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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어머니는 어느 점쟁이한테 갔더니 혼인신고부터 하고 일년만 있다가 결혼해야 잘 산다고 해서 양가 집안의 허락 하에 혼인신고를 했다. 주희는 그래도 못미더운 듯 했다.
“난 사실 너 이렇게 혼인신고부터 털썩 해버리는거 반대야. 아무리 혼인신고를 했다고 해도 결혼식을 올려야 부부지. 너 학교에다가는 뭐라고 할거야? ”
“학교엔 비밀이지, 이제 7개월만 있으면 결혼식 할건데. 누가 내 호적등본까지 떼 보겠냐?”
혼인신고를 하고부터는 그와 만나는 것도 밖에서보단 그의 아파트에서 더 많이 만나게 되었다. 주말엔 항상 같이 있었다. 보고 또 보아도 너무 좋은 사람이다.
그는 주말마다 나를 위해 맛난 음식을 해주었다. 카레, 떡볶이, 피자, 호주식 양고기 찜, 오리요리 등등 그는 인터넷에서 맛있는 요리법을 찾아 프린트까지 해두고 주말만 기다린다고 했다.
퇴근하고 주희와 백화점에 가서 휘진의 생일 선물을 사고 라운지에서 쉬는데, 문혁이 혜영언니와 라운지로 들어섰다.
“뭐야, 너 여기 오려고 땡하자마자 나갔니?”
혜영언니가 우리 앞에 앉으며 핀잔을 주었다.
“어. 선물 살게 있어서. 문혁씨는 여기 웬일이에요?”
“저도 어머니 생신 선물 좀 사려는데 여자 꺼는 제가 모르니 혜영누나한테 부탁했죠. 어찌나 바쁘다고 튕기시는지... 선혜씨 여기 올 줄 알았으면 치사하게 누나한테 부탁 안하는건데.”
혜영언니는 원래 약속이 있었다며 차만 마시고 갔다. 오랜만에 셋이 만났으니 술 한잔 하자고 해서 백화점 근처 닭발 집으로 갔다. 다들 술이 고팠는지 원샷으로 일관하다가 소주 3병이나 비웠다.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난 정말 선혜씨 이해할 수 없다니까. 나한테는 그렇게 차갑게 굴더니 왜 그 사람한테는 그렇게 질질 끌려다니는건지..”
문혁도 술기운이 오르는지 목소리가 좀 높아졌다.
“그게 사랑의 힘이랍니다. 우리가 뭐 압니까. 지가 사랑의 힘이라고 이야기하니..”
주희도 덩달아 문혁에게 맞장구쳤다.
“얘가 더 웃긴건 이미 혼인신고를 했다는거 아닙니까”
“야~ 비밀이라고 했잖아”
문혁의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혼인신고라니요? 결혼식도 안하고? 이 사람 큰일 낼 사람이네. 대책없네.”
“내년 1월에 결혼할거예요. 어차피 할건데...”
“남자란 동물은 절대 믿으면 안됩니다. 결혼식장까지 들어가봐야 진짜 신랑이 누군지 알죠.”
이 사람들이 악담을 해라. 문혁이 술 맛 떨어졌다며 나가자고 해서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는데 기어코 자기도 같이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봐야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다나.. 셋이 한 택시를 탔다. 전화기를 보니 휘진의 부재중 전화가 3통 와있었다. 그에게 전화한다는 것이 잊어버렸다.
그는 신호가 가자마자 받았다.
“어디야?”
조금 화가 난 듯 목소리가 컸다. 문혁과 주희에게도 그의 목소리가 들렸나보다.
“이제 아파트 들어가는 길. 친구랑 술 한잔 하고. ”
“친구 누구? 주희씨? ”
“네. 아파트 다 왔으니까 걱정하지말고 자요. 내일 만나요!”
택시에서 내리자 휘진이 아파트 입구에 서 있었다. 문혁은 휘진을 보더니 성큼성큼 다가갔다.
“처음뵙겠습니다. 선혜씨를 짝사랑한 조문혁입니다. 제 얘긴 들으셨죠?”
“들은 적은 없지만, 뭐 선혜를 데려다주었으니 고맙긴 합니다.”
휘진은 떨떠름하게 그의 인사를 받았다.
“우리 선혜씨 많이 아껴주세요. 그렇게 언성 높이지 말고. 참 좋은 여자 아닙니까?”
문혁이 술에 취했나보다. 쓸데없는 말을 했다. 휘진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건 그쪽이 참견할 문제는 아닌 듯 싶군요. 그럼 가보세요. ”
“네, 갑니다. 선혜씨, 주희씨, 다음에 또 한잔하자구요.”
문혁은 술에 취한 사람 같지 않게 비틀거리지도 않고 걸어갔다. 휘진은 화가 많이 난 것 같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들어가서 자라고 하고는 가버렸다.
“휘진씨 화 많이 난거 맞지? 문혁씨는 왜 그런말을 해가지고....너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혼인신고했다는 말에 충격받았나보다야. 들어가자 춥다”
주희가 끌어당기는 바람에 휘진의 뒷모습이 사라지기도 전에 끌려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는데 어지럽고 토할 것만 같았다. 술이 과하긴 했던 모양이군. 냉장고에 있는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여는데 다시 구역질이 났다. 주희가 일어나서 달려왔다.
“너 아직도 술 안깬거야? 술냄새는 이제 안나는데..”
“그런가봐. 이제 나이 드니 술도 안깨네. 우리 냉장고 청소 좀 해야겠다. 냄새가 많이 나나봐. 자꾸 구역질 나.”
“이따가 출근하기 전에 해놓고 가지뭐. 지난 일요일에 했는데 그새 더러워졌나..”
출근하는데 계속 어지러웠다. 버스 정류장에 그가 서있었지만 다른 사람들 눈도 있어서 목례만 했다. 그의 눈빛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어지럼이 심해서 버스가 오자마자 후딱 올라타 버렸다. 점심을 먹고 나니 그제야 휘진의 생일 선물을 문혁의 차에다 두고 내린 것이 기억났다. 문혁에게 전화했더니 밝은 목소리로 받았다.
“아니어도 그거 주려고 가는 길인데, 한 시간만 있다가 앞으로 나와요. ”
아랫배가 생리통처럼 아파왔다. 달력을 보니 예정일이 일주일 정도 지나있었다. 생리하려나보다. 화장실에 가서 보니 생리혈과 달랐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했다. 배가 너무 당기고 아팠다. 사무실까지 걸어가는게 너무 힘들었다. 다행히 문혁이 도착했다고 전화를 했다. 문혁의 차에 쓰러지다시피해서 탔다. 문혁은 내리려다 말고 깜짝 놀랐다.
“산부인과로 가야 해요.”
문혁이 혜영언니에게 나를 병원에 데려간다고 알아서 사무실 일은 처리해 달라고 전화하는 것이 들렸다.
희미하게나마 의사의 말이 들렸다. 자연유산되어서 혹시나 모르니 잔여물을 긁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혁이 보호자라 생각했던지 의사는 수술절차를 밟으라고 했다.
전신마취가 깨면서 많이 앓았던 모양이다. 문혁이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네.. 주희한테 연락하셨어요?”
“네. 곧 도착할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주희씨가 연락한다고 했어요.”
우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 바보같죠? 임신한 것도 모르고 술을 그렇게 마셔대고. 커피를 하루에 서너잔씩 마셔대고.”
“네. 바보같아요. 자기 몸 상하는 줄도 모르고... 이런 일 한번씩 겪으면 여자들은 애 낳은거 보다 몸이 더 상한다고 하던데..”
병실 문이 열리고 주희가 들어왔다.
“얘, 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휘진씨는 아직 안왔어?”
“퇴근시간 다 되었으니 이제 오겠지. 함부로 나올 수가 없잖아.”
“야, 넌 이 상황에서도 그 사람 생각해주는 말이 나오니? 당장 달려와도 이쁠게 없구만.”
“그럼 저는 이만 가렵니다. 선혜씨, 몸조리 잘하고 퇴원하면 제가 몸보신 시켜드릴께요.”
문혁은 휘진의 생일 선물이 든 종이가방을 침대에 올려주고 갔다.
#휘진‘s
병원까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도착했다. 그녀가 유산이 되어서 병원에 실려갔다고 주희가 급하게 전화를 했다. 퇴근시간이 한시간이나 남았지만, 아프다고 핑계대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아무렇게나 주차를 해놓고 내리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병원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의 그 놈이군. 대체 저 사람은 선혜와 어떤 관계길래 나보다 먼저 선혜의 병원에 와있는거지.
병실로 들어갔더니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의 선혜가 희미하게 웃었다.
주희는 물뜨러 간다며 나갔다.
“몸은 괜찮아? ”
“네.... 미안해요..”
“미안하긴...아기는 또 가지면 되는거지. 어서 당신 몸이나 추슬러야지.”
하지만 내 마음에서는 서운한 감이 있었다. 아기를 가진 것도 몰랐겠지만, 그래도 함부로 술을 마시고 다닌 그녀가 야속했다. 우리 아기가 생길 수도 있었는데.
병원에서 하루 더 있어야 한다고 해서 그녀와 병원에서 함께 자려는데 한사코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주희가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서 그녀는 직원들 눈에 띌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어차피 결혼할건데 어떻게 소문나든 상관없는데 그녀는 신경이 많이 쓰이나보다.
집에 와서 어머니께 전화를 했더니 당장에라도 달려가신다고 했다. 겨우 말려 낮에 가보시라고 했다. 계속 내 머릿속에서는 조문혁이라는 남자가 떠돌아다니고 있다. 그녀를 짝사랑했다면 왜 아직도 그녀 옆에서 어슬렁거리는거지.
병원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너 유산되었다는 그 애가 니 애가 맞니?”
“무슨 말씀이세요?”
“병원에 갔더니 보호자가 조문뭐시기라는 사람으로 되어있더라.”
“조문혁이요?”
“그래. 내가 병실에 들어서니 둘이 있다가 놀라더라. 그놈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도망치듯 가버리고. 너 뭐 아는거 없어?”
“어머니, 괜한 상상 마세요. 선혜 그런 여자 아니예요. 조문혁씨가 병원에 데려다 줘서 그런겁니다.”
“그 사람도 학교 직원이냐?”
“아뇨. 그냥 아는 사이라고 하던걸요.”
“그럼 이상하잖아. 어째 그 사람이 선혜를 병원에 데려다주니? 같은 사무실 직원들도 있는데. 원래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쪽으로 상상하기 싫었지만 어머니의 말을 듣고보니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스스로에게 선혜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나의 뇌는 이미 나쁜 쪽으로 생각을 굳혀 가고 있었다.
그녀가 퇴원해야 한다며 전화했다. 퇴근시간 전이라 퇴근하고 가본다고 했다. 다른 핑계를 대면 나갈수야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이라 다들 6시 땡하자 퇴근들 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8시다. 그 사이 2시간이나 지났나보다. 사무실을 나와서 병원으로 갔다. 병실을 들어서려는데 주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사이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문혁씨 날마다 여기 도장찍는거 아니예요? 남들이 보면 선혜 남편이 문혁씬 줄 알겠네.”
“아니어도 선혜씨 이혼서류에 도장찍고 내게로 올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요.”
“총각이 뭐가 유부녀가 좋다고 그렇게 매달리는거래?”
“선혜씨 아픔이 나의 아픔이니 그렇죠. 선혜씨 이렇게 아픈건 내 잘못이기도 하고. 선혜씨 아기 잃은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란 말이죠.”
“어머어머 이 사람이...남들 들을까 겁나네.”
어머니 말씀이 사실이란 말인가. 돌아나와서 아파트로 갔다. 전화벨이 울린다. 선혜다..
나는 선혜를 사랑한다. 그 사실은 백 퍼센트 거짓이 없다. 하지만 선혜가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혜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전화기를 꺼버렸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주말에 전주에 있는 친구에게 가서 이틀동안 낚시나 실컷 하고 왔다. 휴대폰을 켰더니 문자가 쉴 사이 없이 들어왔다.
[무슨일 있어요?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와서요. 전화도 안받고... 9:47 pm 정선혜]
[사무실도 전화안받는데.. 혹시 사고 난거 아니죠? 11: 10 pm 정선혜]
[오늘 오전에 퇴원수속하고 오후에는 퇴원하는데 데리러 올거죠? 10:03 am 정선혜]
[어머니도 전화 안 받으시던데.. 집에 무슨 일 있어요? 2:05 pm 정선혜]
[어머니 화 많이 나셨던데... 제가 전날 술마신거 말씀드렸어요? 6:30 pm 정선혜]
[뭐하는 거에요? 다 제 잘못인거 알아요. 그러니 전화 좀 받아요. 2: 50 am 정선혜]
[그냥 제가 싫어진거라면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말로 하면 다 알아들을 것을... 미안해요. 3: 35 am 정선혜]
선혜는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가 20통이 넘게 와있다. 그녀가 싫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사랑한 만큼 배신감이 컸기에 그녀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녀를 죽일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