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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손에 이끌려-4

이성은 |2009.05.04 00:28
조회 114 |추천 0

주의 손에 이끌려-4                                         

 

2-1

하나님의 기묘한 섭리는 당시로는 풀기가 어렵다. 뒷날에야 그것이 그분의 섭리였다고 알아지는 것이다. 나는 그 신학교 8회 졸업생이다. 그동안 졸업생들이 꽤 배출되었지만 신학강의를 맡았던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다. 안 목사님(교장)께서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신학 과목 중 한 과목을 강의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뜻밖이었다. 아직 그럴 만큼 학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슨 자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공부할 겸 한번 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경솔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단지 공부하겠다는 한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좌우간 그래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교리사를 알고 싶어서 그 과목을 선택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것도 어느 과목을 할 것인지 여쭤 보았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강의 도중 어느 학생이 질문을 하겠다고 했다. 그 질문인즉 결혼 전에 성관계를 갖는 것은 죄인가 아닌가의 문제였다. 나는 그때 아직 미혼이었다. 경험도 없는 일이었고 또 그런 문제로 고민해 본 일도 없었기에 좀 거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 문제는 기독교 윤리학의 문제이니까 윤리학 교수님에게 묻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났으면 문제가 없었을지 모른다. 이어서“나는 지금 현장에서 목회하는 입장이고 여러분들은 앞으로 목회할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입장에서 자기 교회에 이런 문제 즉, 어떤 남녀가 결혼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억제하지 못하고 그런 관계가 일어났다면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죄하고 심판할 것인가, 아니면 속히 정식으로 결혼을 하게 주선을 해서 떳떳하게 살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내 의견은 후자라고 말했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참 지났을 것이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여름방학에 전보 한 통이 도착했다. 그 내용은 중앙위원회(우리 교단 최고기관)에 나오라는 것이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찾아갔더니 원로 목사님 두 분과 총회장이 계셨는데 어쩐지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 중 한 분이 내가 앉자마자“그래, 이 전도사는 결혼 전 관계가 죄가 아니라고 했다면서?”라고 퉁명스럽고 좀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나는“아닌데요.”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교장 목사님이시고 우리 교단 총 실권자이신 안 목사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시면서“왜 변명하오?”라고 하면서 금방 어떻게 할 듯이 얼굴을 붉히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너무나 당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도 싸늘해지면서“알아서 하십시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이것은 그 분위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었다. 그렇다면 조용히“무슨 일이십니까? 소상히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했어야 할 터인데 그 순간에 오고갔던 말은 너무 이상한 모양이 되고 만 것이다.

교장 목사님, 그분은 성질이 완고하나 강의는 유명했으며 그래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고 나는 언젠가 그분처럼 뒤를 이어 강의해 볼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던 분이었다. 나를 아껴주셨고 도와주셨던 분이며 지금까지 있었던 은혜의 손길마다에서는 그분의 결재가 필요했던 분이었다. 그런데 나와 그분이 이런 방식으로 부딪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연령으로 보면 아버지 같은 분이고 교단에서는 정신적 지주이자 신학의 중심이신 분으로서 그 교단 자체가 바로 그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는데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마치 달리던 차가 서로 부딪히듯 순식간에 꽝 하고 말았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나는 그 험악하고 무거운 분위기에서 직감적으로‘아! 나를 쫓아내려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러니까 겁도 없이 한 마디를 뱉고서는 그 방을 나오는데 뒤에서 큰소리로“네가 뭔데 남의 교단을 좌지우지하려고 해!”라는 안 목사님의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무엇인가를 각오한 사람처럼 종종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그 교단 역사상 가장 큰 비극적 사건이 되었고 두 사람의 운명이 갈라짐으로써 두 사람 다 교단을 떠나는 치명적 사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날 밤에 급하게 그분들은 시내 모처로 우리 교회 집사들을 소집해 놓고 이 전도사를 교단에서 제명했으니 내보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일어났던 것이다. 남자 집사님들은 모두가 그럴 수 없다고 반발한 것이다. 교회에서 아무 잘못이 없는 교역자를 교단에서 내보내라고 한다 해서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래서 4년간의 이상한 전쟁은 막이 올랐던 것이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대로였던가? 나는 그분을 존경하고 믿었으며 그분 역시 나를 믿고 아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분은 내게서 어떤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고 나는 그 사정을 모르고 당황한 나머지 나를 방어하려고 반사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분들은 그분들대로 나를 축출하기 위해서, 나와 우리 교회는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갖은 방법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어느 교단에서나 이런 일이 생기면 으레 그러하듯이 찬반 두 패로 갈라지고 본질보다는 정치적 이해 관계가 주축이 되게 마련이다.

교단 내에서 젊은 층들은 내 입장을 지지했고 중견층과 고위층에서는 그쪽 편을 들었다. 결국 2년간을 이렇게 냉전이 계속되다가 교단 총무였던 이영훈 선생의 계획으로 총회에서 투표로 결정짓도록 일을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총회를 소집하고 찬반 투표에 들어갔는데 기이하게도 내 편이 1표가 많았던 것이다.

그때 내 편이 1표 적었더라면 두말 못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쪽 편이 1표 적게 되자 총회장이 일어나면서“나는 총회장 못하겠다.”고 했고 다음은 재정 부장이 일어나더니“나 이제 손 떼겠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막강한 실세들이 총회 투표 결과를 보이콧하자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때 그 교단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는 우리 교회를 간섭할 수 없게 되었으나 교단에서 제외된 형편이었다. 그렇게 쌍방 모두 어찌할 길이 없어서 잠잠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오랜 시달림 속에서 심령이 피폐해졌다. 그래서 기도원으로, 부흥회로 찾아다니면서 무엇인가 생기를 찾으려고 했지만 현실은 그대로 있었고 영적인 진보는 발생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할 일이 많았다. 나이가 34세가 되니까 목회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고들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2-2

나이 34세에 독신으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곤란했던 모양이다.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옳았을 것이다.

나이는 훨씬 지났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 동안은 공부를 한답시고 너무 바빠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졸업을 하니까 옆에서들 바짝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강상의 이유가 있어서였는지 결혼을 언제 하는가 하는 문제, 결혼을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너무 결혼이 늦어지지 않나 하는 염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친구들이 벌써 다 결혼을 했고 마지막 친구(김영송) 한 사람이 결혼할 때도 그들의 첫 만남에 동석하기는 했지만 내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이 멀리 있는 남의 일인 것처럼만 느껴졌을 뿐 한 번도 신중하게 나의 일로 고려해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옆에서는 은근히 염려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장성우 집사(현재 목사)가 사람을 소개해서 첫 선을 본 일이 있었다. 그는 모 교단 신학교 교장의 여동생이었는데 영문과를 졸업하고 오빠 사무실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어느 다방에서 처음 만났는데 분명히 이목구비가 똑바로 생긴 사람이었는데도 얼굴 빛이 어둡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돌아와서 장 집사님께 안 되겠다고 했더니“그렇지 않은데…….”하면서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뒤에 생각해 보니까 다방이 별로 밝지 못한 곳인데다가 그날따라 어두운 녹두색 투피스를 입고 나왔던 것이 그렇게 보이게 된 원인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는 그때 나는 결혼을 급하고도 신중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터에 갑자기 소개를 하니까‘아니오’라고 할 수 없어서 나갔던 것이 성사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 후 한참이 지났다. 그해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또 해가 넘어갈 것 같아서였던지 미국에서 귀국해서 모 교단에서 일하고 있던 김흥목 목사님이 결혼해야 되지 않겠느냐면서 좋은 신부감이 있으니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함판 사진 1매를 드리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났던지 두 달이 지났던지 잘 기억이 없는데 소식이 없어서 잊고 있는 때에 고향(완도)에서 올라와 내가 있는 교회에 나오고 있던 김종진 집사님이 전남 광주에 있는 한 처녀를 소개했던 것이다. 그는 모 목사님의 장녀였고 피아노를 전공해서 시내 모처에서 레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 목사님이 소개했던 곳에서는 연락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날짜를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려가기 하루 전날 갑자기 김 목사님이 오시더니 사람이 왔으니 만나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약속을 했다는 말을 못하고 따라가서 현재의 아내가 된 사람과 첫 대면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람은 예전 사람과 반대로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왔고 야외에서 만났는데 시종 웃는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는 등 말을 시작했더니 자기는 사진을 받고 지금껏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이 사람이다.”하시는 확신을 주셔서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결혼을 하기는 해야겠는데…….’하면서도 최악의 조건 때문이었던지 도무지 적극성이 일어나지 않고 그저 주위의 권유에 끌려가는 형편이었기에 한 번도 기도해 보지도 않았고 그저 보라면 보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오랜 시간을 내 사진을 놓고 기도했다고 하니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바위를 만났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기도하고 결정해서 왔다는 사람에게 기도 한 번 안 했던 내가 무슨 말을 하겠으며 명색이 주의 종이라는 사람이‘아니오’라고 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입이 닫힌 채 상대방이 하는 말만을 들은 셈인데 무슨 얘기인지는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다만“기도하고 이미 마음이 정해져서 왔다.”는 말만 계속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아이고, 하나님 뜻이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대답을 안 하고 적당히 헤어진 후 돌아와서 다음날 광주 갈 일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때도 나는 기도 한 번 해 보지 않고 다음 날 광주에 내려가면서 무안에서 목회하고 있던 정 목사에게 이런 일로 내려가니 그곳에도 들르겠다고 하고서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갔던 것이다.

왜 이렇게도 아무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던가? 그저 만나 보라면 만나 보고 가 보라면 가 보는 것 외에는 아무 마음이 없었으니말이다. 최악의 조건에 설상가상으로 전투 중이었기 때문이었던가?

광주에 내려가 그 목사님 댁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수요 집회에서 대표 기도까지 했고 다음 날 광주 구동 공원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큰댁에 가서 잠을 잤다.

광주이기는 하나 변두리에 있는 작은 교회여서 마치 시골 교회 같았는데 목사님 집안 분위기는 소박한 시골집 같았고 사모님도 아주 푸근하게 인상이 좋았으며 동생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고 목사님도 장로교 목사들답지 않게 소탈하고 인간미가 있는 분이었다.

다음날 약속 장소에서 만났는데 우유 빛에 큰 체크무늬가 드문드문 있는 옷을 입고 모자까지 쓰고 나온 그 사람은 인상이 깨끗해 보였고 부드럽게 보였다. 교역자의 딸로서 어떻게 또 어려운 교역자의 아내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그 길이 싫었는데 지난 여름 산상 집회에 갔다가 거기서 소명을 받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없었다. 태도 단정하고 소명감 확실하고 가정 배경 정확하고 하니 무엇을 더 물어 볼 말이 없어서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핸드백에서 청색 종이에 깔끔하게 싼 명함판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이다. 나는 이 사진이 내가 보냈던 그 사진 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도 지갑에 있던 그 사람의 증명사진을 꺼내서 건네주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은 사진이 없어서 증명사진을 보냈었는데 미안하다 하면서 받아 넣었고 나는 내 사진을 되돌려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은 곧 결혼할 의사

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은 끝나고 말았다. 나는 조용히 떠나려고 시간이 되었다고 일어났는데 그는 나를 따라오더니 내려오는 길에서 잠시 쉬어가자고 했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뭐 섭섭하거나 불쾌한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다만 인연이 아닌가 보다 했는데 그는 무슨 얘기였던지 이말 저말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 후에 내가 또 일어나자 다시 따라왔는데 그때는 큰 길이어서 다방이 보이니까 잠시 올라 가서 얘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두 번째 자리를 했는데 그때 역시 같은 모양새였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한 태도였지만 나는 속으로‘다 끝났는데 무슨 할 말이 있나? 참 예의바른 사람이구나. 내가 서울에서 광주까지 왔는데 되돌려 보내려니까 미안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럴 필요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광주역을 향해 다시걷게 되었다. 그런데 또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표를 사서 홈에 들어갈

때 입장권을 사서 또 따라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 무안에 있는 정 목사님 집에 가기 위해 차를 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무 말 없이 나는 기차를 탔고 그는 끝까지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그때 또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땡볕이 쬐던 한 여름날에 갑자기 소나기가 확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한쪽에는 햇빛이 강하게 비치고 있었고 차가 떠나는 곳에만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던 것이다.

나는 손을 끝까지 흔들고 있는 그 사람이 희미해지자 기차 안으로 들어서서 자리에 앉았는데 한 30분 지났을까 갑자기 되돌려 받은 사진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주머니에서 꺼내 정성스럽게 싼 종이를 펴 보았다. 오! 이게 웬 일인가! 내 사진이 아니고 그 사람 사진이 아닌가! 기차는 영문도 모른 채 달리고 있는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지난 몇 시간을 회상하면서 어이없이 무안에 도착했고 정 목사님에게 이 사실을 말했더니 배꼽을 쥐고 웃으면서“그러니까 여태 결혼을 못하지 뭐.”하지 않는가!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선배님에게 물었더니 “아, 그것 뭐 문젠가. 내일 아침 일찍 올라가서 자초지종을 말하면 되지 뭐.”라고 간단하게 말해서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럭저럭 얘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이 친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내 선배였다. 연애에도 선배, 결혼에도 선배, 목회에도 선배. 그러니까 나는 사전 교육을 충분히 받았어야 했는데 그냥 혼자 뛰다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이다.

다음날 아침 가벼운 기분으로 광주로 올라가서 그 전날 공원에서 가르쳐 주었던 그 집(레슨하고 있던 집)을 똑바로 찾아간 것이다. 마침 이른 아침이라서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인기척을 했더니 의아해하는 태도로 나를 보면서 왜 왔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할 말이 좀 있어서 왔다고 했더니 그 일하던 대로 밖으로 나와서 어떤 곳이었는지 빈터로 인도했고 거기 앉아서 그야말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게 되었노라고 했는데 반응은 차가웠고 무반응이었다. 그렇다고 엎드려 빌 수도 없고 해서 할 수 없이 헤어졌는데 어제는 기차가 떠날 때까지 전송하던 사람이 그날은 대문간에서“안녕히 가세요.”하고는 들어가 버리 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냉담해졌던가? 뒤에 알고 보니까 자기를 보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른 곳에서 사람을 만나보고 거기가 또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다시 자기에게로 왔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존심이 상했고 기분 나빴던 것이다. 나는 공연한 사람 기분만 상하게 해 놓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을 또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래도 오해를 풀어야지 내가 뭐 그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편지를 써서 내 진심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 후 얼마 있어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그 사람과 그의 아버지 목사님께서 교회로 찾아오신 것이다. 사연은 이러했다. 내가 떠난 후 그 사람은 막막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지 답답했던 것이다. 그런데 편지가 왔으니까 그것을 들고 아버지께 보였더니“야, 이거 결혼하겠다는 뜻이구먼.”하시고서 이번에 서울에 총회가 있어 올라가게 되었으니 함께 가서 간단히 기도하고 약혼을 하자고 해서 함께 올라왔다는 것이다.

나는 또 난감해졌다. 무슨 결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오해를 풀자고 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그 목사님은 간단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교역자 사이고 하니 뭐 격식 차릴 것 없이 찬물 한 그릇 떠놓고 기도하면 약혼식 되는 것 아니냐면서 오늘 둘이서 잘 얘기하라 하시고는 총회 모임에 가셨고 우리는 서울 남산 공원에 가서 마주 앉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큰 일이 생겼다. 전에 말했던 그 4년 전쟁이 정식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바로 이분들이 오기 전날 우편물이 도착했는데 그 내용은 나를 교단에서 제명한 다는 통지였다. 그래서 그들은 작전을 세워 시내 모처로 우리 교회 집사들을 소집해서 결과를 통보했고 우리 집사들은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전쟁의 막이 올라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제 밤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내가 지금 이런 형편입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내려가서 계시면 다음에 형편을 봐서 연락하겠습니다.”해서 마음먹고 올라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낸 것이다.

한편 충주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 이런 일이 없었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내려갔고 광주 사람은 어이없는 일을 보고 또 어쩔 수 없이 내려갔으니 당분간 나는 결혼 문제 보다는 전투 문제에 열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속 시끄러운 판이었으니까 결혼은 뒤로 밀쳐 두는 것이 차라리 편하게 되었다.

왜 이런 생각을 했던가? 나는 거듭 말하지만 결혼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얼굴로 봐서는 좀 말랐다 할 정도였지만 170Cm 키에 45Kg 체중에 한쪽폐가 거의 망가져 있는 미라 과에 속하는 걸어 다니는 막대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모습이나 사정과 형편에 대해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속 편하게 살았는데 결혼 문제가 생기면 어차피 여자 앞에서 신체검사를 받게 될 것이니까 이것이 싫었던 것이다.

15년 전 징병검사장에 갔을 때 징병관이었던 군의관은 나를 보고 병종 불합격 도장을 찍고서는 내가 돌아서는데“장가나 가야 할 터인데…….”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던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장가를 가야겠다 말아야겠다는 것이 그때까지 항상 남의 얘기처럼 생각되었지 막상 내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어쩌면 일부러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해야 별 수가 없고 괜히 인생만 서글퍼질 것이니까 아예 그런 것들은 내 생각의 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남의 일이나 구경하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부담스러운 것이 현실로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둘 다 없었던 것으로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다가오는 소리를 멀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충주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런 형편에 이런 사람이오. 그러니 어떻게 결혼하겠소?”라고. 그랬더니 답장이 오기를 이러니저러니 격려를 하면서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는 식의 편지였던 것이다.

그래서 좀 더 강도를 높여서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기도하고 확답을 얻은 기초가 있었으니까 그랬겠지만 나로서는 기도의 응답도 없고 또 기도하자니 그것도 낯짝이 없는 일이고……. 기도하면 이런 꼴을 감춰 주시기라도 하겠는가? 옷을 벗어 보면 당장에 알 일을 하나님 보고 상대방들의 눈을 멀게 해 달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기도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못해 질질 끌려가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또 현실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광주에 내려간 사람은 아무 소식이 없고 충주에 있는 사람이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또 올라왔는데 그때 나는‘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모든 일(전투)이 다 잘 정비되어 교단에서 뭐라 해도 교회에서는 꼼짝도 않을 태세가 준비되었을 때 그가 왔기 때문이다. 전에 광주 사람은 사건의 심각성을 가지고 말했지만 이번에 충주 사람에게는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핑계치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어쩐지‘하나님의 뜻이 이쪽에 있는 모양이다.’라는 감이 들었다.

광주 사람에게는 인간적으로 참 미안했다. 그러나 인간적인 일은 지나면 그만이지만 하나님과의 일은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내 잔꾀를 부리고 거부한다면 하나님에게 교통이 막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결혼하겠다.”고 했더니 이 사람은 뭐 당연한 것을 가지고 혼자서 그러니저러니 하느냐는 식이었고 놀라워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나만 천당과 지옥을 차표도 없이 왔다 갔다 한 셈이었다. 그래서 광주에는 그 사진을 동봉해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마감 편지를 썼다. “미안합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일의 추이를 보아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 부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시기를 빕니다.”라고. 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그래도 하나님 행하시는 일이라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광주 사람은 안 될 때 왔었고 충주 사람은 될 때에 왔었다. 이것을 누가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은 미리 알았지만 꼭 그날 그 사람이 당도하기 하루 전날 그 제명 통지가 도착했다는 것이 우연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반대로 충주 사람은 사정도 모르면서 그 사건이 정비되어서 한숨을 쉰 다음에 왔으니 그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나의 결혼은 이렇게 복잡한 사연 속에서 내가 만들어 놓은 혼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가닥을 추려 주시고 주님의 뜻을 따르도록 배후에서 조종하고 배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나는 길을 가자 하면 가니 마느니 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서는 가기로 결정하고 나면 왜 빨리 가지 않느냐고 성화를 댄다. 여행을 하자면 짐도 많고 준비할 일도 많은데 그때는 막상 재촉을 하는 것이다. 결정을 빨리 할 일이지 짐이 무거운 사람 보고 어떻게 빨리 안 간다고 성화냐고 할 것이다.

결혼이 결정될 때까지 나는 많은 혼란을 겪고 하느냐 마느냐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막상 결혼이 결정되자 당장 결혼식을 하자고 재촉을 했다. 그런데 아내는 반대로 결혼 결정은 벌써 해 놓고 막상 결혼식을 빨리 하자니까 밍그적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10월 달인가 결정을 했는데 기어코 해를 넘기고 다음 해 1월 5일 그 추운 날에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34세를 넘기고 결국 35세에 결혼함으로써‘늦게야(?) 결혼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실 아내는 그때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시집을 오는데 텅 빈 짐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7년간을 친정에서 봉사했는데도 아버님께서 사업에 실패하고 나서 막상 결혼할 때는 완전히 빈손이었던 것이다.나는 그냥 오면 된다고 성화를 댔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그것이 무거운 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결정을 빨리 하고 짐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천히 가자고 했어야 했던 것이다.

이 사람은 결정은 하나님하고 했으니 빨리 했지만 행차는 자기가 하려니 힘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길이 열렸다. 육군 대령으로 있던 큰오빠가 별자리인 제2 하사관학교 교장으로 갑자기 발령이 난 것이다. 7년 동안 말똥을 달고 우리나라 대령 중 최고참이었던 분이 갑자기 별도 달기 전에 직임이 결정되었으니 별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너무 좋아진 나머지 간략하게나마 결혼 준비를 해 주어 그나마 1월 5일이 결정된 것이다. 역시 하나님이 결정해 준 일이니까 책임도 지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느냐 하면 오빠는 그때 발령을 받고 임지에 내려갔다가 얼마 안 있어서 장군 계급장을 달기도 전에 병사들이 훈련을 하던 중에 사고가 난 것이다. 그래서 겨우 동생 결혼만 시켜 주고는 그 의자 밑에까지 왔던 별자리에서 영원히 떨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장모님께서는 그 아들을 극진히 사랑했고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은혜를 갚느라고 갑자기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장군 자리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장군이 될 팔자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아내에게 어머님에게 받은 사랑을 보답하라고 그 기이한 기회를 주셨고 아내와 의논하였던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살피시다가 오빠를 택하셨다고 해석하면 어떨까! 나는 결혼식을 마치고 인천으로 신혼여행을 가서 1박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호텔에 짐을 풀고 이렇게 둘이서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결혼도 할 수 없는 나를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그것이 전적으로 당신의 은혜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라고.

그 후 얼마 있다가 아내는 임신을 했고 첫 아이를 친정집에서 낳았는데 소식을 듣자마자 이름을‘은혜’라고 지었다. “장가라도 가야 할 터인데…….”라고 했던 군의관의 말은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실감하게 했고‘은혜’는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교단을 떠나 연희동에 있으면서 C. C. C. 에 들어가 충주로 이사하기 직전에 둘째를 얻었는데 그의 이름을‘화평’이라고 지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모두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지으니까‘용(容)’자를 써야 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화평’이라고 지은 것은 4년간의 뼈아픈 싸움이 끝나고 화평의 때로 들어왔기 때문이었으며 그 싸움을 통해 얻은 것이‘싸우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화평중에 계신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후일 이 아이에게 내가 왜 그 이름을 지었는가를 설명해 줌으로써 싸움 없는 인생을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떤 명분이라도 싸움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은 계실 수 없다. 인간들의 싸움에는 다 명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이해관계가 아니면 선과 악을 아는 지식 때문이다. 그러니 이해의 문제와 선악의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 사회의 문제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안에 계실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막을 정하시고 지성소에계셨던 분이고 인격의 성막이신 예수 안에 거하신 것이다.

나는 명분이 분명했기에 대항하고 싸웠다. 그러나 그 명분은 바로 이해관계와 선악을 아는 지식의 문제였으니 어찌 그 싸움판에 그분이 거하였겠는가? 그런데도 쌍방이 서로 하나님이 자기편인 양 내세웠고 진리니 정의니 하면서 서로 당당하려고 했던 것이다.

‘주님은 싸움판에 계시지 않고 오직 화평 중에만 계신다.’이것이 4년 전쟁을 통해 배운 하나의 교훈으로 내 일생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결혼으로 인하여 중요한 노선으로 인도 되었다.

밀려서였든 끌려서였든 나의 결혼은 오늘의 진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첫 번째 선을 보았던 그 사람과 결혼했을 경우 필연적으로 갈 곳 없었던 나는 그 교단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거기서 그의 오빠 되신 분의 지도와 보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길은 정해진 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나는 당연히 장로교의 교역자가 되었을 것인데 세 번째 사람인 현재의 내 아내와 결혼함으로써 나는 C. C. C. 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일했기 때문에‘워치만 니’를 만났고 오늘의 나와 우리 교회가 있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이하다. 그런대로 좋은 조건과 길이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이끌려가다가 하나님과 결정했다는 사람에게 끌려가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일이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만일 첫째나 둘째 사람 중에 누구와 결혼했더라면‘워치만 니’를 만나지도 못했겠지만 혹시 만났다 해도 전적으로 그분을 따르자면 그 좋은 조건들(?)이 크게 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코 순수하게 그분의 노선을 따르지 못했을 것이고 따른다 해도 적당히 섞인 채로 얼버무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다.

70년 대 우리나라에서 교역자치고‘워치만 니’저서의 시리즈를 접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순수하게 이 복음의 노선을 따른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생명은 자기의 고유한 노선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노선 안에서는 성장이 어렵다. 혹시 성장한다 해도 왜곡되거나 퇴색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나를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여건 안으로 이끄셨고 그 생명이 장애 없이 성장할 수 있는 자유로운 세계로 해방시 켜 주셨던 것이다.

나는 C. C. C. 안에서 그 사역의 연유로(다음에 언급할 것임)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이고 C. C. C. 에서 밀려남으로써 생명의 성장을 위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나를 밀어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C. C. C. 라는 조직의 제한으로 인하여 이 생명을 온전하게 재배하지 못하고 그 일부만을 맛보고 말았을 것이다.

교단 사건은 내게 가혹했고 결혼 과정은 혼란스러웠지만 주님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하셨다. 교단 사건이 아니었으면 내가 C. C. C. 에 들어갈 리가 없었고 현재의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도로 옛길을 갔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여러 사람들을 동원하고 사용하셨지만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나까지도) 각자의 배역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길은 야훼이시고 야훼에게만 있다. 나를 부르시고 이끄신 하나님은 길이셨고 그 길로 나를 인도하셨던 것이다. 가혹한 고통 중에서도, 어지러운 혼란 속에서도 그분만은 유일한 길이셨던 것이다. 결혼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사람이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을 수 있을까 염려했던 사람이 자식을 낳았다. 야훼께서는 내 앞에 있는 태산을 평지가 되게 하셨고 가시나무 수풀 속에 길이 되어 주셨던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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