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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주남의 성경적오류 "경악"

박영진 |2008.06.14 19:04
조회 636 |추천 1


조용기 목사 번역‘천국은 확실히 있다!’에서

비성경적인 심각한 허점을 다수 발견-경악!

 

- ‘계시관. 천국관. 기독론’등이 비성경적, 비신학적으로서

 ‘위험천만!’,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 그리고 십계명의 제2계명과도 충돌되며,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위협하는 

 ‘제2의 계시록?’처럼 주장-.





정통 기독교 신자들로서는 대부분의 내용이 용납하기 어려운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조용기 목사는 ‘이 책은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저서는 아닙니다 --- 이 책에 담긴 내용을 신학적이거나 교리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과 함께 천국을 구경하신 토마스 여사의 진솔한 체험이 사실 그대로 담긴 기록으로 받아들이고 읽으면 좋을것’,---‘주님의 크신 복을 받게 될 것’이라하며 번역하여 선전판매까지 할 수 있는가?(4,5쪽)
신학적 또는 교리적 논쟁거리도 안 되는 것처럼 말하는 비성경적인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어 ‘주님의 크신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천국 체험을 철저하게 성경적 사실이라고 주장한다.(17쪽)

이것은 성도들이 1세기의 초대교회 당시 베뢰아 교인들처럼 성경신학을 통해서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려는 노력을 사전에 봉쇄하여 거짓되고 악한 것에 ‘눈멀고 귀먹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바른 신앙은 바른 신학에서 나오며, 바른 신학은 바른 성경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자와 번역자 그리고 독자들은 다음의 몇 가지를 묵상하며 성경말씀의 기준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a. 신.구약 성경말씀(66권)이 구원의 길라잡이 역할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늘의 새로운 계시 인 제2의계시록(?)교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b. 신.구약 성경말씀(66권)이 경종을 울리는 지옥’이야기와 소망을 주는‘천국’메시지 가 역부족이므로 하늘의 새로운 계시인 제2의계시록(?)이 필요한가?

c. 신.구약 성경말씀(66권)이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독려의 메시지가 족하지 못하여 신 앙인들에게 유익을 주는데 충분하지 못하므로 새로운 계시가 요구되는가?

이 책에서 성경말씀을 다수 인용하였는데 혹시 그 이유가 마치 예수께서 직접 주시는 계시인양(직통계시) 정당화 하여 비성경적인 다수의 이야기들을 옹호하려 했다면 그 위험 수위가 상당히 심각한 것이다.
이제부터 번역한 책에 관한 몇 가지의 문제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토마스 주남(여) 씀, 조용기 옮김,「천국은 확실히 있다!」(HEAVEN is so REAL),서울 말씀사,2004.〕

Ⅰ. 계시관의 문제점 (- 제2의 계시록?’처럼 주장)

‘예수님이 요한에게 주신 메시지는 주님이 내게 주신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내게 듣게 될 모든 사람과 나누기를 원하시는 메시지입니다.’(203쪽)

‘그러나 주님은 내게 자신이 재림하시기 전에 자신의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정결케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실 것이라고 확신을 주시면서 그 때문에 나를 택하여 이 책을 쓰게 하셨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믿지도 않고 또 주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곧 오시리라는 것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한 이 책이 수백만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354쪽)

‘주님은 내게 자신이 행하신 일과 하신 말씀을 성령의 인도 아래 기록하라고 명하셨다’(348쪽)

‘하박국 선지자처럼 나는 내가 본 환상을 명백히 책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자신을 향한 주님의 완전한 계획에 따라 달려갈 수 있습니다’(491쪽)

‘나는 주님이 나 같은 사람을 부르셔서 이 책을 쓰라고 하신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16쪽)

주님은“내 딸아, 너는 말세의 여선지자이다. 너는 나의 말과 산 증인이다.”(338쪽)

“나는 네가 책에 집중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너는 많은 교회를 만족시킬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전도할 수 있을 것이다.”(182쪽)
“주남아, ---나는 네가 책을 한 권 쓰기를 바란다. 그 책은 종말에 관한 중요한 책이다. 그 책은 많은 언어로 번역될 것이다.”(117쪽)
‘몸이 진동하는 것은 ---권능이 부어지기 때문---그러므로---여러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책으로 시작되는 세계적인 복음 전도와 신유의 사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152쪽)

‘요한의 경우처럼, 나의 천국방문은 언제나 주님이 나를 방문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천국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내가 천국으로 올라간 것을 이와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높여 주신 택함을 받은 소수 중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특권인지요!’(205,206쪽)

‘주님은 내게 지시하셨습니다.“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가 네게 계시하는 그대로만 적어라”(96쪽)

‘나의 천국 체험이나 주님과 함께 했던 체험들이 철저하게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시리라고 믿습니다.’(17쪽)

《내용비판》
◉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부인!(16,17,96,117,152,178,182,203,205,206,291,338,348,354,394,491쪽 등등)

이 책은 사도요한의 요한계시록과 하박국과의 ‘동등함’을 넘어서 마치 무능력해진 66권의 성경말씀을 능가하는 구원의 도구로서 예수재림직전에 마지막 기회로 주어지는 제2의계시록!? 인양 주님의 계획에 따라 명하여 쓰여진 책이라고 시종 주장하고 있으니 성경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철저히 부인한다는 의심을 면하기가 어렵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66권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엄히 경고 하시고 계신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찌니라”(신12:33)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6)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 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실 터이요 ---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이러한 시각에서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말씀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저자는 이 책을 성경권위 위에 놓는 잘못을 범하면서도 각종 성경 구절을 다량 인용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체험으로 기록된 책이 마치 참 성경적이라는 암시를 끊임없이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러한 암시를 주는 최면에 걸린 사람들은 영적으로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분별력을 잃고 쉽사리 믿어버리게 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예.1992년 10월28일 한국판 시한부종말론 예수 재림 휴거사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책으로 1980년대 말경 ‘내가 본 천국’(-펄시 콜레 지음)은 한국교회에 베스트셀러로 유행하였었다.
한국에 일부 유명한 목사님들은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 것은 성도가 따지면 안 된다’‘그것은 믿음이 없는 짓이다’라고 윽박지르고 그 책이 천국 소망과 감동과 은혜를 준다면 십일조 생활, 기도, 전도, 교회 봉사활동 잘하여 족한 것이고 교회에 유익이 되면 그뿐이니 ‘개인의 신비체험’을 성경적으로 비판하지 말고 그냥 맹하니 믿으라며 부추기었던 어처구니없었던 시절을 반복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 살아서 변화된 몸으로 영적인 천국을 체험한 소수 중에 하나
-말세의 여선지자!(205,206,338쪽 등등)
저자는 사도요한과 엘리야처럼 살아서 천국 체험을 했던 소수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구약의 엘리야와 하박국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사도 요한과 맞먹는 말세의 독특한 여선지자로서 제2의 계시록!?을 쓰는 정당성을 강조하려 하고 있다.

◉ 예언이란?
구약성경의 역사서와 예언서(선지서)만 보아도 미래보다는 현재의 죄와 그것으로 인한 임박한 심판을 강조한다.
때문에,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것에는 관심이 덜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고 그들이 살아가는 현재였다.

이렇게 성경 계시의 최종성과 만족성을 부인하고 있으니 이는 다른복음(갈1:6-9)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의 계시관은 궤변적 소설수준이며, 비성경적 이라는 비판의 소릴 듣는 것이다.
저자는 ‘나의 천국 체험이 철저하게 성경적’(17쪽)이라고 책머리에서 주장을 하면서 다수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내용을 이끌어 가는데 이 책의 상당 부분이 철저하게 비성경적인 것으로 발견이 되고 있다.
성경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다량 인용한 책이 목적과 의도를 갖고 집필한 불순한 비성경적 내용이 다수인데도 하나님 말씀이 다수인용이 되었다는 이유로 이 책이 하나님의 것이요 말세 구원의 길라잡이라고 옹호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성경신학적 내지는 교리적으로 논쟁을 참으라고 타이른다면 누구 좋으라고 하는 달콤한 소리인가?

그것은 독자의 판단력을 무감각하게 하려는 영적 최면이라고 진단 할 수 가 있다.

백가지 계시를 받았다 해도 그 중 한 가지만이라도 성경 말씀과 다른 거짓된 계시로 발견이 된다면 완전하신 성자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불완전한 거짓말쟁이로 몰고 가려는 마귀의 교활한 음모에 편승한 것으로 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성자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을 내려는 것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일이다.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는 어느 하나라도 성경 내용과 다를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 내용의 대부분이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계시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사 아흔 아홉 가지는 맞고 하나가 틀려도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며 거짓계시이다.

‘이단’의 단어를 풀이 해보면 어떤 의미들을 포함하는가?
‘끝에 가서 다르다’는 뜻을 포함해 다음의 3가지 형태를 살펴 볼 수 있다.
a. 이단은 ‘성경곡해’의 논설로 이루어진 기독교 형태이다.(벧전2:3-4, 행5:17, 갈1:7)
b. 이단은 ‘전통부정의 교리’로 전통에 역행하는 기독교 형태(고전1:11-12, 11:18-19, 벧후2:1)
c. 이단은 ‘공해사익’의 행위로 남에게는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유익을 추구해 나아가는 자들이다(벧전2:3, 골2:4, 고후2:17, 딤전 6:5)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 일부 여호와의 증인은 생활이 검소하고 예의가 바르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점이 오늘날 일부 개신교인들보다 더 돋보이고 훌륭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인 한 마디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중에 가장 선한 인간일 뿐 하나님 곧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결정 내리게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여화의증인 교재 붉은색 하드커버 40여 쪽을 참고)

그러므로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운운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비성경적인 거짓의 하나님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라고 판단되며, 성경계시와 다른 책이라 하면 마귀의 전략적 술수라는 것이 자명할 진데 그 이상 더 무슨 설명이 필요 하겠는가?

1992년 10월 28일 한국판 거짓 시한부종말론과 빗나간 예수 재림(휴거)계시가 결국 건전한 성경의 기독론과 성경의 종말관까지 왜곡된 것인 양 세상 사람들로 비아냥거리도록 만들지 않았던가?

그 후로 한국 개신교회의 위상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한 계시인 성경말씀(66권)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거룩성을 또 다시 짓밟게 할 수 있도록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를 빙자하여 어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인하여 빗나간 계시 안에 포로가 되게 하려는 의도라면 얼마나 무섭고도 섬뜩한 일일까?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 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2:4)

너무나 말이 안 되는 비성경적인 이야기들을 비판하는 것이 시간의 낭비 같지만 그래도 2004년 초여름 한국에서 40쇄 이상의 책이 쏟아지며 기독서점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많은 성도들의 영혼을 심각하게 오염 시키고 있는 현실 때문에 누군가라도 사명감을 갖고 비판하여 정리해야 할 것이다.

건전한 비판은 진리를 세우려 함이다. 남을 모함하여 비방하는 차원과 전혀 다른 예수그리스도의 방식인 것이다.

진실로 많은 이들이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 일 뿐이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Ⅱ. 천국관의 문제점

‘주님이 내 손을 잡으시자 우리는 다시 한 번 날아올랐습니다.---내가 주님과 함께 해변에서 들려졌을 때---천국에 도착했을 때---주님과 나는 천국의 아름다운 가운으로 갈아입었습니다.’(84,85쪽)

‘나는 종종 왜 주님과 내가 다른 곳이 아니라 해변에서만 출발해야 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그 장소가 보통 이른 아침 시간에는 사람의 왕래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나는 내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를 생각하니 재미있어서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십중팔구 그들은 외계인이 납치해 간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환각현상이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97쪽)

‘무거운 슬픔이 내게 엄습하였고, 나는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주님이 다시는 이 연못에 나를 데리고 오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였고 이로 인하여 매우 슬펐습니다.---“제발 저 혼자 가게 하지 마세요. 그러면 저는 주님을 몹시 보고 싶을 거예요”라고 말하고는 주님의 팔을 꼭 잡았습니다.’(242쪽)

‘천국이 지상과 상당히 흡사하되 지상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곳---’(240)
‘화장대의 거울은 파란 보석들로 장식되어 있어 더욱 환하게 빛났습니다. 화장실 욕조는 은으로 되어 있었으며---’(147쪽)

‘나는 한 천사에 의해 옆에 있는 한 작은 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나는 그곳에 파우더 룸(여성들이 화장하고 옷 갈아 입는 방)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거울 앞에는 많은 아름다운 벨벳 의자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습니다.---큰 옷장을 열었는데---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멋지고 값비싼 옷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76쪽)

“나는 많은 나의 자녀들을 천국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너의 문패가 달린 집 같은 그런 저택에서 살게 되지는 못한다. 그런 저택은 매우 특별한 자녀들을 위한 것이란다.”(286쪽)

‘그 복도 끝 바로 앞에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자동문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78쪽)
‘오븐 위에는 타원형 접시들과 은으로 된 포크들과 고기 굽는 그릴들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주님이 한 오븐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시자 불이 올라왔습니다.’(209쪽)

‘바닷가는 크고 작은 배들로 가득---이곳은 천국의 정박지였고 모든 배들은 두꺼운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221쪽)
‘주님이 버튼을 누르시자 작은 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이내 속력을 내어 달렸습니다.’(224쪽)

≪내용비판》
◉ 천국은 우리가 살아생전 왔다 갔다 하는 장소가 아니다.
(76,78,84,85,97,147,174,209,221,224,240,242,286쪽 등등)
영적천국은 죽음 월편(越便)의 세계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히11:1에서처럼 천국에 관한 내용이건 사후에 관한 내용이건 요한 계시록에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은 우리 로 하여금 궁금증을 갖고 천국을 소망하고 내세를 소망케 하시려는 것이다.

또한 신약성경 13권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천국의 낙원을 다녀온 경험이 있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침묵한 점을 깊이 묵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 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1-7)

그런데 이 책의 저자와 옮긴이는 천국계시 앞에서 이러한 바울과 같은 조심스러운 겸손을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하여 오해할 수 있기에’ 더 이상의 말을 그만 두겠다는 사도 바울의 겸손을 떠나서 오히려 그 사도 바울의 견해를 뛰어 넘어‘철저하게 성경적 사실이라’(17쪽)는 말로 빙자해가며 자신감 있는 글귀로 천국 소개를 하고 있는 사실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같은 성령 안에서 말과 태도가 하나일진데 오늘날 이 책의 저자와 그에 동의하는 번역자가 성경속의 사도바울과는 전혀 다른 말과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사도바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역사와 같지 않은 영의 역사라 한다면 역으로 어떤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일까?

영적인 천국을 경험한 사도바울의 계시도 일반화, 보편화 시키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저자는 개인적 체험을 일반화 또는 보편화 시켜서 이 세상 마지막 구원의 도구로 직통계시를 받은 책이라 주장하고 또한 철저히 성경적이라면서 비성경적인 책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전파하고 있으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말세의 여선지자라 하면서 사도바울의 영적 천국인 낙원에 대한 입장을 정면으로 뒤집고 있다. 그러므로 이 또한 바울 서신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또는 그의 동조자들)와 성경속의 사도바울 그 둘 중에 누가 악한 영에 사로잡힌 거짓자인지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 계시자인지를 분별하는 몫은 이제 독자들의 것이다.

◉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출발지는 태평양해변이다? (84,85,97쪽 등)
: 변화된 몸으로 태평양 해변에서의 천국행 발착을 말하고 있지만 만져지거나 볼 수 없는 하늘(HEAVEN)이란 영적 천국이 대기권 하늘(SKY)과 우주(COSMOS)와는 전혀 다른 단어인데도 굳이 같은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모르고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 살아있는 인간이 변화된 육체의 모습으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이 른 아침에 천국으로 올라간다!(84,85,97,204,205,206,319쪽 등등)

이것은 자신이 마치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대단한 특권을 누리는 말세의 여선지자임을 극대화 시키려는 대단히 오만한 표현으로 보인다.

비물질 세계이며 영혼만이 갈 수 있는 천국(차원이 다른 영적 장소)을 마치 물리적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는 우주의 어느 장소적 개념인양 시사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천국여행을 함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또는 지역적 방향성을 갖는 출발지와 도착지가 태평양 어느 해변에 있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영적하늘 곧 천국을 물리적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는 세계처럼 그림을 그리려고 했기 때문이다. 영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음에도 시간과 공간의 영향과는 관계없이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에 나타나셨음을 기억하라(요한복음20:19)

죽은 뒤에 영혼만 가는 영적인 천국을 엘리야처럼 육체가 변화된 신비한 몸으로 태평양해변에서 왕래발착을 함으로서 말세의 여선지자로서의 특권을 획득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키어 자신의 계시를 철저히 성경적인 것처럼 돋보이게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말세 구원의 길라잡이로 인정하도록 유도하려는 인상을 무시하기는 매우 어렵다.

고전 15:51-53 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죽은 자들이 먼저 무덤에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 일어나고 살아 있는 자들의 몸이 신비하게 변화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무관한 특권을 누리며 성경말씀의 순서를 뛰어넘어 이미 변화된 몸을 맛보는 말세의 여선지자로 자리 매김하려고 한다.

독자들은 이처럼 이미 기록된 성경의 순서를 뒤집어엎는 그러한 저자를 향하여 언제까지 마냥 신기하게 여기겠는가? 그리고 비성경적인 책을 독자들은 어느 때까지 믿고 있어야 하는가?

◉ 영적천국에 도착하여서도 슬픔과 염려와 은으로 된 화장실의 욕조를 언급! (147쪽)

주님과 함께 기껏 도착한 영적천국에서도 완전히 소화되지 못한 찌꺼기 같은 부산물이 쏟아지거나 죄의 결과인 슬픔 등이 존재한다면 여전히 이 땅의 수준 높은 귀족층의 어느 대저택을 상상한 것일 뿐이지 어찌 전지전능하신 완벽의 하나님이 계신 천국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신약성경 로마서8장(:20-22)에서는 왜 인간과 자연이 부패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고로 영적천국이 이 세상과의 연속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반드시 현세(슬픔,염려,부패 등의 상존)의 연장이 아닌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완벽한 곳이어야만 소망 중에 바라볼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충만히 채워진 영적천국이란 곳에서 여전히 완전 소화가 되지 않는 찌꺼기의 대변과 소변을 받아내는 화장실과 욕조가 존재하며 슬픔과 염려가 있는가?
이토록 성경의 계시와는 전혀 다른 책을 여러 번 읽고 감동과 깨우침이 있었다니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일이다.

◉ 여성들이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는 파우더 룸이 있다?(197쪽 등)

‘화장’은 현세에서 연극을 할 때 돋보이게 하려는 일종의 얼굴 가면이요 위장술이다. 천국에서 무엇이 부족하여 화장을 하여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이가 들고 피부에 주름 ,기미 등을 감추어야 하는 곳이라면 현세(슬픔,부패,염려 등의 상존)의 연장일 뿐이며 예수님처럼 부활한 신비한 몸(고전15:44,빌3:21)도 그렇거니와 영적 천국에서야 더 더욱 ‘화장’은 필요 없다 하겠으니 번역서 ‘천국은 확실히 있다’의 천국계시관은 웃기지도 못할 허구로서 성경과는 전혀 무관하며 우리의 신앙의 독려는 물론 영성을 해롭게 하는 독초일 뿐이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미 예수님은 천국에는 천사와 같아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천국에서는 동등한 성도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늘의 기업을 이어받을 것이며(엡1:5) 천사와 같아서 남.녀가 정욕에 따른 연애를 위해 잘 보이려고 화장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변화된 성도들은 이제 이성과의 결혼이 필요 없다.
천국은 육체의 온갖 정욕들이 자리 잡지 못한다. 그곳은 사망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더 이상 출생도 없으며, 자손이 없어질 염려가 없기 때문에 혼인도 없다. 세상에서의 모든 결혼은 이제 성도들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의 영원한 혼인으로 대치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천국이 무엇이 부족하여 또 누구에게 무엇을 잘 보이려고 ‘화장’을 하겠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 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29,30)

성도의 부활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을 갖게 되며 (빌3:21,요20:26) 다시는 늙거나 병들지 않는 몸으로 완전하게 변화되며(고전15:52,53) 시집과 장가를 가지 않는 것이 천사들과 같다는 것이다.

부활이후의 천국도 더 이상 이 세상과 같은 몸을 갖지 아니하는 신비한 몸인데 하물며 영적천국에서 무엇이 부족하여 또 다시 위장하는‘화장’ 할 일이 있는 것인가?

마22:23절 이후에서 사두개인 들은 부활후의 천국세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새롭게 되는 세계(요한계시록21:5)인 줄 모르고 단순히 현세의 연장인줄로만 알아 오해 했던 것이다.

◉ 문패가 달린 저택은 매우 특별한 자녀들을 위한 것? (286쪽)
누구는 문패가 있는 대저택, 누구는 쓰러져가는 집, 또 누구는 개털, 소털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지구촌 현세의 물질적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오해된 생각들일 뿐이다.
현세에서 열심히 주의 일을 잘 한 사람에게 베푼다는 천국의 상급(영광)개념은 천국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워진 곳이기 때문에 현세처럼 더 이상 물질의 양으로 판단하는 소유적 개념이 아니다.(고전15:40,41; 창세기15:1)

저자의 체험은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영적천국의 체험이라기보다 이 땅의 유토피아적 삶의 환상을 꿈꾸며 살기를 소망하는 것처럼 보이며 과거의 부족하고 어려웠던 상황을 보상하고픈 심리적 작용으로 나타난 어느 꿈 많은 소녀와 같은 개인적인 단순한 체험으로 이해하고 싶다.

◉ 잘 생긴 미가엘 천사는 키가 2 미터 정도 몸무게가 135 킬로그램, 푸른 눈에 금발!(346쪽)
천사가 분명 영인데 물리적 세계의 키와 몸무게가 있듯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몸이나 천사의 몸을 서양의 백인 우월주의 시각과 얼짱!과 몸짱!으로 존재하는 세계라고 한다? - 동양아시아계 여인의 한계가 보이는 것으로서 그동안 서양인들의 외모 앞에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보상심리는 아닌가? )

◉ 울며 기도하면 주님이 지옥 속에서 부모를 지옥에 두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들 어 안심! 부모의 그릇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남은 생애동안 주를 기쁘게 해달라고 간구---

“내게는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기억이 있었습니다---부모님을 위해 여러 번 울며 기도를 드리고 나니 주님이 부모님을 지옥에 두시지 않을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나는---보상으로 나의 남은 생애동안---주님을 기쁘시게 하게 해달라고 간구--”(293,294쪽)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음’ 보다는 이제 지옥에 간 사람을 기도와 현세에 보상적 활동으로 천국으로의 구원을 이끌려는 듯한 시도는 마치 천주교 곧 로마 카톨릭 종교의 연옥설과 엇비슷하다.

결국 주님의 뒷 배경만 있으면 과거의 성경 말씀이 무엇이라 하든지 지옥에 있는 이름들을 모두 지워 버릴 수 있다는 듯한 ‘이상한 구원론!’(믿음의 구원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기도)구원?)이 등장을 했는데 여기 ‘새 천국계시록’이 과연 성경적 구원관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비신학적 비성경적인 내용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신학적 교리적인 논쟁을 지향 하라는 말인가?

물론 뒷부분에 가서 지옥(음부)으로부터 어머니의 구원이 불가능한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지만 상기와 같은 의혹과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용들이 어디 한 두 군데인가 말이다.

옛 추억에서 이상야릇한 ‘연옥설(?)’과 엇비슷한 운을 띄우고 스쳐지나가려는 이 책의 내용이 2004년 6월 3일/4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새신자 환영회실(여의도 CCMM 빌딩(국민일보 사옥)영산 아트홀, 지하 2층)에서 갖은 ‘2004 영산 국제 신학 심포지엄’에서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천주교의 연옥설’을 강하게 인정한 분위기와 어떤 알 수 없는 상관관계가 직관적으로 감지되는 것이 지나친 상상의 무리수만은 아닌 듯 하여 앞으로 깊이 주목하며 관찰할 성질이라고 본다.

2004년 6월 3일/4일 영산 국제 신학 심포지엄(주제 : 영산 조용기 목사의 희망 신학?)에서 세계적인 독일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 초청, 여의도순복음교회/질의 응답 내용에서 위르겐 몰트만 박사가 천주교 ‘연옥설’을 인정함으로 새록새록 성경해석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음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2004년에 들어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왜 번역하여 한국에 초청하였으며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를 왜 초청 하였을까? 거기에서 암시되고 있는 어떠한 의미들을 찾아 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월간 ‘교회와 이단’7월호에서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영엽 교수는 “천주교 요리문답 1:5에, 경건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은총의 자리에 있는 영혼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는 연옥에 간다”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연옥에 있는 영들은 산 신자들에 의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연옥에 체류하는 기간도 단축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하여 천주교에서는 면죄부를 팔기도 하였다. 천주교는 “인간의 상정”으로 드리는 기도가 그 고인을 연옥의 고통에서 좀 더 속히 풀려나오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는데, 이것이 이른 바 ‘잉여공로’의 교리이다. 즉 성자나 성직자의 남은 공로를 신도에게 나눠준다는 교리이다.

그러므로 연옥설의 개념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사고자들에게 상당히 호소력이 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죄를 많이 진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연옥에서 정화의 기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주장은 ‘칭의’의 교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산 자의 기도나 돈으로 연옥에 있는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도리(속죄의 완전성)를 무시하는 죄가 되며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단설이다.(사도행전8:20-23절을 주목하라)

성경이 가르치지 않는 것을 이렇게 중요한 교리로 만들어서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신도들의 내세 운명에 대한 지식과 신앙을 오도하고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과오를 범하는 죄이다.

천주교는 주후 6세기부터 1000년 동안 성경말씀을 떠나 기독교 아닌 기독교를 믿고 전함으로 중세 암흑시대를 초래 하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피택된 죄인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보혈(precious blood)을 흘리심으로 객관적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다(요19:30 ; 히9:27). 구원은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다(엡2:8,9)라고 하였다.

위르겐 몰트만 박사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의 구원문제는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행위(기도)구원을 주장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연옥설의 치명적인 결함은 ‘사후 구원 기회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신오순절주의와 자유주의 신학, 거기에 로마 카톨릭 천주교 교리와 혼합된 2004 영산 국제 신학의 심포지엄에서 무슨 희망이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금번의 신오순절주의와 자유주의신학자와의 만남은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건전한 교회들과 바른 신학자들이 미래적으로 주목하고 지켜볼만한 중대한 일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상대주의적 시대사조의 흐름 속에 시대적인 사명을 띠고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인물들이 많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의 코드를 주장하다가 주적의 개념들을 없애고 적들과 동침하기위해서 정치적 상생의 논리로 풀며 우리는 하나, 평등, 공조 등의 용어로 상대주의의 멋을 한껏 내며 이 시대의 진보 개혁적 평화주의자(peacemaker)로 등장하여 세상들로 칭찬과 박수를 받는다.

그래서 신비주의와 근본주의, 자유주의, 로마 카톨릭, 불교 등과 서로 구원의 교리를 인정해주는 조건으로 만나고 타종교와의 벽을 허물어 세계 평화를 위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며 모든 종교의 평등성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말하지만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는 유아독존적으로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하나님)이 없으며 모두 상대적으로 평등하다는 새로운 깃발을 높이 들어 부르짖는다.(마태복음10:34)
그래야만 대중으로부터 외로운 왕따를 면할 수 있는 길이며 종교 정치적인 상생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미 종교적 교리가 혼합을 이루어 가고 있으며 결국 종교다원주의를 자연스레 지양하는데 공헌을 하여 시대의 폭넓은 아량을 가진 훌륭한 대인으로서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타종교의 교리를 이해가 아닌 인정을 함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칭찬도 인정도 사라지는 것이다.(마태복음10:24-39절 까지를 주목하라)

혹자들은 뭐 그렇게 시끄럽게 하느냐 자기만 잘 믿으면 되고 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은혜스럽게 (한국 기독교안에 상식이 되어버린 상투적인 용어)덮고 상생을 하자고 할 것이다.
잘 믿는 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 믿음의 정의를 어디서 구해보겠는가?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은혜를 이웃집의 강아지 이름처럼 그렇게 가벼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돼지가 가장 가치 있는 진주보석을 주둥이로 발로 짓밟는 행태와 다름이 없다(마태복음7:6).
기독교의 복음(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인한 믿음,은혜,사랑,공의 등이 함축됨)은 흔한 싸구려가 아니라 고귀하고 값진 것으로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진리는 요즘 유행하는 정치적 용어인 ‘상생’으로 풀어갈 이유가 전혀 없는 유일하고도 독립적인 것으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제아무리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 유행하는 새시대-뉴에이지(새시대-newage(뉴에이지)의 근저에는 그동안 수구 꼴통으로 기득권을 누려오며 옛시대-oldage(올드에이지)를 호령해 왔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와 합리성, 교실과 가정을 해체하고 각종 쟝르의 벽을 허물어 버리며 규범적 틀과 서열을 파괴한다.
그리고 종교적 입장은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절대적 유일신은 인정치 아니하고 모든 종교에도 구원의 논리가 있다는 것으로 골고루 인정하며 상생하는 ‘절대로 상대주의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또 다른 절대주의’를 시대적 사명으로 알고 태어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이념이요 세계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의 시대라 할지라도 성경이 말하는 고유한 복음의 본질적 색갈이 훼손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 이상 기독교의 절대적인 아가페적 ‘사랑’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인격이 있으시고 전지전능하신 유일하고 독특하신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공의’가 함께 하신다.

고름과 살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환부를 덮고 ‘상생’하자하면 훗날 몸통을 자르게 되며 생명을 잃게 하는 때가 오는 거와 같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과 공의의 질서가 함께 하지 않는 분이라고 두 번 속이는 표현으로서 결코 성경적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 천국에서 고기 굽는 그릴, 자동문, 주님이 버튼을 누르자 달리는 배들,
오븐 옆에 달린 버튼을 누르는 주님!(78,209,221,224쪽 등)

현세상의 최근 문명의 수준이 버튼을 누르는 정도 보다 더 발전이 된 최첨단 전자동화 인텔리전트(intelligent,인공지능) 수준에까지 발전되어 말로 명령만 내려도 집안의 모든 것이 자동 검색이 되고 움직이는 수준인데 계시된 천국은 너무 문명이 낙후되어있는 후진국 문명이다. 마치 현대 지구촌문명의 이기의 일부를 천국으로 직수입한 느낌을 준다.
오히려 이 땅(지구촌)이 천국 같다는 역전 현상이 나올 수 있다.

이런 정도의 천국 묘사를 읽으며 감동과 영적인 깨우침을 얻었다고 번역하여 선전들을 하고 있으니 걱정이 되도 보통 걱정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또 한 번 온 세상에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기 전에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리어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의와 평강과 희락보다 천국에서 먹을 것이 많다고 한다

Ⅲ. 기독론의 문제점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 그리고 십계명의 제2계명과 크게 충돌!)

◉ 저자는 주님과 팔짱도 끼고 어깨에 기대고 서로 안기도 하였다 !
(이와 유사한 표현이 이 책 전체에서 주류를 이루며 연애 소설 같은 느낌으로 천국계시록을 쓰고 있다.)
☞ 138,145,176,182,185,186,199,210,211,218,230,238,242,244,254,260,266,277,278,282,309,322,323,
324쪽 --- 등등 외 다수

“주님께서는 내 손을 사용하셔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내 몸의 모든 부분을 반복해서 만지셨습니다. 나는 마치 떼를 씻어 내는 것처럼 손으로 나의 몸 전체를 문지른 다음 다시 더러워진 손을 씻어 내는 것 같이 양손을 잡곤 하였습니다.”(324쪽),
“우리는 서로 끌어안았고, 주님은 ‘딸아, 사랑한다’라고---‘저도 주님을 사랑해요’(266쪽),”주님은 나를 불러서 옆에 앉으라고--- 나는 주님의 팔에 손을 끼고 얼굴을 주님의 어깨에 기댄 채 ---“(210쪽))

《내용비판》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 곧 영적인 거룩한 사랑인데도 남.녀 간의 애정행각처럼 에로스적 사랑 곧 상대적 사랑으로 거룩한 아가페적 거룩한 사랑을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표현하는 시도는 아주 불경건하며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인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성자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거룩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이자 그리스도에 대한 모욕이며, 비성경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단들이 하나님과의 아가페적 거룩한 사랑의 관계를 남.녀간 애정행각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작업을 자주하여 온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주님의 생김새(머리카락, 키, 나이, 손, 옷차림, 입)를 구체적으로 보았다?
‘골격이 크고,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목은 비단같이 희고, 손의 피부는 올리브 색깔, 손가락은 길고 날씬, 나이는 30-40사이의 젊은이, 키는 약 180센티미터를 약간 넘는 것 같다?’(14쪽)

《내용비판》
구약성경 이사야53장에 보면 오실 메시야의 모습에는 풍채(의젓한 겉모양 즉 골격),고운 모양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어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라고 되어 있으며,

신약성경에는 몸의 부활 이후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동산지기인지 예수님 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고(요20:15) 엠마오로 함께 길 가던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막16:12).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도성인신 하신 몸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을 못한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주님의 구체적 생김새며 나이까지 이 땅의 얼짱!과 몸짱!처럼 기록해 놓고 있다.

★ 예수님의 생김새를 거론하는 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과 연결하여 상고할 때
심각하게 충돌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찰스 핫지의 말을 인용하면 두 번째 계명은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뿐 아니라, 형상을 가지고 참되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의 원리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를 위해 삼위 하나님 혹은 삼위일체의 어떠한 위격을 눈에 보이는 것 또는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질과 개인적 취향에 따라 자기 방에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상이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걸고 기도할 때 바라보면 그리스도께로 생각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한 장식물들이 없는 교회에서보다는 그러한 장식물들로 가득 찬 교회에서 더 마음껏 더 쉽게 예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 그런데 그것이 뭐가 잘못된 것인가?

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시대의 감성적 열린 진보적 사고의 유혹을 제2계명은 단호하게 배제한다.
이 단호한 진술은 하나님을 우리가 아는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으로 묘사하는 그림들과 상들을 사용하는 것 역시 배제되어야 한다.(출24:9,10; 신4:15,16; 요4:24; 롬1:20; 딤전6:16; 약1:17)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묘사한 그림과 상을 사용하는 것을 배제한다.
비록 하나님(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과거에 인간의 몸을 입으셨고 아직도 여전히 그 몸이 부활하시어 뼈와 살을 갖는 인간의 몸을 갖고 계시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환상체험과 그림과 형상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됨을 ‘닮은 모습’으로 만들어지거나 상상이 되며 따라서 제2계명에서 금하고 있는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제2계명이 가르치고 교훈하는 계명의 본질과 개인적 체험 간에 어느 것이 진실과 허상인지는 성경신학 전반적인 말씀 안에서 평가 하여서 강도 높게 비판을 받아야 한다.

1) 형상들이나 상상은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이다.

◑ 칼빈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의 참된 형상은 세상 속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 앞에 보일 때 하나님의 영광은 더럽혀지며 그 분의 진리는 거짓에 의해 타락해 버리게 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고안해 내는 것은 그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존엄성이 훼손되며, 하나님은 실제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 하나님 또는 예수님에 대한 상상, 그림들과 형상들을 반대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자신이 묘사하는 신적 존재의 인격적 본질과 특성에 대한 진리의 대부분을-전부 는 아니라 하더라도-불가피하게 숨기게 되기 때문이다.

아론의 금송아지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 의로우심, 선하심, 오래 참으심 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상이 갖고 있는 ‘비애감’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린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사망권세로부터의 승리 그리고 현재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나라 등의 사실을 감추어 버린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연약함을 나타내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신적인 힘은 숨겨버린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받은 고통의 실재는 나타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기쁨과 그 분의 능력의 실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상징과 그 분에 대한 상상(때로 환상 체험)은 특히 그것이 나타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무가치하다.
신성에 대한 다른 모든 가시적인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2) 상상(또는 환상)이나 형상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a.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왜곡하며
b.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을 심는다.

★ 심리학적으로 볼 때,

기도를 드릴 대상의 형상이나 그림 또는 환상체험과 상상에 습관적으로 초점을 맞추다 보면, 곧 그 환상이나 형상이 묘사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것에 기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형상에 ‘절하고’ ‘섬기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어떤 부류의 사람도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만든 형상이나 상상 안에 존재하시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성경 말씀의 계시이외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계시를 받았다면서 성경이외의 또 다른 특별계시를 운운 하거나 철학적 추론에 의거하고 있는 모든 사변적인 신학은 이 점에서 잘못 되어 있다.(이러한 문제는 주의 말씀을 특히 주목하라 ☞ 마24:4,5,11-14,23-27; 요8:47)

바울은 이런 유의 신학이 결국 어떻게 되는가를 말한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고전1:21).

◑ 신학의 영역에서 자기 마음의 상상력을 따라가는 것은,

a. 하나님에 대해 여전히 무지한 채로 있는 것이다.
b. 그리고 자신의 추측과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마음속의 형 상이라는 우상의 숭배자가 되는 길이다.

이에 비추어 보면, 제2계명은

1) 소극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명예를 잃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게 하는 예배 방식들과 종교적 관행들에 대한 경고이다.

2) 적극적으로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초월 하시고 신비로우시며 불가해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상상과 철학적 사고 범주 너머에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명령 - 그리고 따라서 우리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에게서 배우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시도록 하라는 명령 - 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시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목적, 가치 평가 기준, 하나님의 행동 양식은 우리의 것들과 너무나 엄청나게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직관에 의해 추측하거나, 아니면 이상적인 인간됨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으로부터 유추하여 그것들을 짐작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출처도 아닌 성경 66권과 제2계명 같은 말씀으로부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견해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요점은 분명하다.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환상적 체험이나 상징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롬10:8-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시48:12; 빌2:12; 약2:22; 고전4:20; 요일1:1; 눅16:19-31)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환상과 상징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만든 하나님의 모든 형상은 주물을 부어서 만든 것이건 정신적인 것이건 환상적인 것이건 실제로 죄 많고 불경건한 세상의 도구들로부터 빌려 온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어떤 형상을 취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적 출처나 물리적 현상에서 취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형상이나 환상과 상상을 취하는 일이 잘못된 까닭임을 밝혀두는 것이다.

《본문 내용을 나오며》

번역자와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신.구약 성경(66권)만 자세하게 보아도 ‘천국은 확실히 있다’와‘지옥도 확실히 있다’를 정확하게 알고 믿으며 소망과 경계를 삼고서 살아가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다.

올바른 정통 신앙인이라 하면 신.구약 성경(66권)을 통하여 구원 문제의 충분성과 이 땅에서의 신앙 활동을 하는데 무리가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또 다른 계시를 받아 추가로 보충해야하는 제2의 계시록(?) 교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신명기13장을 묵상하라)

그런데 그동안 신.구약 성경(66권)이 천국에 대한 소망과 신앙생활의 독려함에 얼마나 부족 하였기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오서 말세의 여선지자를 통하여 새로운 천국소망과 구원의 길라잡이를 주셨다는 것인가?

신.구약 성경말씀을 통하여 감동과 영적인 깨우침이 얼마나 덜하면 꼭 이렇게 문제가 많은 책들에 매달리며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지 그 답변을 듣고 싶다.

신.구약 성경말씀을 통해서‘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기가 불충분하던가?
신앙생활(십일조생활,기도,전도,교회에 헌신,봉사 등)에 독려받기가 너무나 부족하였는가?
성경 자체로는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라는 메시지가 부족하므로 새로운 유익을 찾아 주는 말세 계시의 책을 쓰게 되었다는 의도로 해석이 가능한가?

그리고 반드시 개인의 신비체험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의 토대를 떠나 객관적 검증이 부족한 개인의 신비체험을 이용하여 소망목회(?)와 희망목회(?)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혹시 담겨져 있다면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개인의 신비체험이라고 인정을 해본다 해도 염려되는 것이 하나 있다.
이 책의 서두 ‘번역에 부쳐’에서 번역자가 교리적, 신학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말자라고 선언한 의도는 무엇인가?

번역자가 비신학적이고 비교리적 내용인줄 뻔히 알고 있지만 시끄러우니까 교리적, 신학적인 논쟁의 대상이 안 되었으면 하는 희망에서 선언한 것이라 하면 한국의 정통 개신교회들을 너무 가볍게 본 처사이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렇게 비성경적인 책을 제작하여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마치 종교적 흥행을 염두에 둔 상업적 발상이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마땅히 자제 했어야 할 일이었다.
혹여 예민한 혹자들이 있다면 ‘꿩 잡는 것이 매’라는 말과 놀음판의 도박 용어로 종교적 올인(all in)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느냐고 물어올 때 대답이 궁색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개인의 신비체험으로 신앙생활(흔히 기성교회가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기준 곧 십일조 잘 내고, 교회 봉사, 헌신, 기도 등의 목표)을 독려한다는 차원으로 활용하려 했다고 해도 건전한 성경신학이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실행되어져야 할 일이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2:1-7 에서 사도 바울이 삼층 천의 천국(낙원)신비체험기에서의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왜 체험담을 쓰지 않았는가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신비체험의 언어가 다소 주관적이고 정황적이며 묘사적이므로 성경의 객관성과 논리적 교리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 있으므로 신앙생활에 유익과 족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적인 전통을 운운하며 마치 교회사가 개인의 신비체험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준 듯이 말한다면 변명하는 그 사람의 신앙에 대한 본질적 정체성은 의심을 받기 시작할 것이며 정통한 성경적 성도들이나 교회들로부터 점점 그 신뢰를 잃어 갈 것이다.

교회사적인 전통에서도 정통한 목사와 신학자들은 성도들의 바른 성경적 신앙에 오염되는 것을 우려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이단과 사이비한 점들을 성경신학을 기준으로 하여 질타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의 포도원과 목장을 훼파하려는 자들(아가서2:15,마태복음24장, 베드로후서2장 참조)로부터 성도 곧 교회들을 보호하여 관리를 잘 해보려는 말씀의 정당한 지팡이요, 나팔수이며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성령 충만(엡5:18,19 ; 골3:16)한 목자요 신학자들인 것이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보면 전반부는 말씀의 교리가 있고 후반부는 신앙생활의 실천적인 면을 겸하여 균형 있게 다루므로 교리와 실천생활신앙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을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야고보서도 믿음과 행함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성경적신학과 교리 등을 도외시하고 신비체험만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빗나갈 뿐 아니라 결국 만신이 우글거리는 원시종교로 회귀하자는 것밖에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 즉 너희는 가서 빛과 소금(마5:13-16, 성도의 이중적 사명)이 되어 하나님나라에로의 문화변혁을 추구하라는 제자의 도(마28:19-20, 제자삼아라!)는 어디에 가서 찾겠느냐는 것이다.

단지 신앙을 독려하기위해서 영적인 천국을 이 땅에 있는 형이하학적 수준으로 끌어내려 표현하는 것은 신.구약 성경 말씀과 바른 신학의 객관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른 신앙 올바른 신학을 위해서는 주관적, 객관적, 역사적 방법이 동시에 조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체험을 다룰 수는 있으나 반드시 신.구약 성경이 뭐라 하느냐에 조명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경의 원리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경(canon)을 통해서 걸러내야 하는 것이다.
무당의 접신(강신무당의 사례)과 기타 종교들안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개인의 신비한 영성체험들에 관하여 과연 그것들이 성령님의 체험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체험인지 무슨 잣대로 분별하여 구분을 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회는 성경말씀위에 기초한 체험이어야 한다. 성경말씀이 성령하나님의 검(칼)으로 활용되어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영.육간의 능력으로의 역사하심과 영적인 안목으로의 분별의 능력에 기준이 되는 잣대가 신.구약 성경말씀이다.

주일 예배 시에 목사가 성경말씀으로 준비된 설교는 아니 하고 꿈 이야기, 개인의 체험으로 된 얘기로 일관하며 신앙생활(십일조 생활, 교회에 헌신,봉사 등)을 잘 하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막가자는 것이다. 아마 그러한 교회가 성경을 대하는 입장은 이방 종교의 부적처럼 모셔 두거나 들고 다니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이 빠지면 기독교의 개신교회는 무너지게 되며 사명상실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회가 ‘오직 말씀’으로 돌아온 이유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같은 개신교 교단들끼리 물고 찢는 것으로 표현을 시도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미 교회 안에 미혹하는 영들과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들어와 이적, 환상, 현란한 연예 오락적 이벤트성 프로그램(entertainment), 코미디 같은 달콤한 말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를 빙자하여 어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인하여 빗나간 계시 안에 포로가 되게 하려는 의도라면 얼마나 무섭고도 섬뜩한 일일까?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까닭이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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