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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최고운 |2006.07.25 23:58
조회 443 |추천 11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온 우주의 풍요로움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문제는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배반하는 일 같은 것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에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사랑의 속성이었다. 우리는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랑이 가지고 있는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사랑의 빛이 내 마음 속에서 밝아질수록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그만큼 짙게 드리워진다는 건 세상천지가 다 아는 일이었지만, 나만은 다를 거라고, 우리의 사랑만은 다를거라고 믿었다.

                                            -본문중에서

 

 

 

 서점에서, 오늘, 오랫만에 소설 한 권을 샀다.

 

 아주 오래 전-

 제법 재미있게 읽었던,

 "냉정과 열정 사이" 의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공지영과 함께 또 한 번 공통 집필한 소설이라는 글귀에 눈이 끌리고,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걸 믿어요?" 라는

 예쁜 색깔의 표지 위에 조그맣게 적혀 있는 글귀에 마음이 밟혀

 나는 오랫만에, 정말 오랫만에 충동적으로 책을 사고 말았다.

 

 소설의 결말은- 해피 엔딩이었다.

 

 사실 해피엔딩이라는 말은- 어떻게 정의되는 걸까?

 어느 사랑은 이루어지고, 어느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진정한 해피 엔딩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파고 들면 어디에 진짜 해피엔딩이 있는 것일까?

 

 아니- 그런 결과 자체를 논하는 것에 어떤 무게가 있단 말인가.

 사실은 그런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설에 대해 말할 때 끝이 행복한가 그렇지 않은가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 글이 어떤 길을 따라 펼쳐져 있는가,

 그 길을 따라 가면서 내가 어떤 광경을 보았는가,

 그 광경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가-

 그것이 더 중요한 문제니까,

 해피 엔딩 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섬세하고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가슴저린 사랑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글이

 사랑을 했던 여자의

 사랑에 대해 희망과 기대를 가졌던 여자의

 사랑함으로써 외로웠고, 사랑함으로써 행복했던 여자의

 사랑을 함으로서 이별을 택하고 이별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럼에도 사랑을 버리지 못해 아파야만 했던

 온 세상 모든 여자들의-

 아니, 어쩌면 적어도 나와는 너무 닮아있는 그 여자의

 이야기 였다는 것이다.

 

 사랑 후에 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을 하고 있는 동안에 알지 못했던 것들은

 어째서 사랑 후에 일제 몰려와 사람을 당혹케 하는 것일까.

 

 내가 이 글을 하루 사이에 내리 세번이나 읽어내리는 동안,

 책 제목을 들여다 본 누군가가 이렇게 농담처럼 말했다.

 

 - 사랑 후에 남는 것들? 뭔지 알아.

 - 뭔데요?

 - 사랑 후에 남는 건, 카드 빚이지.

 

 나와 그 사람은 함께 웃어버렸지만, 사실 사랑 후에 정말 남는 것이 이런 힘든 생활고의 잔재 뿐이라면 그건 너무 가슴 아프지 않은가.

 

 공지영은 슬프고도 담담하게 사랑과 이별에 대해

 너무나도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써내려 나간다.

 너무나도 나를 공감하게 하는 이야기를.

 

 '이제 와서 그와 헤어지던 무렵을 생각하면, 모든 일이 한참 후에 생각하면 그렇듯이 알 수 없는 어떤 힘들이 우리의 이별을 독촉하고 있었음을 느낀다.....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말을 해놓고 보니 그것조차 불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한다고, 겁도 없이 나는 그에게 말했었는데 그는 그 말을 쓰지 않았다. 나 혼자서만 그에게 사랑해, 사랑해, 하다가 내 입마저 다물어 졌던 것이다......

 

 그래도 전화 한 통은 해줄 수 있지 않았어- 내가 인내심을 다해 천천히 물었다.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해도 아직은 이 사태를 믿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희망의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니라고 내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희망의 문을 낑낑거리며 내가 붙들고 있었던가. 나는 그렇게 온 존재의 힘을 다해 닫히려는 문을 붙들고 있는데 준고는 나를 외면한 채 태연히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쪽은 보지 않은 채,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었어, 하더니 식탁에 앉았다. 그가 나를 바라만 보았더라면, 그가 내 손을 잡아만 주었더라면 모든 일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도 모른다. 머릿 속으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토악질처럼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나를 사로잡았다.....

 

 나로서는 그를 미워한 채로 보내는 편이 나았다. 그 때 나는 너를 사랑했어....., 보내고 싶지 않았어, 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그는 간다. 그리고 나는 남는다. 다시 시작하자고 한들, 한번 보낸 마음이 그렇게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그건 이별보다 더한 희극 같았다.'

 

 앞을 바라보고 나가려 애쓰는 홍,

 최홍이라는 여자.

 스물 아홉을 바라보고,

 칠년 전의 사랑을 잊으려, 또한 잊지 않으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런 노력을 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여자는

 그렇게 사랑을 보내고 시작하고,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

 

 잊지 못할 줄 몰랐다고,

 아니 잊지 못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오래 동안 잊지 못할 줄은 몰랐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이 사랑 자신을 배반하는 일 따위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마음 속으로 여기는 그 여자, 최 홍, 아니지, 베니.

 마음 속 호리병 속에서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러나 한 때 행복을 허락받은-

 그걸로 모든 순간을 다 가질 수 있었던 복받은 여자.

 나는 홍이 되어 웃고, 울고-

 오랫만에 몇 번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지 않은 소설을 만나게 해준

 우연- 또는 행운- 이라 부를 만한 순간의 선택-

 내가 그 순간에 서점에 들어가고픈 충동을 느끼고,

 또 어느 코너를 지나다가 이 책을 보게 된 바로 그 우연에-

 길게 길게 감사했다.

 

 이제는 사랑이 떠나고서야 사랑을 깨닫게 되는 남자, 준고의 이야기를 읽어볼 차례일까.

 냉정과 열정 사이를 읽을 때-

 나는 일부러 두 권을 함께 사서-

 동시에 한 챕터씩을 번갈아 읽었다.

 어느 한 쪽 만의 감정을 알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랬다.

 하지만, 이미 먼저 홍이의 감정을 알아버려 홍이 편이 되어버린 지금은-

 이제 준고가 어째서 그렇게 홍이를 외롭게 홀로 뛰도록 내버려 뒀는지-

 할수 없이 조금은 책망하는 눈빛으로 읽어볼 수 밖에 없다.

 

 

 

 내일은, 오랫만에 또 한 번 서점에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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