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경은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잠시 다녀온 엘리스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세상에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신기가 것이 많았고, 재미있는 모험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결코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엘리스가 영원히 살 수 없듯이 미경 자신도 그곳에 영원히 살 수 없는 그런 세상을 구경하다가 온듯한 느낌이다.
미경은 어두운 방안에 재준이 준 옷을 입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10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생활은 꿈이고,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기는 모습이 원래의 나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김미경: 그리웠니? 이 집에 있는게 가짜처럼 느껴질만큼 그리웠니?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솔직하지 못한 자신에게 묻고 싶었다.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는게 싫다고 말하고 있는 자신의 거짓된 마음에 묻고 싶었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과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타이머신이라도 있으면 망설임없이 부모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쩜 그 마음도 거짓인지 모르겠다.
어떤 마음이 진짜 자신의 마음인지 미경 자신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미경은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괴롭고 혼란스러웠다.
이혜숙: 불도 안켜고 거기서 뭐해. 도둑놈처럼..
친구 혜숙이 들어와 방에 불을 밝혔다.
이혜숙: 너 왜그래. 미친년처럼 멍하니... 저녁 잘못 먹었어.
떨리는 목소리로 혜숙이 그녀의 팔을 툭하고쳤다. 미경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김미경: 나 지금 잘하고 있는거니?
이혜숙: 뭘 잘해.
김미경: 이 집으로 이사올때 기억나. 늘 지하방에서 생활하다가 지상으로 업해서 이집으로 이사왔을때 기억하니?
이혜숙: 기억하지. 그걸 어떻게 잊어. 하루종일 좋아서 미친년처럼 웃고 다닌거 전부다 기억해. 평생 그 모습 못 잊을거야.
김미경: 나.. 나 말이야. 그 동안 거짓말하고 있었다. 그 동안 나 잘하고 있었던게 아니였어. 이런 생활 너무너무 힘들고 싫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어.
이혜숙: 오늘 무슨일 있었어. 이 옷은 뭐야. 왜 그러는건데..
김미경: 거짓말하고 있었어. 이런 생활이 너무 힘겹고, 지긋지긋해. 거짓말하고 있었어.
이혜숙: 니 자신한테 거짓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공주에서 한순간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거지로 산다는게 보통일은 아니지.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 거짓말이 진짜처럼 느끼게 할 정도로 넌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그건 거짓말이 아니지.
김미경: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난 너 학생아니거든.
이혜숙: 고집부리고,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사춘기 애들처럼 반항하면 선생님이 가만 안둘거야. 각오해.
혜숙은 불안해하는 미경을 안아주었다. 마음으로...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벽에 조심스럽게 걸러져 있는 드레스를 보면 그녀는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몇번이고 마음속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몇번이고 반복해야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을것처럼.. 그렇게해야 꼭 돌아갈 수 있는 사람처럼 몇번이고 되뇌이고 있었다.
그래 돌아가는거야... 이젠 나에게도 그런 돈이 있으니까? 이 집에서 떠날 수 있는 돈이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거 마음껏하고 사랑하는 남자의 부모한테 모욕당하는 일도 이젠 없을거야. 돌아가는거야. 그런데 왜이리 하나도 기쁘지가 않는거야. 바보같이...
김미경: 내가 그를 사랑했나?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그저 편안해서 좋았고,다음은 기댈 수 있어 좋았다. 어쩜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모든게 다 힘들고 외로웠으니까? 그의 어머니한테 불러가서는 뺨까지 맞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를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힘들어서 잠시 정신이 나갔다는 것을.. 그러나 기분은 더럽고 떡 같았다.
김미경: 다행이지 뭐. 지금 생각하면 그 어머니가 고맙네. 그때는 정말 자존심 상하고 싫었는데말이야. 미워하고 저주했었는데.. 아마 맞은게 억울했겠지.
통장에 들어온 금액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김미경(핸드폰을 받으면) 여보세요.
최승민: 승민이야. 집앞인데 나와라.
뜻밖의 전화에 순간 미경은 당황했다. 그러나 승민이 집앞에 있다는 말에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정말 거짓말처럼 자신의 집앞에 승민이 서 있었다.
김미경: 여기까지 어쩐일이야. 내 집은 어떻게 알고 온거야.
최승민: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게 뭐 있겠니? 가자 맛있는거 사줄게.
김미경: 내가 애니 맛있는거 사준다고하면 쪼르르 따라가게.
최승민: 참 말많네. 그냥 고맙게 생각하고 따라오면 되지. 내가 사주고 싶어서 그래.
김미경: 뭐 사줄건데.. 맛없으면 너 죽어.
최승민: 타기나 해. 그래도 안따라간다는 소리는 안하네.
김미경: 공짜로 밥사준다고하는데 당근 가야지. 나 공짜 무지 좋아한다.
미경을 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승민.
김미경: 왜 그래.
최승민: 이제 실감났다. 많이 변했어. 예전의 김미경이도 좋았지만 지금의 이런 모습이 더 좋다.
김미경: 너 완전 선수야. 어디서 배운거야. 학원이라도 다녔어. 누가 너한테 이런 몹쓸 짓을 한거야.
최승민: 안가르쳐주지.
김미경: 사실 알고 싶지 않았어.
승민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가슴이 설레였다.
김미경:너 일부러 그렇게 미소짓지. 여자들 뻑가게.
최승민: 어떻게 알았어. 다들 좋아하던데.. 완전 뻑가더라구. 너도 나한테 반했어.
김미경: 바보처럼 보여. 그렇게 웃지마.
최승민: 진짜.
김미경: 진짜
승민과 티격태격하면서도 미경은 그걸 즐겼다.
김미경: 여기는 태욱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아니야.
최승민: 아는구나. 태욱이와 얘기 많이 했어.
김미경: 많은 얘기는 못했어. 그저 스파게티 전문점을 경영한다는 말만 들었어.
최승민: 들어가자.
미경이 생각했던 거 보다 훨씬 크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였다. 일하는 종업원도 많았고, 손님도 꽤 많은 편이었다.
태욱은 그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면서 누구와 열심히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돈만 쓰고, 부잣집 아들 흉내나내고 여자나 꼬시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박태욱: 왔어? 왔으면 부르지.
김미경: 생각보다 이렇게 클줄 몰랐어.
박태욱: 흥청망청 돈쓰면서 놀기나 하는줄 알았어. 이런 가게 차려놓고 여자나 꼬시는 그런 놈인줄 알았어.
김미경: 아니 누가 그래. 난 니가 이렇게 번듯하게 인생을 살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박태욱: 입술에 침이나 바르시지.
김미경: 아까부터 발랐는데...
미경을 빤히쳐다보는 태욱. 그런 태욱의 시선이 미경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김미경: 왜그래.
박태욱: 딴 사람 같아. 너 쌍둥이는 아니지. 예전의 미경만 생각하다가 널 보면 적응이 안돼.
김미경: 나도 가끔 그래
다들 내가 변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날 아는 사람마다 내가 변했다고 한다.
그런 말이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나에게는 이젠 중요하지 않다. 예전의 모습도 지금의 모습도 다 김미경 나니까?
김미경: 이 집에서 제일 비싼걸로 줘봐. 돈은 승민이가 낼거야..
박태욱: 네 손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런 내 모습에 어색해하지 않은 단 한사람 최승민. 승민이 앞에서는 날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혜숙이와 마찬가지로 날 있는 그대로 받아줘서 너무나 편안하고 좋다.
어쩜 승민이와 이렇게 다시 만나는게 운명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승민이가 나의 운명이라면.. 난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런데 이런 중요한 생각을 하는데 그 재수없는 인간이 왜 생각나는거야. 머리에서 지우자.. 어우 재수없는 인간.
승민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예전과 다른 승민의 밝은 모습에 그녀도 덩달아 즐거워했다. 앞으로 또 다시 어떻게 살아야할까? 걱정스러웠는데 승민를 만나서 잠시 그런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28살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걱정도 되고, 시작할 용기도 사실 없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거라고 늘 생각했었다. 지하방에서 살면서 희망보다는 절망부터 했다. 돈만 있으면 예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부모님이 없어도 돈만 있으면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돈이 있어도 어떻게해야할지 뭘해야할지 자신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서재준: 핸드폰은 왜 안돼. 고물이야.
만나자마자 시비다. 어찌된 인간이 반갑다는 인사는 없어도 시비는 걸지 말아야지. 오늘도 무표정이다. 조상중에 웃어서 죽은 귀신이리도 붙었는지 좀처럼 웃는 법이없다.
김미경: 무슨 일이세요.
다시는 볼일 없을 줄 알았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이유로 왔는지 모르지만 저 인간은 다시 안 볼수만 있다면 전재산이라도 내놓고 싶은 심정이다.
서재준: 내일부터 출근해.
세상에.. 내일부터 출근하세요도 아니고 출근해. 내가 지 회사직원인줄 아나... 도대체가 인격에 아니 성격에 문제가 많은 남자다.
김미경: 여기까지 헛수고했네요. 안가요.
서재준; 들어오고 싶어했잖아. 마음이 변했나.
김미경: 내가 그쪽 회사직원인가요 아님 명령을 하면 예하고 받아들여야하는 아래사람인가요. 부탁을 하셔야죠. 부탁이라는 단어는 혹시 아세요.
서재준: 출근해. 당신 아버지 회사잖아.
김미경: 그건 10년전 일이죠. 회장 딸이 이런 집에 살지는 않죠. 지금은 서재준씨가 사장이잖아요. 이번에도 뜻대로 안되면 날 고소하실건가요.
서재준: 하루아침에 큰 돈이 생기니까 일하기가 싫어.
김미경: 네. 너무나 큰 돈이 생기니까 일도하기 싫고, 놀고 싶어졌어요.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머리가 터질 것 같아요. 지금 그거 고민중이니까 그냥 가세요. 서재준씨 그 잘난 얼굴 진짜 보기 싫거든요.
서재준: 당신 아버지회사 당신 손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 난 그럴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인가?
김미경: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에요. 남의 일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 이 세상 혼자 사시는 분이 웬일이세요.
서재준: 당신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난 갖고 싶거든. 그러니까 내 말대로 내일부터 기획팀으로 출근해. 난 당신이 내 비서로 일해도 상관없겠지만 니가 싫어하겠지.
김미경: 언제나 그렇게 제멋대로세요.
서재준: 가끔
정말 정 떨어지는 스타일이다. 어제와는 상당히 다르다. 모임에서는 여자들과 잘도 이야기하고 웃더니 지금은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사람처럼 차갑고, 표정에 변화가 없다.
김미경: 바보처럼 웃어봐요. 그럼 한번 생각해볼게요.
당황하는 그.
김미경: 웃기 싫음 말구요.
미경은 보란듯이 그를 지나쳐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서재준: 가만히 있어도 멋있는데 웃으면 나한테 반할거야.
헉~~`` 강한 주먹에 한대 맞은 듯한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김미경: 지금 그말 제정신으로 하는말 아니죠.
미경의 얼굴 바로 앞에서 그는 한번 씩 웃어주었다.
김미경: 진짜 바보 같아요.
그말 밖에 다른 말은 할수가 없었다. 정말 심장이 두근거리는 미소였으니까? 정신차리자.. 난 자존심 강한 김미경이다. 그건 예전일인데...
서재준: 미경씨의 자리 마련해두지.
김미경: 생각해본다고 했지 출근한다는 말은 아직 안했어요.
서재준: 나올거야.
그의 말이 맞다. 난 내일 한때 아버지회사였던 곳으로 출근할거다.
서재준: 우유배달하던 미경씨가 생각나. 그 모습이 날 닮았어.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그는 가버렸다. 우유배달하던... 닮았다구..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도둑놈처럼 옷입고 운동하는게 닮았다는 말인가 아니지 난 도둑놈처럼 배달한적이 없는데.... 내가 도둑놈처럼 생겼다는 말인가? 저런 된장이...
그와 가까워질수록 그에게 다가가면 갈수록 더욱 불안해지는 이유가 뭘까? 저런 싸가지 없고, 자기 밖에 모르는 잘난척 잘하는 그의 모습에서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가 싫다. 남 배려할 줄 모르는 그와 닮은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를 멀리하고 싶다.
도망가고 싶은데.. 저 사람한테서 멀리 도망가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자꾸 그와 보게 되는 지금의 현실이 날 불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