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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복 편 지 14

수호천사 |2006.10.15 18:27
조회 663 |추천 0

 

 

 

 

 

 

 

 

『얼음매미』 - 박찬(1947~ ) - 저, 매미 소리 참 맑고 시원도 하다. 솔바람 가득한 산에서 해를 나던 굼벵이 지난 겨울 살 에던 산바람 제 몸에 재어 꽁꽁 얼려 놓았다가 되바라지지 않게 풀어놓고 있다. 얼음매미 그, 맑고 투명한 소리의 정체. '얼음매미' 전문

 

 

 

이 겨울 한복판에서도 여름을 준비하는구나. 삼복 불볕더위에 얼음보다 시원한 울음을 울어 주려고 땅속 굼벵이는 이 혹한 살을 에는 삭풍을 제 몸에 차곡차곡 재어 두는구나. 겨울에는 여름을 준비하고 여름에는 겨울 준비에 바쁜 그를 배워야겠구나. - 유안진<시인> -

 

 

 

 

 

 

 

『교외』 - 노향림(1942~ ) - 언덕에 오르면 몇 량(輛)의 낡은 시간들을 떼어 놓고 달아나는 화물차가 보였네. 풀섶 끝 샐비어 꽃들은 시뻘건 피를 억억 토(吐)해 내고 저 아래 골짜기로만 주택들은 한 무더기 니켈 주화(鑄貨)로 쏟아지고 있네 어디선가 창백한 햇볕 하나가 질려서 제 뼈가 마르는 소리를 듣네 '교외' 전문

 

 

 

모든 도시의 교외가 다 보인다. 화물차는 데리고 온 제 몸둥이 몇 량을, 아니 녹슨 과거를 억지로 떼어놓고 도망치고, 버려져 피를 토하는 샐비어의 억울증세, 그래도 사람 사는 집들은 집값으로 헤아려지는, 비록 몇푼 안 될지라도. 내리쬐는 햇볕도 왜 아니 기막히랴. - 유안진<시인> -

 

 

 

 

 

 

 

『나무 물고기』 - 차창룡(1966~ ) - 물고기는 죽은 후 나무의 몸을 입어 영원히 물고기 되고. 나무는 죽은 후 물고기의 몸을 입어 여의주 입에 물고. 창자를 꺼내고 허공을 넣으니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입에 문 여의주 때문에 나무는 날마다 두드려 맞는다. '나무 물고기' 부분

 

 

 

목어(木魚)를 두드리는 스님의 두 손으로 산사는 비로소 산사다워지고, 여의주를 물지 못한 물속 물고기들도 그와 벗하는 모든 수중생명들이여 부디 평안하시라, 대신 맞아주는, 나무의 몸을 입은 나무 부처님, 목어시여! - 유안진<시인> -

 

 

 

 

 

 

 

『푸른 곰팡이-산책시』 - 이문재(1959~ ) -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푸른 곰팡이-산책시' 부분

 

 

 

이별이 있어야겠다. 맛 깊고 향기 높은 사랑의 발효를 위하여. 우체국이 필요한 이별이 있어야겠다. 잘 뜬 푸른 곰팡이로 충분한 발효의 사랑에 취하고 취하게 할 긴 이별이. 우체국이 보이거든 편지를 쓰라. 강얼음 밑으로 푸른 강이 흐르도록, 작은 카드에도 긴긴 사연을 쓰라. - 유안진<시인> -

 

 

 

 

 

 

 

『소음』 - 남진우(1960~ ) - 나도 모르게 벌집을 건드렸나 보다 붕붕거리며 날아오른 벌들이 사방에서 나를 에워싼다. 발을 디뎌서는 안될 금지된 영지를 침범한 것일까? 늙은 떡갈나무 아래를 지나다 무심코 머리 위로 손을 뻗치는 순간. (중략) 수많은 말들이 거침없이 나를 찔러대며 어서 무릎 꿇으라고 잘못했다고 빌라고 다그친다. 퉁퉁 부어오르는 살 위에 다시 침을 박는다. '소음' 부분

 

 

 

꿀벌이든 말벌이든 형벌인 소음. 고요롭고 싶고 귀가 심심하고 싶고, 안 보이고 안 들리는 것을 보아내고 들어내려는 시인에게 벌떼만 소음이랴. 어쩌다 실수한 한마디에 벌집 쑤신듯, 돌아오는 것이여, 찔러대고 다그치는 소음 소음…. 벌침도 뼛골까지 쑤신다. - 유안진<시인> -

 

 

 

 

 

 

 

『위대한 식사』 - 이재무(1958~ ) - 식구들 말없는, 분주한 수저질 뜨거운 우렁된장 속으로 겁없이 뛰어든 밤새 울음. 물김치 속으로 비계처럼 둥둥 별 몇점 떠있고. (중략) 베어문 풋고추의 독한 까닭 모를 설움으로 능선처럼 불룩해진 배 트림 몇번으로 꺼트리며 사립 나서면 태자봉 옆구리를 헉헉 숨이 가쁜 듯 비틀대는 농주에 취한 달의 거친 숨소리. 아, 그 날의 위대했던 반찬들이여. '위대한 식사' 부분

 

 

 

이런 두레밥상이 그립다. 식구들의 분주한 수저질, 밤새 소리도 뛰어드는 된장뚝배기, 별도 몇 개 떠있는 물김치, 그런 마당식사가 언제 적이었나. 그 때의 매운 풋고추도 독한 농주도…. 그 위대한 반찬들도 이 겨울 고향집 움속 김칫독에서 삭혀지리. - 유안진<시인> -

 

 

 

 

 

 

 

『짧은 낮잠』 - 문태준(1970~ ) - 낮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치는 겁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 가는 낮꿈은 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중략)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짧은 낮잠' 부분

 

 

 

꽃을 보내고 남겨진 나무가 되는 기분, 낮잠이 남겨놓은 낮잠의 그림자 같은, 혼이 나간 묘사가 절묘하고 기막히다. 낮꿈에서 눈물 많은 누이의 친정길이라니? 세상의 모든 그리움의 이름 누이여! 없는 누이는 없어서 더 그리움이 되는 시인에게, 낮꿈 아니라도 자주 보이거라. - 유안진<시인> -

 

 

 

 

 

 

 

『울음처럼 깊은 말로』 - 이향아(1938~ ) - 입술에 무쇠 천근의 추를 달아서 맹세는 죄가 되느니 망설였지만 평생에 한번이랴 어떠랴 허락 받은 그 맹세를 나는 지금 하고 싶다. 산대나무 밭에는 종일 바람 서걱이고 지는 꽃 피는 꽃이 하늘에서 엇갈릴 때 엄지손가락 지장을 붉게 눌러서 묵혀 둔 말 한마디로 맹세하고 싶다. '울음처럼 깊은 말로' 부분

 

 

 

울음처럼 깊은 말로 맹세하고 싶은, 맹세의 죄를 다시 한번 짖고 싶어지는 성탄절 이브. 성당뜰이 아니어도 성당을 향해 서서, 어디든지 보이는 십자가를 향해 서서, 자신에게 누구에게 아니 신(神)에게, 묵혀둔 말 한마디로 맹세하고 싶은, 그런 때도 있어라. - 유안진<시인> -

 

 

 

 

 

 

 

『불면 앨러지-심우도』 - 박찬(1947~ ) - 복사꽃 점점 푸른 잎의 하늘에 손톱만한 달인양 색색의 알전구를 켜드는 밤, 문득 복숭아 앨러지가 생각난다. 복숭아 캔만 만져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고 복사나무 곁만 지나가도 복숭아귀신 털복숭이 손으로 덥썩 손을 잡는 것 같아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만다는 복숭아 앨러지 바람 부는 대로 무지개 빛 알전구들이 점멸하는 밤이면 채 열매를 맺지도 못한 백도 황도 천도 복숭아들마저 온몸이 간지러워 색색의 불빛 사이로 씨눈을 내놓은 채 잠 못드는 복숭아 앨러지를 아시는가! '불면 앨러지-심우도' 부분

 

 

 

섣달의 밤거리는 불면이다, 색색의 알전등 점멸하는 알전구도 시인처럼 잠 못든다. 귀신을 쫓는다는 복숭나무의 복숭귀신, 더구나 동도지(東桃枝)는 정신병도 고친다는 민속을 기대었으니, 절묘한 구조화여, 도시의 겨울밤거리 온몸에 돋아난 복숭 앨러지여. - 유안진<시인> -

 

 

 

 

 

 

 

『고백성사』 - 김종철(1947~ ) - 못을 뽑습니다. 휘여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본 체 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않은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 전문

 

 

 

섣달도 막바지, 대낮에도 십자가는 눈에 더 잘 든다. 잠깐 잠깐 뉘우침이 깃들어 준다, 올해도 잘못 살았다고. 고해성사 그만큼 영성(靈性)으로 가까워진다. 마지막의 못하나마저 뽑아내고 싶어도,마음 같지 못하다. 그래서 인간적이다. 그분도 참아주신다. 남겨둔 못으로. 다음번의 고해성사도 남겨둔 채로 산다. 누구나 누구든-. - 유안진<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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