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녀에 대한 나의 기억 > -
"응, 30분 후에 도착 한다구 ... 알았어, 어 대륙빌라 201호인데 일단 역삼 역에서 내려
내가 마중 나갈 테니까."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장례식 이후 처음 보게 되는 것 같다.
사실, 양자 물리학 수업이 있던 날 학교가 알아주는 학구파로서 공부 이외에 것인 거의
관심이 없었던 태곤 선배의 윤정이에 대한 관심은 나로 인하여 그 당시 내가 윤정이에 대
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성인이 되어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던 적
이 있었었다. 선배에게 윤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려는 순간 그는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면서 가버렸지만 ……
그녀는 나와 함께 서울과학고를 다니던 시절부터 남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
다.
다만, 약간 이상한 행동과 특이한 사고 방식으로 인해 좋지 않은 소문을 많이 나게 되었
고, 그녀의 미모에 빠져 관심을 보이던 남학생들도 얼마 되지 않는 동기끼리의 구설수에
휘말릴 것을 우려해 직접적인 접근은 꺼려 하는 분위기였다. 아마, 그녀에 대한 남학생들
에 대한 인기가 만들어낸 질투일 것이라고 지금은 추측되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꽤나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소심한 과학고 학생으로서는 접근하기 두려웠던 게 사실이었다. 그
런 소문의 이야기를 태곤 선배에게 이야기 해 주려고 했었는데 …… 태곤 선배는 아무 거
리낌 없이 윤정에게 다가갔고, 그녀의 남자가 되었었다.
하지만, 서울과학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라는 소문이 남학생들 사
이에서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로 그녀에 대한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었다. 나 역시 그런
윤정을 보고 한 것 마음 설레였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
'아휴, 차라리 소문만 좀 없었어도 .... '
이런 생각을 한 남학생들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폐쇄된 기숙사형태의 학교라는 공간
에서 지나치게 튀는 여학생과 사귄다는 것은 남자들한테 큰 부담이었다.
대학시절에도 역시 그녀는 소문을 몰고 다녔다. 하지만, 나 역시 대학 시절 또 다시 그녀
를 보고선 한 것 두근거리곤 했다. 용기를 대어 과감히 댓쉬를 해 보아야겠다는 마음도
여러 번 먹었었는데 ……
사실 예쁜 여자만을 찾자면 윤정이보다 예쁜 여자도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
의 그 천진난만한 미소와 가끔씩 내던지는 엉뚱한 말투는 알 수 없는 그녀만의 매력을 부
가 시켰다.
‘윤수야, 이거 정말 예쁘지 않아?'
교정에서 주어온 듯한 이상한 잡초를 내게 내밀며 하늘이 내린 듯 한 미소를 짓는 그녀
의 모습에 난 여러 번 심장이 멈추는 듯 했었다. 아마 서울과학고 시절 그녀의 얼굴을 그
렇게 정면으로 바라 볼 수 있었던 첫 기회였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난 그녀의 눈을 똑바
로 마주칠 수 없었다.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은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그녀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기 보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 같은 느낌이
가득 차 올랐다.
하지만, 무언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에 이후에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었다.
실제 그녀의 학창 시절의 성적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중간 혹
은 그 이하의 성적을 항상 유지하고 있었다. 천재는 미치광이라던가 하는 류의 속담에 대
입 할만한 천재형의 학생은 아니었지만, 하는 생각이나 행동방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
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실험, 특히 생물이나 화학실험에 있어서는 이상할 만큼의 강한 집착
을 보였다. 그걸로 인해 많은 구설수에 올랐지만, 그리고 대부분의 애들이 실험파트너가
되길 꺼려 했지만,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고되고 피곤한 실험을 피하는 반면 그녀는 반드
시 스스로의 힘으로 대부분의 실험을 이끌어 나갔다. 물론 엉뚱한 상상과 돌발 행동으로
인해 실험을 망치는 바람에 밤을 세워 다시 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는 점은 서울과학
고 학생이라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아랑곳도 하지 않
는다는 듯이 그녀는 현미경과 실험 기자재들을 과학고 시절 거의 끼고 살았다.
한가지 더 특이했던 점은, 모든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집착이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그
당시 흔히 가졌던 연예인이나 개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구설수의 호기심이 아니라, 그녀
가 가진 궁금증은 정말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나오기도 힘든 그런 것들이었다.
‘사람의 영혼은 현미경으로 볼 수 없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작게 축소 할 순 없을까?’
심지어, 개미의 생태계로 대학 졸업 논문을 썼던 그녀는 나에게 개미가 되어 살아 보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곤 했다. 정말로 자기가 궁금한 것은 절대로 참지 못하는 그녀였다.
- < 재회 … 그리고 그녀의 고백 … > -
- 딩동! 딩동!
"누구세요?"
"어, 나 윤정이야. 문좀 열어라 힘들어 죽을 것 같다. 꾸엑"
우리 집을 용케도 찾은 윤정은 벨을 누르자 마자 푸넘섞인 목소리를 내 뱉는다.
"에이, 내가 마중 나간다고 했잖아? 집을 용케 찾았네?"
우리 집은 역삼동에서도 복잡한 골목들을 지나서 나오기 때문에 찾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용케 전화 한 통 없이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어, 그다지 어렵지 않았어 ... 놀러 오는데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편의점 들려서 물어
보니까 번지수만 말해도 아주 자세히 가르쳐 주던걸 뭐. 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깨끗하게
해 놓고 사는걸?"
역시, 그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편의점에서 사온 음료수와 과자거리를 내 팽개치고 집안
을 두리번 거리며 살펴본다. 남자 혼자 사는 새로운 집의 환경이 신기한 듯 보였다.
"야 야! 정신 산만하다 콩알딱지 만한 집에서 뭘 그리 부산스러우냐? 일단 좀 앉아라. 과
일좀 줄까?"
산만하게 이리저리 구석구석 살피는 윤정을 자리에 앉히고 (사실 집을 치우긴 했으나 집
안에서 뭐가 나올지는 나도 몰랐다.) 정말 오랜만의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역시 사회생
활이라는 것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지 대학시절과 같은 그녀 앞에서의 두려움은 이제 사
라 진 듯 했다.
"아니, 괜찮아 차가운 물이나 한잔 줄래?"
고등학교, 아니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 시절을 통틀어서 그녀는 오히려 한 번 결혼을
한 이후인 지금이 더 매력적이다. 남편과 사별한 후 기분 때문에 스타일을 바꾼 건지는
몰라도, 짧은 헤어 스타일은 순수해 보이던 윤정의 모습을 다소 도발적이게 보이게 만들
긴 했지만 여전히 빨려 들어갈 듯한 눈동자와 이젠 하얗다 못해 투명할듯한 저 피부는 바
라보는 나의 넋을 잠시 빼 놓는 듯 했다.
"어 .. 어 .. 그래 그래, 물이라 ..."
나는 냉장고에 보관해는 보리차를 꺼내서 따랐다.
그걸 지켜 보던 윤정이 정색을 하며 다시 부탁했다.
"아니, 색깔 있는 물 말고 말고 … 그냥 생수 없어? 깨끗하고 투명한 물 좀 부탁하옵니
다. 없으시면 그냥 두고."
‘예전에는 보리차만 마셨던 것 같은데 …’
고등학교 시절에 그녀가 심지어 여름에도 항상 따뜻한 보리차만을 마셨던 기억이 떠올랐
다. 여자는 결혼하면 많은 것이 변한다더니, 새삼스레 그녀가 결혼 했었다는 인식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쓸데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석수 한 통을 꺼내 든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식탁의 맞은 편에 앉았다.
"많이 힘들었지? 이젠 좀 괜찮니. 집은 어떻게 할 거야?"
말 주변이 워낙 없는 데다가 그녀가 방문 했다는 것에 긴장한 탓이었는지 나는 그녀에게
아주 민감한 사항을 이야기의 화제로 꺼내놓고 말았다.
"아니, 괜찮아. 집은 내가 혼자 살기에는 너무 크니까 빼서 나와야지. 태곤씨네 집에도
이야기 했어 … 음 내 계획을 말하자면 박사과정에 입학을 할까 해. 결혼 때문에 미루어
왔던 거니까."
의외로 그녀의 대답은 담담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서둘러 이야기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래? 어디로 갈려고? 외국으로? 아니면 KAIST로?"
"음, 글쎄 아직까지 구체적인 건 생각 안 해 봤는걸, 사실 이것 저것 너랑
상의 좀 해 보려고 왔어 ..."
나랑 진학에 관해 상의를 한다고 한들, 난 전자공학을 전공 했고 그녀가 전공했던 생물학
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내가 별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나도 남자였었던 지라, 그녀 앞에서만큼은 당당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 잘했다. 자식, 오라버니가 다 알아서 해 주마 ... 하하하 ... "
과장된 표현과 호탕해 보이려는 억지스러운 말투였다. 나의 마음속의 그녀에 대한 호감
을 꽤나 감추고 싶었던 것이 오히려 표출되어 버린 듯 해서 조금은 부끄러웠다.
"뭔 오라버니, 시끄럽고. 음, 포항공대로 진학을 할까 하거든..."
한 번 결혼하더니 말투도 많이 바뀐 듯 했다. 아니면, 친구로서인 내가 이제 나이 들어
서 편하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
나는 그녀의 뜻밖의 대답에 잠시 머뭇머뭇 거리며 물었다.
"웬 포항공대? 거긴 좀 멀지 않아? 그냥 KAIST로 진학하지 그래 너 석사 과정 밟을 때 성
적도 좋았잖아? 대학 때 성적도 나쁘지 않았었고? 학교에서 안 받아줄 만한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포항공대와 KAIST는 경쟁관계 였지만 연구분야에서 특화된 부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자기가 학부를 마친 대학에서 대학원과 박사과정을 마치는 것이 관
례였다.
하지만 그녀의 의외의 대답을 내 뱉었다.
"응, 거기 입자 가속기가 있잖아. 내 석사 논문을 보충하기 위해서 입자 가속기가 있는
곳에 가서 실험을 해야 할 게 좀 있을 것 같아서..."
입자가속기? 국내 대학 중에 유일하게 포항공대만이 가진 연구 장비라고 들은 기억이 났
다.
‘입자를 가속시켜 물질과의 충돌과 반응을 살펴 원자 단위 혹은 분자 단위의 결과물을
얻는 실험장비라는 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윤정이 석사 학위 테마가 무슨 식물에 대한 연구이지 않았던가 ……’
그녀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항상 내게 관심의 대상이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윤정이의 석사 학위
테마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 조심스레 그녀에게 되물었다.
"너 석사 학위 논문이.. "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정이는 벌써 미리 준비 해 놓은 것처럼 대답을 했다.
"어, 식물의 광합성 반응에 관한 연구야."
그랬었다. 그녀의 석사 학위 논문은 광합성 반응에 관한 것이라고 윤정이와 같은 과의 여
학생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다만 내게는 고등학교 때 입시를 위한 생물책을 뒤적인 이후
로 별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분야였기 때문에 기억에 오래 남지 않았었던 것 같다.
석사 학위 논문은 대부분 산업 현장에서의 요구에 따라 많이 주제가 결정되기 때문에 일
반적으로 윤정이가 선택한 ‘광합성’과 같은 지나치게 기초적인 분야에 대한 논문은 잘
쓰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그 여학생이 내게 해 주었던 기억도 머리 속에 떠올랐다.
“맞다. 그랬지. 물론 이 오라버니가 다 알고 있었지만, 근데 무슨 광합성이랑 입자 가속
이랑 상관이 있는 거냐? 자식, 그렇다면 널 내가 어찌 그 먼 포항까지 보내겠냐 내가
KAIST 원장을 협박해서라도 입자 가속기 한 대 사내라고 하마.”
나는 또다시 약간의 과장을 곁들여 농이 섞인 자신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말
을 듣고 있던 그녀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치 정
말로 내가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줄 수 있다는 확신에 찬 말투로 이야기 했다.
"정말? 그럼 스탠퍼드에 있는 것처럼 고출력의 가독 능력도 좋은 걸로 마련해 달라고 좀
말해주라. "
농담처럼 건넨 나의 말 한마디에 그녀 역시 농담 같은 말을 건넸지만, 결코 그녀의 표정
은 농담 같지 않았다. 너무나도 진지한 모습으로 내게 애걸하듯 말하고 있었다.
‘입자가속기라 하면 한대 설치하는데 몇 천억이 드는 걸 텐데 … ’
나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더 이상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
녀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과기처 장관이냐? 그냥 포항으로 가서 공부해라."
나의 남자다운 허풍과 허세는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실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윤정의 눈빛은 애절했다. 그리고 그 눈 빛
은 잠시 동안 나의 눈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던 한 순간 난 흠칫 놀랐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세로로 반짝 하고 빛나는 듯
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그녀가 오기 전에 만화가게의 종업원의 눈처럼 짐승의
눈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내 등줄기에는 오싹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요새 자꾸 헛것을 보나 ……’
마치 신념처럼, 나는 그런 이상한 것이 보이는 이유가 나의 망상 때문이라고 단정지어버
렸다.
그녀는 조용히 응시하던 나의 눈에서 시선을 떼고 낮고 조금은 슬퍼 보이는 목소리로 말
했다.
“그래야겠지... 그래서 포항공대를 선택한 건데… 그렇기 때문에 나 너한테 부탁이 하
나 있어. 내 부탁 들어줄 거지?”
다시 쳐다본 그녀의 눈은 짐승이나 괴물 같은 이상한 눈이 아닌, 눈물이 그렁 그렁 맺힌
듯 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그 무엇
도 거부 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뭔데? 입자가속기 빼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 "
난 그녀의 그런 슬픈 표정이 마음 아파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 윤수 너랑 결혼 할래. 나랑 결혼해줘 ...... "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듯 했다.
‘결혼이라니 …’
물론 내가 그녀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의 부탁에서 많은 것들을 상상한 것은 사실
이었다. 하지만 그녀 입에서 터져 나온 이 갑작스런 청혼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
분했다.
내 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충격적인 고백에 당연히 “예”라고 대답하려 하고
있었다. 다만, 오히려 너무나 당혹스러웠기 때문에 내 대답은 머뭇거려 졌다.
“어 .. 어 .. 그게 .. ”
나의 머뭇거리는 대답에 그녀는 앙칼지게 나를 몰아 세웠다.
“싫은 거야? 다 해준다 그랬으니까. 나랑 결혼 해 줬으면 좋겠어.”
거의 본인이 나의 대답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단정 짓듯 한 말투였다.
난 할말이 없었다. 그녀가 한번 결혼을 했다는 것은 내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하실 거다.)
그래도 갑작스레 이렇게 내게 와서 결혼을 하자는 말이 그녀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하
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 어 ... 음 ... 저기 … 나도 생각을 ... 아니 ...”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벌개 진 채 적당한 대답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더듬거리지 말아. 내가 아는 윤수는 한 번 한 약속은 다 지켜주는 남자야 … 내
가 살던 집 정리하고 이런 저런 것들 정리하려면 한 두 달 정도 걸릴 것 같아. 그 후에
나랑 정식으로 결혼해 줘. 사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너의 집에 온 거야. 그
리고 니가 나의 부탁을 거절 하지 않을 거라 믿었어. 이젠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까 난 집으로 들어가 볼게. 너와의 결혼을 위해 나도 이런 저런 준비를 해야지
……"
얼굴 빛 하나 바뀌지 않은 그녀는 너무나도 진지하게 나와의 결혼을 기정 사실화 해 버렸
다.
나는 도무지 그녀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저런 말을 얼굴 빛 하나 안 바뀌고 너무나
담담한 표정으로 나한테 하고 있는 그녀는 내가 알던 윤정이 아닌 것만 같았다. 갑자기
머릿속은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조용히 석수통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더니 식탁에서 일어났다.
"저, 저기 ... 윤정아 ... 이야기를 좀 더 ..."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윤정을 다시 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앉아서 나랑 다
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제 뭐 더 이야기 할 건 없는데 … 뭘 … 그냥 난 네가 내 부탁을 들어 줄거라 믿으니
까. 그리고 난 너랑 결혼하고 싶으니까. 난 이걸로 우리가 오늘 나눌 이야기들은 모두 나
누었다고 생각해 ……”
아까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녀의 말투는 다소 곳 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한 게 부끄럽다
는 듯이 볼에는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 말만을 남긴 체 내가 뭐라고 붙잡고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어느 틈엔가 나의 집 밖으
로 걸어 나갔다. 내가 그렇게 멍하게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고 있는 동안 그녀는 물 한
잔 마시고 나가 버린 것이다.
겨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그녀가 택시 잡으려 서 있는 곳까지 따라가서, 배웅
을 할 수 있었다.
“안녕 … 잘 가 … ”
“그래, 윤수야 … 사랑해 …”
그녀의 ‘사랑해’라는 단어는 내게 너무나 낯설게 다가왔다. 그녀에게 처음 듣는 말이기
도 했지만, 갑작스러운 ‘결혼’과 ‘사랑’이라는 단어에 나에게는 너무나도 낯선 것이
었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결국 항상 나를 그녀에게 빠
져 들게 했던 바로 그 살인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난 결국 그걸 거부 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휴우 …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
‘사랑해 … 사랑해 … 사랑해 … 결혼 … 결혼 … 결혼 …’
그녀가 던지고 간 단 두 마디의 단어는 그렇게 나의 뇌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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