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콩 소녀

박준식 |2006.10.06 14:06
조회 19 |추천 0

 

옛날 한 마을에 콩 농사를 크게 하는 대지주가 있었다.  지주의 농장에는 많은 하인들이 항상 콩을 관리하고 다듬고 지냈다.

 

그 중에 한 소녀의 일은 콩을 맷돌에 가는 일이었다.  매일 소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 종일 큰 맷돌을 돌리며 노란 콩 파란 콩 빨간 콩을 갈았다.  맷돌이 잘 돌아가도록 물을 가끔씩 부으면서 맷돌 가운데에 콩을 집어넣고 그렇게 몇 시간씩 콩을 가는 게 소녀의 일과였다. 매년 종류별로 콩을 수확할 때마다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소녀는 거의 한 해를 콩을 돌리며 몇 해를 지내고 있었다.

 

사방이 다 콩밭이었기에 소녀는 가끔씩 시장에 가는 일 외에는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가끔씩 시장에 나가면서 소녀는 보따리 장사를 하면서 돌아다니는 또래의 소년을 만나게 되었다.  마을에 같은 나이의 또래도 많지 않은 터라 둘은 쉽게 말벗이 되었다.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다니던 소년은 소녀에게 이곳 저곳의 이야기를 해주고는 하였다.

 

소년은 소녀가 어떻게 한곳에서 지루한 일을 반복하며 살수 있는지 묻고는 하였다.

 

“우리 농장엔 내가 쓰는 맷돌 말고도 큰 맷돌들이 많이 있거든.  대부분 콩들은 그런 큰 맷돌을 써서 가는데 내가 쓰는 맷돌은 제일 좋은 콩들을 주인님께 드리거나 최상급 상품을 만들 때나 쓰는 거야.  예쁘고 흠집 없게 생긴 콩들을 가는 거지.”

 

소녀의 말에 의하면 맷돌을 가는데도 어느 정도 요령이 있는 듯 했다.  너무 빨리 돌려도 안되고 너무 느리게 돌리면 잘 돌아가지 않고 적당한 때에 물을 넣고 속도를 맞춰서 잘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다른 일들이 해보고 싶거나 가보고 싶은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소녀는 굳이 다른 일을 해본 적도 없고 가본 곳도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사실 소년은 소녀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살고 싶어했다.  소녀에게 옆 마을의 유명한 건물도 보여주고 싶었고 산 위에서 보이는 마을의 전경도 보여주고 싶었다.

딱히 살 방법이나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혼자 구경을 하는 것 보다는 소녀와 함께 본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소녀는 여전히 콩을 갈면서 지냈고 소년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다.  소녀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에 만족한 듯 살고 있었지만 소년은 세상엔 더 많은 것이 있다고 소녀에게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새삼스레 자신의 생활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년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소년의 말대로 소녀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소녀는 주인님에게 속해있고 콩을 갈지 않고선 소녀는 생활을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콩을 가는 일은 이제 소녀에게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소년을 만날 때면 소녀는 푸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년은 그저 안타깝게 소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가고 소년은 푸념만 일삼는 소녀에 대한 감정이 식어감을 느꼈다.  한때 소녀의 소박하고 여유로웠던 성격은 사라지고 소년에게 풀 수 없는 문제만을 안겨줌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년의 설렜던 기다림은 점점 무디어 가기 시작했고 여행의 즐거움도 점차 사라져갔다. 

 

얼마간 고민을 하던 소년은 결국 중대한 결심을 했다.  소녀의 농장에서 같이 일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소년이 그 동안 모은 돈에 몇 년간 일을 해서 더하면 소녀의 삯을 지불할 수 있다고 했다.  여행을 즐기던 소년은 농장에 들어와 밭을 갈고 농기구를 옮기며 소녀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푸른 하늘 아래 평안한 농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가는 일도 얼마가 지나니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아졌다.  소녀는 여전히 바깥 생활을 하고 싶어 농장 생활을 따분하게 여기게 되었지만 소년은 일을 하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박하고 서정적이던 소녀의 성격은 이제 불평이 잦아지고 참을성이 없어졌지만 소년은 그래도 다시 삶이 따스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소녀의 삯을 거의 다 지불하게 되었을 즈음 먼 지방의 거상이 농작물을 사기 위해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다.  상인과 함께 온 수하들도 마을 사람과는 다르게 세련된 옷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시장은 상인이 가지고 온 물건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시장에 나온 소년과 소녀는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다른 볼일을 위해 소녀와 헤어진 소년은 농장으로 돌아오는 무리들 중에서 소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혼자 집에 돌아온 소년은 농장에서 열린 잔치에서 소녀가 상인의 심복이라 불리는 사람과 함께 다음날 떠날 것이라는 소식을 소녀의 동료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이미 상인의 심복이 소녀의 삯을 주인에게 지불하고 돌아가는 즉시 혼례를 치르리라는 내용이었다.  소년은 잠시 자신이 보따리 장수였을 때를 생각해보았다.  그가 좀더 기다렸다면 소녀와 함께 떠났을 수도 있었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소녀가 미워지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푸념에 섞인 그 동안의 인고의 세월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농장에서 일하기로 약속했던 햇수는 아직도 일년이 남아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마음에 소년은 그날 밤을 뜬 눈으로 새었다. 

 

다음날 상인 일행이 떠나는 광경에서 소년은 소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 옷을 입고서 예쁜 콩을 갈던 손엔 콩과 비슷한 크기의 진주 반지를 끼고 있던 소녀는 소년을 본 듯 했지만 이내 외면하려는 듯 보였다.  소년은 다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떠나고 소년은 남은 일년을 농장의 풍경을 즐기려고 노력하며 보내었다.  소녀가 오랜 시간을 일했을 곳간과 끝없이 펼쳐진 듯한 푸르른 콩밭, 티없이 맑고 파란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달래고 단순하지만 고결한듯한 콩 농사를 열심히 지었다.  일년이 지나고 나서도 소년은 농장에서 더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록 소녀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만 자신이 남아서 일을 하는 건 소녀를 기다림이 아니라 농사가 좋아져서라고 생각했다.  여름이 지나고 하늘이 더 푸르러 질 때 소년은 그렇게 콩을 기르게 되었다.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