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만남에서 사랑으로
무더운 한 여름
거리위의 아지랑이가 한 아름 피어오르기 시작하던 그날, 그녀를 처음 보게 되었다.
친구의 소개팅으로 만나게 된 자리라서 한껏 멋을 부리느라고 조금 늦은 시각에 도착하게 된 나는 서둘러 약속 장소로 뛰어갔었다.
그런데 까페로 올라가는 길에 그녀와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붉은 태양아래 환한 빛이 하나 더 있다면 지금까진 보았던 빛 중에서 가장 밝은 빛이 있다면, 그 날 내가 보았던 그녀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가 자기도 약속 시간에 조금 늦게 온 것에 대한 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친구들 틈에 섞여 있었다.
하얀색 원피스에 환한 미소, 조금은 길어보였던 생머리, 발이 보이는 하이힐구두
밝아 보이는 그 웃음 속에 다소 어색한 느낌도 있었지만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친구들이 주선 해 준 소개팅으로 시작 되었다.
이미 4번 정도 소개팅을 해봐서 익숙했던 나는 평소대로 뻔한 질문들을 그녀에게 했다.
어디에 사는지,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인지, 새로 나온 영화 이야기들하며 다소 따분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조금은 알아가려 했다.
그녀의 이름은 박나미, 연향동에 살고 청암 고등학교 진학 반에 재학 중이라 했다.
좋아하는 가수는 특별히 없고, 밖에 있는 시간보단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했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밖에 나가는 것보다는 집에서 뒹굴 거리며 노는게 그냥 더 편하잖아.”라고 하면서 답을 해주었다.
형식적이었던 까페에서의 이야기를 끝낸 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내가 영화표를 두 장 사는 동안 그녀는 영화를 보면서 먹을 팝콘을 샀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는 팝콘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아무튼 ‘내 여자 친구를 소개 합니다’라는 영화를 보는데 의외로 좀 슬픈 멜로 영화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잠깐 동안 쳐다보았는데 그녀의 눈가에 반짝이던 무엇인가를 보았다.
‘눈물일까? 눈물이 많은 여자구나‘ 왠지 착하고 좋은 여자 같아 보였다.
눈물이 많은 사람은 순수하고 착하다고 생각하는 나만의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나미는 그때는 울지 않았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아무튼 우리는 영화를 보고 오락실로 향했다, 오락실 노래방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불러주려고 했지만, 마땅히 좋아하는 가수가 없다 해서 휘성의 ‘안되나요’를 불렀었던 것 같다.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면서 그 날 나는 내 친구가 자기 여자 친구한테 운동장에서 촛불로 이벤트를 해준다고, 와서 좀 도와 달라 해서 그녀와 다음을 약속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다주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내 옆에 서 있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오곤 했었다.
‘설레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에 나도 모르게 들떴었던 것 같았다
오래 있지 않아서 그녀의 집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는 버스를 타면서 내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버스 안쪽에서도 잘 가라고 다시 손을 흔들어 주었고 나도 역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첫 만남에 첫 데이트는 그렇게 끝났었다.
때는 장마철이어서 몇 주 동안 비만 계속 내렸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없었고, 비가 그친 2주 뒤에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공포영화를 함께 보자던 그녀의 말에 나는 무서운거 잘 못 본다며 재미있는 코믹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자기가 잘 보니까 걱정 말라면서 끝내 우리는 김하늘이 주연으로 나오는 공포영화 ‘령’을 보게 되었다.
맨 뒤쪽 통로 쪽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서로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영화를 관람했다.
지금껏 공포 영화는 딱 한번 봤었는데, 이번이 2번째로 공포 영화를 보는 날이었다.
원래 무서운걸 잘 보지 못하는 나로서는 내가 무서워하는 기색을 내면 ‘그녀가 얼마나 실망할까.’ 라는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예상은 철저히 빗나가 버리고, 오히려 그녀가 더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 것이었다.
처음 부분에서는 그냥 가볍게 놀라기만 하더니 나중에 가서는 악을 쓰고,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무서운 장면 나오면 말해달라고 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반면에 나는 그저 담담하게 영화를 보고 있었다.
의외로 나는 무서운걸 잘 보는 모양이었나 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녀는 거의 사색이 되어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다음부터 너랑 공포영화 보나 봐라, 너 악쓰는게 더 무서운거 알어?” 라고 하면서 놀렸었다.
겁에 질려서 그런지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던 우리는 남교 벤치에 앉아서 처음으로 서로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 이야기, 재미있었던 축제 때의 일, 여러 가지 사적인 이야기들 등등.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벌써 10시를 조금 넘기게 되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전과 마찬가지고 그녀와 함께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왠지 이대론 헤어지기 싫어서, 다음 주에 순천 대학교 도서관에 같이 가서 몇 일 뒤면 보게될 시험 공부를 하자고 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알았다고 했다.
조금 지나자 버스가 도착했고, 역시 그녀는 나를 보며 한번 웃어 준채, 버스에 올라 차창 밖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아직은 낯선 감정들이 내 안에서 싹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같이 시험공부를 하러 가기로 한 그 날이 되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안 오던 비가 다시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늘 그녀에게 고백 하려고 몇 일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비가 오면 왠지 못 볼 거 같았다.
그래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녀에게 문자가 한 통 왔다.
-연우야 오늘 비 너무 많이와ㅜㅜ//어떻게 하지?
큰 맘 먹고 고백하려 했던 오늘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조금은 화가 나서
-알았어, 다음에 보자
라고 문자를 보냈더니, 내 기분이 조금 상한걸 알았는지 그녀가
-아니야//그냥 오늘 보자/케이투에서 봐 ㅋ
라고 답장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늘도 도와 주려고 생각했던지, 절대로 그칠거 같지 않던 비가 약속 시간이 되니 조금씩 잦아들고 이내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순천 대학교 도서관에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다던 그녀의 말에, 케이투에서 일단 만난 뒤, 너무 덥기도 하고 그래서 함께 택시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때는 시험 기간이라서 사람들이 도서관에 많이 있었기에, 자리를 잡는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3층에 어렵게 자리를 잡기는 했었지만, 에어컨이 없어서 너무 더웠다.
에어컨이 있는 1층에 자리가 있는지 살펴 보고 있었는데, 다행히 2자리가 비어서 그 쪽으로 자리를 옮기기는 했지만,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더워서 우리 둘 다 도저히 공부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샘하 형한테 문자가 하나 오는 것이었다.
-연우야 도서관이냐? 형도 도서관인데 어디냐
그래서 난 1층인데 더워 죽겠다고 하니까, 샘하 형이 자기도 1층인데 옆에 2자리가 비었다면서 에어컨이 바로 뒤에 있어 엄청 시원하니 이리로 와라 했다.
곧바로 형 옆자리에 그녀와 함께 자리하고서 형이 없었으면 우린 공부도 못하고 쪄 죽을뻔 했다는 말을 하고 서서히 책들을 꺼냈다.
그녀는 책을 2권정도 꺼내고 나서 한 10분정도 뒤적거리더니,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피식’ 하고 나도 몰래 웃음이 나왔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샘하 형이 “같이 밥 먹으러 가자”라고 해서, 그녀를 데리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딴 ‘샤갈’이라는 음식점에서 볶음밥을 먹은 뒤, 샘하 형은 친구와 오락실에 가고 우리는 다시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함께 걸었다.
밖에 앉아 조금 쉬다가 다시 들어와서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이번에는 그녀도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책을 보는 것이었다.
오락실에서 돌아온 샘하 형은 바로 가방을 챙기더니 먼저 가겠다면서 가버렸다.
나도 ‘곧 있으면 나미 집에 갈 버스 끊키겠다’라는 생각에 그만 가자고 하면서 일어났다.
집에 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면서 우린 버스 맨 뒷 자석에 함께 앉았다.
창문을 열어놓고 시원한 밤 바람을 맞으면서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닿을때마다 오늘 말하겠다던 나의 마음들이 점점 커져 목 끝까지 차올라 왔었다.
전에 착한 일을 3번하면 서로 소원 하나씩 들어주기로 우리끼리 유치한 약속을 했었다.
버스에 내려 그녀의 집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그녀에게 말도 안되는 이유들로 오늘 착한 일을 3번했다고 했다.
“참나~한게 뭔데?”라고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에게 묻는 그녀의 말에
“첫째는 나 때문에 너가 시험공부를 하게 됐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맛있는 점심을 내가 사줬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3번째는 이 늦은 시각 집에까지 데려다 줬다는 것.“
참~ 남들 다 하는, 뭐 그런거 가지고 3번을 끝내 채웠다.
그녀도 한번 웃더니,
“알았어, 그럼 소원 말해봐” 라고 했다.
나는 조금 얼버무리면서
“음....그게..말이지.”
“뭔데? 뭐 맛있는거 사달라고? 뭐 먹고 싶은데?”
“아니야 그런거... 그런거 말고......”
“응?”
“아~ 그거 있잖아 왜....그니까 내 말은..”
“뭔데? 말을해~ 내가 다 답답하다”
“아~ 미치겠네, 야 너 정말 내가 무슨 말 할지 감도 안 잡혀? 정말 모르겠어?”
“음....무슨 말 할건데? 정말 모르겠어”
‘정말 눈치도 없다’라고 생각하며 나는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그녀에게 말했다.
“후우~ 저기 미나야.”
“응? 뭔데 그래? 자꾸 그러니까 더 궁금해.”
“그러니까 말이지.....저기...우리...사귀지 않을래?....뭐...이말 할려구...”
“사귀자구?”
“으응..”
그녀는 조금 생각하는 듯 했다.
“너무 부담스러우면 안 그래도 괜찮아.”
“흠~그래....”
그렇게 그녀가 말했다.
나의 고백에 ‘그래’라는 말로 답했던 그녀.
안도의 한숨을 내 쉰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수가 없어서 자꾸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우리 둘을 소개시켜준 미리와 수정이가 미나 집 근처 공원에 있다 해서 잠시 만났는데, 벌써 그 둘은 눈치를 챈 듯 했다.
미림이가 먼저 “김연우 뭐냐? 너희들 오늘 뭐했어?”라고 웃으면서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아가 “야 연우랑 나미봐바, 계속 웃고 있는데? 와...설마 너네둘...사귀냐?”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면서 뒤로 돌아섰고, 나미가 방금 사귀기로 했다고 미리와 수정에게 말했다.
둘은 축하해 주었고, 우리 넷은 공원을 조금 걷다가 내가 ‘버스 시간 때문에 그만 가봐야겠다.‘라고 했더니, 어차피 수정이도 나랑 같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했고 나미도 집에 조금 늦게 들어가도 괜찮다고 했기에 우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렸다.
이윽고 버스가 왔고, 나와 수정이는 버스에 타면서 나미와 미리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왜 그렇게 웃음이 나오던지,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불어오는 바람마저 나를 간질이는 듯이 나를 실실 웃게 만들었다.
여자 친구가 생기면 해보고 싶던 것들.
함께 손잡으면서 영화보고,
까페에 앉아 이야기도 하면서,
벤치에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 유치한 이야기도 해보고,
집에 데려다 주면서 가벼운 입맞춤 하나로 서로에 대한 아쉬움을 위로하기,
함께 술 마셔보기,
그리고 잠 들때까지 전화기를 붙잡고 몇 시간 동안씩 통화해 보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책들을 그녀에게도 들려주고 보여주기
.....그리고 단 한번도 그 누구에게 해 본적 없던, 정말로 해보고 싶던 말.
.....사랑해...라고 말해보기.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아니면 이 많은 것들을 하나씩 다 해볼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였던 건지.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004년 7월 3일.
나의 어설픈 고백을 그녀가 받아주던 날.
설레임.
기쁨.
행복함.
그리고 다소의 걱정들.
사랑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느낌들을 직접 느껴보면서,
고백하던 순간 터질듯하던 심장에게 내 여자 친구가 되었다고 속삭이면서
후에 있을 기대감들을 진정제로 삼아 밤바람 한 모금에 삼킨 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 그렇게 홀로 즐거운 생각에 잠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