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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자 이야기 (7)

고인돌 |2003.04.15 15:02
조회 141 |추천 0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도종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중에서



지석은 자신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유진의 유치원에서 무작정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차에 탔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까페까지 오게됐다. 항상 유진과 함께 들렸던 곳인데

막상 혼자 까페에 들어서려고 하니 왠지 모를 적막함이 밀려든다.

무슨 얘기라도 듣고 싶었다. 아니, 차라리 모든 게 거짓이라고 믿고 싶

었다. 지금이라도 유진이 전화를 걸어올 것만 같다. 정말 그렇다면 유

진이 있는 곳으로 당장 달려갈 것 같은 심정이다.

까페안은 조용했다. 늘 그랬듯이 그녀가 모퉁이 한 구석에 앉아있다.

탁자 위엔 지금 막 커피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석이 곁으로 다가가는 것도 모른채 그녀는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그녀는 당황한 듯 지석을 올려다봤다.

"어... 지석씨! 왠일이세요? 유진이는요? 같이 안왔어요?."

"오늘은 저 혼자 왔어요."

그녀는 순간, 지석의 우울한 표정속에서 뭔가를 감지해낼 수 있었다.

"유진씨 유치원에 갔다가 다른 분이랑 있는 거 보고 여기까지 오게 됐네

요. 많이 울더군요. 저... 사실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습니다.

헌데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드네요. 유진씨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이 떠나

나지 않았어요. 환하게 웃는 것 같으면서도 늘 힘들어 보였어요. 그래

서 저... 항상 그게 마음에 걸려서 유진씨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마음

열기를 기다렸어요. 근데 그런 이유가 저 아닌 다른 사람이 채워주어야

할 부분이었나요? 얘길 듣고 싶어요! 저 많이 괴롭습니다!."

그녀는 묵묵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너무나도 난감했다.

동욱이 유진을 만나게 해달라고 연락했을 때 그녀는 그리움에 지쳐있는

한 남자의 슬픔 때문에 유진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유진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유치원을 가르쳐주었다.

동욱은 아마도 지금쯤 유진과 함께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얘기를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지나간 추억은 기쁨의 모습이든, 슬픔의 모습

이든 애틋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마찬가지 일 것 같다.

"지석씨! 얘기할께요. 지석씨가 말했듯이 유진이 나... 그리고 진희도

지석씨 속이거나 힘든 상황을 만들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단지 지석씨

가 느끼는 그대로 유진이 겉으로는 티없는 애처럼 맑은 애지만 속으로는

상처가 곯을대로 곯은 애예요. 아시다시피 세상에 피부치 하나 없이 지

금까지 견뎠구요. 지석씨가 본 사람... 그 남자 유진이 첫사랑이예요.

대학 새내기 시절에 만나서 두 사람 정말 누가봐도 예쁜 사랑했어요.

헌데 현실이 유진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더군요. 그 사람 집안에서 유

진이 심하게 반대했구요. 유진이 갖은 모욕 다 당하면서 그 사람 지켜내

려 했지만, 결론은 그렇게 내더군요. 그러면 그럴수록 사랑하는 사람만

더 고통스럽다고, 보내줘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그 사람 캐나다로 3

년동안 유학 아닌 유학을 떠났고, 유진인 그 시간 동안 오로지 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듯 해요. 유진이 죽을려고 약도 먹었던 애

예요!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렇게까지 사랑한다는데 맺어주면 어떻겠냐고

저 솔직히 빌고 싶었어요. 유진이 너무 고운 앤데, 누구보다도 괜찮은

앤데 사람들은 진실을 모르니까요. 오로지 드러나는 화려함만을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지석씨! 이제와서 이런 얘기하는 건 정말 예

의에 어긋날지 모르지만요... 지석씨도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유진이 사랑하는 마음... 이제와서 변할 수 있어요? 지석씨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구요. 그 동안 지석씨 때문에 유진이

예전처럼 잘 웃을 수 있었던 거... 너무 고맙게 생각합니다. 헌데...

제 생각은 그래요... 유진인 너무 요동치는 사랑보다는 늘 한결같은 사

랑이 필요한 사람이예요. 지석씨가 옆에서 더 많이 다독거려주세요.

유진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말이예요."

지석은 아까 격앙된 심정과는 다르게 조용히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 사람... 유진씨 첫사랑이라는 분... 그 분 사랑도 내가 결국 존중

해주어야만 하는 겁니까? 그 몫도 유진씨꺼니까... 그 분 사랑도 지켜

주어야하는 거네요."

그녀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차라리 소나기 같은 사랑에 빠져 금

방 잊혀지는 사랑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이제 그만 햇빛에 말려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흠뻑 젖어있는 가

랑비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

오래전에 유진이 했던 사랑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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