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행복했을까..?
고갱의 그림들을 보며 생각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죽을때까지 뭔가를 선택해야 된다면
고갱의 용기를 부러워 하는 사람도 많을것 같습니다.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 1897, oil on canvas, Museum of Fine Arts, Boston.
"우린 어디로부터 와서..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
그도 우리도 다 알고있는 사실-
누구나 인간은 현재로 부터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는 것을..
결국 모든 생물체는 죽음이란 종착역을 향한다는 것을요..
우린 언젠간 우리가 보는 모든것으로부터 이별을 해야 하니까요..
다만 일반적 수명을 다 하지 못할경우 애처롭다고 생각할 뿐이겠죠..살아있는 사람이 죽은자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경험적으로 맞지않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죽은 사람의 경험을 검증할 수 없으니까요..
가끔은 죽음을 생각해 보지만, 어떤 비관적인 삶의 자세나 죽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죽음의 순간은 얼마나 두려울까는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다.
2.
고갱의 삶은 참으로 극적입니다.
다른 예술가들처럼 결코 평범하지 않았는데 1848년에 태어나서 1903년에 죽을때까지 "그는 멀리서 와서 멀리 갔다"는 그의 친구 말 처럼..그는 늘 멀리 가기를 원했었나 봅니다.
방랑자의 기질이 있었던지 어려서도 집을 도망친 적도 있었고, 성인이 되서 늘 현실을, 타락한 문명을, 인간의 헛된 욕망으로 부터. 속된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것 같습니다.
경험은 중요한 것인데..그는 어려서 페루에서 보냈고 청년시절엔 6년동안 선원으로 이방의 항구를 떠돌아 다녔고 말년엔 남태평양의 고도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전 고갱을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은것이 있었습니다...모든걸 다 버리니까 행복했는지.. 그리고 원하던걸 이루었다고 생각했는지, 특히 타히티에서 죽음을 맞이했을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라구요..
그는 아마도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그 자신도 모를테니까요. 어차피 프루스트말 처럼 알지못하는 길도 나중엔 다 같을테니까요..
Mahana no atua (Day of the Gods), 1894, oil on canvas,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그는 증권거래소 직원으로도 일 했었고 5자녀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1873년 일요 화가회에서 취미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883년 그는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가정을 떠났고 본능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통적 회화법을 버렸습니다. 인간의 운명이란..이렇게 우연한 순간에 결정되나봅니다.
이때부터 그의 현실적 삶도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평범한 부르죠아적 삶이나 습관적으로 속해있는 사회의 규범이 그를 못 견디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3.
그가 35세에 택한 새로운 인생은 파리에서 브르따뉴로 거처를 옮긴 일이었고 인생이란 "잘 먹고 키스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한다면, 당신은 만족스럽게 죽을것이다" 라는 조언을 그를 따르는 화가들에게 말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브르통 마을의 설경"을 거꾸로 세워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속여 단돈 7프랑에 판적도 있었고, 물감을 살돈도 늘 부족했는데, 타히티에서의 삶도 마찬가지였던지..타히티에서의 그림이 얇게 발라져 있는 이유이라고도 합니다.
Gauguin, Paul- 브르통 마을의 설경(Breton Village in the Snow,) 1894
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자 했으며,실제의 자각이 아닌 개념을 그림에 도입했는데요. 사실의 모습이 아니라 색채와 형체왜곡을 통해 그림에 그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자신의 꿈"을 표현하는것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했으며 강렬한 감정은 즉시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꿈이란 현실을 초월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4.
작품
그는 그의 생의 마지막 10년을 타히티 원주민들 속에서 타락한 문명에 속박되지 않은 순수한 감각을 찾았고 타히티 여자와 동거하면서 생동감 넘치는 원색의 상징적인 회화들과 조각 판화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강렬한 색채, 감각적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평면적 형태,주관적 감정의 표현으로 당시 화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향을 끼쳤습니다.
남태평양에서의 그의 그림은 이 세가지를 다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이아 오라나 마리아"(=나는 마리아를 경배한다)는 제목의 그림은 전통적인 기독교 성모상을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Ia Orana Maria (Hail Mary), 1891-92 메트로폴리탄 소장
고갱은 이 그림에서의 성서의 내용을 이질적으로 재해석 스스로 라파엘로의 성모상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였고. 타히티에서 그린 어떤 그림보다도 완성도가 높은 그림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고갱이 이 그림을 파리 뤽상부르 박물관에 기증할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던 일이었죠. 그는 못생기고 발가벗은 원주민들이 스스로 어떤 미화도 없고 감춤도 없기때문에 어떤 성상화보다도 순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설교후의 상상도
The Visitat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the Angel), 1888, The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Edinburgh.
이 그림은 그가 브르따뉴에 있을때 초자연적인 상상을 보는 여인들의 신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땅은 붉은색으로 표현했고, 앞엔 현실의 세계인 여인들의 기도하는 모습과 뒤에 천사가 야곱과 씨름하고 있는 환상의 세계를 동시에 그려넣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사선으로 그려 넣었으며, 이 그림에서 미술이란 추상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신조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The White Horse, 1898, oil on canvas, Musee d'Orsay, Paris.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곳이 낙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아름다운 강한 원색이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19세기 유럽인들이 이 그림을 보고 남태평양의 환상에 충분히 사로잡히게 했을거란 생각이 드는 그림입니다.
Fatata te Miti (Near the Sea), 1892,
5.
이렇게 밝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고갱.
100여년전 남태평양의 섬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19세기 유럽문명과는 동떨어진 곳에 살면서 그가 원하던 천국을 발견했을까요..?
그를 그 멀리까지 가게한 이유를 섬머셋 모옴이 쓴것처럼, 달이라는 이상을 쫓아 가장 하위단위인 6펜스로 상징한 물질을 추구하는 인생을 과감히 버린 그는..내면의 진정한 이상과 원했던 자유를 얻었을까요..?
그가 택한 고독한 길은 그가 파리에 살면서 얻었을 부나 안정보다 덜 행복할 것이라고 누가 감히 말 할 수 있을까요...
고갱의 자유분방한 삶을 동경한 적이 있었습니다.
추함이 있기에 상대적으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삶이었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한 인간의 열정이 감동적으로 다가 옵니다.
함께 보기위하여 퍼왔습니다.
즐거운 휴일 되십시요.
<섬섬옥수>
2003-04-04 20: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