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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寺와 함께한 겨울사랑이야기-2

이중호 |2007.02.08 18:20
조회 102 |추천 0
 

 

내게는 오래도록 함께해 온 소중한 벗이 하나 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내가 가야 할 곳이면 어디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며 내 삶의 배경이 되어 주고 동반자가 되어 준,

 아주 오래된 그 벗의 이름은 ‘길’이라 한다.

 



내가 머물고 있는 산사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지 않는 숲이 하나 있다.

그 숲 앞에서 푸른 바람이 열어 주는 초록의 문을 밀고 들어가면

숲은 어느새 반가운 얼굴로 길손을 맞이한다.

그 숲에서는 겨울의 작은 햇살에도 강아지풀은 얼음 잠에서 깨어나고,

노란 복수초 꽃망울은 잔설 사이로 애잔한 얼굴을 내민다.

 



겨울바람마저 해맑은 웃음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 숲에서

뒤를 돌아보면 길은 어김없이 나를 쫓아와 있다.

그리고 그 숲의 길은 침묵하고 있다.

숱한 사연이 가득한 지나온 세월을 묻고 바이로차나의 침묵은 장엄하다.

그렇다.

모든 길은 순결하다.

그 순결한 길 위에 마음의 자취가 나뭇잎처럼 뒹굴고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작은 숲의 오솔길이라도 그 길에는 먼저 지나간 이들의 자취가 묻어 있다.

그것이 사바의 길이다.

그 길로는 미망의 중생도 걸어갔고 반야의 보살도 걸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둘이 아니다.

화약 냄새가 진동하던 길로 평화의 행진이 이어지듯

미망의 중생이 내민 손길이 곧 보살이 내민 구원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길의 법칙이다.

 



언제나 시시비비로 조용할 날이 없는 이 세상.

대로를 찾아 너도 나도 나서는 세상.

그러나 그 순결한 길 위에서 먼저 걸어간 이들의,

뒤쫓아 걸어오는 이들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그 길은 금세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것은 세상의 길에서나 숲의 길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남는 것은 미망뿐이다.

 



길을 찾는 이들.

어떤 봇짐을 지고 길을 떠났든 모든 길은 마음 여행이다.

그 모든 길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에서 우리 모두가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모든 길의 끝은,

자신을 찾아 떠나는 새로운 여행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려 길을 찾는 이들이여.

오늘, 그대가 가려 하는 길이 어디든 봇짐을 꾸리기 전에,

바로 지금 그대 발아래 침묵으로 드리워진 마음을 먼저 살펴볼 일이다.

 

-오성스님 한라산관음사 -


*오르리의 상념 하아나*

 

 섬진강변을 옆에 끼고 모래사장과 겨울이 움트는 도로를 달린다는 것은

지극히 일상을 벗어나는 짧은 상념의 시간이 될수도 있다

유구하게 흘러내린 강물줄기는

살아지는 내 자신의 아픔과 쾌락을 함께 떠나보내고 싶어지는 분출구와 같음이라!

잠시의 달림뒤에 만나지는 찻잔속에 담긴 사랑의 무게감

홀짝 홀짝 그 맛을 음미하며

무언의 대화속에 상대방 맘속에 내 진심을 투영하려

담아 마셔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 본다

등뒤를 내리는 섬진강의 낙조는 피어오를 내일을 위한 세레나데였음........

 

-2007년 2월 1일 목요일 화개장터 어느 다원에서-

 

 

*오르리의 상념 두우울* 

 

-2007년 2월 4일 일요일에 떠난 山寺로의 여행- 

 

 

산이 아닌곳을 향하지만

여전히 산속에 나를 드리운다

친구가 절에 가고 싶다고 한다

그렇게 함께 마음을 드리우는 소담하고 나를 비출수 있는 곳으로 향한다

한적한 고속도로를 무한 질주 하며

송광사들머리의 오래된듯한 벚나무의 겨울 향기를 느끼며

차는 어느새 견성의 공간으로 나를 이끈다

 

 

말없이 걸어 주어도 좋다

흙길을 밞아 오르는 그 시간이 소중하며

발걸음에 묻어나오는 작은 마음의 아우성조차조 정겹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처를 찾아 가는 내가 부처가 된듯이 도솔천을 거닐고 있는듯하니

가희 불심에 귀의 하는 비구와 같음이라

 

 

이런 작음 걸음속에서도 나를 바라 볼수 있듯이

머리를 깍고 불제자로 살아 가는

수도승들의 번뇌에 수양의 깊이는 가늠조차 하기 힘들지 않을까?

혜가가 달마조사에게 한팔을 잘라줌으로 공부를 청하고

성철스님의 하룻밤 주지와의 잠자리 인연으로 그 그릇을 인정받고

11면 관음은 고통받는 중생의 아픔을 궁휼이 여겨  벗어나지 못해

 11개의 머리가 생기는 해탈의 어려움

그렇다면 미혹한 나는

부처님 계신 산사에 하얀 연기를 품어내며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

 

 

산문에 들어서

禪問答을 던져 본다

사랑 禪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問

가장 세속적이고 통념적인 알지 못하는 答

나의 선문답은

무지몽매하야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실없이 웃음으로 그 알지 못하는 사랑을 가슴에 품어 볼 뿐이다

 

 

사찰 한켠에 붙어 있는 이달의 선시

나의 선문답에 명확한 답을 준다

밖에서 찾지 마소

그저 내 맘속에서 그 소식이 있을진데

왜 들려오는 소식

외부로 찾아 나서는지

                                 미혹할따름이다..............

 

                                                     -송광사에서 오르리-

  

 송광사 이야기

 

순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자락에 위치한 송광사는 우리나라의 오랜 불교 역사 속에서

전통승맥을 계승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합천 해인사(法寶), 양산 통도사(佛寶)와 더불어 삼보사찰(三寶寺刹)로 불리고 있다.

 



지금부터 800년전 보조국사 지눌이 당시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고

 우리 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벌였던 도장이며

 지눌, 진각을 비롯한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외국 승려가 수도하는

국제 선원으로 한국불교문화를 연구하는 도장이다.

 



신라말 혜린선사가 길상사로 창건후 고려명종27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대찰을 이룩했고

희종4년 지금의 송광사로 개칭했으며 조선헌종8년 큰 화재후 철종7년 중창 하였으나

 1948년 여순사건, 1951년 공비만행으로 대웅전등 주요건물이 소실되어

1984∼1988연까지 제8차에 걸친 불사중창으로 대웅전등 33동이 복원되었다.

 

 


현재도 16국사영정을 봉안하는 "국사전"과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등 국보 3점, 하사당, 약사전, 영산전, 대반열반경소, 16국사 진영, 경질, 경패,

묘법연화경찬술, 금동요령등 보물 13점, 천연기념물인 쌍향수등 국가 문화재 17점과

 능견난사, 금강저, 팔사파문자, 우화각, 자정국사사리함등

지방문화재 9점을 포함 총 26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특히 이곳 송광사는 보조국사의 ‘불일(佛日)보조국사 감로탑’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돌로 된 건물이나 시설이 하나도 없다.

이곳의 지형이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거리는 형상, 죽 풍취나대의 지형이라 해서다.

또한 송광사는 특별히 큰 건물이 없고 80여동의 건물이 모두 엇 비슷한 크기를 보여주며,

 

 

다른 사찰과는 달리 선방이 대웅전보다 위쪽에 있다.

 

 

 그리고 선방인 ‘수선사(修禪社)’에는 문수사리나 달마대사를 모시는 대신 크고

둥근 거울이 놓여 있다.

이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의 큰 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선정을 닦아 마음의 거울을 밝게 비추라는 의미라 한다.

이 모든게 승보사찰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매표를 하고잘 닦여진 산책로를 따라 가면 작은 개울 막아 제법

큰 저수지를 막아놓은 걸 보게 되고 바로 이어 일주문이 나온다.

 

 

일주문을 지나면 작은 마당처럼 세월각이

오른쪽에 큰 느티나무 너머 왼쪽으로 우화각이 서 있다.

 

 

이 우화각을 지나면 박물관의 우람한 자태 뒤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앞 마당을 작은 운동장만큼 크고

그 뒤로 선방인 수선사와 좌우로 승보전과 지장전이 서 있다.

 



송광사에 가면 꼭 보고 오라는 3대 명물이 있다.

첫째는 비사리구라 불리는 큰 나무 밥솥으로 우화각 옆에 놓여 있다.

1742년 남원 세전골에 있었던 큰 싸리나무가 쓰러지자 이것을 가져다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epm 무려 쌀 7가마, 4천명분의 밥을 담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다음으로는 사찰의 음식을 담아내는 일종의 그릇인 능견난사로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수공예품으로 그 정교함이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지막 명물은 조계산 정상 바로아래에 위치한 천자암 뒤뜰에 있는 향나무.
곱향나무로 불리는 송광사의 명물 쌍향수는 조계산 마루 천자암 뒤뜰에 있다.

두 그루 향나무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쌍향수란 이름이 붙었는데,

나무 전체가 엿 가락처럼 꼬였고, 가지가 모두 땅을 향하고 있다.

보조국사 지눌스님과 당나라 담당왕자가 이곳 천자암에 이르러,

짚고 있던 지팡이를 꽂았더니 가지가 나고 잎이 피었다고 전해진다.

높이 12m, 수령 800년이 넘었다.

                                                               -(송광사상세정보펌글)-

 

*오르리의 상념 세에셋*


산사에서

난 깨달음을 쫒는 미혹한 한 사람의 중생이 되어 본다

해탈의 경지를 꿈꾸는 자유스러움을 느끼려 한다

소담한 돌다리는 건너면서 한순간 나를 괴롭히는 과거에 대한 연민을 이제 떨치려 한다

누구나 삶에 있어 고통없는 사랑과 번민이 없었겠는가

쉬이 떨치고 일어섬이 당연할진데도 그 속에 허우적 되면서

자기 자신에게 엄청난 생채기를 계속 남기고 있는 줄을 몰랐다고 하지 않으련다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괴로움에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학속에 내 몰았던 것이다

이제 저 작은 징검다리 처럼

주위를 둘러 보는 여유러운 마음속에서

건너는 상대를 살피는 배려심과

조심 조심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자제력으로

다시 사랑의 다리를 건너야 겠다

이젠 진정한 레테의 江  강건너로 노를 저어 가야 겠다

혼자라는 고립의 단절 보다는 둘이라는 고독스러운 불안감을 선택하려고 한다

 

-산사를 나서면서 오르리-

 

 

산사를 나섰지만

다시 선암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세가지 계획중에서 두번째 사찰을 품어 보려 하는 것이다 

  

 

어느 나그네의 선암사 이야기

 

전남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는 애당초 우리의 여행 일정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리암 다음의 행선지로 선암사를 넣은 것은 사귈 능력도 변변찮으면서

명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내 과욕 때문이다.
지도를 여러 번 살펴보는 과정에서 보길도로 가는 길목에 순천 조계산이 있었고,

 승보사찰 송광사 너머 산자락에 깃든 태고총림(太古叢林) 선암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송광사는 두어 차례 들렀으나 선암사는 초행이다.

노승과 동자승이 등장하는 뒷간 광고로 널리 알려진 이 절집을

 나는 작가 조정래의 출생지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나는 조정래보다는 그의 부친을 먼저 알았다.

70년대에 고등학교에 다닌 이라면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다음 노래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나도 푯말이 되어 너랑 같이 살고 싶다.

별 총총 밤이 들면 노래하고 춤도 추략

철 따라 멧새랑 같이 골 속 골 속 울어도 보고.

오월의 창공보다 새파란 그 눈동자

고함은 청천벽력 적군을 꿉질렀다.

방울쇠 손가락에 건 채 돌격하던 그 용자(勇姿).

네가 내가 되어 이렇게 와야 할 걸,

내가 네가 되어 이렇게 서야 할 걸,

강물이 치흐른다손 이것이 웬 말인가.

 


그렇다. '나도 푯말되어 살고 싶다'는,

시조치고는 드문 문장형 제목을 단, 이 작품을 쓴 이는 승려 조종현이다.

그리고 그가 낳은 4남 4녀 중 둘째가 작가 조정래이다.

조정래가 선암사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물론 나는 의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를 통하여 알았다.

선암사에서? 웬 절집에서 아기가 태어난담.

 



선암사 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암사는 대처승으로 이루어진, 조계종에 이은 국내 두 번째 종단인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叢林, 강원·선원·율원의 3개 교육기관을 모두 갖춘 사찰)이다.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조 시인과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의 작가를 연결한 것은

거의 확신에 가까운 직관이었다.

절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요즘에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조정래가 태어난 것은 해방 이태 전이다.
아직 조계종과 태고종이 갈리기 전이었고, 일제 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이 불교개혁의 차원에서 일본 불교로부터 수용하고 적극 권장한

대처제도로 많은 승려들이 결혼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불교계에서 일제 잔재 청산의 대상이 되면서 대처제는 해방 후 된서리를 맞는다.

여러 해의 법정 분쟁을 거쳐 조계종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이 종파가

태고종을 정식으로 선포한 것은 1970년이다.


 

 

이후 선암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곳을 한 번도 찾지 못한 내게 떠오르는 그림은 이런 것이다.

 남향의 오래된 요사채, 낡고 좁다란 마루에 부서지는 따뜻한 햇볕,

기저귀를 차고 그 마루를 기어다니는 어린애와 그를 어르고 있는 장년의 승려.

그것들을 조합한 풍경으로 떠오르는 산사가 선암사였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적 얘기다.

'동화사에 갔더니 중들이 탁구를 치고 있었는데 정말 우스워 죽을 뻔했다'는

얘기가 화제가 되고 모두 전염된 듯 손뼉을 치며 웃어댔다.

요즘은 경내에 승용차를 끌고 오는 자가운전 스님도 많고, 카세트가 염불을 대신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승려의 혼인을 바라보는 눈길을 그리 곱지 않은 듯싶다

. 종교적 금욕과 독신 생활을 수행과 신에 대한 귀의로 이해하는

우리 사회에서 '아내를 둔 수행자'가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더디기는 하지만, 세상의 변화에 비추어 보면 조계종의 승려나 가톨릭 신부들의

금욕 독신 수행의 계율도 다분히 빛이 바래고 있는 느낌이다.

창건 528년 된 절집에서 느끼는 60∼70년대의 시공간, 그 온기

 


선암사는 백제 성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528년)한 절이다.

 뻔히 교과서에서 배운 거지만, '백제'라는 이름 앞에 영남에서 온 여행자는

여기가 호남이라는 걸 실감한다. 창건 이후 도선국사, 대각국사 등

수많은 선승을 배출해, '선암사 선방 수좌는 국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어떤 사찰에서도 입방이 허락'될 만큼 선방으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렇다. 선암사에는 새로워진 게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범종루에 걸린 '대적광전 복원' 관련 펼침막이나 경내에 커다랗게 세워진

대웅전 중창 불사 입간판에도 불구하고 널찍한 경내 곳곳에 들어박힌

여러 전각들과 그리로 가는,

마치 고샅길 같은 통로에 고여 있는 것은 그만그만한 온기와

두런대는 정담(情談) 같은 것이었다.
선암사가 서른 개가 넘는 전각이 위아래로 조밀하게 들어차 있는데도

비좁고 답답해 보이지 않는 것은 급한 경사지를 여러 단(段)으로 깎고 축대를 쌓아

조성한 대지에 전각들을 배치해 공간을 오르는 방향으로 시선이 분절되기 때문이고,

위아래에 비해 좌우가 다소 넓은 까닭이다.

 

선암사엔 황악산 직지사(直指寺)의 그것처럼 낮고 소박하게 돌담을 둘러친 전각이 여러 채다.

 각황전을 품고 있는 무우전을 비롯해 응진당, 응향각, 적묵당, 해천당 등은

마치 여염집처럼 돌담 속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물론 닫히거나 열려 있는 그 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담장 바깥의 번뇌와는

오연한 적요(寂寥)와 무심이다.
무우전(無憂殿)의 안존히 닫힌 대문과 완만히 구부러지는 돌담, 돌담 옆에 가지런히

어깨를 맞대고선 매화나무와 벚나무가 연출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은

오래 그윽하게 마음에 잔잔히 젖어든다.

경내에서 가장 외져서 스님들의 선방으로 쓰이는 듯, 잠긴 문을 밀어보다 말았다.

매화는 언제 피는가. 시인 송수권은 선암사 무우전 한편에서 매화를 노래했다.

예닐곱 그루 성긴 매화 등걸이

참 서늘도 하다

서늘한 매화꽃 듬성듬성 피어

달빛 흩는데 그 그늘 속

무우전(無憂殿) 푸른 전각 한 채도

잠들어 서늘하다

- 송수권 '조선 매화'



선암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게 60, 70년대의 낡고 오래된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절집이 400만 불자를 가진, 조계종에 이은 제2 종단의 총림인데도

경내에 수차에 걸쳐 요란하게 진행되었을 중창 불사의 흔적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까닭이다.

 여러 전각들의 단청도 낡았고,

경내에 드문드문 주차된 차량을 빼면 길과 건물에 손을 댄 자국도 찾아보기 어렵다.



각 전각들을 잇는 길도 가는 자갈이 깔린 모래땅 그대로고, 장경각 아래 키 큰 전나무 아래의

연못을 빼면 인위적 조경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오래 묵은 철쭉, 벚나무, 매화나무, 동백나무, 소나무 등이 제멋대로 서

건물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전각이 많다.

이렇게 절집을 가꾼 것은 선암사가 납자, 학인들의 공간이었던 탓일까.

 

해천당(海川堂)은 예의 그 선승과 동자승 광고에 나오는 '선암사 뒷간' 바로 옆에 있다.

 절의 객사(客舍)로 절에 오는 객승이나 신도들이 묵는 곳이다.

하얀 눈을 이고선 이 낮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어쩌면 작가 조정래가 태어난 곳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해천당은 여염집 같은 점은 무우전과 같으나 훨씬 더 수더분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는 건물이어서다.
고어로 된 나무 팻말을 달고선 선암사 뒷간은 예의 TV 광고 이래

 선암사의 아이콘이 되어 버린 듯하다.

 아주 튼튼하고 큼지막하게 지어진 이 재래식 변소에서

나종영 시인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와 '청솔 바람소리',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를,

그리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노래한다.



 

선암사 해천당 옆에

수백년 묵은 뒷간 하나 있습니다

거기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문 틈새 이마 위로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목어(木魚) 흔들어 깨우고 가는

청솔 바람소리 보입니다

부스럭부스럭 누군가 밑닦는 소리 들리는데

눈 맑은 동박새가

매화 등걸 우듬지에 앉아

두리번두리번 뭐라고 짖어댑니다

천년 세월이 덧없이 흘러가고

새로운 천년이 무섭게 밀려오는지,

그 울음소리 대숲 하늘 한 폭 찢어놓고

앞산머리 훠이 날아갑니다

하릴없이 대나무 대롱 끝에 입술을 대고

한 모금 찬물을 삼키다가 옳거니

매화꽃 봉오리 움트는 소리,

겨울 산그늘 얼음꽃 깨치고

봄 햇살 걸어오는 것 보았습니다.

- 나종영 전문

 

그러나 아직도 봄은 멀다. 해거름 이내가 내리는 선암사 산문을 빠져나오는 길,

커다란 무지개 모양의 아름다운 다리 승선교(昇仙橋)를 지나치며 떠나온 절집을 뒤돌아 보았다.

 

 

선계에서 내려온 신선들이 속세의 민심을 살폈다는 누각, 강선루(降仙樓)가

마치 피안의 신기루처럼 멀어 보였다.

                                            -선암사여행 펌글-


 

*오르리의 상념 네에넷*


세번째 공간 항일암을 시간적인 문제로 포기하기로 한다

일요일 떠난 산사로의 여행

생각이 생각을 낳았고 무념이 무념을 낳았으며

사랑이 사랑을 부를때 마음에 이는 잔잔한 바람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울음 소린가 보다

깨달은자의 소울음소리와 별반 다를바가 있겠는가?

나의 작은 그릇에 담겨진 충만한 설레임은

소리없이 자꾸만 자꾸만 떨림이라는 감성으로 퍼져 나아간다  

 

 

 

겨울이 마음까지 얼리는 차가움이라면

거짓말이다

훈풍은 강한 소리를 내지 않지만 여전히 작은 불씨처럼

내 마음속에 꺼지지 않고 살아 쉼쉬고 있었던 것이다

비어있는 벤취

그곳은 채워 지리라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며

한켠에 자리를 비우고 기다릴것이며

혼자의 자릴지라도 그 빈 자리의 채움이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  이는 사랑이라는 소식으로 채워야 겠다

 

                                                  -선암사에서 오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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