟁의 격화와 기존 붕당체제의 해체적 징후라는 정치상황에서 일어났으며, 무신사태의 주도층이 외방기병(外方起兵) 및 경중내응(京中內應)의 거사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유민(流民)의 격증(激增), 도적(盜賊)의 만연(蔓延), 제 사회계층(諸 社會階層)의 저항의 증폭이라는 당시의 사회정세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도층간의 대립 갈등, 실천기반의 한계, 1727년(영조3)정미환국을 통한 경중(京中) 주도층의 약화와 관망, 호남 부안 변산 노비적 세력과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한 노비적 세력의 이탈, 관군 중심 계획의 치밀성 부족, 양민층의 동원계획 미흡 및 이중 거사 계획의 판단 착오, 면밀한 작전계획의 결여 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동원 및 작전계획의 미흡은 거병(擧兵)의 주도층이 유생(儒生) 출신이 많았다는 사실에도 기인한 바 크다 하겠다.
안동 상주 진입 실패와, 현 전북 정읍지역인 태인 거병(擧兵)의 좌절, 일부 지역의 취군(聚軍)의 허술함 등은 그런 사정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청주 안성 죽산과 거창 안음 합천 함양 삼가지방의 점령이 신속하게 진행된 것은 각 사회계층의 참여 및 호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모칭집단(冒稱集團), 군관(軍官), 향임층(鄕任層), 소빈층(小貧層)을 비롯한 피역민(避役民)의 활약은 무신당, 즉 거사군측의 세력확장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는 물론 거사군의 선전 홍보의 결과이기도 하지만,「제역감역(除役減役)」「불략민재(不掠民財)」의 강령이 채택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이 계층의 현실적 요구가 수용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인좌가 자신의 노비 모두를 방역(放役)한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하급 무력기반이던 토적(土賊), 사노(私奴), 소작인(小作人)에 대한 급가모군(給價募軍)은 그 동원 형태에서 볼 때 경제적 관계가 강화되어 가는 역사적 방향과 일치하는 것이며, 일부 토적 및 사노층(私奴層)이 양반과 결계형태(結契形態)로 결속하였다는 것은 17세기 이후 소빈층과 하층민의 성장을 반영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이 두 참여 및 동원세력의 존재와 관련하여, 특히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현실비판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합천 안음 거창 함양 삼가 초계 진주 등 경상우도의 진보적 사림파들과 토호(土豪)들의 역할이 무신사태의 준비단계를 거치면서 점증(漸增)하고 있었던 반면에, 공리공담의 사변적 철학으로 현실과 유리(遊離)되어 있던 보수적 사림파인 진신사족층(縉紳士族層:지위가 높고 학문이 뛰어난 사대부계층)의 당론적 입장에 따른 실천기반의 한계는 점차 분명해졌다는 사실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무신사태는 조선후기 정치체제 및 권력구조의 내부 모순의 결과로 나타난 민중 동원을 통한 마지막이자 가장 대규모의 권력투쟁이면서 의리명분론쟁(義理名分論爭)의 표출인 동시에 소외계층의 변혁운동으로써, 16,17세기 이후의 고립적 국부적 민중운동의 흐름을 수용하고, 당시 각 사회계층의 이반행동(離叛行動)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무신사태의 영향으로 1730년에 공사(公私) 노비 중 양처(良妻) 소생은 어머니를 따르게 하는 종모법(從母法)의 시행이라는 제도 개선책의 마련과, 1750년(영조26)에 양인(良人)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균역법(均役法)의 도입, 그리고 1764년에는 노비 문서를 관리하던 기관인 장례원(掌隷院)이 혁파되는데 1728년 3월 발발한 무신사태가 기여를 하였다. 또한 한강 각 나루에 종3품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서울 경비를 강화하는 제도개선을 마련하게 되었다.
무신사태 평정 후 조정은 180년 동안 노론과 외척들의 세도정치가 민중을 외면하고, 삼정(三政)의 문란, 관료의 부패로 이어져, 그들이 조선을 망하게 한 당사자들이면서도 1910년 한일합방 당시 일왕(日王)의 은사금을 받고 작위를 받은 친일 매국노 76명 가운데 서인(西人) 분파인 노론(老論)이 67명이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무신사태 후 국민통합을 외면한 노론(老論)의 일당 독재가 더욱 심화되어 민중이 도탄에 빠지고 지역차별까지 증폭되자 1811년(순조11) 홍경래의 평안도농민전쟁과 1862년(철종13) 단성 진주 함양 거창 상주 청주 부안 순천 등 임술농민항쟁, 그리고 1894년(고종31) 동학혁명(갑오농민전쟁) 등 조선후기 민중운동이 비약적으로 촉발하게 되는 단초를 무신사태가 제공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인 의의(意義)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조선후기 민중운동이 사족층(士族層)의 탈락과 배제를 수반하면서 잔반(殘班) 향임층(鄕任層) 등의 부농층(富農層)을 주도층으로 하고, 하층민(下層民)을 여러 형태로 동원하였던 발전단계를 거쳐, 잔반(殘班)과 소빈층(小貧層) 하층민의 일체성을 바탕으로 하여 성숙단계로 이행한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볼 때, 戊申事態는 이러한 부농층과 소빈층 및 하층민이 봉건사회 해체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는 민중운동 발전의 필연적 통과점으로써 교량적 과도기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역사적인 일대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권인호 교수는 1998년 5월에 발간한「남명학연구논총 제6집 ‘내암 정인홍의 지치주의적 학문경향성과 개혁사상’」이란 글에서, “강우학파(江右學派), 즉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중심지역인 진주 합천 삼가 등에서 1919년 3.1 만세운동 때 어느 지역보다 빨리, 그리고 면단위 장터 중심으로 격렬하게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또한 1923년 진주지역에서 신분 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 일어난 것은 바로 ‘내암 정인홍’의 민본사상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고향으로써, 또한 강우학파의 중심지로써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정의에 순(殉)하고 앞장서야 한다는 정신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는 ‘남명 조식’의 고향인 합천 삼가지역에서 3.1 독립만세 운동때공재규 임종봉 오영근 정연표 윤규현 정현하 이상동 진택현 한필동 정치규(現 쌍백 육리의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 1843~1911)의 동생) 허동규(現 가회 오도리의 창주 허돈(滄洲 許燉, 1586~1632)의 방손) 등의 주도로 삼가장터에 무려 20,000여명(일본측 자료 10,200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일제의 침략성과 야만성을 규탄하였으며, 이 때 일본 경찰과 헌병에 의해 공재규(쌍백외초) 김기범(생비량관동) 배숙원(가회장대) 윤성현(가회구평) 이낙현(삼가문송) 권상주(가회두심) 권영규(가회둔전) 박선칠(삼가두모) 이상현(삼가 두모) 한우상(삼가 일부) 최도인(삼가 문송) 우氏(삼가 하판) 등 60여명(일본측 자료 5명, 현재 13명 확인)이 순국하고, 150여명(일본측 자료 20명, 현재 17명 확인)이 총상을 입었으며, 수형자는 50여명(일본측 자료 38명, 현재 25명 확인)이나 되는 등 가장 격렬하게 일제에 항거한 지역이라는 사실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된다. 즉, 서울 파고다 독립만세 운동 다음으로 큰 독립만세 운동으로 유관순의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 운동(일본측 자료 3천명 참여, 11명 순국)과 함께 독립운동사에 크나 큰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