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 - 스포일러 거의 없음
오늘 근무를 빼먹었다.
몬토크행 열차를 탔다.
난 그렇게 충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조엘이 몬토크로 가야했던 건 운명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넌 내가 그렇게 좋니?
응
그런게 있구나
왜 은희는 영수를 그토록 사랑했던 걸까.
여자와 남자가 만난다-사랑한다.
이런 만고불변의 상투적 패턴은 대부분.
운명과 우연과 이성(理性),
이 세 가지에 의해 발아한다.(족보다 외워라.)
어떤 인연이 돋아나온 그럴듯한 상황과 조건과
이유들을 이리저리 헤집고
근원을 찾아서 저 깊은 데까지 들어가면,
결국
그것의 탄생은
운명과 우연과 이성,
이 세 가지의 역학적 관계에 의한 결과로 설명된다.
운명은 신이 던지는 창,
우연은 어디선가 쏟아지는 화살이라면,
이성은 인간이 든 방패다.
창과 화살이 방패에 튕겨져 나가거나
혹은 그것을 뚫고 가슴을 찌른다.
다분히 물리적인 과정의 연속에 의해
즐거운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남은 운명과 잘 어울린다.
'운명적 만남'은 혹은 '운명적 인연'은 상투어다.
신이 정해준 인연이라니 로맨틱하고 극적이고 신비하다.
나를 위해 음독자살할 로미오,
불 뿜는 용의 목을 쳐줄 금발의 기사.
백마 탄 왕자님이여 꿈에라도 나타나소서.
이런 것은 전통적으로 여자의 판타지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전통적으로.
요즘 여자들은 변했다.(페미니스트를 위한 변명)
아무튼 누가 그랬던가.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네 박자 쿵짝이라네.
그래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고 네 박자야.
운명론은 서사를 죽이는 독약이라지만,
어차피 인생극장, 결말에는
주인공이 죽게 되어있는 통속극이니까.
차라리 모든 만남에 운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자.
나도 당신도 애초에
운명을 읽을 수 있는 눈 따위는 없으니.
'우연한 만남'도 친근한 클리셰다.
옷깃만 스쳤을 뿐인데 인연이 된다.
운명론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
이런 종류의 만남을 대개 우연의 덕으로 돌린다.
길 가다 새똥을 맞는 것처럼,
담배가게 아가씨와도 눈이 맞는다.
이런 것은 주로 남자의 판타지다.
우연히 만난 처자와 불타는 사랑.
어쩌다 마주친 그대의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네-
‘우연'이 사전적으로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라니,
굳이 그러한 심상찮은 부딪침의 이유를 찾으려 들어도
결국은 되묻게 되는.
'왜 그때 거기에 계셨어요?‘
운명이 어떤 초인적인 힘에 의해 결정된
움직일 수 없는 인과의 산물이니까,
우연과는 분명히 대립하는 말이다.
'인과'라는 관점에서 보면
서로 극과 극에 놓인 개념이다.
하지만 '운명적 만남'이나 '우연한 만남'이나
두 사람의 삶이 맞닿기까지
당사자들이 할 일이라곤
목욕재개하고 꽃단장하고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정도다.
운명의 창이든 우연의 화살이든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는 마찬가지고,
일단 그것들이 얄팍한 이성의 방패를 뚫고
가슴을 찌르기만 하면
피가 흐르고 숨을 헐떡이게 되는 것도 매한가지다.
그러니 요놈이 창인가 화살인가 구별하는 일은
별 의미가 없다.
시방 나는 위험한 짐승이고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되고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고...아무튼
우리는 어차피 그런 슬픈 군상이니까.
운명인지 우연인지 분간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음 중 영수의 인연으로
가장 적절한 사람을 고르시오' 라는
객관식 문제라면
정답은 4번 은희 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다음 중 은희의 인연으로
가장 적절한 것을 쓰고,
그 이유를 풀이하시오.' 라는
주관식 문제라면,
가능한 답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답-영수,
풀이-연애의 정석 해설서 12194페이지에 그렇게 나와있음.
다른 하나는
정답-영수,
풀이-찍었음.
혹은 이런 답안도 인정될 수 있겠다.
정답-영수
풀이-몰라요.
왜 하필 은희와 영수인가.
순희와 영수나 은희와 철수는 안되는 걸까.
그런 시덥잖은 의문에도
뿌리까지 속시원한 답을 내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별 수 없이
운명의 해설서 들춰보고
우연의 연필을 굴려보지만,
결국엔
철저한 무지에 대한 또다른 고백일뿐.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그러므로 중요한 건,
영수의 정답은 은희,
은희의 정답은 영수 라는 것.
그래, 가물어 메마른 가슴에
사랑의 단비가 한 방울이라도 내리면,
내리기만 하면,
그걸로도 족한 목마른 영혼들에게
이 비가 기상청 슈퍼컴퓨터로 예측가능했는가 하는
문제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관심이 있다면 강수량 정도일까나.
아주 흠뻑 젖고 싶어라!
자, 이제
그렇다면 사랑을 이야기할 순서다.
만남 다음에 올 주제는
늘 그렇듯 사랑이니까.
사랑은 만남보다 간단하다.
이미 글이 길어질대로 길어졌으니,
더이상 길게 쓸 말도 없을 뿐더러.
사랑 자체가 단순한 것도 사실이다.
사랑에 이르는 절차와
그것이 붕괴되는 과정이 복잡한 것이지
진실로 사랑 중인 인간은 단순해진다.
그 뜨겁고 위험한 감정의 덩어리를 지키려다
들짐승처럼 예민하고 포악해지거나,
혹은 그와 정반대로
모든 것을을 용서하고,
대추나무에 사랑이 걸리듯 귀에는 늘 입이 걸려있는,
대책 없는 평화주의자가 된다.
그러므로 골치 아플 필요가 없다.
종로갈까 영등포로 갈까가 고민스러운 거지.
차라리 청량리로 갔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춘천 가는 기차를 타라.
비록 돌아올 기약 없이 one-way ticket만 쥔데다
옆자리에는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대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가 앉는다더라도.
그 끝이 슬픈 사랑이든 기쁜 사랑이든,
내일의 행복이든 아니든.
심지어
넌 밥 천천히 먹는 거 지겹지 않니? 난 지겨운데.
라며 가차 없이 순정을 도려내는 잔혹애정극일지라도.
끝내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난 나중 같은 거 몰라.
은희도 나도 당신도
나중은 모르는 거니까.
운명적으로든
우연하게든
만나지면,
지금은 즐겁게 사랑해도 좋지 않을까.
와 같은
낭만적인 결론은
건조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적어도 영수와 은희가 사랑하던
그 순간에, 그 공간에 충만한 행복이
조금이라도 부러웠던 사람이라면
영수의 방황과 은희의 죽음은 잊어라.
은희는 영수를 만나지 말아야했을까.
그럼 더 행복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행복이란 늘
현재형으로만 서술되어야 마땅하고,
어차피 인생극장, 결말에는
주인공이 죽게 되어있는 통속극이니까.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삶(살X)이 닿는다.
서로 마음을 맞춘다.
사랑이 시작된다.
결말을 모른다해도
이대로 좋지 아니한가.
아무래도 은희의 처지가 못마땅하다고?
그냥 한 번 좋게 봐주라.
어차피 이 글의 제목은 '은희를 위한 변명'이니까.
나도 사실 그런 사랑
이제는 자신 없거든.
이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