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김근태...

김준양 |2007.09.16 16:11
조회 132 |추천 0


 

김근태는 재야에 있던 30여년 간 언제나 익명이나 가명을 쓰면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오지 못하다가 15대 총선 때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걸고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는 거절되거나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고 회고한다. 그동안 왜곡되고 편견에 갇혔던 자신의 진짜배기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만나 나를 소개하는 일 따위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사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감흥을 주는 얘기가 아닌데도, 김근태는 그 일이 그렇게 고맙고 좋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1965년 대학에 입학한 김근태는 이후 1995년까지 30여년 동안 그의 말처럼 늘 공포와 부담 속에서 살아왔다.

독재와 맞서 싸우는 동안 체포 26회, 구류 7회, 5년 6개월에 걸친 두 번의 투옥을 포함해 수 없는 가택연금과 수배, 살인적 고문을 당하며 어두운 시절을 버텨온 사람이 바로 김근태다.

극단적인 것을 싫어하는 김근태의 원래 꿈은 교수였다.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계속해 비전을 제시하는 지식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유신으로 종쳐 버렸단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유신은 투쟁 이외에 다른 대안의 선택을 내 양심에 허락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의 선택은 늘 흔들리는 과정에서의 선택이었단다. 그래서인지 김근태는 대단히 ‘지성적인 투사’다. 늘 고뇌하고 회의한다.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과 학생시위 배후조종 혐의로 수배되고, 또 1974년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어 김근태는 박 정권이 막을 내릴 때가지 피신생활을 계속했다. 1960년대가 제적과 군대생활이었다면 1970년대는 수배와 피신생활의 연속이었다.

피신 시절이던 어느 정월 대보름날 밤 은신처를 구하지 못한 김근태는 통금 시간에 쫓겨 도곡동의 한 갈대밭에서 밤새도록 제자리 뛰기를 하며 추위와 싸웠다. 그 때 그의 머리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얼어 죽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고 한다.

김근태가 그런 고통을 감내한 이유는 유신과 군사독재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미래를 계획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김근태는 자신의 1980년대를 “매 맞고 감옥에 내동댕이쳐지는 혹독한 세월”로 회고한다.

1980년대는 김근태에게 운동가로서는 최고이자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고통을 안겨준 시절이다. 그는 1983년 9월 학생운동 출신들이 조직한 최초의 독자적이고 공개적인 사회운동단체였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초대, 2대 의장을 맡는다.

이때부터 김근태는 항상 권력의 첫 번째 기피인물이 되었다. 군부독재의 살기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으니 불법단체인 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겪었을 괴로움을 추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느 날 안기부 국장을 만나러 나갔던 민청련의장 김근태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처참한 몰골로 집에 내동댕이쳐졌다. 부인 인재근씨의 말을 들어보자.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어요. 찢어지고 터지고, 코뼈는 부러진 것 같았고 눈썹 끝이 갈라져서 벌겋게 살이 드러나 있었지요. 그리고는 한 시간 이상이나 구토를 하더라구요”

부인 인재근씨는 잠이 든 남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였다. 김근태는 그 사진을 들고 안기부를 압박해 민청련을 공식화하는 데 성공한다.

‘부창부수(夫唱婦隨)’란 표현이 이런 때도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

‘민청련의장 김근태 고문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1985년 8월 24일 서울대 민추의 배후 조종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민청련 의장 김근태는 9월 4일부터 26일까지 23일동안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11회에 걸쳐 물고문, 전기고문을 당한다.

그로부터 석달 후 김근태는 재판과정에서 지옥의 23일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또렷하게 증언한다.

“새로운 사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될 때마다 고문대 위에 올려놓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암기, 복습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협박공갈, 집단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굶기기, 잠 안재우기, 동물적 능욕···”

진저리를 치는 그의 증언은 계속된다.

“결국 9월 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티어 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단폭행을 당한 후 그들은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지옥 속에서 김근태는 눈을 가리기 전에 그들이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좁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둠을 통해 날짜를 가늠하면서 고문자의 이름과 인상을 외우려 애를 썼고, 진행과정이 어떠했는지 소상하게 기억하려 했으며, 감옥으로 넘어가서도 반복해서 외워 그 모든 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발뒤꿈치 상처부스러기를 모았다. 이 상처조각은 아내 인재근씨에게 전해졌고, 고문을 입증하는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 경관에 대해서는 고문 무혐의 결정이 났지만, 실형을 선고받은 김근태는 1988년에야 감옥에서 나온다. 출소 후 또 다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을 결성해 정책기획실장을 맡은 김근태는 1990년 5월 또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년 3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김근태는 더할 수 없이 ‘징글징글’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심 깊은 강물처럼 외적으론 흔들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늘 쉼 없는 일렁임이 계속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민주화실현에 벽돌 한 장쯤 쌓는 게 되기는 하는 건지, 독재자들의 양심을 조금이라도 부끄럽게 만들 수 있는 일인지 회의가 생긴다고 토로하던 사람이 김근태였다.

아내의 생일 무렵에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김근태는 생일선물로 그녀에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을 수 있는 자유’를 주겠다고 인간적 번민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김근태는 ‘아이들 앞에서 체포당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기 싫은 인간적 고민’에서 해방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생했지만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이름없이 쓰러져간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은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말하곤 한다.

-정혜신의 글에서

추천수0
반대수0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