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 드라마 / 100분 /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
(★★★★★)
1953년, 73살의 '앙리 피에르 로셰'가 고령에도 불구하고 첫 소설 을 발표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당시 21살, '랑글루아'가 만든 시네마테크의 악동이자 '앙드레 바쟁'의 로 평단에 입문한 그는 이 소설을 언젠가 반드시 영화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961년, '트뤼포'는 기어코 그 꿈을 이루게 된다.
은 두 남자와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상투적인 멜로드라마에서 닳고 닳도록 써먹은 소재다. 그러나 '트뤼포'는 진부한 삼각관계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의 자유와 그에 대한 남성의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쥘'이나 '짐'이 아니라 '카트린'이다. '쥘' 그리고 '짐'과 친구이자 부부, 연인의 관계를 유지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카트린'은 '이상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그는 누구에게 이해를 바라기보다는 행동으로 여성의 '해방'을 쟁취하려 했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문화적 순수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불안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한 유럽의 시대, 사회적 배경은 그가 설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사실 '카트린
'이 이루려고 했던 자유는 '쥘'과 '짐'이 스스로에게 던진 과제이기도 했다. 그 과제를 '카트린'만이 목숨을 던져가며 쟁취하는 것이다.
에서 가장 강력한 나름대로의 자기해방이기도 하다. 그래서 '카트린'은 '쥘'과 '짐'에게, 아니 '트뤼포'에게 '아나키스트'이며 동시에 대지의 어머니다. 이처럼 1960년대 그의 영화 속의 여성들은 매우 지적이며 또 남성들에 비해서도 훨씬 당당하고 진취적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성을 이해하는 척 하려 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려 한다. '트뤼포'의 관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삼각관계는 필연적으로 소외를 야기하는데 '트뤼포'는 이를 언어의 문제로 파악한다. '쥘'의 독일식 액센트는 그를 타자와 분리시키고 '쥘'과 '짐'은 다른 '트뤼포'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언어가 가장 중요한 작가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카트린'의 문제는 언어로는 풀리지 않는다.
확실히 '트뤼포'는 같은 '랑글루아'와 '바쟁'의 아이면서도 '고다르'처럼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의 정치'에 대한 관심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쥘'과 '짐', '카트린' 세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가장 기초적인 정치집단, 즉 가정에 대한 관심의 일면이기도 하다. 정치란 가정에서 시작되며 따라서 사랑 이야기는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결혼이 불완전한 제도임을 인정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에 대한 대안도 부재한다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트린'의 죽음은 '성의 정치'에 관한 항거다.
'르누아르'로부터 일상적 삶의 시각적 표현에 대한 열정을, '히치콕'으로부터 영상의 힘과 감각을 배운 '호모-시네마티쿠스' '트뤼포'는 이러한 그의 주제의식을 때로는 서정적 스타일로 또 때로는 낯선 사진적 효과와 편집효과(스톱 프레임, 스위시 팬, 점프 컷 등)로 엮어나간다. 말하자면 대중성을 충분히 갖추면서도 누벨바그의 실험적 정신을 잃지 않는 조화로움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은 누벨바그 영화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대중들에게조차 끊임없이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