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충청도의 한 가난한 시골마을을 상상해보자.
피아노라는 걸 구경해본 사람은 커녕, 피아노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저 마을의 초등학교에 놓여있는 풍금 한 대가 고작. 내가 자라던 곳이 바로 그런 마을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처음 풍금을 봤을 때 너무나 신기했다.
음악시간이되면 교탁 옆 창가에 풍금이 놓여지고 선생님은 두 손으로 아주 멋진 화음을 만들어낸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없었으니 음악연주를 처음 들어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풍금을 쳐보기로 했다.
방과 후에 남아서 도레미파솔을 다섯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누르면서 연주는 시작되었다.
내게는 유리한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학교에 놓여있는 풍금을 만진다고 야단칠 선생님은 없었다.
아버지도 음악을 아주 좋아하는 분이어서 그 시절 집에서 만도린을 즐겨 연주하곤 했다.
아버지의 허락하에 학교의 풍금은 내 차지가 되었다.
당시 나는 아주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2~3년에 한번씩 전근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의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다보니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거기에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시자 아무데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한창 뛰어놀 나이에 풍금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처음엔 연습이라고 해야 한손으로 멜로디를 치는 정도였다.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형이 방학때 내려와서 내 모습을 보더니
"풍금을 연습하려면바이엘 책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 때부터 바이엘 책을 가지는게 내 소원이 되었다.
그리고 3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드디어 바이엘교본을 선물받았다.
학교가 파한다고 곧바로 풍금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풍금이 이반저반 옮겨다니니 어디 있는지 찾아다녀야 했다.
또 장소가 적당치 않으면 혼자 낑낑대며 풍금을 옮겼다.
수업이 끝나지 않은 학년에서 풍금을 사용하고 있을 때면 바이엘 교본을 옆에 끼고 운동장에서 기다려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바이엘 교본을 펼쳐놓고 끊임없이 연습했다.
책 모서리가 다 닳고 실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곧 실력이 일취월장해 웬만한 동요는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옹달샘', '둥근해가 떴습니다' 등을 쳤는데
'넓고도 넓은 운동장에~'로 시작하는 운동회 노래는 특히 좋아하던 곡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쯤에는 선생님들이 내 연주를 듣더니
"넌바이엘은 떼도 되겠다. 이젠 체르니를 연습해야지." 했다.
이미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형에게 나는 교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형, 체니르라는 책이 있는데 그걸 쳐야 피아니스트가 된데."
한참 후 집에 들른 형은 "아무리 찾아봐도 체니르라는 교본은 없더라. 체르니라는 건 있던데 혹시 그거 아니냐?" 했다.
중학교에 가면서 상황은 좀 나아졌다. 무엇보다 학교에 피아노가 있었다.
흔히 있는 88건반 피아노보다 건반이 두 옥타브 정도 적은 베이비 피아노였지만
당시에는 피아노를 갖춘 중학교도 드물었다.
그때까지 나는 바이엘이 풍금교본인 줄로만 알았지 피아노 교본인 것을 몰랐었다.
피아노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클래식곡이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시골 중학교에 피아노가 있었던 것은 음악선생님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분이었는데 처음 부임할 때 학교에 피아노를 사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때와는 사정이 달라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는 없었다.
피아노 뚜껑은 늘 잠겨있었다. 철사 같은 것으로 몰래 따고 도둑 피아노를 쳤다.
가능한 한 살살 두드리면서도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싫어하는 과목이 있을 때면 도망나와 피아노를 치다 벌도 여러번 섰다.
처음엔 야단을 치던 음악선생님도 내 실력을 보더니 피아노를 치도록 허락해줬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피아노를 칠 줄 아는 학생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음악회가 있으면 늘 1등이었다. 음악실기시험을 볼 때도 선생님대신 내가 반주를 맡았다.
피아노 명곡들도 알게 되어서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곡을 즐겨 연주했다.
그때 내 첫째 소원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고 둘째 소원은 내 피아노를 갖는 것이었다.
두가지 소원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안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음대 진학을 포기했다.
소원대로 피아노를 갖게 됐다면 어땠을까. 아마 금방 진력이 나 그만 두었을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기가 힘들었기에 일단 기회가 오면 온 마음을 다해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클래식 연주자가 되었다면 나는 재즈의 깊은 맛을 몰랐을 것이고
혹 알았다 해도 좋은 연주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클래식으로 굳어진 다음에는 재즈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나는 두가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항상 감사하게 여기며 살고있다.
1997년 12월 경향신문 매거진 X "나의 젊음, 나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