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하나 없는 어두운 방 안,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있는 며늘아이, 연희를 앞에 앉히고
정부인은 엄숙히 옷고름을 매만지고 있었다.
"어머니,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조용히 하거라."
"어머니."
"조용히 하래두!"
감추어지지 않는 공포로 인해 연희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근엄하게 며늘아이를
다그치는 정부인의 목소리 역시 두려움은 묻어 있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평온한 하루, 누구하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언제 피어오를지 모를
불씨를 모르는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소 사이가 안좋아 꼬투리 잡을 거리만 노리던 박대감이 이렇듯 아무런 예고나 통보도
없이 김대감을 역적으로 몰아 평온하기만 하던 김대감의 집안을 한순간에 풍비박산 내버릴 것
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님!"
그때 덕팔이가 제 신도 벗지 앉은채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는 쉬지않고 계속되었다.
"왔는가."
"마님, 어서 피할 채비를 하십시오. 금새 놈들이 예까지 몰려올겝니다."
가만히 덕팔이를 바라보던 정부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덕팔이 자네, 자네가 여식을 보낸게 언제였었지."
"예?"
"자네 여식이 살아있었다면 아마도 저 아이만 했겠지?"
정부인은 눈짓으로 며늘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새아씨를 슬그머니 훔쳐보는 덕팔이의 말속에
는 어느덧 한숨이 섞여 있었다.
"예.. 아마 그랬을 겝니다. 제 명이 그뿐이었던 아이, 잊고 산지 오래라 명확하진 않습니다."
"저 아이를 자네 여식처럼 생각해 줄수 있겠나."
"예? 마님, 그게.. 무슨 말씀..."
"내 예로 시집온 후로 자네에게 신세만 지네만... 어쩌면 자네에겐 잔인한 청이될지 모르겠으나
믿고 보낼 사람이 자네밖에 없구려. 저 아이를, 저 아이를 지켜주게. 저 아이와 저 아이 뱃속에
있는 우리 가문의 마지막 핏줄을 자네가 좀 지켜줄수 있겠나."
"마님. 당연히 제 할일입니다. 제 목숨을 다해서 마님과 새아씨를 지킬겝니다. 어서 채비를..."
"아니, 나는 가지 않아. 나는 여기에 남겠네."
생각치도 못했던 정부인의 말에 덕팔이와 연이는 정부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마님."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 저 혼자 피하라 하십니까. 서방님따라 검이라도 들고나가
싸우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운 몸입니다. 제가 남겠습니다. 제가 예 남아 시간을 끌어볼테니 어서
피하세요. 어머니"
제 몸하나 지탱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며늘아이의 가느다란 손을 뿌리치며 정부인은 언성을 높
였다.
"내 지금 네 목숨하나 살리겠다고 이러는것 같으냐. 승산없는 싸움이다. 모르겠느냐."
"어머니..."
"따라 나가 싸우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다 하였느냐. 그래서, 나가 싸워 저놈들을 다 내치면 그걸로
끝인 것 같으냐. 이미 우리 집안은 빠져나올수 없는 함정에 걸려든 것이야.
이 밤, 우리 집안의 앞날은 결정된 것이다. 예서 살아남는다 하여도 대감과 내 아들은 역적모의를
했다는 말도 안되는 함정에 빠져 어떻게든 죽게 될게야."
"어머니. 어떻게든... 어떻게든 길이 생길겝니다. 죄가 없음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않습니까."
"하늘과 땅은 말이 없는 법이다. 나에게는 네 목숨도 중하지만, 네 목숨보다 그 뱃속의 아이가 더
중해. 무슨일이 있어도 낳아라. 반드시 온전히 낳아서 귀히 키우거라. 훗날, 우리 가문을 다시 세우
지는 못한다 하여도 오늘의 이 억울함, 오늘 이 자리에서 흘린 피의 댓가를 필히 되돌려 주어야 하
느니라. 그 뱃속의 아이는 할일이 많은 아이다. 알겠느냐."
"어머니... 혼자는.. 저 혼자는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함께 가세요. 저 혼자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입
니다."
"덕팔이 자네. 잘 들었겠지. 부탁함세.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청이 너무 무거운게 아닌가 싶네
만 자네 말고는 없네. 부탁할 사람이 없어."
"마님. 지금 출발하시면 마님과 새아씨 모두 피할수 있을겝니다. 어찌 마님을 두고 떠날수 있겠습
니까요."
"내가 없으면 금새 날 찾을껄세. 그리되면 다 죽는게야. 내가 여기 남아있어야 하네. 어서 피하게."
"마님.."
"어머니.. 어머니..."
"어서 가래도! 이 밤이, 시간이 우리 편이 되어줄것 같으냐. 더이상 지체하지 말고 가거라."
"마님.. 부디.. 부디..."
"자. 얼마 안되겠지만 당분간 지내기에는 충분할게야."
정부인은 어느덧 눈시울이 촉촉히 젖은 덕팔이의 손에 비단으로 곱게 싼 얼마의 돈과 노리개를 쥐어
주었다.
덕팔이는 손등으로 대충 눈물을 훔치며 새아씨를 일으켜 세웠다.
"아가야... 조심하거라... 내 너를 이리 힘들 길로 보내야 하는 것이 참으로 미안하다.
곱디 고운 너를 내 며늘아이로 삼을수 있어서 하늘에 감사할 정도였는데... 더 많이 아껴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 꼭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부디 살아계셔야 합니다...어머니..."
"그래.. 그래.."
지금 떠나는 이 길이 정부인과 연희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다시 만나
기를 약속하며 하염없는 눈물을 쏟고 있었다. 이것이 마지막 인사는 아닐 것이라 여길수 없음이 한스
러워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며늘아이를 내 미는 정부인의 가슴은 무너지고 있었다.
콧끝으로 느껴지는 진한 풀내음과 뺨으로 전해지는 여린 찬바람은 조심스레 연희를 깨우고 있었
다. 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의 무게로 인해 연희는 쉽사리 눈을 뜰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눈꺼풀의 무게를 이겨내고 힘겹게 눈을 뜬 연희. 여전히 피곤한 연희의 눈 속으로 눈부
신 햇살이 스며들었고, 갑작스러운 햇빛으로 연희는 옅은 인상을 지었다.
"아씨. 새아씨. 정신이 좀 드십니까?"
다급하면서도 걱정스런 목소리로 연희를 부르고 있는 덕팔이는 제 윗도리를 벗어 연희에게 덮어
주고 있었다. 그런 덕팔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일조차 연희에게는 힘에 부쳤다.
한껏 부풀어 오른 배는 무거웠고, 팔과 다리는 어디에 긁혔는지 상처 투성이였다.
허기까지 진데다 몸의 이곳 저곳이 쑤시고 저려와 손끝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을 정도였다.
"예가... 어딘가."
"아씨..."
순간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통 기억이 나질 않
았다. 머릿속이 온통 뿌연 안개로 가득차 있는것 같았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 좋았으리라. 한동안 어리둥절 해있던 연희의 머릿속에 잔인하다 할
만큼 선명하게 지난 밤의 일들이 떠오른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떄였다.
'미안하구나...'
시어미의 마지막 말이 귓전에 맴돌자 연희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밤새 까칠해진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눈물의 감촉이 메어지는 가슴에 더해져 연희는 다시금 눈을 감을수 밖에 없었다.
"아씨. 괜찮으신겝니까?"
"어찌... 되었느냐."
"아씨..."
"어머님은... 아버님은... 서방님은... 어찌되신게냐."
"아무 생각하지 마시고 기운부터 차리셔야 합니다."
연희의 입에서 새나오는 것은 한섞인 한숨뿐이었고 감고 있는 눈 틈으로 쉴새없이 눈물이 쏟아
지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만나지 못할 것
이다.
혼인을 한다는 설레임보다 막연한 두려움이 컸던 연희였다. 하지만 두려움을 지녔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연희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셨던 시부모님이었다.
그리고 겁 많던 연희를 중히 아껴주고 조심스레 대해준, 죽어서도 사모할 지아비였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머리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저 혼자 살아서 무얼 하겠다고 예까지 피해온 것인가. 이제 없는데..
이제 곁에는 아무도 없는데 혼자 어찌 살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따라가자 생각이 들었다.
부질없는 목숨 끊어 그들 곁으로 어서 가자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마음을 다 잡은후 저고리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연희의 손에는 은장도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목숨하나 끊는게 뭐 그리 어렵겠는가. 가슴에 그들을 담은채 내 어찌 살아갈수 있단말이냐.
제 손으로 생명줄 끊어야 하는 것, 용서하십시오.'
목숨을 끊자 마음먹으니 한결 편안함을 느끼던 연희가 막 은장도를 꺼내들던 순간이었다.
"아..."
부풀어 오른 뱃속에서 작은 태동이 느껴졌다. 죽음을 생각하던 연희의 몸속에 있는 또 하나의
생명이 살고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 흑....... 흑....."
마지막까지 이 아이를 지키라던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죽으려 작정하고 있는 못난 애미를
말리려는듯한 아기의 태동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끝내 연희는 은장도를 꺼내들지 못하고 엎드려 오열할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이 하신 겝니까... 어머님이 제 명줄, 이 목숨 살리고자 하신 일인겝니까...
아니라면.. 어머님이 아니시라면... 아가야.. 너냐.. 너인게냐...
살고싶었느냐... 살아내고 싶었더냐... 살아봐야 너와 나 단 둘뿐일텐데...
외롭고 힘든 삶이 될진데... 그래도 살아야 겠더냐... 살고... 싶었던게냐....
아가야.... 내 아가야... 아가야...'
끝없이 오열하는 연희 옆에 앉아있는 덕팔이는 차마 멍으로 가득찬 가슴 때리지 못해 하늘을
향해 눈물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애이불비라는 글을 시작하는 세ol라고 합니다.
프롤로그 부분이라 다소 짧긴 한데.. 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쓰겠습니다. 이틀에 한편정도씩 올릴예정이예요.
그럼 애이불비1편으로 다시 올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