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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모델로 한 정밀묘사

박효진 |2006.09.26 21:04
조회 42 |추천 0

미술시간.

 

왠지 투박해보이고 서글픈 표정의 새하얗던 석고상.

 

빛나는 금색 잠자리가 예뻤던 4B연필과

 

유난히도 부들부들해서 잘 닳아졌던 지우개.

 

왠지 그 앞에 앉아있지만 해도

 

내가 대단한 화가라도 된 기분을 주는 이젤.

 

그리고 그 위에 놓여진 흰 도화지.

 

 

미술시간에 정밀묘사를 해 본 기억은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혼자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미술시간에 정밀묘사를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차라리 미술시간처럼

 

내 앞에 확실히 서 있는 대상을 그리는 거였으면

 

훨씬 더 쉬웠을텐데,

 

슬쩍 슬쩍 이젤 너머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석고상을 보면서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었으면 훨씬 더 쉬웠을텐데..

 

 

 

그 사람은,

 

석고상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날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결코 쉽게 그릴 수 없게 합니다.

 

 

 

 

 

한번 긋고 이게 아닌것 같아서

 

지우개로 쓱쓱 지우고.

 

또 두세번 그어보다가.

 

이게 아닌가?..하고

 

마치 희미해진 사진으로 남아

 

순간의 시간 속에 정지되어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을

 

끊임없이 내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려고 노력하면서

 

다시 지우개로 지우고..

 

이게 맞나? ..긴가민가 하는 기분으로

 

오늘도 이젤 앞에서

 

그 사람을 하루 종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 사람이 내 앞에 섰을 때

 

그리고

 

내가 여지껏 그려놓았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때.

 

 

그 사람은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사람이었는데,

 

내 도화지 위의 그 사람은

 

4B연필로 그려진 새카만 사람이었음을 깨달았을때.

 

 

내 도화지 위의 그 사람은

 

문드러져 버린 지우개가 말해주듯,

 

지우개로 자꾸 지워서 일어나버린 도화지가 말해주듯,

 

내 자신없는 선들로 그려진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내 기억에서 수천번 수만번 나오느라

 

닳아질대로 닳아진

 

내 손 가는대로, 내 마음대로 그려버린,

 

전혀 다른 사람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눈부시게 새하얗게 빛나는 그 사람은

 

내 앞에서 눈부시게 시리도록 내 그림을 비웃고 갑니다.

 

 

 

나는

 

이젤 앞에서

 

울다가

 

도화지를 구겨버립니다.

 

 

 

 

그렇게 몹시도 피곤했던 그림그리기는 끝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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