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이라는 건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내가 그 초원에 몸을 두고 있었을 때, 나는 그런 풍경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적인 풍경이라는 느낌도 없었고,
더구나 18년 후까지 그 풍경을 구석구석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때 나에겐 풍경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
그러나 이제 그 풍경 속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다. 그녀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토록 소중해 보이던 그때의 그녀와 나, 그리고 나의 세계는
도대체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래, 지금의 나로선 그녀의 얼굴을 바로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됐다.
내가 지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건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배경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中 p.15~p.16
-
"어깨 힘을 빼면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쯤은 나도 알아.
그런 말은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구. 알겠어?
내가 지금 어깨 힘을 뺀다면 나는 산산조각이 난단 말이야.
난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살아왔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
한번 힘을 빼고 나면 다신 본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구.
난 산산조각이 나서 어딘가로 날려가 버리고 말거야.
자기는 왜 그런걸 모르는 거야, 응?
그걸 모르면서 어떻게 나를 돌봐 준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 中 p.22
-
"스무 살이 되다니 어쩐지 바보 같애.
난 스무 살이 될 준비 같은 거, 전혀 안돼있었어.
묘한 기분이야, 어쩐지 누군가에 의해
뒤에서 무리하게 떠밀려 온 것만 같다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中 p.22
-
"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를 좋아하지?
꼭 파시스트 같아. 정말 시시하다구.
어째서 남자들이란 머리가 긴 여자가 품위가 있고 상냥하고 여성스럽다, 그러는 걸까?
난 말야, 머리가 길고 야비한 여자를 250명쯤은 알고 있어, 정말."
-무라카미 하루키, 中 p.90~p.91
-
"부자의 최대 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해?"
"모르겠는데?"
"돈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거야.
가령 내가 반 친구한테 뭘 좀 하자고 하면 상대는 이렇게 말한단 말이야.
'나 지금 돈이 없어서 안돼'라고.
그런데 내가 그런 입장이 된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못하게 돼.
내가 가령 지금 돈이 없어 그런다면, 그건 정말 돈이 없다는 소리니까. 비참할 뿐이지.
예쁜 여자가 '나 오늘은 얼굴이 엉망이니까 외출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과 같거든.
못생긴 여자가 그런 소릴 해봐, 웃음거리만 될 뿐이지."
-무라카미 하루키, 中 p.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