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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을 건국절로? 매국행위 반대합시다.

한지은 |2008.08.14 21:01
조회 918 |추천 3

<건국절 기념은 공식 매국이다!!!>

 

1. 누가, 왜 건국절을 만들려 하는가?

 

한나라당 국회의원 13인이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입법 발의를 해놓은 상태다. 관심 있는 국민들은 알 일이지만 이들 중 9인은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대했던 이들이다. 한 마디로 공식적인 친일파로서의 입장을 가진 이들이다. 친일진상규명법에 반대했던 17대 국회의원들 중에는 일본의 자위대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들이 많다. 이들의 이념적 배경은 뉴라이트다. 뉴라이트의 안병직 재단이사장은 서울대학교 교수이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이기도 하다. 일본의 조선 근대화를 긍정하는 교과서 논란의 중심에 있는 대표적 친일파다.

한나라당이 광복절은 건국절로 바꾸자는 입법안을 낸 것이 처음은 아니다. 2003년 한나라당 김용학 의원외 13인의 이름으로 발의되었고 2004년 한나라당 정갑윤 의원이 다시 대표 발의자로 나섰다. 작년 9월 다시 정갑윤 외 10인 한나라당에 의해 발의되었고 올해 김용학, 이방호, 권기술 등 역시 한나라당 13인 명의로 발의되었다. 한 마디로 끈질기게 진행해 온 일관된 작업이지 갑자기 나온 일이 아니다.

 

이들이 광복절을 그토록 싫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광복절을 기념하면 독립운동가들을 추모하게 되고 그것은 곧바로 매국 친일파에 대한 비판 여론 상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건국절 기념은 이승만을 위시한 초대 각료부터 영웅화하게 된다. 이들의 대부분은 공식 친일파였다. 이들로서는 그들 역사 일생일대에 위험한 순간이었던 광복을 전 국민의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 단지 과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늘 현재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의 이해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친일파는 한 번도 정리된 적이 없고 그들은 아직도 일제로부터 하사받은 땅과 재산으로 잘 살고 있다. 이것이 위협받을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우고 싶은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건국일이 1919년이 아니고 1948년이라는 점이다. 헌법에도 분명히 48년 정부는 건국이나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도 임시정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국호를 지은 이들을 건국의 역사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만약 꼭 건국절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정통성은 임시정부에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시기를 올려 잡는 것을 이 입법 발의자들은 결코 원치 않는다.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건국에 대한 순수한 기념이 아니라 독립운동과 광복의 역사 제거이기 때문이다.

 

 

2. 몇 가지 물타기 논리들에 대한 검토

 

* 일제 시대 좋든 싫든 조금이라도 일제에 협조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그걸 다 밝혀낼 수도 없거니와 밝히는 과정에서 국론 분열만 초래한다.

 

친일파들의 대표적 물타기 논리다. 물귀신 작전이다. 일제 하 조선 민중들은 대략 몇 가지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첫째, 적극적 항일-아마도 수로는 가장 적을 것이다.

둘째, 소극적 방관-아마도 대개 다수가 이랬을 것이다.

셋째, 소극적 소시민적 동조-아마도 이 수도 만만치 않게 많았을 것이다. 모든 공식 기구가 일제하였으므로 불가피했을 것이다.

넷째, 적극적 매국-민족이 밥 먹여 주냐, 나만 잘 살면 되지. 이들이 공식적 친일파들이다.

 

이들의 범위를 확정지을 방법이 있다. 청산 대상이 되는 친일파는 애매모호하게 퍼져 있는 부역자들이 아니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공식적인 귀족 직위와 토지를 분배받았던 사람들인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2년간에 걸쳐 진행된 이 사업은 <대동조선신사보>라는 책으로 1912년에 편찬되어 귀족 작위 수여자 80명과 140여개 성씨 문중 원로 대표 7300명을 밝히고 있다. 이들이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친일파들이다. 이들에게 수여된 토지는 작게는 수십만평에서 많게는 수백만평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들은 이 직위와 토지를 바탕으로 조선의 매국 엘리트층을 형성했고 천인공노할 앞잡이 노릇을 충실히 했다. 일본이 영악한 점은 가문을 중시했던 조선의 상황을 활용하여 대부분 씨족의 종가를 매수함으로써 향후 사실상 조상대의 친일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거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들은 일제하에 이 재산을 기초로 출세했고 그 후광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떤 나라든 식민지 광복 후 내부 반역자 정리는 기본이고 그 범위는 대략 몇 만건에서 몇 십만건까지 이르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 아주 좁게 봤을 때 신사보에 이름 오른 이들과 36년간 고위 관료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이들로 축약해서 친일파로 규정할 수 있다.

 

 

* 선진국은 다 건국 기념한다.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건국 기념이 뭐가 문제냐?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논리 자체가 비주체적이다. 남이 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서구 선진국들이 건국 기념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가, 그것도 개천절과 광복절과 3.1절을 두고 해서 안되는 이유를 살펴 보자. 다음 글을 보자.

 

 

내셔널리즘과 국민국가가 괴리되어 있는 극단적인 예는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사부아 왕에 의해서 1859~1860년과 1866년 및 1870년에 걸쳐 통일이 되었다. 그러나 알프스 지역에서 시칠리아에 이르는 전 지역에 단일한 통치권력이 존재한 선례는 고대 로마 이후로는 없었다. 이탈리아는 메테르니히가 매우 적절하게 표현했듯이, ‘단지 지리상의 표현’에 불과했던 것이다. 1860년 통일이 성취된 당시 일상생활에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주민은 전체 주민의 2.5 퍼센트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사람들은 아주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어서, 1860년대에 시칠리아 섬에 부임한 학교 선생이 영국인으로 오인받았을 정도였다. 아마도 그보다는 훨씬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그 당시 스스로 무엇보다도 자기는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했으리라는 것은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수는 전체로 볼 때 대단치 않은 소수파였다. 다젤리오(Massimo d'Azeglio, 1792~1866년)가 1860년에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이탈리아인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민족은 모두 사회적 창조물이며, 국가가 민족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물론 민족은 신화이다. 하나의 민족을 창조해 내는 과정은 하나의 역사, 하나의 장기적인 연대기 그리고 이를 정의하는 일련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는 상당 부분 고안된다). 설령 민족을 구성하는 다수가 이 특징들을 공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민족은 그렇게 만들어진다.(중략)

민족주의는 근대 세계체제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하나의 신분집단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금처럼 국가간 체제 내부에 위치해 있는 주권국가들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국가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접착제 역할을 한다. 이를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민족주의는 단지 약한 국가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유한 국가들에서 민족주의는 중간 정도의 힘을 지닌 국가들보다 공개적으로는 전면에 내세워지는 경향이 덜하지만, 사실 가장 부유한 국가들에서 민족주의는 매우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국가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민족주의적인 테마를 공공연히 추구하는 것은 국가를 더 강력하게 만들기 위한 시도로서 분석되어야지, 결코 그 국가가 이미 강하다는 증거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가 민족주의를 창출하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 주요한 방식이 있었다. 국공립학교 체제, 군대복무, 공공 경축행사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모두 다 끊임없이 활용되어 왔다.                                       - 월러스틴, 『세계체제 분석』-

 

  자, 보시다시피 서구 국가들은 근대에 ‘인위적, 계약적’으로 만들어진 국가 역사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경제 교류 범위가 확대되면서 말과 역사의식, 정체성이 다른 몇 개의 민족이 이해 관계에 따라 뭉친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민족이나 독일 민족이라는 것은 유구한 세월 존재했던 실체가 아니고 근간에 만든 것이다. 우리는 미국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인 줄 알지만 주요 서구 국가들은 다 연방국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건국일이 곧 민족 정체성의 탄생과 기원일이 된다. 그래서 내이셔널리즘이라는 영어의 번역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양자가 다 가능한 것이다. 즉 국가 건설과 그 집단 통일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가 동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다르다. 우리의 민족 정체성은 단군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미 형성되어 있다. 서구나 동양에서는 중국의 경우 왕조의 교체는 곧 지배 민족의 교체였다. 그러나 조선-삼국-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이 역사는 단 한번도 민족의 교체 없이 이어진 역사였고 더구나 대한민국이 연방국도 아니다. 국호와 정통성의 문제도 이미 왕조의 이름 속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큰 빛이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고구려는 고씨가 세운 빛나는 나라, 백제는 빛 무리, 신라는 새로운 빛, 고려는 큰 빛, 그리고 다시 조선으로 이어졌다. 이 광명민족으로서의 내용적 연결 의식은 대한제국의 ‘한’자 속에 이어졌고 (한자에는 크고 빛난다라는 의미가 있음)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민족 정체성을 의미하는 한 자는 그대로 두고 정치 시스템을 의미하는 ‘제’자만 ‘민’자로 바꾼 것이다. 왕조에서 공화제로 바꾼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 변경일 뿐 구성원의 성격과 연속 정체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서구가 건국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네들 정체성의 뿌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우리 민족이 48년도에 사회 계약을 통해 만들어졌나?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국민이 있는가?

 

 

3. 건국절 탄생의 효과

 

단기적 효과

 

1) 우리나라는 100년도 못되는 신생국가가 된다.

2) 임시정부의 존재가 보잘 것 없는 '망명정부' 신세로 전락한다.

3)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사이에 존재할 미군정 3년이 한국사에서 떨어져 미국사에 편입될지 모른다.

4)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존재를 배제해 버림으로써 분단체제를 영구화하게 된다.

5) 1910년 8월 29일부터 1948년 8월 14일까지 38년을 스스로 국권상실 또 국맥단절기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간도나 독도 영토 문제는 자동적으로 물 건너 간다. 독도 문제가 터졌을 때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는 요미우리의 보도가 실현된다.

6) 매국노 친일파의 죄상을 대한민국에서 제외시키게 된다. 그들의 부당 이득에 대한 국가 환수는 물 건너 간다. 아마도 현 친일파들에게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7)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장기적 효과

 

1) 이제 시작에 불과한 중국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완벽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2) 모든 독립운동가는 테러리스트로 몰리고 거꾸로 매국 친일파들은 민족 근대화의 선구자로 재평가되게 된다. 이런 정도로 정의가 외면당한다면 공동체의 대의를 위해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3) 과거에 대한 평가와 명분 문제가 아닌 현실적 문제가 있다. 이들은 친일이면서 친미이고 개신교 지배층이고 철저한 천민 자본주의 신봉자들이다. 이들의 정책에 서민 우선이 있을 수 없다. 이들의 지배가 공고해진다는 것은 곧 체제가 그나마 건강한 복지 국가의 방향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그 고통은 오롯이 서민층에게 전가된다. 이런 효과를 모르고 생존에 쫒기고 교육 수준이 낮아 보수 언론에 쉽게 물드는 일부 서민층들이 자기 발등 찍는 줄 모르고 그네들에 동조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4) 무엇보다 민족의 정체성과 知力이 영원히 말살된다.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이 우리 대에서 실현, 완성된다.

 

 

4. 역사적 고찰 -해방 후 정리의 실패: 반민특위 해체

 

8.15 해방은 이들에게 공포스러운 날이었지만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이들에 대해 청산은커녕 요직으로 등용한다. 근대 국가 수립에 필요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이들이 이들이라고 봤던 것이다. 일제때 고위직을 지내거나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상층은 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청산되어야 할 역사는 미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의해 탄생한 초대 이승만 정부 역시 군정의 연속선상에서 이들에 대한 수용을 이어가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정부 정통성 문제에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하게 된 출발점이다.

 

한편, 민족반역자들의 속성대로 이들은 해방 후 친일에서 친미로 탈바꿈한다. 물론 프린스턴대를 나왔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을 따라 복음주의 기독교로 개종도 한다.(이승만 대통령의 박사 학위는 사실무근이다. 대한민국 최초 학력위조자인 셈이다.) 그래서 친일파, 친미파, 한기총으로 대표되는 복음주의 기독교는 세 집단이 아니라 한 집단이다.

 

이들에 대한 민족적 정리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제헌국회 소장파인 김웅진의 발의로 "반민족 행위 처벌자 특별법" 초안이 마련되고 이어 10월23일 역사적인 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이후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중앙청 205호실에서 본격적인 특위활동에 들어간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구성되었을 즈음인 1948년 10월하순 당시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사찰과 부과장 홍택희,중부경찰서장 박경림,전임수사과장 노덕술 등이 공모한 반민특위 요원들의 암살음모 사건이 있었다 이사건은 당시 이들의 사주를 받았던 살인청부업자인 백민태가 양심선언을 함으로써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들어나기도 했다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려고 당시 기득권층이 얼마나 부심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였다 암살대상자 명단에는 김웅진, 노일환,신익희,유진산,이철승,김두한,장홍염,김상덕,김상돈,김병로,권승렬,서순영,오택빈,홍순옥,최국현,서용길,서성달,곽상훈,김장렬 등으로서 반민특위 요원 혹은 이를 지지하는 강경론자들이었다. 그후 반민특위는 정부의 집요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특위활동을 해나가는데 화신 백화점 사장인 박흥식을 시작으로 드디어 검거에 들어간다 이어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인 최린,이광수,최남선 등이 연이어 체포된다. 그러나 1949년 6월26일 반민특위의 정신적 지주이자 지지자였던 백범 김구 선생의 암살로 인해 사실상 반민특위는 급전직하 하게된다. 그 전에 이미 정권 측에 의해 조작된 대한 정치공작대사건(국회프락치 사건)으로 특위 위원들의 대부분이 구속되었고 무장경관 50여명의 반민특위 급습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이미 그 힘을 상실하고 있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공소시효를 1950년 6월20일에서 1949년 8월31일로 단축하고 1949년 9월5일 반민특위 활동 종결 이어 9월22일 완전 폐지된다. 결국 정부가 주체가 되어 강제적으로 특위 활동을 막은 것이다. 친일파들의 득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당시 경찰의 80%는 친일파였고 초대 국군 창설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배제되었다. 바야흐로 친일파에 의한 국가기구 장악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반민특위 활동]

 

1. 총 조사건 682건, 특별검찰부 기소 280건

2. 영장발부 408건, 검거 305건

3. 특별검찰재판부송치 570건, 재판종결 40건, 실형언도 12건

(실형이 언도된 자들은 1950년 6.25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전원 풀려남. 결과적으로 친일파 처벌은 한 건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외국 사례

1. 프랑스 - 친나치주의자 사형2071건,징역 39900건

2. 벨기에 - 상동(上同) 55000건

3. 네덜란드 - 50000건

4. 일본 - 군국주의자 21만명 추방

 

 

3.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권 내에서의 연속성

 

초대 정권을 잘 넘긴 이들에게 5.16을 통해 일어난 박정희 정권은 역사적 면죄부 정도가 아니라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고 구조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방어할 절호의 기회였다.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명으로 만주군관학교 생도생 중 1등 졸업생이었던 박정희는 태생부터 철저한 친일파였다. 군관학교 입학 시절,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가 군관학교로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많아 자격 미달이었고 신원과 사상검증의 통과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화신이었던 그는 호적을 고쳐 나이를 고치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씀으로써 (당시 혈서 내용은 다음이다. 盡忠報國 滅私奉公 진충보국 멸사봉공) 입학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던 동조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자세였다. 혈서로 일본 천황에게 충성 서약을 한 조선인은 그가 유일하다. 그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날 주일 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대일본제국최후의 군인이 죽었다’고 말 할 정도였다. 그만큼 그의 친일은 적극적인 것이었다.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영안지방 →간도에서 활약한 한인 독립군부대가 북만주로 이동할 때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서쪽으로 진출할 때에 주둔하던 요충지였다. 열하지구는 일본군에 대한 항일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항일세력은 팔로군, 군부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소규모의 게릴라 (유격대) 등이었다. 다카기 마사오(박정희)는 이곳에 임관한지 1년만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의 편제상 소대장은 최전선에 배치된다. 여기에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이 상황을 좀더 자세히 보자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본질을 알 수 있는 증언이다. 말없는 사나이가 갑자기 고함을 질러대는 것은 발작일까? 기적일까? 어느 쪽이든 '조센징 토벌'이란 명령을 받으면 자기도 가눌 수 없는 흥분 상태에 빠진 것만은 분명하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은 강렬한 의지와 충성심에 불타는 "조센징(독립군) 토벌"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신념을 보여주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그래도 이런 것은 얌전한 행위에 속했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압권이다.

 

[중앙일보. 1991. 12. 14]

 

[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근대화를 지상 과제로 삼았던 박정권은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바탕으로 계획 경제의 틀을 마련하는데, 차관을 끌어올 수 있는 대상은 미국과 일본 뿐이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을 요구할 수 있는 처지였고 이승만 정권 때부터 끌어오던 한일협정을 서둘러 매듭짓게 되는데, 일본은 보상금과 차관의 조건으로 보상 일체를 대한민국 정부의 이름으로 다시는 거론하지 말 것과 국내 친일파 권리를 건드리지 말 것을 요구했다. 박정권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아직도 정신대 위안부 문제 같은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은 박정권과의 외교로 일체 보상이 끝났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때 박정권이 받아 쓴 보상금액은 3억불이었다. 여기에는 일본으로 넘어 간 숱한 문화재와 사서들에 대한 일본 권리를 인정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극단적 친일 정부의 비호 아래 친일파 세력들은 사회 각계로 세력을 키워갔다. 이승만 10년과 박정희 18년을 합쳐 한 세대가 흐른 뒤에 친일파는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는 명실공한 사회 기득권층을 이룬다. 아다시피 박정권 이후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까지는 동일한 정치세력이 집권한 것이었다. 오늘날 한나라당의 전신은 민정당이고 그 전신은 공화당인 셈이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임을 자처하던 자였다. 다시 한 세대가 흘러가고 친일 문제는 이제 어느 한 대통령의 의지대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이 되고 말았다.

 

 

4. 친일파에 의한 국가 장악

 

17대 국회의 의원 중 위에서 지적한 공식적 친일파의 후손이 148명이었다. 그들 재산에 대한 국가 환수 문제는 법률적 시효 문제 때문에도 더 다룰 수 없는 문제가 되었는데, 이 정리는 모종의 특별법 신설이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입법, 사법, 행정 국가기구의 대부분을 친일파 후손들이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가능 할 수가 없다.

민간 사회 부분에서도 친일파의 득세는 압도적이다. 종교계에서 가장 큰 부자는 한국기독교총연맹(한기총)과 순복음 교회로 대표되는 개신교 복음주의 종파인데(대한민국 개신교의 70% 차지) 전술했다시피 이들의 뿌리는 친일파들이다. 순수하거나 순진한 신도들이 다수 있다하더라도 그 상층부는 친일파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세계 기독교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십의 일조라는 헌금 관행 정착으로 이들이 거둬들이는 헌금액은 천문학적이다.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정확하게 알 길은 없으나 단순히 신도수와 재산액 대비 추정을 해보아도 이들이 연간 거두는 헌금은 수십조에 달한다. 그 돈에는 세금도 붙지 않고 감사도 없다. 무엇에 쓰이는 것일까?

학계도 별 차이없다. 현 서울대학교 총장인 이장무씨는 을사오적의 대장 이완용의 자손이다. 그런 이장무씨가 총장에 선출될 때 서울대학교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의 60%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들은 이 사실을 알고 한 것일까, 모르고 한 것일까? 모를 수가 없다. 알고 한 것이라면 그 60%의 교수들에게 친일 문제에 대한 역사의식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장무씨의 동생 이건무씨는 현 국립박물관의 관장이다. 대한민국의 교육과 문화재 수장이 친일파 후손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들이 단순히 친일파 후손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이들의 역사의식은 아직도 그네 조상들의 행각을 ‘근대화 선구자’라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물론 친일파들로서는 그들의 입장을 어떻게든 합리화해야 할 것이고 궁색한 변명이라도 만들어야 할 처지일 것이다. 여하튼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그들의 변명은 이제 대한민국의 공식 입장이 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신호탄이 오늘날의 ‘뉴라이트 교과서’다. 교육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신화를 사실로 만들든 사실을 신화로 만들든 한 세대만 흘러가면 누구나 그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 세대 후 우리 후손들은 을사오적을 을사오영웅으로 기념할지도 모른다.

 

 

5. 친일파에 의한 조선총독부 민족문화말살정책의 완성

 

해방 후 역사학계를 장악한 이들은 고 이병도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가 역사왜곡을 위해 창설한 조선사 편수위 출신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충실하게 식민사학, 반도사관을 대대로 현재까지 교육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강한 심정적 반발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왜곡의 실상이 내용적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왜곡이 다른 곳이 아닌 교과서 안에서 버젓이 지금까지 가르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문제 왜곡은 너무나 방대하여 여기서 일일이 다룰 수가 없고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결론적인 것만 제시한다.

 

① 건국과 관련하여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조작

이에 대해서는 해방 후 각 계 노력으로 어느 정도 수정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요원하다. 고대사 관련 핵심은 조선 이후 혈통과 강역인데, 이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고려는 건국부터 소멸까지 한 번도 한반도에 도읍한 적이 없는데 이 방대한 역사를 전부 한반도 안의 사건으로 축소 조작하였으나 사학계 친일파들은 이미 학문적으로 고증, 입증된 사실이나 세계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문제조차 유독 국내에서만 눈과 귀를 틀어막아 고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논리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친일파에 의해 완성되고 있는 셈이다.

 

② 조선사 왜곡과 식민지 근대화론

직접 조선 왕조를 멸망시킨 일제로서는 조선사 왜곡이 당면 과제였다. 그런데, 이 부분은 친일파 내부에서도 미묘하게 갈린다. 공식적이고 노골적인 입장은 뉴라이트류의 일본측 식민지근대화론을 받아들이는 쪽이다. 좀 변형된 입장은 현 국사 교과서의 <근대화 맹아론>자들이다. 뉴라이트류의 왜곡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한 눈에 친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지만 후자가 더 문제다. 언제나 교묘한 왜곡이 더 위험하다. 이 부류들의 명제 몇 가지만 검토해 본다.

 

* 조선은 성리학이 전일적으로 지배한 왕조였고 이것은 임진란 이후 공식적으로 불가역적으로 강화되었으며 주자 성리학에 대한 숭배는 곧 중화 사대주의의 뿌리이자 결과다.

 

이런 주장이 먹혀서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조선 선비들이 다 사대주의에 물들었다는 자학적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층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수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비층과 백성들의 생활과 문화에 전일적 지배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임진란 전후 영남 기호학파의 거두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와 기

념관이 함양군에 있다. 거기에는 신명사도라는 조식 선생이 남긴 그림이 있는데, EMB000001704ca5
위와 같다. 동양 철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 일이지만 위 그림은 도가류의 사상과 민족 전통의 신선도가 혼합된 형태다. 조식의 영향은 막대해서 임진란의 의병들 80%가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을 정도다. 그러한 그의 세계관이 위 그림과 같다면 이것을 어떻게 성리학의 지배라고 해석할 수 있는가? 더구나 그의 호 남명은 장자 소요유에 나오는 곤이 변해 붕이 되어 남쪽 바다로 간다는 일화에서 따 온 것이다. 조선 유학자 호가 도가를 따 온 것을 성리학 일방적 지배로 이해할 수 있는가? 오늘날 사학계는 ‘성리학 지배’를 뒷받침할 사료들만 편식적으로 편집하여 역사 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더 극명한 예로 누구나 상식처럼 알고 있는 조선의 ‘숭유억불’이라는 것도 과대 포장되어 있다. 만약 조선조가 단적으로 이러한 정책을 편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오늘날 남아 있는 문화재의 80%가 불교 문화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다 파괴되었어야 정상 아닌가? 더구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실은 이것도 창제라 볼 수는 없지만------)한 이후 조상들에게 고하는 <용비어천가>를 먼저 짓고(이것은 일종의 제사 의식이므로 너무나 당연하다) 곧 이어 지은 것이 <월인천강지곡>(이것은 부처의 자비에 대한 찬양 글이다)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숭유억불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나라에서 임금이 그런 작업을 했단 말인가?

우리 문화의 특징은 거대한 수용력과 융합성에 있다. 이의 뿌리는 삼신일체에 근거한 문화적 자신감과 그 시원성이다. 그래서 불교든 유교든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 전통 사상과 융합되지 않을 수 없다. 그 융합의 정도는 특정 외래 문화의 원형적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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