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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배 7. <괴상한 전화>

스토커 |2007.03.17 09:43
조회 674 |추천 0

괴상한 전화

  강민지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면서 잠자는 시간이 아까운 듯 자다 깨다 하면서 여관 종업원이 준 세 개의 콘돔을 다 사용한 장성우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을 느꼈지만 아침 출근과 동시에 항상 마시던 자판기 커피까지 포기한 채 친구인 박종수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었다. 어제 이경아와 함께 있었던 남자의 차량조회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강력계입니다.”

  벨이 여러 번 울려서야 전화를 받은 상대방의 목소리는 장성우에게 위압감을 줄만큼 무겁고 거칠었다.

  “죄송하지만, 박종수 형사 좀 부탁합니다.”

  거친 상대방의 목소리에 기선을 제압 당한 듯 장성우는 매우 조심스러워 하는 목소리로 박종수와의 통화를 원했다.

  “내가 박종수인데, 누구십니까?”

  그 무겁고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박종수였다. 사람의 성격이 직업에 의해 변할 수도 있다고 했던가. 그의 목소리는 누가 형사 아니라고 할까봐 예전에 카사노바 흉내를 내면서 여자에게 꼬리칠 때의 나긋나긋했던 목소리는 어디다 내팽개치고 시건방지다고 오해를 살만큼 투박한 나무 껍질만큼이나 무뚝뚝해 장성우는 거부감을 느꼈다.

  “나, 성우야.”

  일부러 그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장성우의 목소리 또한 덩달아 무뚝뚝해지고 말았다.

  “어, 그래! 그런데 웬일이냐? 네가 아침 일찍부터 전화를 다 하고?”

  오랜만에 통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장성우의 전화를 반가워하는 박종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제도 전화했었는데, 연락도 주지 않고 그렇게 바쁘냐?”

  장성우는 어제 통화하지 못해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시킨 것을 기억하고는, 거기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은 박종수를 힐책하는 말투로 물었다.

  “응, 좀 바빠. 그런데 무슨 일이야?”

  “부탁이 하나 있어서.”

  마치 귀찮은 전화를 받은 것처럼 짜증이 섞인 박종수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진 장성우는 부탁이고 나발이고 그냥 전화를 끊으려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저것 따질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탁이라는 게 뭔데?”

  여전히 박종수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 데, 차량조회 하나만 해줘라.”

  그래도 장성우는 박종수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 돼!”

  하지만 박종수는 더 이상 장성우의 말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짧고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된다고?”

  단번에 칼로 무 베 듯한 박종수의 거절로 장성우의 표정은 벌레 씹은 얼굴로 변했다.

  “지금은 사건과 관련되지 않은 차량조회는 못 하게 되어 있어.”

  “그래도 남들은 다 하던데 뭐.”

  “하여튼 안 되는 것은 안 돼.”

  “임마, 친구 좋다는 게 뭐냐?”

  기분이 깨진 항아리처럼 나빴지만 부탁하는 입장인 장성우로서는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꾹 눌러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 지금 무진장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야, 비싸게 굴지말고…….”

  그러나 장성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깍’ 하는 소리를 내면서 전화가 끊어졌다.

  “쌍놈의 새끼!”

  하도 기가 막혀서 장성우는 자기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린 박종수에게 목구멍이 콱 막히도록 울화가 치밀어 올라와 내팽개치듯 수화기를 내려놓고 욕설을 내뱉었다.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경아의 남자 관계로 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장성우는 휴게실 벽기둥에 기대어 서서 커피를 마시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분명 이경아는 어젯밤 그 남자와 함께 밤을 지새웠으리라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성우는 뿌옇게 눈앞을 가린 담배연기 속에서 벌거벗은 두 사람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그들이 내뱉는 신음소리가 마치 옆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나서 윗니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그녀의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두 귓구멍을 손가락으로 틀어막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이경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그녀의 모습이 보였으며 그녀의 향기가 스며들었다. 장성우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버린 그녀는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은 듯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었다.

  장성우는 피우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전 내내 분침이 한 번 움직이는 것이 시침이 한 번 움직이는 것처럼 지루하고 짜증스럽게 느끼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장성우는 식사시간 30분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에게 친구가 찾아왔다는 거짓 핑계를 대고 혼자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직원들이 드나들지 않는 식당을 골라 찾아가 평상시에 즐겨 먹던 갈비탕을 주문했지만 반쯤 먹다말고 숟가락을 놓아야 했다. 장성우는 아침을 굶어 허기진 뱃속을 억지로라도 채우려고 애써보았지만 마치 모래를 씹는 듯 입안이 깔깔해서 도저히 그릇을 깨끗이 비울 수 없었다.

  남들이 식사하러 들어올 때 식당을 나온 장성우는 회사 동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점심식사를 하러 나간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장성우는 자리에 앉자마자 수화기를 들고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전화번호를 차례대로 누르고서 신호가 가는 동안 흠흠,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사람이 몰리는 시간을 피해 남들보다 일찍 점심식사를 같은 건물에 있는 일식집에서 생선초밥으로 해결한 이경아는 소파에 앉아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싸들고 두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의 주제곡인 ‘Unchained melody’가 흐르고 있었다.

  이경아는 하루에 커피를 서너 잔씩 마시지 않을 경우 거짓말을 하면 코가 커지는 피노키오처럼 자신의 코가 커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낄 만큼 커피를 좋아했다. 또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조용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따르릉…….”

  그때 어디선가 날아 들어온 돌멩이가 유리창을 깨듯이 이경아의 분위기를 왕창 깨뜨리는 전화벨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녀는 들고있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전화기가 있는 계산대로 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이경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장성우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마음속으로 골백번도 더 되풀이 연습을 했지만 가슴이 뛰기 시작하면서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준비한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골백번도 더 되풀이 한 연습이 말짱 헛수고만 된 것이다.

  “…….”

  말 한 마디하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장성우는 마음속으로 골백번도 더 되풀이 연습했던,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요점만 간단하게 백지에 휘갈겨 적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번에는 하고 싶은 말을 꼭 하리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따르릉…….”

  상대방이 아무 말하지 않고 불규칙한 숨소리만 내다가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자 잘못 걸려 온 전화겠지 생각하며 이경아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서 소파에 앉아 마시던 커피를 마저 마시기 위해 커피잔을 들으려고 할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선을 타고 이경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성우는 요란하게 방망이질 쳐 대는 가슴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대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는, 허많이판에 홀로 서 있는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에 걸린 연처럼 외로운 남자입니다.”

  이경아가 전화를 받자 장성우는 나중에라도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도록 아주 낮게 깔린 음침한 목소리로 백지에 적은 글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누, 누구……시라 구요?”

  갑자기 걸려온 괴상한 전화에 찬물을 머리 위부터 뒤집어쓴 듯한 오싹한 소름이 끼친 이경아는 숨막히듯 겁먹은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누구냐고 물었다.

  “그대를 죽도록…….”

  이번엔 장성우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뚜뚜……’하는 단절음이 들렸다. 겁에 질린 이경아가 허겁지겁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그는 수화기를 든 채로 다시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끊임없이 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아마 전화선 코드를 뽑아버린 것 같았다.

  할말이 많았는데……, 장성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성우는 이경아와 그 남자의 관계를 끊어놓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와의 일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법에 저촉되는 지저분하고 사악하기가 그지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성우는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리라고 다짐을 했다. 다짐을 하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쥔 그의 두 눈이 먹이를 앞에 둔 살쾡이처럼 빛났다.

  그때 점심식사를 끝낸 직원들이 무리를 이뤄 떠들썩거리며 사무실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장성우는 그들에게 맛있게 식사를 했냐고, 건성으로 인사치레를 하고 나서 손목시계를 힐끗 보았다. 12시 40분이었다.

  장성우는 컴퓨터 프린터기 속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내 거래처로부터 주문 받은 물품 목록을 작성하듯 오후에 퇴근하자마자 곧바로 구입할 필요한 물품 목록을 하나하나 꼼꼼히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진기와 어둠 속에서도 잘 나오는 고감도 필름, 망원렌즈, 망원경, 소지하기 간편한 소형 녹음기와 테이프…… 등등, 물품 목록을 보면서 장성우는 마치 자신이 첩보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승용차였다. 승용차 없이는 기동성이 떨어져 실탄 없이 총만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차를 구입한다는 것은 장성우로서는 큰 무리였다. 한참 고민 끝에 그는 며칠 동안은 렌트카를 이용하다가 중고차라도 구입하는 것이 좋을 듯 싶어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A4용지를 여러 번 접어 주머니 속에 넣으면서 다시 한 번 이경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장성우는 양복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휴게실에는 점심식사를 끝내고 들어온 몇몇 직원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어 장성우는 비상계단으로 나가 핸드폰 폴더를 열고 1번을 눌렀다. 1번은 그녀의 전화번호가 입력된 번호였다.

  원래 1번은 그가 하루빨리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는 부모님이 계신 고향집 전화번호가 입력된 번호였다. 그는 불효자식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그녀에게 수시로 전화를 해대야 할 것 같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1번에 입력시켰던 것이다.

  “여보세요?”

  신호음이 한참 울려서야 수화기를 든 이경아의 목소리는 한 번 괴상한 전화를 받은 터라 떨고 있었다.

  “그대를 죽도록…….”

  이번에도 장성우의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딸깍, 하는 소리에 이어 ‘뚜뚜……’ 하는 전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단절음이 들려왔다.


  장성우는 퇴근을 하자마자 곧장 회사 근처에 있는 렌트카 회사로 달려가 소나타를 일주일 간 임대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아 낯설었지만 군대에서 610 운전병 주특기를 받고 연대장 지프를 운전했던 솜씨는 아직도 녹슬지 않고 있었다.

  장성우가 차를 몰아 먼저 찾아간 곳은 종로 4가 종묘 옆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사진기 판매점이었다. 그는 종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한 상점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구입한 후 렌트 한 차를 몰고 광화문에서 U턴 해 신사동으로 향했다.

  퇴근시간 때라 그런지 도로는 많은 차량들로 붐비고 있어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런 속도로는 오늘 밤 안으로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근처에도 못 갈 것 같은 조급한 마음에 장성우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남산 1호 터널을 빠져나와 단국대학교 앞 고가도로 위를 지날 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언제나 정체현상으로 복잡했던 도로가 짙은 안개가 걷힌 듯 뻥 뚫려 있었다. 장성우는 담뱃불을 재떨이에 비벼 끈 다음 십 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는 기분으로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고 한남대교 위를 달렸다.

  이경아의 레코드 가게 앞에 도착한 장성우는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차를 인도에 바짝 붙여 세웠다. 그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옆좌석으로 옮겨 앉아 스피커에서 1970년대 중반과 후반을 통해 가장 인기 있는 록 그룹으로 맹활약을 펼쳤던 비지스의 ‘잊지 말고 기억해요(Don′t forget to remember)’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는 레코드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친구인 듯한 서너 명의 여학생들이 가나다순으로 또는 ABC순으로 정리된 CD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진열대 앞에 서서 CD를 고르고 있을 때 이경아는 카운터에 앉아 전화를 받고 있었다.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밝은 표정으로 보아 분명 상대방이 그 남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장성우는 가방 안에서 사진기를 꺼내 망원렌즈를 부착하고 필름을 넣고 감았다. 사진기 안엔 어두운 곳에서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아도 아주 선명하게 나오는 고감도 필름이 들어 있었다.

  장성우는 차창을 삼분의 일 정도만 내리고 가끔 방해하는 행인들을 피해가며 이경아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기 시작했다. 전화 받는 모습, 여학생들이 구입한 CD를 포장해주는 모습, 손님이 없을 때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 커피를 마시는 모습…… 등등, 그는 한 시간 동안 그녀의 작은 몸짓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필름 한 통 속에 고스란히 담았다.

  대학시절에 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활용될 줄이야, 장성우는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다 찍힌 필름을 되감고 다시 새 필름으로 갈아 껴 넣었다. 도둑질만 빼놓고 모두 배워두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실감날 정도였다.

  원래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던 장성우였다. 캠퍼스에서 영영 모습을 감춰버린 이경아를 잊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 때 친구의 권유로 사진 동아리에 가입한 그는 그들과 같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사진에 미쳤던 적이 있었지만, 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사진기를 한 번도 잡아보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그때 배운 솜씨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엉뚱한 일에.

  시간이 9시쯤 되자 레코드 가게문을 닫으려는 듯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 이경아의 모습이 장성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장성우는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폴더를 열고 1번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자 그녀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괴상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며 망설이다 수화기를 든 이경아의 눈까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아까 전화했던 외로운 남자입니다. 그대를…….”

  이경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전화기가 부서질 정도로 세차게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자의 음흉한 목소리가 피부로 스며든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뭔가 끔직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이 강하게 엄습해와 몸서리를 쳤다. 그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한참만에 겨우 정신을 수습한 이경아는 레코드 가게문을 닫기 위해 흐트러져 있는 CD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 전화가 올 줄 모른다는 생각에 단 1분 1초라도 빨리 가게를 벗어나고 싶어 CD를 정리하는 그녀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떨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햄버거 하나로 해결하고 나서 이경아는 샤워를 마친 후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고 잠옷만 입은 채 침대에 엎드려 장홍조의 시집 ‘창꽃 향기 너에게 주리리’를 펼쳤다. 며칠 전 음악관련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가까운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구입한 시집이었다.

  그 동안 다른 책을 읽는 바람에 책꽂이에 꽂아 놓은 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다가 ‘창꽃 향기 너에게 주리리’라는 시집을 펼친 것은 오늘 자칭 ‘외로운 남자’라고 하면서 전화를 한 남자의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를 마음속으로부터 지워버리려는 수단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글씨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남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기는커녕 더 깊이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오며 이경아를 괴롭혔다. 그녀는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시집을 덮어 머리맡에 밀어놓았다.

  도대체 누굴까? 그리고 나를 어떻게 알았을까? 이경아는 몇 명 안 되는 주변 남자들을 떠올리며 가능성에 대해 하나하나 추적을 해봤지만 이렇다할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기 주변에는 그럴만한 남자는 없었던 것이다. 목소리조차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스토커? 스토커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이경아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입안이 바싹바싹 타는 듯한 공포가 엄습해왔다. 대학시절 한때 그런 남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대개 순정파들이라 공포나 두려움 같은 느낌을 줄만큼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때는 그걸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느낌은 그때의 느낌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남의 일처럼 느꼈던 그 일이 자신에게도 배당된 것이다.

  정말 스토커라면, 이경아는 자신이 표적이 된 이상 아무리 애를 쓰고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질투심 때문에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가 틀림없는 그 남자는 뼈다귀를 물고늘어지는 미친개처럼 자신을 괴롭힐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이경아는 스토커의 지칠 줄 모르는 협박 때문에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는 한 여대생이 방송국에 출연해서 MC와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있었다. 사회 문제로 크게 부각되고 있는 스토킹에 대한 프로그램이었다. 알아볼 수 없게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된 그녀는 MC의 질문에 어눌하게 입을 열었다.


  작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어떤 남자가 작은 돌멩이를 싼 메모지를 저에게 집어던지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 행동이 얼마나 빨랐는지 저는 그 남자의 뒷모습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첫눈에 나는 우리가 천생연분이라는 걸 알았어. 저녁 7시에 학교 앞 슈베르트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꼭 나와 주길 바래’라는 내용이 메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별 미친 놈 다 보겠다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그 메모지를 그 자리에서 발기발기 찢어 쓰레기통 속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 전화번호를 알아냈는지, 그 날 저녁에 제 핸드폰에는 여러 통의 음성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잔뜩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였습니다.

  ‘나오라고 했는데 왜 안 나왔어? 네가 날 무시하면 닭 모가지 비틀 듯이 네 목을 비틀어 죽여버리고 말겠어’라는 협박의 내용이었으며, 그런 전화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고육책으로 전화번호를 바꾸고 발신번호표시 서비스까지 신청해봤지만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습니다. 바뀐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 남자는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게 하면서 찰거머리처럼 계속 저를 괴롭혔습니다. 어느 때는 아무 말 없이 음란비디오에서나 들을 수 있는 괴상망측한 신음소리만 내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잠들어 있는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와서 창문을 두드리며 경찰에 신고하면 곧바로 거기에 대한 응징을 하겠다고 협박을 해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무서워서 얼굴도 못 내밀고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또 집 벽에다 빨간 매직으로 ‘○○아, 사랑해. 넌 내 꺼야?’라고 낙서를 해대기 일쑤였습니다.

  또 ‘날 버리고 다른 남자를 만나면 이 면도칼로 네 목을 그어버릴 거야’ 등의 섬뜩한 욕설이 담긴 내용과 함께 붉은 색 사인펜으로 칠한 면도칼이 든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 남자가 누군지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으며, 왜 이런 일이 자기에게 생겼는지 모르겠다면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이경아는 물을 잔뜩 먹은 스펀지처럼 너무나 몸이 무거웠고 몹시 피곤했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레코드 가게로 걸려왔던 그 괴상한 전화가 집으로도 걸려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룰 수 가 없었다. 밤새도록 이리저리 뒤척이며 멀찌감치 달아나려는 잠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의식은 점점 멀쩡해지고 있었다.

  결국 이경아는 수면제를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수면제를 먹고 자면서도 그녀는 자꾸만 자칭 ‘외로운 남자’라고 송충이가 기어가는 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려 서너 번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그러다가 창문으로 엷은 햇살이 비쳐드는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깊은 늪 속으로 가라앉듯 서서히 잠 속으로 빠져들 수가 있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새벽햇살이 길게 이어진 이경아의 방, 잠 속에 빠져든 그녀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이경아의 꿈속에서, 어떤 남자가 살며시 방문을 열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도둑놈 발걸음으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남자는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 같은 눈빛으로 하얀 살갗이 비치는 얇은 잠옷만 입은 채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는 이경아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나서 남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를 입지 않은 그녀의 잠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잘록한 허리를 훑고 지나가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누구세요?”

  자신의 몸을 더듬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깬 이경아가 용수철 퉁기듯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조용히 해. 소리치면 죽여버리겠어.”

  갑자기 이경아가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깜짝 놀란 남자는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을 거두면서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위협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녀는 의식을 잃어버릴 정도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제에……발, 목숨만…….”

  공포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경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남자에게 울먹이는 소리로 애원을 했다.

  “겁먹지마. 널 아주 즐겁게 해주려고 그래.”

  남자의 목소리는 밤에 부는 겨울바람처럼 음산했다.

  “음, 음…….”

  이경아는 무서움에 떨면서 필사적으로 반항을 해봤지만 그럴수록 남자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졌다. 남자는 그녀가 소리치지 못하도록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청색 테이프를 붙인 후, 그것으로도 불안한지 노끈으로 그녀의 양손을 침대 양쪽 모서리에 묶었다.

  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내던진 남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 위로 올라가 이경아의 잠옷을 거칠게 낚아챘다. 그녀의 잠옷 단추가 ‘후드득’ 뜯겨져 나가면서 백옥 같이 흰 젖가슴이 드러나자 남자는 입안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가 한 손으로 이경아의 젖가슴을 주무르면서 또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잠옷을 벗긴 후 꽃잎처럼 부드러운 그녀의 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덫에 걸린 토끼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남자가 힘껏 오므린 이경아의 다리를 있는 힘을 다해 억지로 벌리고 자신의 성기를 그녀의 몸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녀는 다리를 V자로 벌린 채 누워 남자의 성적 욕구를 받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음엔 마네킹처럼 무감각하게 누워 남자의 성적욕구를 받아들이던 이경아는 점점 시간이 흐르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찾아온 쾌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온몸을 비틀며 숨을 헐떡거렸다.

  남자의 성기가 자신의 몸 속에서 구렁이처럼 꿈틀거릴 때마다 점점 정신이 아찔하도록 온몸을 감싸는 황홀감을 참지 못해 신음소리를 내뱉다가 잠에서 깨어난 이경아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남자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었다.

  한동안 아무런 표정도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시선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누워 있던 이경아는 입안이 바싹바싹 타고 뜨거운 뭔가가 목구멍을 조이는 것 같은 갈증을 느끼고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경아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마시면서 꿈이었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는 꿈속에서 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다만, 소름이 오싹 끼치는 무서운 얼굴이었다는 것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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