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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파랑을 기리는 노래1 / 이성복

박옥춘 |2007.12.03 14:18
조회 78 |추천 0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1 - 나무인간 강판권 / 이성복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지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에는 그가 있는 줄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튼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따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옆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는 또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이야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

 

                                                     - 2008 현대문학상

 

덕수궁 돌담 앞에서 365일 나무에 글을 새기는 無右手人이

생각나는 시.

아버지 칠순을 준비하면서 써내려간 글과 흡사해서 많이 놀랐던 시.

 

사람 하나하나를 나무에 견주어보는 일도 재미있겠다.

혹시 우리는 사람 모양을 하고 있는 나무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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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의 이야기입니다.

나무가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디서 무엇 때문에 와서 우리에게

그늘과 양식과 쉼을 주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나무는 우리가 알기 이전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고 믿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무가

눈물을 흘리거나 주저앉은 걸 본적 없듯

걸터 앉아 쉬거나 흥에 겨워

호탕하게 웃는 걸 본 적 없습니다

이불을 덮어주거나 우산 씌워 등교시키던

조용한 눈그늘의 나무

수판을 놓으며 가계부를 쓰는 나무

호마이카 상에 둘러앉아 산수 숙제를 봐주는 나무

답십리 언덕배기 땅에 집을 지으며

런닝에 땀이 흐르게 밴 나무

대패질과 미장일에 능한 나무

시골 간 엄마 대신

시래기 된장국을 맛나게 끓이며

동생의 갈래머리를 땋아주던 나무

곁가지가 못된 가시를 품거나 휘면

호되게 회초리를 대다가도

정작 큰 아픔은 혼자 피울음 우는 나무

처마 밑에 온식구 다 깃들때까지

깜깜 골목을 눈 밝혀 서성이며 기다리기를

다 자란 지금까지

더 멀리 더 오래 지켜보는 나무

월급봉투와 ‘회사 간다’는 말을 모르는 나무

양복 대신 땀내 나는 작업복으로

손이 갈라지고 허리가 휘어도

‘아야’ 한 번 하지않고 안으로만 앓던 나무를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크거나 화려하지 않아

갑갑하거나 어리석어 보이는 나무를

부끄러워한 적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무는

옛날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밭일 나간 엄마 대신 누이를 업어 키우고

냉수로 빈 배를 채우고 삽질 하며

찐 고구마 한 개도 달게 먹던,

가난한 대가족의 시간이 행복했을까요

나무는 한번도

허기와 못 배운 한을 대물림한

조부를 탓한 적이 없습니다

견디는 것과 섬기는 일만이

천성인 듯 말없이 즐겨했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서울 땅에서

쌀 몇 되박과 수저 두 벌로

뿌리 내리기조차 버거웠을 나무

몸 하나 하나를 지워가면서

잎과 줄기를 만들었겠지요

넘쳐나지 않지만 나무는

먼저 곁가지에게 수액을 나눠먹이고

열매도 기꺼이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달라기 전에 미리 알아 주었으며

준 것은 하나도 기억하지 않는

바보 나무

재재거리던 새도 모두 떠나고

꽃도 피지 않는 나무는 이제

허리가 아프고 다리도 시원찮으며

눈이 희미하고 총기도 예전같지 않은

더 줄 것 없는 그루터기입니다

물기 하나 없이 갈라터진 그 틈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나무 십자가 위의 그분을 봅니다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이 말

옹알이 지난 아기가 제일 먼저

입에 붙이는 엄마, 다음의 아빠라는 말

아버지,

세상에서 가장 쉽고 오래 불러온 이 말이

오늘은 목에 걸려 몇번씩 가슴을 쓸게 합니다

기억하시나요, 아버지

시험 잘보면 사주시곤 하던 붕어빵과 소년 중앙

시집가기 얼마 전 손잡아 길 건네주신 일

힘든 시집을 다 살아낼 때 쯤

‘집에 방 많은데 그렇게 힘들면 와버리지’ 하셨던,

모두의 마음 속에

다 다른 추억의 색실이 감겨있겠지요

아버지가 일군 땅 위에서 우리는

쉽게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발 밑만 보느라 자주

아낌없이 주었던 나무를 잊곤 합니다

가끔은 아주 작은 것에 생색내기도 합니다

이 모두를 허물하지 않고

되았다, 되았다, 되았다 하시는 아버지

이제 우리는 나무가 어디서 왔는지

왜 우리에게로 왔는지 압니다

아버지,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내내 넉넉하고 든든한 기둥입니다

더는 아픔없이

더는 슬픔없이

더는 늙지 않고

그대로 계셔 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 아버지 고희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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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기파랑가


(구름을) 열어 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구름 좇아 (서쪽으로)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어라.(어리도다)
이로부터 그 맑은 냇물 속 조약돌(하나하나)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 끝을 따르고자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 모르시올 화랑의 우두머리시여.

 

                                         ----(양주동 해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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