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원결의(桃園結義)
춘천문화예술회관에는 춘천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Rachmaninoff)'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의 마지막 악장이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매년 봄과 가을에 갖는 그들의 정기연주회였다.
연주회장은 많은 인파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로써, 담임선생님의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단체관람을 온 경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외에도 아이들을 동반한 부부와 데이트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 젊은 남녀들의 모습만이 간간이 눈에 띄었을 뿐, 질 높은 음악을 현장감 있게 감상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로 이곳을 찾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고전음악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문화와 예술의 도시'라는 현수막이 도시 곳곳에 나붙어 있는 춘천시지만 3, 4명으로 이루어진 실내악이 아닌, 수십 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접하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혼은 다음 날 오전에 있는 전공 시험 공부도 뒤로 미룬 채, 무대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 좋은 곳에 미리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들고 온 팜프렛을 통해 피아니스트에 대한 프로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별히 외국에서 수학을 했다는 문구 따위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춘천여고를 거쳐 현재 강원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과 졸업반이라는 설명이 전부였다. 하지만 보잘 것 없다면 보잘 것 없는 프로필을 가진 그녀가 만들어 내는 피아노 연주는 다른 연주자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머리와 습관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과 감정으로 연주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녀 정도의 평범 이하의 경력으로는 소화해내기 불가능한, 자신만의 유니크한 해석이 묻어 있는 연주를 선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혼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는 그녀의 음악적 천재성을 발견하지 못한 채 오래토록 방치해 두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한 달에 수십 만원씩 하는 레슨 비를 아들도 아닌 딸에게까지 투자할 만큼의 여유를 갖지 못했을런 지도……. 그녀가 만약 강남의 극성스런 부모를 만났다면 오늘 협연을 펼치고 있는 악단은 춘천시립교향악단이 아니라 뉴욕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나 베를린 필 하모니 오케스트라였으리라.
혼은 다시 고개를 들어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약 두 시간에 걸친 공연은 이젠 피날레로 치닫고 있었다. 해머로 내려치듯 연주해야 하는 마지막 부분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짓는 그녀의 정열적인 모습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계속된 반복연습만으로는 결코 불가능한 재현이었다.
만약 이 곡의 작곡가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가 죽지 않고 살아서 지금 이 홀 객석에 앉아 있다면 다른 어느 관객보다도 더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늘 그렇듯 별 기대 없이 연주회를 찾았던 혼은 모처럼 만에 혼이 깃 든 연주를 감상할 수 있어서 매우 흡족했다.
낮 동안 뜨거운 열기를 온 천지에 방사해 대던 태양이 지구 저편으로 저문 지 오래였지만, 대기 중에는 아직도 후덥지근한 열기가 살갗을 끈적끈적하게 더듬어왔다. 혼이 주머니를 뒤져 두 시간 이상 참아 왔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폐 깊숙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나서야 그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극장이나 공연장을 자주 찾는 혼에게 있어 최대의 고역은 금연을 해야한다는 사실이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하야부사에 오른 혼은 가볍게 스로틀을 열어 예술회관 정문 쪽으로 향했다.
도서관 뒤편 빈 공간에 자신의 애마를 멈춰 세운 혼은 경영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영대 안에 마련된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은 후 배과즙 음료 하나를 뽑아 든 그는 반대편 출입구를 지나 대학원 건물 뒤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수목으로 뒤덮인 그 곳 벤취의 고즈넉함을 좋아하는 혼은 자투리 시간을 자주 그곳에서 보내곤 했다. 혼은 제각기 빛을 발하는 밤하늘의 별들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벤취에 내려앉았다.
「정말 환상적인 밤이군……. 내일 시험만 없다면 밤새도록 취해보고 싶은 밤인데 말야」
왼쪽 팔꿈치를 벤치에 기대어 절반쯤 누운 자세를 취하며 무척이나 아쉽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신 후 주머니를 뒤적여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즈음, 어디선가 둔탁한 소음이 들려져 왔다. 대학원 건물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흡사 먼지를 털기 위해 무언가로 이불을 두들겨 대는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하지만 잠시 후 사람의 신음소리 같은 게 아주 미세하게 들려왔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능력도 안 되는 새끼가 뭘 믿고 꽁지 돈을 쓰냐 쓰긴, 이 씨러배 아들 노무 새꺄?」
「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일주일쯤 후면 돈이 마련되니까요……. 믿어 주세요, 제발!」
대학원 2층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몇몇 사내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무척이나 유약해 보이는 한 사내가 덩지 큰 사내의 발목에 매달려 울먹이고 있었고 다른 한 사내가 대학원 건물 벽에 기대어 조롱 섞인 미소로 그 광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옆, 화단 바위 위에도 한 사내가 걸터앉아 있었는데 오가는 대화로 미루어 노름판 빚을 추궁하러 온 건달과 채무자인 듯 했다. 채무자는 이 학교 학생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 하나 죽어나가도 알 수 없을 그런 장소를 놔두고 굳이 학생들이 오갈 수도 있는 이런 곳에서 저런 장면을 연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주일만 더, 일주일만 더가 벌써 몇 번째야, 이 호로 쉐꺄? 그 동안 밀린 이자가 얼만 지 알기나 해?」
족히 쌀 한 가마니 반은 나감직한 사내의 통나무 같은 우악스런 다리가 유약한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올렸다. 싸이클 높은 비명이 어둠 속을 꿰뚫어갔다.
「이런 오살할 노무 쉐끼? 돈 떼 먹힌 사람, 맴 아픈 줄도 모르는 호로 쉐끼가 지 몸뚱아리 아픈 건 아는가 보구마이?」
소금을 뒤집어쓴 지렁이처럼 발버둥을 치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덩어리는 씹어뱉듯 그렇게 이죽거렸다. 벽에 걸터앉아 있던 고수머리의 사내가 불빛 아래로 몸을 드러냈다.
「어차피 돈 나오긴 글른 것 같은데 그냥 확 갖다가 묻어 버립시다, 형님?」
일반인들에겐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만한 살벌한 말투였다. 그 말에 질겁을 한 사내가 두 무릎으로 필사적으로 기어와 고수머리 사내에게 애원을 했다.
「아, 아니예요. 이, 이번엔 진짜라니까요. 전세금을 올려달란다고 집에다간 거짓말을 해 놨어요. 다음 주면 트, 틀림없이 입금될 겁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했다는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신빙성 있게 들렸다.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보며 눈웃음을 쳤다. 주먹으로 해결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냐는 듯한 포만감 서린 그런 웃음이었다. 덩어리가 어둠 속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어떡할깝쇼, 성님……. 속는 셈치고 한 번 더 믿어 줄까요?」
깜빡이던 담배 불이 아무렇게나 어둠 속으로 처박혀졌다. 그리고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장발의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일주일 안에 빚진 돈하고 이자까지, 오천 만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차라리 자살을 해! 그게 덜 고통스러울 테니까……」
살의가 베어 나오는 서늘한 음성이었다.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말 저작 거리에 패대기쳐진 썩은 고깃덩어리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는 전율이 대학원생의 폐부를 엄습해 왔다.
그 때 덩지 큰 사내가 입술을 씰룩거리며 씹어뱉듯 입을 열었다.
「저건 뭐 다요……?」
그의 시선 끝에 혼이 우뚝 멈춰서 있었다. 귀에 거슬리는 사내의 말투에 장난기가 발동한 혼이,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나가던 과객이오만……, 아무래도 내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소. 그럼 이만……」
크게 허리를 숙여 보인 혼은 다시 왔던 방향으로 뒷걸음질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하지만 곧 그의 뒷걸음질은 'Beat it'을 부를 때 '마이클 잭슨'이 추던 '빽 슬립 댄스(Back slip dance)'로 이어졌다. 그를 지켜보던 사내들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토해냈다.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크고 단단한 근육질의 육중한 몸매를 가진 사내가 뼈 있는 어투로 말했다.
「쓰벌, 지나가던 길이면 계속 지나가야지, 사내 대장부가 어찌 그리 강단이 없는가? 신경 쓰지 말고 가더라고!」
'빽 슬립 댄스'를 멈추며 혼이 반색을 했다.
「저,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 쓰벌. 자유주의 국가에서 지 좇 꼴리는 데로 가겄다는데 누가 뭐라 그럴 것이여? 퍼뜩 가던 길 계속 가더라고!」
여전히 온갖 거만을 다 떨어대고는 있었지만 사내의 근육은 팽팽히 긴장되어 가고 있었다. 현재 상황이 어떤 건지 뻔히 알 텐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이 상황 속으로 끼어 든 것도 그렇고 '지나가던 과객' 운운하며 마이클 잭슨의 춤을 흉내내는 천연덕스러움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똥오줌 못 가리는 바보이거나, 조폭 세 명쯤은 삼박 사일 동안 데리고 놀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이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감지덕지한 표정으로 덩어리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여대던 혼은 이번에는 두 손을 허리춤에 가져다 댄 후 과거 이주일 씨가 대유행시켰던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를 흉내내며 덩어리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런 혼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는 대학원생의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삼돌이 아냐……? 교황 흉내내기 놀이하는 거야? 왜 땅바닥에 키스를 하고 난리야?」
혼은 마치 군대 갔다온 친구를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운 얼굴로 허리를 굽혀 대학원생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런 혼을 올려다보는 대학원생의 두 눈은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었다.
「어? 얼굴이 이게 뭐야? 어떤 놈들이 널 이렇게 만든 거야?」
역시 진지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과장된 표정과 말투였다.
「얘기해 봐! 내, 당장 쫓아가서……」
아무래도 혼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덩어리가 혼의 말을 자르고 나섰다.
「쫓아가서 뭘 어쩔 건데……?」
「뭘 어쩌기는요. 당장에 요절을 내 줘야죠……」
덩어리의 질문에 혼은 깍듯한 말투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철저히 자신들을 기만하고자 하려는 의도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벽에 기대어 있던 고수머리 사내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 덩지 큰 사내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새끼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소, 형님?」
말을 토해내자마자 고수머리의 사내는 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혼의 두 눈이 섬뜩하리만치 서늘한 빛을 발했다. 큰 반원을 그리며 안면을 향해 솟아오르는 사내의 무릎을 오른 손바닥으로 퉁겨낸 혼은 한 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그의 옆구리에 도끼질하듯 오른발 뒷꿈치를 내려찍었다. 땅을 짚고 있던 사내의 다리가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혼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덩어리가 활시위를 당기듯 오른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미 혼의 군화 발이 사내의 목덜미에 쑤셔 박힌 뒤였다. 그 큰 덩어리가 공중으로 날아 올라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 떨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 있을 기운마저 없었던 대학원생이 오른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혼이 재빨리 그를 부둥켜안고는 벽 쪽에 기대며 말했다.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요. 곧 편히 쉴 수 있을 테니까……」
말을 마친 혼이 장발의 사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듯 그 때까지도 느긋한 표정으로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었던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선량해 보이는 눈매였지만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빛, 깡마른 체구였지만 벌어진 어깨……. 칼받이 용으로 키워지는 유형이 아닌, 전투의 선봉에서 대세를 이끌어 가는 전형적인 파이터의 체격이었다. 그런 그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일정한 보폭으로 혼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묵직해 보이지만 결코 무겁지 않는 걸음으로. 여유롭게만 보이지만 결코 더디지 않은 걸음으로…….
비록 수금원 노릇이나 하는 하급조직원이었지만 그가 무술의 고수라는 사실을 혼은 한 눈에 읽어낼 수 있었다. 혼은 모처럼 쓸만한 상대를 만난 것 같아 몹시 즐거웠다. 간만에 몸을 풀어 볼 수 있을 거라는 설레임이 그의 안면에 기대감 어린 미소로 자리잡았다.
선방을 날린 것은 장발의 사내였다. 그의 왼발이 혼의 턱을 향해 돌고래처럼 솟아올랐다. 바위에서 일어서 걸음을 내딛는가 싶더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던 것이었다. 허리를 뒤틀어 사내의 공격을 비껴낸 혼은 사내의 빈틈을 포착하고도 손을 쓰지 않은 채 그의 또 다른 공격을 기다렸다. 사내가 얼마나 자신의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있을지를 가늠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돌고래처럼 솟았던 사내의 왼 발이 정점에 머문 그 순간 그의 새로운 공격이 이어졌다. 땅을 딛고 있던 그의 오른 발이 유도탄처럼 혼의 움직임을 따라 관자놀이를 향해 쇄도해왔다. 순간 흡족한 미소가 혼의 입가에 머금어졌다. 이 정도 운동신경과 빠르기라면 기대를 해도 좋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혼은 허리를 활처럼 뒤로 젖히며 사내의 2차 공격을 흘려보냈다. 사내의 몸이 허공에 부유해 있는 동안 일격을 가할 수도 있었지만 그저 뒤쪽으로 두어 걸음 정도를 물러서는 것으로 대신했다. 회심의 연타를 가볍게 피해낸 것으로 사내는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했을 테고 조금 전과 같은 한 수 아래 상대들에게나 써먹을 법한 무리한 공격은 삼가게 될 것이다. 혼은 이제야 조금 재미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오른 손을 뒷짐 진 채 왼발을 두 족장 정도 앞으로 내 밀었다.
한 손으로 땅을 짚으며 착지해 내린 장발의 사내는 다른 한 손으로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까만 두 눈이 먹이감을 발견한 맹수의 그것처럼 혼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한 수 접어준다는 거요?」
깍듯한 경어는 아니지만 사내는 존대를 사용했다. 비록 지금은 양아치행세를 하고 있지만 고수를 대하는 무도인으로써의 기본예절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 정도의 생각까지 있는 녀석이 무슨 사연으로 쌩양아치들과 어울리게 되었을까? 그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졌다.
「자네와 좀 더 오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서……」
「행여 그렇다가 손을 써야될 일이 생기면 민망하지 않겠소?」
그건 일종의 협박이었다. 만약 자신이 이기기라도 하면 괘씸죄를 적용해서 건방을 떤 것에 부합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식의…….
「많이 민망하겠지……. 고맙군. 내 체면까지 걱정해줘서……」
그건 절대로 그럴 일 없을 테니 어디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 보라는 대답이었다.
기필코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듯 사내가 이를 악물며 몸을 날렸다. 사내의 오른 발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건 혼을 속이기 위한 트릭이었다. 혼의 시선을 한쪽으로 모은 후 상대적으로 주의력이 산만해진 반대편을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사내는 마치 계단처럼 대기를 밟고 다시 한번 공중으로 튀어 올라 왼발 돌려차기를 시도했다. 상대가 호언한 대로 오른 팔을 쓰지 않는다면 방어에 있어서 가장 취약한 부분은 역시 그 쪽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사내의 이단 점프에 이어지는 일격은 흡사 전광석화와도 같아 보통사람의 육안으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계산은 이미 오른 팔을 뒷짐지던 그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혼은 이미 그의 모든 동작을 눈으로 읽고 있었다. 그 만큼 혼의 관찰력은 빨랐고 또 예리했다.
공간을 사선으로 꿰뚫고 올라오는 사내의 발차기 공격을 몸을 비틀어 머리위로 흘려보낸 혼이 한 걸음 뛰어 들며 그의 어깨를 왼쪽 검지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허공에 부유하고 있던 그의 몸이 공중제비를 돌 듯 한바퀴 회전한 뒤 땅바닥에 추락했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사내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대학원생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한 건 분명히 장발의 사내였고 또한 그 어떤 타격 음도 없었는데 왜 바닥을 뒹구는 일도 장발 사내의 몫이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지막한 신음이 장발 사내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세어 나왔다. 왼쪽 옆구리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져 왔다. 그렇다면 등뒤에 두고 있던 오른 주먹을 썼다는 얘긴가? 하지만 그건 분명히 아닌 것 같았다. 그곳은 조금 전 추락할 때 땅바닥과 충돌한 부위였다. 자신의 기억으로 충격은 분명 추락 때뿐이었다. 그렇다면……?
바닥에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퍼질러져 있던 사내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리곤 흥분해 있는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몇 차례 심호흡을 내뱉었다.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건 장발의 사내였다. 도대체 자신을 내동댕이친 게 무엇인지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사내의 정권이 혼의 안면을 향해 뿌려졌다. 혼이 허리를 숙여 이를 피해내자 사내의 왼쪽 무릎이 혼의 가슴팍으로 솟구쳤다. 혼은 그것을 헤드웍으로 비껴낸 후 몸을 지탱하고 있던 사내의 발목을 세차게 걷어 올렸다. 사내는 또 한번 붕 떠올랐다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하지만 사내는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계속 반복됐다. 사내의 회심의 공격들은 모두 다 헛 손발 짓에 지나지 않았고, 결국엔 공격 같지도 않은 공격을 당한 후 땅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가 다시 벌떡 일어서는…….
현수가 12살이 되던 해에 술주정뱅이였던 그의 부친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의 아랫도리를 칼로 난도질한 후 자신의 몸에 불을 질렀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던 탓에 현수는 무사할 수 있었지만 살아 남아 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불행이라고 여길 만큼 그의 삶은 암울했다.
의지할 사람도 없고 아무 것도 가진 거 없는 그가 도태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주유소와 중국집을 전전하며 밤에는 무술도장에 나갔다. 다행히 싸움에 특출난 재능을 갖고 있던 그는 물을 빨아 마시는 스폰지처럼 각 무도의 기술들을 흡수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었다. 현수는 다섯이나 되는 불량배들을 묵사발이 되도록 두들겨줬다. 그 일이 소문이 나 춘천을 관할하고 있던 핵주먹파에 스카웃됐다. 그게 5년 전, 그러니까 그가 17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비록 조직 내에서의 서열은 중간쯤에 지나지 않는 그였지만 주먹으로만 따지자면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 가끔 주변 조직들과의 영역다툼으로 인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1 맞짱 승부로 판가름하자는 제안이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현수가 나서야 하는 것으로 그렇게들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주먹으로 말하자면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이골이 난 몸이었다. 만약 그가 일제점령기에 태어났다면 '시라소니'나 '김두한'으로 대변되는 우리 나라의 주먹계의 역사가 다시 쓰여졌을 거라는 게 동료들의 한결 같은 의견이었다.
그런 자신이 도저히 어찌 해 볼 수 없는 상대가 존재할 수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마치 물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똑 같은 조건이라면 혹 모를까, 한 손으로 싸우는 상대에게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게 도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 이상의 몸부림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순간 현수의 무릎이 스르르 굽혀졌다.
「제가 졌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사내를 내려보며 혼은 뒷짐을 지고 있던 오른 손을 풀었다. 「모처럼 쓸만한 상대를 만나 즐거웠네. 인연 닿으면 다음에 또 보자구」
「갈증나죠? 음료수 한 잔하세요!」
벤취에 앉아 있는 대학원생에게 음료수를 건네주며 혼은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혼을 올려다보며 사내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려 애썼다. 하지만 얻어맞은 곳의 근육이 당겨서인지 곧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혼이 사내의 옆자리에 내려앉았다.
「고, 고맙습니다. 잘 마실께요……」
혼이 건넨 음료수 캔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들며,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유 혼이라고 해요. 법학과에 다니고 있죠」
「경영학과 지신협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초점을 찾지 못한 신협의 두 눈이 연적지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그의 민망함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춘천은 다 좋은데 별이 많아서 좀 그래요……」
느닷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이 중얼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아 신협이 질문했다.
「별이 많은 게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세요……?」
혼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우르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 불안하거든요……」
신협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터진 입술에 손을 갖다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병원부터 가요」
「찢어진 대나 부러진 대도 없는데요. 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자신을 향한 혼의 측은한 눈빛이 못내 부담스러웠는지, 아니면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고 싶어서였는지 신협이 입을 열었다.
서울 강남의 한 졸부 집 셋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능성적에 맞춰 원서를 쓰다보니 이곳 춘천까지 오게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돈만 주면 입학허가를 내어 주는 외국의 사이비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것을 종용했지만 고등학교 재학 시절부터 강남과 이태원 등지를 전전하며 수많은 친구와 연인을 만들어 두었던 신협은 도저히 대한민국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졸업선물로 큰형이 선물한 '페라리 GT3'를 타고 서울에서 춘천까지 통학하는 것이었다. 물론 수업이 끝난 후에는 압구정동이나 강남역 부근의 유흥가에서 오렌지족으로 활동하며 숱한 하룻밤의 연인들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것도 한 때였다. 별 다른 특별한 추억도 없이, 그저 '냄비사냥'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의기투합한 그의 친구들. 그런 그들을 한데 싣고 항해하던 우정이라는 이름의 초호화 요트는 사소한 풍랑에도 자주 전복됐고 조그만 암초에도 좌초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 즈음, 인생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해왔던 '여체 미학에 대한 탐구(?)'에 대한 불같은 열정도 식어가고 있었다. 아무 때나 손짓만 하면 호텔까지 따라오는 여인들……. 사랑 없이도 자신의 아랫도리를 허락하는 그녀들……. 오직 색다른 상대와 색다른 섹스를 하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냥 살아가는 그녀들에게도 서서히 실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의 모든 인간관계를 청산했다. 외국유학을 권유했던 부모님의 충고를 거절했던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외국 대학에 편입을 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한가롭고 정겨운 자연의 도시 춘천과 그곳에서 만난 순박한 사람들에게 이미 정이 들대로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일 같이 왕복 4시간 이상 운전을 하며 통학을 했던 신협은 공지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오피스텔을 하나 얻었다. 그리고 대부분 지방 출신인 대학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서 공부도 하고 술도 마시고 당구도 치면서 서울의 귀족 친구들의 공백을 메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주 다니던 학교 앞 당구장에서 친구들끼리 재미 삼아 포커를 치다가 당구장 주인 후배라는 인물을 동석시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가끔 그와 함께 게임을 했는데 어느 날부터 당구장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창고 안으로 무대가 옮겨졌고 배팅 단위도 몇 배나 커져버렸다. 어떤 때는 한판에 기백 만원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농업이나 수산업에 종사하시는 부모님을 둔 신협의 친구들은 무대를 옮긴 후에는 당연히 판에 낄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 빈자리를 당구장 주인의 후배라는 사람들이 대신했다. 친구들이 빠져나갈 때 신협도 손을 빼고 싶었지만 이미 천만 원 돈을 딴 이후라 그럴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천만 원은 미끼에 불과했다.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그 천만 원은 물론, 중고시세로도 1억은 홋가할 '페라리 GT3'와 오피스텔 전세금 6,000만원까지 그들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빚까지 5,000만원이나 지고?」
벤취에 앉아 손수건으로 입가에 피를 훔쳐내고 있는 신협에게 다그치듯 혼이 말했다. 비록 학년은 신협이 훨씬 위였지만 25살이 돼서야 대학에 입학한 혼이 나이는 두 살이 더 많았다.
「제가 미친놈이죠. 짜고 친다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본전을 되찾겠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수업도 전폐한 채 매일 같이 거길 들락거렸으니까요!」
그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소리 없는 조소가 그의 입가에 묻어 나왔다. 그런 그를 위로하기 위해 혼이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래도 도박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깨달았으니까 손해만 본 것도 아니네. 이제 썩어나는 돈이 있어도 도박으로 날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말야. 안 그래?」
두 손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단호히 그가 말했다.
「물론이죠. 이제 절대로 도박에는 손대지 않을 겁니다……. 제 목숨을 걸고요!」
신협의 강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대답에 혼이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됐어!」
혼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어 불을 붙인 후 신협에게 건넸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신협이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그나저나 죄송해서 어쩌죠? 이제 형님도 놈들의 타켓이 되어 버렸을 텐데……」
「후후……. 내 걱정은 하지 마.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그래도……」
그런 것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혼이 벤취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많이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다. 집이 어디니?」
「집은요……. 그냥 친구들 자취방을 전전하고 있죠, 뭐……」
한 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는지 일어서려던 그의 입에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측은한 표정으로 혼이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많이 불편해 보이는데……」
애써 자세를 고쳐 서며 신협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씩씩하게 대답했다.
「괘, 괜찮습니다. 움직일만해요」
혼이 못 미더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다.
「오늘 잘 데는 있어?」
「후후……. 어제 잤던 친구 놈 집에 가야죠. 정 안되면 대학원 강의실에서 자면 되요」
혼이 잘 됐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그럼 형 네 집에 가자. 형도 혼자 자기 심심했는데」
「아니에요. 이 정도로도 충분히 신세를 졌는 걸요. 더 이상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축생처럼 뒷걸음질을 치며 신협이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만 신세 져라. 그 후에 갚으면 되잖아」
「아버님이 당장 오늘 돌아가시면서 유산을 남겨 주시면 모를까, 내일부터 신세를 갚는 건 불가능할 걸요」
그 말을 하면서 신협은 비소를 흘리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부모님이 돌아가시기를 바라고 있을 지도 모를 자신에 대한 경멸감의 표출이었다.
「아냐……. 내일이면 모든 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거야. 내 말을 믿어!」
혼의 말투는 속삭이듯 부드러웠고 그의 안면에는 느긋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내일이면 모든 게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 갈 것이라는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그에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신협은 어느새 혼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혼이 당구장 안으로 들어서자 아르바이트 학생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10시 조금 넘은,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어서 인지 당구장 안은 거의 빈 공간이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캐쥬얼한 복장의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양쪽 창가로는 검은 색 양복을 걸친 심상치 않아 보이는 사내들이 두어개의 테이블을 점령하고 있었다.
잠시 당구장 안을 훑어보던 혼이 카운터의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말했다.
「혼자 왔는데 한 게임 할 수 없을 까요?」
「얼마 치시는 데요?」
「2,000점 정도 놓으면 될까요? 안 친지가 하도 오래돼놔서……」
카운터 옆 큐 함에서 자신의 큐를 꺼내려던 학생이 2,000점 정도라는 혼의 말에 입을 떡 벌리며 나지막한 탄성을 토해냈다. 아르바이트를 한 지난 3개월 여 동안 그가 목격했던 최고점자는 기껏 해봐야 700점이었다. 손님이라고는 강원대학교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를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당구장 구석에 위치한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신협이 말했던 투전판이 바로 그 창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30대 초반의 비쩍 마른 사내 하나가 그리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2,000 치신다고요? 그럼 저랑 한 게임 하시죠!」
카운터에 놓여진 공을 당구대 위에 뿌리며 사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런……」
일부러 큐미스를 유발한 혼이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32점 치셨습니다!」
여전히 딱딱한 어투로 카운트를 한 뒤 사내는 자신의 공이 서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포카 판이 달구어 지고 있는 시점에서의 낯선 이방인의 방문이 별로 달갑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자신의 공 앞에 멈춰선 사내는 공의 포지션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지 잠시 골몰한 얼굴로 테이블 위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리고는 입맛을 다신 후, 큐를 집어들었다.
정석대로라면 긴 쪽 당구대에 붙어 있는 제 1적구의 왼쪽을 두툼하게 때린 후 단축, 장축 쿠션을 타고 다시 오른 편 구석에 있는 제 2적구를 맞춰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제 2적구 앞에 혼의 수구가 포진해 있었기에 두깨와 회전을 아주 정교하게 조절해야만 벌점 없이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매우 까다로운 형태였다.
몇 번 큐 질을 하던 사내가 오른 팔목의 스냅만으로 샷을 시도했다. 경쾌한 충돌음과 함께 사내의 수구가 쿠션을 타고 회전했다. 공이 그리는 궤도로 봐서 무난히 공격이 성공될 것 같았다. 하지만 느닷없이 튀어 올라온 제1 적구가 충돌을 해왔고 사내의 공은 엉뚱한 곳으로 퉁겨 나가고 말았다.
순간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수구와 충돌한 제 1적구가 하필이면 제 2 적구 옆에 굴러가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속된 말로 꽃다마였다. 1,000점 이상의 고점자라면 당구대를 빙 돌아가며 하루 종일도 칠 수도 있는 그런 챤스를 상대에게 상납하고 만 것이었다.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던 사내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창고 안 테이블 위를 돌고 있는 수천만 원대의 판돈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후딱 서너 판 깨져주고 이방인을 돌려보낸 뒤, 어서 빨리 포카 판에 끼고 싶었다. 어젯밤 좋은 꿈을 꿨다. 포카 판의 눈 먼 돈이 오늘은 모두 자신의 몫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삑!'
하지만 이방인은 또 다시 큐 미스를 했다. 주는 떡도 못 먹는 병신. 사내는 혼을 흘겨보며 그렇게 속엣말을 했다.
「3박 4일 동안 쉬지 않고 패를 쪼였더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군, 제기랄! 겨우 2천 따려고 그 노가다를 뛰다니……」
오른 주먹으로 자신의 등을 두들기며 독백처럼 혼이 내뱉은 말이었다. 수구를 겨냥한 채 펌프질을 하던 사내가 두 눈을 번뜩였다. 지금껏 불만족스러워 보이기만 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혼의 등뒤로 바짝 다가서며 그가 중얼거렸다.
「원정오셨나보죠?」
「물 좋다고 그래서 가게도 직원 놈들한테 맡기고 서울서 내려왔는데, 일당도 못 뽑고 가게 됐습니다, 지미」
사내는 맞으려면 맞고 말라면 마라는 식으로 성의 없는 샷을 내질렀다. 제 1적구를 강타한 수구가 쿠션을 돌더니 혼의 수구와 충돌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시면 여기서 보충하시죠? 그렇지 않아도 선수가 하나 모자라던 참인데!」
사내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지만 혼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자, 새로운 멤버를 모시고 왔습니다. 인사들 하시지요!」
창고는 다섯 평 남짓했다. 그 정 중앙에 녹색 천이 둘러진 둥그런 원탁이 놓여져 있었고 네 명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뱀처럼 혼을 훑었다. 낯선 등장인물에 대한 약간의 경계가 서려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장안평에서 조그마케 외제차 수입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는 조평식이라고 합니다」
혼이 조금쯤은 어눌하게 들릴 수 있는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가평에 있는 친구 놈 별장에 잠시 쉬러 왔다가, 춘천에 볼일이 있어 잠깐 들렀습니다. 이런 좋은 자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입구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뿔테 안경의 사내가 회답했다.
「전 한림대학교 통계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경식입니다. 35살, 노총각이죠. 쓸 만한 처녀 있으면 소개 좀 시켜 주십시오. 하하!」
그의 서툰 농담이 살벌해야 할 투전판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전환시켰다. 경식의 오른 편 자리에 앉아 있던 거구의 사내가 묵직한 톤으로 입을 열었다.
「명동에서 밤업소를 몇 개 운영하고 있는 민상기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시다!」
몸무게가 얼마나 나갈까? 키는? 정말 무지막지한 거구였다. 마치 NBA의 샤킬 오닐을 보는 듯 했다. 주먹에 군데 군데 굳은살이 박혀 있는 것도 그렇고, 그저 평범한 장사치는 아닐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는 최종욱이라고 합니다. 그냥 최라고 불러 주십시오」
말이 금융업이지 강원도 내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악질 사채업체이자 폭력조직인 '종다리파'의 보스이기도 했다. 한 5년 전까지만 해도 고향인 화천에서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동네 양아치에 불과했었지만 태백에 카지노가 들어서면서 노름꾼들을 상대로 한 사채업을 시작했고 불과 1년 만에 강원도를 통틀어 최고의 사채업자로 성장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검은 색 돋보기 안경을 걸친 어리숙해 보이는 40대 사내가 혼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더듬더듬 자신을 소개했다.
「가, 강릉에서 조그만 거, 건축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하, 한도윤이라고 합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8:2 가르마에 70년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스타일의 양복, 그리고 굵은 뿔 테 안경…….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건축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보다는 한 10년쯤 교도소 생활을 하다가 오늘 막 출감해 장롱 속에 쳐박혀 있던 해묵은 옷을 꺼내 입고 외출에 나선 사람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에겐 더욱 더 적격이었다. 조금도 어색해 보이거나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사내까지 소개를 마치자 혼을 안내한 당구장 주인이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혼에게 권했다.
「저는 이 당구장 주인, 박 병식이라고 합니다. 총알이 부족한 분들께는 뒷돈을 대드리기도 하고 선수가 모자랄 때는 대타로 뛰기도 하죠. 조 사장님이 오셨으니까 전 그냥 심판이나 봐야겠군요」
혼이 자리에 내려앉자 전판의 승자였던 상기가 카드를 집어들고는 뒤섞기 시작했다.
「자, 대충 소개는 끝난 것 같고, 슬슬 시작해 볼까요?」
경상남도 포항시. 칠흑 같은 어둠이 녹아 내린 바닷가를 갑작스런 해일이 단숨에 삼켜버렸다. 정박해 있던 소형 어선들이 로데오를 하듯 아래 위로 심하게 요동을 치며 부두에 선두(船頭)를 처박아댔고, 거센 바람이 공룡의 울부짖음처럼 해안 가득 절규하고 있었다.
느닷없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50여 미터나 솟구쳐 올랐다.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그 물기둥 위에 부유하고 있었다. 20대 중반쯤 된 서양인이었다. 조각상처럼 수려한 용모를 가진 사내는 아무런 외부 동력도 이용하지 않은 맨 몸으로, 순식간에 수백 미터를 비행해 모래사장 위에 내려섰다.
오른손으로 틀어막고 있던 그의 왼쪽 옆구리에서 시뻘건 혈액이 조금씩 세어 나오고 있었다. 호흡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듯 가빠 있었고, 반쯤 벌어진 그의 입에선 나지막했지만 격렬한 신음이 토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두 눈으로 조금 전 자신이 모습을 드러냈던 먼 바다를 더듬었다. 그 순간 두 개의 물기둥이 바다 위로 솟구쳐 올랐다. 물기둥이 정점에 다다르자 머리에 검은 터본을 두른 아랍인과 중국의 전통 의상을 착용한 동양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순간 조각상을 닮은 서양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공간이동을 시전하기 위해서였다.
물기둥 위에 정지해 있던 두 사내는 느릿하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훑어 봤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들의 번뜩이는 두 눈은 수 키로 미터 떨어져 있는 쓰레기통을 뒹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까지도 포착해 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들이 쫓고 있는 '지글로'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랍인이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던 '지글로'의 뇌파를 감지하는 것으로 그의 현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눈을 치켜 뜬 아랍인 사내가 중국인을 돌아봤다.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사를 교감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곤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해안가로 비행해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빠른 스피드였기에 그들이 비행하는 수 십 미터 아래, 바다의 수면이 움푹 패어질 정도였다. 마치 모세의 기적이 재현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지글로'는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사람들의 뇌파가 많이 뿜어져 나오는 곳으로 공간을 이동해 왔다. 중앙시장 안, 횟집 골목이었다. 사람들 속에 뒤섞여 있으면 추적자들이 자신의 뇌파를 감지해내는 데 혼선을 빚을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기대에서였다. 자신의 뇌파를 감지해낼 수 없게 되면 그들은 E·S·P(초감각적 지각 능력) 감지에 나설 것이 틀림없었다. '지글로'는 자신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던 에너지 막을 서둘러 거두어냈다. 그 때문에, 터진 옆구리에서 수돗물처럼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고 통증도 더욱더 격렬해져 왔다.
극심한 부상을 입은 데다가 장거리 텔레포테이션을 시도하는 바람에 숨이 턱까지 차 올라와 있었다. 두 다리가 땅 속 깊이 뿌리를 밖은 나무처럼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자고 싶을 정도로 탈진상태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곧 이어 두 명의 '기드온 전사'들이 자신을 찾아내고야 말 테니까.
싱싱한 횟감을 고르기 위해 횟집 앞에 모여든 사람들 틈을 힘겹게 비집고 들어서며 거친 호흡을 골라냈다. 그의 옆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분수를 발견한 한 여인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걸음을 내딛어야했다. 시장을 벗어나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바로 2명의 기드온 전사들이었다. '지글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풀이 오십인가요?」
하프배팅으로 일관되어져 온 흐름이 서로의 합의를 거쳐 10여분 전부터 풀배팅으로 상향조정되었다. 줄곧 잃기만 하던 김 교수가 모처럼 만에 자신 있는 얼굴로 십 만원 권 5장을 테이블 중앙에 던져 넣었다. 그저 그런 패로는 망설임 없이 카드를 엎어 버리고 마는 그가 선뜻 풀 배팅을 한 것이었다. 바닥 패에 다이아몬드 세 장이 깔려 있는 걸로 봐서는 플러쉬가 메이드 된 것 같았다. 아니면 보이지 않는 트리플을 쥐고 있던가.
잠시 그의 표정을 훑던 민상기가 백 만원 권 자기앞 수표 두 장을 내밀었다.
「레이스! 메이드 2백으로!」
「따당으로 갑시다!」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최 사장이 내뱉은 말이었다. 바닥에 깔린 패로 짐작하건데 '6'이 탑인 스트레이트 메이드로 보였다. 하지만 혼은 그의 패애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지금껏 지켜봐 온 결과 최 사장은 자신이 들고 있는 패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판을 키워 왔다. 그리고 히든을 받고 나면 서슴없이 패를 엎곤 했다. 즉, 자신의 패와 무관하게 그저 판을 키우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쪽으로 분산시키는 바람잡이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재래시장의 장사치처럼 어수선을 떨어대는 최 사장과는 달리 한 사장의 플레이는 대체적으로 얌전한 편이었다. 그 특유의 어눌한 표정으로 가끔 자신의 탁월한 손재주를 발휘해 브릿지 도중에 다섯 명의 패를 자유자재로 얽어내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최 사장이 분위기를 띄워 놓은 판은 거의 대부분 한 사장이 마무리를 했다. 게임이 시작된 지 1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혼은 두 사람의 공생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다.
「콜만 받읍시다」
이번에도 한 사장의 배팅은 매우 소극적이었다. 최 사장이 알아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자신의 패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입맛을 다시던 혼이 마지못해 따라간다는 표정으로 콜을 부르자 김 교수가 다시 레이스를 했다.
「레이스. 메이드 2천으로 가죠!」
두 번 째 배팅 차례가 돌아오자 상기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테이블에 뒤집혀져 있던 자신의 패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손에는 두 장의 '8'이, 바닥에는 한 장의 '8'이 오픈되어 있었다. 6구 트리플은 상기가 제일 싫어하는 패 중 하나였다. 남은 한 장의 패가 그대로 말라 버린다면 스트레이트에게도 이길 수 없는 허접떼기에 불과한 패가 바로 트리플이 아닌가. 그렇다고 히든에 포카나 풀 하우스가 메이드될 수도 있으니 과감히 엎을 수도 없고…….
김 교수의 액면과 배팅으로 미루어 볼 때 플러쉬가 이미 메이드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늘까지 서너 차례 그와 게임을 즐겼지만 철저하게 확률 위주의 플레이를 하는 그는 결코 히든을 바라봐야 할 상황에서의 레이스는 하지 않았다.
아직까진 부담액이 그렇게 크지 않지만 뒤에 세 명 중, 최 사장에겐 한 번의 레이스 찬스가 더 남아 있었다. 그가 다시 레이스를 친다면 히든에서의 부담금은 몇 배로 불어날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상기가 돈을 집어 들었다. 히든 패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만약에 풀 하우스가 올라와 준다면 판을 휩쓸어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콜만 받겠습니다」
상기가 콜머니를 묻자 한 사장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레이스를 외쳤다.
「받고 메이드 4천으로!」
아직 히든 카드를 받기도 전이었는데 벌써 판돈은 2억을 넘어섰다. 히든을 받고 나서도 이 페이스가 계속 유지된다면 판돈은 수십 억을 훨씬 웃돌게 될 것이다. 오늘 게임 중 최고로 큰 판임과 동시에 5시간 동안 돌고 돈 판돈 전부의 수십 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자잘하긴 했지만 바로 전판까지 세 판 연속 한 사장이 위너였다. 그는 이들 중 유일하게 스테키를 사용할 줄 아는 전문 타짜였다. 혼은 그가 패를 섞기 위해 브릿지 도중에 간혹 스테키를 사용해 원하는 패를 배열해내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패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들 죽기 살기로 배팅을 하는 걸로 미루어 짐작컨대 한 사장은 오늘의 승부를 이 한 판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세 판의 브릿지를 하는 동안 35장의 패를 배열해 놓았을 것이었다. 물론 승자는 자신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으리라.
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먹을 수 있는 판에서도 잔뜩 배팅만 키워 놓고 패를 엎어왔다. 5,000만원이 넘는 돈을 지극히 초보적인 배팅으로 계속 잃어주기만 했던 이유는 바로 이 한 판의 반전을 위해서였다.
「배팅 하시죠. 조사장님?」
역시나 콜만 받은 한 사장이 혼을 돌아보며 말했다. 혼은 바로 배팅을 하지 않고 3초 가량을 망설인 뒤에 자기 앞에 놓여져 있는 테이블 머니 위로 손을 가져갔다.
「메이드 4,000이죠?」
돈을 세어 보던 혼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어쩌나? 꺼내 놓은 돈이 3,000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올 인인가요?」
돈이 모자란다는 혼의 말에 최 사장이 아쉬움 짙은 어투로 물었다. 상기를 최대한 크게 엮으려면 판을 키워주는 호구가 있어야 했다.
「아뇨. 지갑에 더 있기는 한데……」
동의를 얻으려는 듯 주변을 돌아보자 최 사장이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어떻게들 하시겠습니까? 테이블 머니 외에도 배팅 가능한 걸로 할까요? 어차피 다들 테이블 머니로는 부족하실 텐데……」
대부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은 돈은 기껏해야 개인 당 4, 5천 만원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6구까지는 각자 두 번 씩만 배팅을 할 수 있도록 룰이 정해져 있는 탓에 별 문제는 없겠지만 배팅 횟수의 제한이 없는 히든을 받으려면 어차피 다들 테이블 머니 외에 그 이상의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모두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그 누구도 패를 엎지 않았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순간이었지만 최 사장과 한 사장의 두 눈엔 음흉한 미소가 번뜩였다.
이윽고 한 사장의 손을 통해 히든카드가 돌려졌다. 행여 옆 사람이 훔쳐볼까 손바닥으로 패를 가린 채 패를 확인하는 사람도 있었고, 바닥에 패를 깔아 둔 채 끄트머리만 살짝 들어 확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다이아몬드 다섯 장을 만들어 놓고 있던 김 교수는 히든에서 같은 무늬 에이스를 건져 올렸다.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바닥 패를 번갈아 살피던 그가 지갑을 열어 1천 만원 짜리 수표 다섯 장을 꺼내 들었다.
「오천 배팅하겠습니다」
상기의 히든은 '8'이었다. 트리플로 마를 경우 미련없이 엎어 버리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상기에게 최선의 패가 올라온 것이었다. 아무런 갈등도 하지 않은 채 지갑에서 1억 짜리 두 장을 꺼내 들었다.
「메이드 2장으로 가겠습니다」
판돈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평범한 셀러리맨의 봉급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은다 쳐도 10년은 꼬박 모아야 할 돈이 테이블 중앙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서민들에게는 '억!' 소리날 엄청난 액수였지만 눈 하나 깜박거리는 사람 없었다.
「메이드 4억으로!」
상기의 돈이 테이블 머니에 올려지자마자 최 사장이 다시 되 받아쳤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각본이었기에 혼은 최 사장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한 사장을 돌아봤다. 지금까지 콜만 받아온 그였지만 아마도 풀 레이스를 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혼이 두 사람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때문이었을까? 혼의 예상과는 달리 한 사장은 과감하게 패를 엎어 버렸다.
「전……, 죽었습니다」
하지만 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판의 승자는 최 사장이 될 게 뻔했다. 그의 바닥에는 스페이드 3과 5, 크로바 4와 다이아 6이 깔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스트레이트로 보이지만 한 사장이 패를 엎은 이상, 그것은 스트레이트가 아닐 것이었다. 스페이드 2와 4, 그리고 1이 최 사장의 손에 쥐어져 있을 것으로 추측됐다.
혼은 자신의 패를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바닥엔 하트 10과 쟈니, 킹, 크로바 마담이 깔려 있었고 손에는 하트 마담과 스페이드 마담이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히든에 들어온 패는 하트 9였다. 즉, 6구 마담 트리플에 투 사이드 스티플 비젼이었던 패가 히든에 하트 9가 뜨면서 킹 탑인 스티플로 메이드된 것이었다.
빽 스티플과 킹 탑 스티플. 너무나 뻔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혼은 그들의 각본대로 움직였다. 마치 광분이라도 한 듯 벌겋게 닳아 오른 얼굴로 당구장 주인을 돌아보며 사정조로 입을 열었다.
「혹시……. 총알 조달 좀 되겠습니까?」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지금 저한테는 1억 정도 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더 들어가게 될지 모르지만 나머지 전부를 조달받고 싶은데요」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 사장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헛기침을 내뱉어 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조 사장의 등장으로 그들이 원하던 왕대박 판을 엮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까짓 돈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실 오늘 포카 판의 공사 대상은 춘천을 장악하고 있는 '핵주먹 파'의 보스인 '민상기'였다. 강원도 전역에 사무실을 차려 놓고 사채업을 하고 있는 그였지만 유독 춘천에만은 발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이미 상기의 조직에서 춘천 지역 사채업을 독점적으로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상기가 돈을 떠나 순전히 게임으로써 쎄븐 오디를 즐긴다는 사실은 그에게는 더 없이 좋은 정보였다. 제대로 짜여진 판에 그를 끌어 들여서 살살 부추기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의외로 쉽게 춘천 지역에서의 사채업 권리를 양도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가 게임 때 준비하는 돈은 2, 3억 정도라고 들었다. 이제 그의 수중엔 이번 배팅을 받을 수 있을만한 여유자금이 바닥났을 것이었다. 킹 탑 스티플을 쥐고 있는 호구와 자신이 번갈아 가면서 판을 지져대면 포카드를 쥐고 있는 그는 꽁지 돈을 끌어서라도 끝까지 따라 들어 올 것이다. 최 사장은 가능한 판을 키워 상기에게 막대한 채무를 짐 지운 후, 채무 변제 대신 춘천 지역의 사채업권을 양도받을 심산이었다.
그래서 오늘 따게 될 판 돈 전부를 고스란히 넘기겠다는 조건으로 '스테키'의 최고수라고 알려져 있는 대한 민국 최고의 타짜, '김 용덕'을 초빙해 왔다. 바로 한 사장이라고 소개된 자가 그였다.
「하하……」
박 사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궁색한 웃음을 흘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이 커져버려서……」
이번 판이 다 돌아가려면 최소한 1인당 10억은 박아야 할 것이었다. 박 사장이 커버할 수 있는 꽁지 돈은 기껏해야 1인당 1억 정도였다. 선이자를 떼고도 1개월 후면 원금보다 이자가 더 커지는 게 꽁지 돈이라 욕심은 났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봐야 10억도 되지 못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빌려 드려도 될까요?」
그 때 최 사장이 특유의 묘한 미소로 끼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이 승리하게 될 판이니 얼마인들 빌려주지 못할까? 무한대로 빌려줄 테니까 판만 잘 키워달라는 게 그의 간절한 마음이었다. 그래야 민 상기를 확실히 엮을 수 있을 테니까.
「같은 선수끼리 대출을 해도 되나요?」
「확실히 채무를 상환할 수만 있다면야 뭐 어떻습니까? 사실 전 사채업잡니다. 좋아하는 게임도 하고 돈 장사도 하고. 저로써는 꿩 먹고 알 먹는 격이네요, 하하」
그러고 나서 최 사장은 동의를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돌아봤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던 탓인지 모두들 긍정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대출절차는 의외로 간단했다. 최 사장이 건네 준 백지에 자필로〈본인 유 혼은 '태백파이낸셜(주)'로부터 일금 0000만원을 차용하였슴〉이라는 한 줄의 문장과 날짜만을 기입한 후, 두 사람의 이름 옆에 지장을 찍은 게 전부였다. 혼의 재산관계나 채무능력 따위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질문도 없었다. 민상기의 코를 꿰는 데 그저 충실한 바람잡이 역할만 해주면 그 뿐이라는 뜻이리라.
「제가 누군 지는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얼마가 됐든 조 사장님이 배팅하는 금액은 제가 은행 문을 여는 동시에 모두 변제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최 사장이 그렇게 공표를 했다. 강원도 내 최고의 현찰 왕이 그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라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메이드 8억!」
모두의 묵시적 동의를 얻은 혼이 그렇게 외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김 교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도 대출 가능할까요?」
「하하. 오늘 장사 잘 되는군요. 물론입니다. 김 교수님 같이 신원 확실한 분에게 대출을 안 해드리면 어떻게 먹고 살겠습니까? 하하하」
최 사장이 펜과 종이를 집어들자 그 새 생각이 바뀌었는지 김 교수는 도리질을 쳤다.
「잠시……,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플러쉬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는 패가 아니다. 거기다가 A, K탑을 가진 후러쉬라면 플러쉬 중엔 거의 최강이 아닌가? 액면으로 봐서는 플러쉬 이상을 쥐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오늘 이 한판에서만 승리를 거둔다면 로또 복권 당첨자 부럽지 않은 인생역전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김 교수는 자금조달 요청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플러쉬가 엿보이는 조 사장이 레이스를 치는데도 불구하고 양쪽에서 계속 판을 키우는 최 사장과 민 사장, 그 두 사람의 패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됐습니다. 전 이쯤에서 올 인을 불러야겠군요」
김 경식은 남아 있던 천 만원 권 수표 여섯 장을 테이블 머니에 포함시키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최 사장이 추궁하듯 상기를 바라봤다.
「배팅하시죠. 민 사장님?」
상기에게는 최근 골치 거리가 하나 있었다. 호시탐탐 춘천 지역에 터를 잡으려 하는 최 사장과 그 일당이 바로 골치 거리를 안겨준 원흉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 곤죽을 내 버리고 싶었지만 강원도 전역에 조직을 갖고 있는 그를 함부로 혼내줄 수는 없었다. 자금 동원력이나 공권력과의 친밀도는 물론 조직간의 전투력 또한 결코 자신이 우월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전과는 달리 요즘 세상에는 구역 다툼을 위한 전면전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상대방의 구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 사장 측에서 이를 어기고 자꾸 시비를 걸고 있으니 넋 놓고 안방을 내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면전을 단행할 수도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나도 준비한 총알이 다 떨어졌소. 하지만 그냥 죽을 수는 없는 패고……」
담배에 꺼내든 상기가 최 사장을 응시했다.
「저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최 사장님?」
「민 사장님까지 제 돈을 써 주시겠다니 영광일 뿐입니다. 하하」
꺼내든 담배를 입에 물고는 최 사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상기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다른 분들이 위너가 되신다면야 상관없지만 만약 최 사장님과 나, 둘 중에 한 사람이 독식하게 된다면 사이드 머니 대신에 나의 춘천 지역 사채업권과 당신의 강원랜드 지분을 거는 것이?」
그건 바로 최 사장이 원하고 있던 바였다. 드디어 민 상기가 자신이 쳐 둔 덫에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지만 애써 겉으로는 무신경한 표정을 가장했다. 그의 심경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춘천에서는 왕으로 군림하는 자였다. 아무리 자신이 강원도 전역을 무대로 활동하는 거대 조직을 거느리고는 있지만 순수하게 전문 주먹잽이들로 이루어진 폭력조직은 아니지 않은가. 행여 그가 죽기살기로 나온다면 자신의 조직도 성할 리가 없다는 것을 최 사장은 잘 알고 있었다.
강원랜드는 화천의 동네 양아치에 불과했던 그를 지금의 그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준 밑거름이었다. 처음 그가 얻어낸 지분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전국의 막강한 폭력조직들 틈바구니에 끼어 그가 확보할 수 있었던 이권이라봐야 카지노에 의해 파생되는 전체 이권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그는 그것을 필두로 전국의 내노라하는 조직들과 감히 어깨를 견줄 수 있을 만한 지금의 대 조직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그의 강원랜드에 대한 사업권에 대한 애착은 특별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상기가 최사장에게 다른 것을 제껴둔 채 강원랜드와 연관된 사업권을 걸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 강원랜드가 그 무엇보다도 각별한 의미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춘천 지역의 사채업권 또한 상기에게 는 그 만큼 소중한 의미라는 사실을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시죠」
하지만 최 사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가 무조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더 이상의 배팅은 우리 두 사람에겐 별 의미가 없게 됐군요」
최 사장의 말에 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렇게 됐군요. 그냥 콜만 받읍시다」
「하하. 저도 콜만 받죠. 김 교수님부터 오픈을 하실까요?」
최초로 올 인을 부른 김 교수가 자신의 숨겨진 패들을 뒤집어 보였다.
「아카 후러쉽니다」
그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상기가 자신 만만한 미소를 만면에 꽃피우며 들고 있던 '8'들을 하나씩 펼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패를 잡으셨군요. 하지만……」
최 사장은 거만하다싶을 정도로 느린 동작으로 한 장 씩 패를 열어 보였다. 역시 혼의 예상대로였다. 스페이드 2와 4, 그리고 1이 차례로 그의 오픈 카드 옆에 늘어섰다.
「……제가 좀 더 운이 좋은 것 같군요. 하하!」
상기는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김 교수처럼 내일 당장 세상에 종말이 오기라도 할 것 마냥 비참해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단지 오늘은 영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비록 인구 20여 만 정도의 작은 도시지만 그래도 한 조직의 보스다운 여유와 기품이 엿보였다.
그런 상기를, 최 사장은 간교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조롱 섞인 미소로 바라보다가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조만간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민 사장님! 오늘은 이만……」
최 사장이 상기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사이 한 사장이 창고의 문을 열고 한 쪽으로 비켜섰다. 시간은 이미 새벽 4시를 넘어섰고 당구장은 영업을 마친지 오래였지만 당구공의 경쾌한 충돌 음이 들려져 왔다. 최 사장과 민 사장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당구 대 몇 개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기가 일어나 목례로 예의를 갖추자 최 사장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잠깐!」
막 문 밖으로 나서려던 최 사장이 우뚝 멈춰 섰다.
「마치 제 패가 뭔지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 분위깁니다. 최 사장님?」
최 사장의 얼굴에 봄꽃처럼 만발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랬다. 결과야 보나마나 뻔한 것이지만 어쨌든 아직 판은 모두 끝난 게 아니었다. 자신을 조 사장이라고 밝힌 사내의 패도 확인을 시켜 주고 나서 일어섰어야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몇 년 동안 변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변비환자가 모처럼 만에 걸쭉한 배설물을 원 없이 배출해내고는 서둘러 그 기쁨을 와이프와 함께 나누기 위해 밑도 안 닦은 채 바지를 추켜 올린 그런 경우라고나 할까?
「그게 아니라면 제 패가 뭔지 확인도 안한 채 그렇게 일어서실 수가 있습니까?」
최 사장은 사정없이 구겨져 있던 얼굴에 억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을 향해 돌아섰다.
「죄, 죄송합니다. 조 사장님. 태어나서 처음으로 잡아본 스티플이라 잠시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되지도 않을 패로 걸음을 되돌리게 만든 불청객의 태도에 최 사장은 짜증이 났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자리로 돌아와 착석하며 그가 비꼬듯 말했다.
「로얄 스티플이라도 들고 계신 모양이군요. 하하」
「보면 알게 되겠죠」
혼이 손에 쥐어져 있던 카드를 하나씩 열었다. 스페이드 마담과 하트 마담이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오픈된 패는 하트 10, 쟈니 그리고 킹, 그리고 크로바 마담이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패로 집중됐다. 그 쪽으로 미끄러져 가던 혼의 오른 손이 잠시 멈춰 서자 방안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정지하기라도 한 듯 정적이 감돌았다.
혼의 손이 다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의 손을 따라 미동했다. 그의 손에서 던져진 마지막 한 장의 패는 잠시 테이블 위를 날다가 중앙에 쌓아져 있던 배팅 머니 위에 내려앉은 뒤에야 그 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하트 에이스였다.
막 정거장을 출발하려는 시내버스를 세우기 위해 지글로는 차도로 뛰어들었다. 놀란 기사가 브레이크 패달을 짓밟았다. 하지만 덩지 큰 버스는 10여 미터나 더 미끄러져 지글로의 앞가슴을 들이박았다. 운전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오메……. 이 일을 워쪄?」
운전석 바로 뒤에 서 있던 40대 여인이 울상을 하며 소리쳤다. 핸들에 얼굴을 쳐 박고 있던 기사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차 밖으로 뛰쳐 내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휘둥그런 눈으로 기사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먼 곳까지 훑어봤다. 충돌시 어디론가 퉁겨져 나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가시거리 안에는 인간의 몸뚱아리로 추정되는 그 어떤 물체도 포착되지 않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버스에 오른 기사는 어찌됐든 간에 일단 현장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했는지 서둘러 버스를 움직였다. 그렇게 한 50여 미터쯤을 전진했을 때였다. 지글로를 추적하던 두 사내가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져내려 버스를 가로막아 섰다. 다시 한번 기사는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버스는 역시나 두 사내의 가슴팍을 들이받고도 한참을 더 미끄러져 간 뒤에야 간신히 멈춰 섰다.
「에이 썅노무 꺼……」
급기야 기사는 그렇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리곤 두 사람을 패대기라도 칠 듯한 기세로 앞문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리곤 일단 두 사내의 상태를 훑어본 후 별 이상이 없어 보이자 삿대질을 해가며 욕지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아랍인에 의해 도로 바깥쪽으로 집어 던져졌다.
「더, 더 이상은 어, 어쩔 수가 없는 건가?」
버스 맨 뒷좌석에 웅크린 채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던 지글로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버스 기사를 내동댕이친 아랍인과 중국인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지글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계속된 텔레포트와 출혈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때였다. 버스 중간쯤에 앉아 있던 건장한 체격의 세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두 사람의 앞에 버티고 섰다.
「돈 벌라꼬 울 나라에 기어들어 온 외국인들 같은데…… 그런 주제에 감히 이로코롬 소란을 떠남?」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밤송이 마냥 짧게 자른 머리……. 흡사 유도 선수를 연상케 하는 한 사내가 그렇게 읊조리며 오른 손으로 아랍인의 어깨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 순간 사내의 육중한 몸은 포탄처럼 허공을 날아 버스 앞 유리창을 박살낸 후 아스팔트 위를 나뒹굴었다. 아랍인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상태였다. 단지 그의 두 눈이 파란빛을 명멸했을 뿐이었다.
한 사내가 아랍인의 턱을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또 다른 사내의 오른 발이 아랍인의 옆구리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두 사내는 제각기 양쪽 유리창을 향해 몸을 날린 후 머리통을 짓이긴 채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번에도 역시 아랍인은 두 눈만 번뜩였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자 승객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모든 방해물을 제거한 두 사내는 지글로를 찾기 위해 버스 안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지글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국인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마, 말도 안 돼……. 이, 이건 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혼잣말처럼 한 사장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방안에는 그 어떤 소음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최 사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혼의 히든 카드와 최 사장을 번갈아 돌아봤다.
의뢰를 받은 김용덕은 어떻게 판을 엮을 건지에 대한 시나리오 구상을 마친 후 제일 먼저 최 사장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보았다. 포카에 관한 한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최 사장이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용덕은 그가 '된장'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의 서툰 플레이는 적의 경계심을 느긋하게 만들어 그들의 목표 달성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용덕은 그에게 어떤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단지 10여 차례정도 이 마지막 한판과 똑같은 상황을 재현해 보이는 것으로 다가올 현재 상황에서의 부담감을 덜 수 있도록 도와준 게 전부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혹시나 그가 갖고 있을 지도 모를 불신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하트 에이스를 제일 밑 장으로 내려가도록 브릿지를 했고 매 판 그것을 확인시켜줬다. 행여라도 상대가 로얄 스티풀을 잡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완벽을 기하기 위해 하트 에이스는 제일 밑에 깔리도록 샤프질을 했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어째서 그가 하트 '9'가 아닌 'A'를 들고 있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에 방금 전 자신이 스테키를 구상하던 그 순간이 비디오 테잎을 리플레이시키 듯 되새겨졌다. 분명히 그는 그 한판을 위해 가능한 모든 신경을 집중했고 또 한치의 실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그가 히든 카드를 바꿔치기했다는 얘기였다.
「뭐가 말이 안 된다는 거요? 내가 패를 바꿔치기라도 했단 말이오?」
조소로 가득한 두 눈으로 한 사장을 올려보며 혼이 한 말이었다.
「아니면 같은 판에 포카와 빽 스티플, 그리고 로티풀이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소리요?」
「니 히든은 분명히 하트 '9'였어. 이 쳐죽일 놈아! 도대체 언제 바꿔치기를 한 거냐?」
혼의 멱살이라도 움켜쥐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사기를 쳤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혼을 노려보며 한참을 가쁜 호흡만 내쉬던 그가 주먹으로 벽을 후려친 후에 밖으로 튀어 나갔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돌아보던 최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 오늘 우리의 거래는 없었던 걸로 해야겠군요……. 다음에 또 자리 한번 마련해 봅시다. 그럼 이만!」
상기에게 그렇게 말한 뒤 최 사장은 자신의 사업을 망쳐버린 혼을 향해 증오의 눈빛을 고정시켰다.
「덕분에 오늘 아주 인상적인 게임을 했소. 사무실로 찾아오시면 돈을 드리죠!」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혼에게 건넸다.
「아무 때나 이리로 방문해 주시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서는 강렬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혼은 말없이 명함을 받아 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타라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보였어. 무슨 헤어진 지 몇 달이나 된 연인처럼 말이야. 녀석은 좀 불안했었나봐. 행여라도 내가 녀석을 버리고 사라져버리기라도 할까봐…….
「알아보셨어요?」
「내일 오전 10시까지 여권을 준비해 두겠데」
「그래요? 돈은요?」
「일단 계약금으로 100불 줬고, 나머지는 내일 여권하고 맞 교환하기로 했어」
녀석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더듬다가 담배갑 위에 멈춰 섰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긴 숨을 내쉬었지. 녀석의 두 눈이 먼 바다를 더듬었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녀석은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가능한 한 최대한 많은 것들을 자신의 머릿속에 각인시켜두려는 듯 녀석은 창가를 가득 메우고 있는 푸른 바다를 열심히 탐미하고 있었어.
쩌업……. 녀석을 데려가는 게 잘하는 일인가 모르겠어. 아직 어린 녀석이라 언제 어디서 또 생각이 바뀔지 모르잖아.
하긴……. 지금으로써는 상처뿐인 이 나라를 잠시 떠나 있는 게 어쩌면 녀석한테 훨씬 더 나을 지도 몰라. 이 땅에서의 슬픈 기억들을 어느 정도 지워버릴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말야.
암튼 여권 위조에 별 문제가 없다면 낼 오후쯤엔 한국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모레 저녁에는 내 모국 땅을 밟을 수 있겠지. 일단 그 빌어먹을 택시기사 놈부터 잡아서 한강 밑바닥에 가라앉혀 버릴 겨. 어미 개 아들 노무 시키. 그렇고 나서는 어쩐다? 녀석을 찾아가 봐야 하나? 찾아가서 머라고 하지? 내가 니 복제인간이다, 임마! 그러나? 딘장…….
「어떻게 된 건지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조 사장님?」
포카 판은 술판으로 변해있었다. 테이블 위엔 탕수육과 족발, 생선회, 그리고 매운탕이 휴대용 게스렌지 위에서 보글거리고 있었다. 소주병을 집어들고는 한 모금 가득 삼킨 후 혼이 말했다.
「짐작하고 계셨겠지만 최 사장과 한 사장은 같은 편이었습니다. 최 사장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스테키 전문가인 한 사장에게 원조요청을 했죠」
「스테키 전문가라고요?」
속임수라고는 전혀 모르는 김 교수가 반문을 했다.
「아마 그는 도박계에서 알아주는 전문가일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52장의 패를 자기가 원하는 데로 배열해낼 수 있을 정도로요」
경식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한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우둔함을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별한 목적이라면……」
뭔가 집히는 게 있는 지 상기가 물어왔다.
「저도 마지막 판이 돼서야 그들의 진짜 목적이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노린 건 춘천 지역의 사채업권이었을 겁니다」
「하하……. 조 사장님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놈들 수작에 말릴 뻔했군요」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김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사장이 스테키 고수라면 조 사장님이 결코 최 사장을 이길 수가 없었을 텐데 그건 어떻게 된 겁니까?」
엷은 미소를 머금은 혼이 소주병을 움켜잡았다.
「한 사장이 스테키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언젠가는 대형사고가 터질 것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한테 포카와 스티 비젼 패가 들어 왔고 드디어 때가 도래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죠」
혼은 두어 모금쯤 술을 들이킨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다음은 두 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는 혼은 젓가락을 들어 생선회를 접시 쪽으로 가져갔다. 김 교수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졸라대진 않았다.
「김 교수님은 어쩌다가 도박을……?」
어쩌면 혼의 말은 연구에 몰두해 학계에 공헌해야하는 본분을 져버리고 놀음에 빠졌냐는 질타의 목소리로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 교수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멋쩍은 웃음으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하하. 제 전공이 통계학이잖습니까. 학문으로써의 통계학이 실생활에서 과연 얼만큼이나 실효를 거둘지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하하. 물론 핑계처럼 들리시겠지만요」
「그래서 얼만큼이나 실효를 거뒀나요?」
「직접 실험해본 결과 90% 이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90%가 아니라 나머지 10%더군요. 항상 그 나머지 10%에 의해서 대세가 결정되더라구요. 하하. 한 마디로 통계학이라는 건 단지 참고할만한 사항일 뿐 정답은 될 수 없다는 거죠!」
「그럼 이제 교수님께서 검증하려던 과제에 대해서는 결론이 나셨겠군요?」
「네. 그런 셈입니다」
「앞으로는 도박은 하지 않으시겠네요?」
그건 김 교수의 마음 속에 최대의 딜레마로 자리잡고 있는 명제였다. 학문이 단지 문헌으로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길고도 긴 항해의 나침반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지침이라는 것을 입증키 위해 도박을 시작했지만 결국엔 학문은 학문일 뿐, 그것이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방정식은 아니라는 결론만 얻었을 뿐이었다. 비록 그가 염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론이 나온 이상 이쯤에서 도박에 손을 끊어야했다. 하지만 그 동안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에서 소요된 돈이 만만치가 않았다. 현재까지 누적된 적자가 3억은 족히 넘었다. 발을 빼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채 질질 끌려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흐흐.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라……」
「지금까지 얼마나 잃으셨나요?」
「한 3억쯤 되는 것 같습니다」
「김 교수님은 오늘도 한 사장이 손장난을 친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다. 교수님이 사기 도박의 고수가 되기 전까지는 상대가 어떤 기술로 교수님을 현혹시키고 있는지 알 수가 없죠.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어하는지 아시겠죠?」
「아, 알긴 알지만……」
「그럼 잃은 돈만 되찾으면 도박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도박은 그 자체로 마약보다 더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미 제 가설에 대한 검증은 모두 끝이 났습니다. 본전만 되찾게 된다면 쓰레기 하치장보다 더한 악취로 가득한 도박판을 다시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잠시 김 교수의 눈을 들여다보던 혼이 테이블 한쪽에 쌓아 두었던 돈더미에서 1억 짜리 세 장을 뽑아 그 앞으로 내밀었다. 김 교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지킬 자신 있으시면 이 돈을 받으세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김 교수가 실소를 흘렸다.
「저, 정말 이 돈을 저한테 주시는 거 맞습니까?」
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표를 집어 드는 김 교수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던 상기는 혼에게 강한 호감과 함께 호기심을 느꼈다. 행여 그가 히든 카드를 바꾸지 않았다면 아마도 춘천 지역에서의 사채업 권은 최 사장의 수중으로 고스란히 넘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걸 기화로 최 사장은 더 많은 욕심을 낼 것이 분명하고 그렇게 된다면 춘천은 금방 아수라장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춘천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아준 은인임과 동시에 자신의 조직의 붕괴를 사전에 방비해준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강대 법학과에 다니고 계시다고 했죠? 올 해 연세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하하. 다른 일 좀 하다가 스물 다섯에 대학에 왔습니다. 올해 스물 여섯이구요」
「저랑 비슷하군요. 앞으로 졸업하실 때까진 춘천에 계셔야 할 테고 종종 만나게 될 텐데……. 우리 친구할까요?」
오늘 처음 본 사람을 위해 어쩌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도박판에 끼었고, 또 그 와중에 알게 된 김 교수를 위해 3억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어 주는 그의 사내다움에 상기는 반해버리고 말았다. 저런 사내라면 설사 자신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라도 타인의 믿음을 져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실 혼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상기는 올해 서른 살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떠나서 혼을 친구로 삼고 싶었다. 껍데기가 몇 년 더 빨리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이 뭐가 중요한가? 영혼의 교류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동지이자 친구가 아니겠는가?
「하하. 사실 저도 민 사장님의 의연함에 호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최 사장의 패를 확인하시고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 담대함은 정말 인상적이었죠. 하지만 전 친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친구로 두지 않습니다. 혹시 민 사장님은 친구란 어떤 관계를 의미하는 지 아십니까?」
느닷없는 혼의 질문은 상기를 조금쯤은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나름데로의 친구에 대한 지론은 있었다. 단지 말보다는 행동으로 움직이는 삶을 살아 온 덕분에 그런 자신의 생각들을 문자나 언어로 표현해 본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굳이 듣기 좋은 어휘들을 사용해 거창하게 미화시키는 것보다는 자신의 머릿속에 담고 있는 생각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약 10리를 가야하는데 한 명분의 버스비 밖에 없다면 그 돈을 걸인의 동냥바구니에 던져 넣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사이. 물론 서로를 위해 버스비를 양보하려고 한참을 실랑이를 편 후의 얘기겠죠. 하지만 둘 중 한 사람에게 정말로 시급한 일이 있다면 두들겨 패서, 기절을 시켜서라도 버스에 실어 보낼 수 있는 사이……. 그런 게 친구가 아닐까요?
만약……. 어느 날 녀석이 내 애인을 겁탈했다면 그건 아마도 녀석이 그녀의 부정을 알게 됐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여자에게 평생 자신의 친구를 맡겨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을 겁니다.
만약 어느 날 녀석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건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리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순간 자신이 칼을 들이대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내 목줄을 끊어 놓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테죠.
만약 그 와중에 녀석이 정말로 내 목에 칼을 쑤셔 박았다면 그건 아마도 내가 죽어 마땅하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살아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걸 녀석은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타인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는 걸 더 이상 두고 보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혼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너무나 원초적인 어휘와 단순무식한 비약들이었지만 그 어떤 달변을 가진 정치꾼의 휘황찬란한 연설보다 감동적이었다. 그건 진정으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면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마음 깊숙한 곳에 근저한 대답이었던 것이다.
「나이 들어서 친구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죠. 민 사장님 같은 분을 친구로 둘 수 있다면 제겐 더 없는 기쁨이 될 겁니다」
혼이 오른 손을 내밀자 상기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럼 우리 지금부터 친구가 된 겁니다? 그렇지, 혼아?」
「그래, 상기야. 지금부터 우린 친구다」
「하늘이 우리 목숨을 거두어 갈 때까지 우린 친구야, 그렇지?」
「그래. 하늘이 우릴 거두어 갈 때까지……」
엷은 미소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김 교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두 분 사이에…… 저, 저도 좀 끼, 끼워주시면 안 될까요?」
양쪽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 멋쩍어하는 김 교수의 모습은 첫날밤의 새색시를 연상케 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순수함…….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두 사람은 김 교수가 민망해 할 것 같아 억지로 참아야 했다.
「김 교수님은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연세도 있으시니까 저희 두 사람의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상기는 그렇게 말한 후 혼의 반응을 살폈다. 혼은 잔잔한 미소로 동의의 뜻을 표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두 분의 형님이 아닌 두 분의 친구가 되는 겁니다. 주변에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제 비밀스러운 고민에 대해서까지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단 한 놈도 없습니다. 이제는 저도 민 사장님이 말씀하신 그런 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설사 제가 칼에 목을 들이댄다고 해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편안한 미소로 그 동안의 제 안부를 물어주는……, 그런 친구를요!」
그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혼이 상기를 바라봤다. 상기 역시 난색을 비췄다. 혼과는 거의 10년 가까운 차이가 아닌가? 하지만 김 교수는 완강했다.
「유형께서 제게 너무 큰 호의를 베푸셨기 때문에 순간적인 감상으로 이러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다고 공부만 하고 살아온 탓에 두 분처럼 좋게 말하면 사내답게, 나쁘게 말하자면 거칠게 살아온 분들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심 같은 게 작용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다만 두 분이라면 제가 치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난 후에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서요」
「치질이요? 푸하하……」
급기야 두 사람은 참아 왔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김 교수는 조금도 수치스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은 결코 자신에 대한 조소가 아니었다. 그들은 결코 상대의 약점을 비웃거나 조롱할 정도로 작은 그릇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라는 게 경식의 생각이었다. 사실 아직 그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그런 느낌을, 아니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상기가 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무나도 적극적인 김 교수의 태도에 몹시도 곤혹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기는 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건 절대 불가하다는 결론을 이미 내리고 있던 터라 난감한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안됩니다. 전 후레아들 노무 시키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김 교수가 안경 너머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 떴다.
「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저희가 좀 더 친해지고 난 어느 날, 소주 한잔하기 위해 어디 포장마차에라도 갔다고 가정해 보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임마 점마, 이 자식 저 자식 나올 텐데 옆에서 지켜보고 계시는 어르신들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저런 후레 아들 노무 쉐키. 지 삼촌한테 이 놈 저 놈 하는 것 좀 보레이 하면서 호통을 치실 겁니다. 하하」
사실 혼은 스물 여섯이라는 나이보다도 너댓 살은 더 어려 보이는 동안이었고 김 교수는 서른 다섯인 자신의 나이보다도 너댓 살은 더 먹어 보이는 노안이었다. 실제 나이로는 9년 차이지만 얼굴로만 따지면 20년 가까운 터울로 보였던 것이다. 혼의 가정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형님을 하시던가 아니면 그냥 김 교수님을 하시던가, 둘 중에 하나만 고르십시오」
결국 한참을 장고하던 김 교수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말았다. 어떻게든 이 멋진 두 사내와 남은 인생 여정을 같이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비록 그가 그토록 원했던 '친구'가 아닌 '형님'으로써나마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었다.
김 교수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떠올렸다. 비록 복숭아밭이 아닌 돈 비린내나는 투전판에서였지만 현실적인 공동의 목표에 의해 의기투합한 그 세 사람의 우정보다는, 그런 것들을 떠나 정신적인 교감만을 위한 순수한 목적으로 뭉쳐진 오늘의 결의가 몇 배는 더 멋지고 고결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자문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