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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의 제3 예언(6. 지구인의 후예)

JudicarE |2003.05.23 19:15
조회 115 |추천 1

 

                                                                 6. 지구인의 후예

 



 
   혼의 하야부사는 물안개로 자욱한 소양강변도로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어느새 먼 동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5월이었지만 이른 새벽 바람엔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공기 중의 미세한 수분들이 얼굴에 부딪혀 왔다. 그런 느낌은 혼에게 상쾌함을 선사했다.
   하야부사의 속도를 서서히 줄여가며 혼은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곤 촉촉함이 묻어 있는 대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밤새도록 담배와 술에 찌들어 있던 몸이 순백(純白)으로 정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이 신선한 새벽 공기만 날마다 마셔줘도 불로장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로 새벽 서너 시가 돼야 잠자리에 드는 부엉이 생활에 익숙해진 그로써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 참에 밤낮을 한번 바꿔볼까 하는 갈등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다른 음악인들은 잘 몰라도 그에게 있어 음악적 영감이 제일 예민해지는 때는 주로 새벽이었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모두가 잠든 시간에 오로지 자신만이 깨어 있다는 약간은 비약적인 소외감이 인간의 생래적인 절대 고독감을 자극하여 감정의 극단에 이르도록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었다. 새벽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음악적 영감의 최고조기를 놓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음악은 그의 정신을 이상의 세계로 승화케 해주는 유일한 탈출구였으니까.
   너무 좋은 사람들을 알게 돼서 즐거웠고 그 덕분에 너무 과음을 하게 됐다. 그로 인해 몸은 더 없이 무거워져 있었지만 정신만은 하늘을 날아갈 듯 가벼웠다.  민상기와 김경식……. 두 사람 모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물론 오늘은 대부분 대화를 통해 얻어진, 어쩌면 다소간의 거짓과 위선이 묻어 있을런 지도 모르는 단편적인 모습들이었지만 혼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 허세는 이해타산적인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걸. 그것은 '우리'라는 덩어리의 결속력을 더욱더 확고히 하기 위한 순수한 의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고 있던 두 팔을 거둬들인 혼은 오른 쪽 손잡이를 바짝 감아쥐었다. 오로지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야부사는 있는 힘껏 아스팔트를 박차고 전면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지막한 야산과 소양강 사이로 구불구불한 커브 길이 펼쳐져 있었지만 스피드에 목말라 있던 녀석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연료의 분사 량을 증가시켜갔다. 물안개로 흥건한 도로 표면은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질펀했지만 녀석은 땅바닥에 닿을 듯 말 듯 동체를 기울여 가며 자유자재로 S자형 곡선로를 공략해갔다.
   쭉 뻗은 직선로에 들어서자 녀석은 잠시 템포를 죽였다가 마지막 남은 한줌 호흡까지 모두 불살라 버리겠다는 듯한 기세로 공룡의 울부짖음 같은 광포한 엔진음을 토해냈다. 자신이 얼마나 명마인지를 주인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녀석은 200km/h로 마주쳐 오는 바람 속에서도 더욱 더 박차를 가해갔다. 속도에 관한한 자신에게는 그 어떤 한계도 없음을 입증이나 하려는 것처럼.
   그 때였다. 녀석은 몇 번이고 요란스런 비명을 토해내다가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갓길에서 겨우 멈춰 섰다.
 
  「이봐요! 괜찮아요?」   
   중앙선 쪽으로 달려간 혼은 구겨진 종이 상자처럼 도로 한 가운데 널부러져 있는 사내를 흔들어 깨우며 소리쳤다. 금발 머리를 가진 잘 생긴 백인이었다. 시내에 미군부대 소속 병사일 거라고 혼은 추측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걸로 봐서는 외박을 나와 술에 취해 무단횡단을 하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멀리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맹렬한 기세로 곡선로를 빠져 나온 덤프 트럭 한 대가 라이트를 위 아래로 깜박여 댔다. 두 팔로 사내를 앉아 올린 혼은 재빨리 인도 위로 뛰어올랐다.
  「야이, 개새끼야! 죽으려고 환장했어?」
   덤프 트럭의 열려진 창문 사이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봐요! 이봐요!」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봐도 사내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쩌면 이미 숨이 끊어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혼은 허리를 숙여 그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다행스럽게도 희미하지만 아직 그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혼은 건너편 갓길에 세워둔 애마를 향해 달려갔다. 도로의 양쪽을 살핀 후 휠 스핀으로 방향을 전환한 뒤 서양인이 쓰러져 있는 보도 앞에 멎어 섰다. 그리곤 그를 부축해 연료통 쪽에 앉힌 후 뒤에서 그를 끌어안는 자세로 핸들을 거머쥐었다. 다급한 주인의 심정을 아는지 하야부사는 순식간에 출력을 끌어올리며 강변도로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병원으로 가면 안 됩니다!》
   그 때였다. 그의 귓전을 어루만지는, 금방이라도 사그러질 듯 작지만 시속 170km로 마주쳐 오는 바람 속에서도 분해되지 않고 또렷이 전달되어 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의 의사를 담은 것이었기에 혼은 당연히 그것을 음성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드디어 의식을 되찾은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바람에 부서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혼은 그의 귓가에다 목청껏 소리쳤다.
  「정신이 드셨군요!」
  《아닙니다. 제 현재의식은 지금 콤마상태입니다. 혼님과 대화를 나누는 건 저의 잠재의식이죠》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혼은 그 어느 누구보다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지금껏 그가 만들어 왔던 곡들의 가사에서도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단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말을 하다니. 그럼 초능력 분야에서 말하는 뇌파로 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전 지금 음성이 아닌 뇌파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겁니다》
   그건 단지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입 밖으로 흘러나온 적도 없는 혼의 생각에 대해 대답했다.
  「뇌파……? 테, 텔레파시를 말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텔레파시라고도 하죠. 그러니까 그렇게 소리를 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생각만 하셔도 전 혼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시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바로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비주의에 매료되어 그것과 관계된 일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수집해 온 그였다. 그런 그가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신비현상과 마주하게 되었는데도 전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냥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세요. 그러면 모든 게 저절로 이해될 겁니다》
   사내는 마치 해탈의 반열에 오른 고승처럼 말했다. 그런 궤변론적인 우문우답(愚問愚答)은 혼의 주특기였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해 밖에 있는 사안에 대해 어떤 우문우답을 펼칠 수가 있단 말인가.
   혼의 머릿속은 바이러스에 점령당해 잘못된 연산만 반복해 대는 컴퓨터 시스템처럼 엉망이 되어 버리 고 말았다. 그 어떤 생각도, 그 어떤 질문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혹은 과음으로 인한 환각인지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 전에, 행여 언젠가 발생할 지도 모르는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엄청나게 많은 질문을 준비해 두었던 그였지만 그의 머릿속은 포맷된 하드 드라이브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제 목숨이 몹시 위태로운 처집니다. 나중에 상황이 허락하면 모든 의문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우선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무언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한 의문들이 겨울잠 자는 한 무더기의 뱀 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엉켜 있었지만 구체화되어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위험이 어떤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로써는 그 모든 의혹들을 떨쳐 내는 게 현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야부사가 RPM을 끌어올리며 공간을 갈랐다.  
  「좋아요. 어디로 가는 게 좋겠어요?」  
  《소양호 아시죠?》
  「네!」
  《그곳으로 절 데려다 주십시오. 최대한 빨리요!》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이를 악물며 혼은 더욱 더 오른 손을 감아쥐었다. 계속되는 굴곡로 위를 하야부사는 그 때 그 때 상황에 맞게 한계속도로 공략해갔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어스름한 새벽 하늘이 대낮처럼 번뜩이며 천둥소리를 토해냈다. 
  「오 맙소사……」
   느닷없는 빛의 명멸에 놀라 하늘을 올려다본 혼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눈부신 빛 무리가 바로 자신의 등을 향해 쏟아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혼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틀었다. 빛줄기는 하야부사의 바로 오른편 아스팔트에 작렬했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빛줄기가 내려꽂힌 그곳엔 직경 3미터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새가슴이 된 하야부사를 진정시킨 후 혼은 다시 한번 빛 무리가 쏟아져 온 하늘을 올려봤다. 그의 후방 300여 미터 지점, 100여 미터 상공에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비행해 오고 있었다.
  「저게…… 뭐지?」
  《기드온 전사단입니다. 저를 이렇게 만드는 데 일조한 자들이죠》
  「기드온 전사단……?」   
  《죄송하지만 지금은 충분한 설명을 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아닐 게 틀림없지만 혹시나 해서 확인해본다는 듯 영 자신 없는 표정으로 혼이 물었다.
  「방금 그 불덩어리는…… 벼락이었죠?」
  《아닙니다. 기드온 전사가 출수한 에너지 파였습니다》
  「푸헐……」
   혼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건지 잠시 갈등에 휩싸였다. 하야부사를 한쪽에 멎어 세우고 나서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수작질이냐고 호통을 쳐야하는 건지, 아니면 일단 그의 요구대로 이곳을 벗어나는 척하면서 살살 꼬드겨 내막을 파헤쳐 봐야 하는 건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빌어먹을……. 좋소.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합시다! 설명은 그 후에!」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 혼은 엑셀러레이터 손잡이를  당겼다. 그 순간 등뒤 쪽 하늘에서 다시 한번 빛이 폭사했다. 혼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체를 약간 오른편으로 기울였다. 거대한 빛 무리는 다시 한번 아슬아슬한 거리 차로 혼을 비껴나가 맨 땅에 헤딩을 했다.
   혼은 고개를 돌려 두 명의 기드온 전사들과의 거리를 확인해봤다. 거리는 여전히 300여 미터쯤. 계기판의 속도는 시속 15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눈  앞에는 곧게 뻗은 직선로가 펼쳐져 있었다. 혼은 서서히 자신의 애마를 가속시켰다. 속도계의 바늘이 순식간에 200km/h 언저리로 치솟아 올랐다. 추적자들과의 거리는 두 배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에너지 파를 뿜어내기 위해 지면을 향하고 있던 두 팔을 거두어 앞쪽을 향해 곧게 펴 비행하기에 최적의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혼은 그들의 최고 스피드가 시속 200km에 조금 못 미친다는 잠정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하야부사가 꾸준히 시속 200km/h로만 달려 준다면 더 이상의 공격은 받지 않아도 된다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장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S자형 곡선로도 문제였지만 그런 걸 차치하고서라도 언젠가는 빨간색 신호등이 진행을 막아설 것이 아닌가. 설령 운 좋게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다고 하더라도 소양호에 이르기 위해서는 굴곡 심한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야했다. 그곳에서까지 평균시속 150km/h 이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얘기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자신의 애마가 하늘을 나는 유니콘으로 둔갑하지 않는 이상엔 성립될 수가 없는 불공평한 레이스였다. 하지만 어쩌랴. 그 부당함을 따지려 들었다가는 당장에 통돼지 바베큐 신세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아닌가. 혼은 선조들의 혜안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때 사용하라고 그 옛날에 이미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속담을 만들어 두었으니 말이다.
   선택은 단 두 가지였다. 지금 당장 죽느냐, 갈 데까지 가 보다가 죽느냐.
  《이틀 동안이나 저를 추적하느라 저들도 거의 체력의 한계에 달해 있는 상태입니다. 게다가 저의 생체에너지가 완전히 꺼져버린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경계도 품지 않고 있죠. 혼님이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주신다면 이 불합리한 레이스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혼의 입가에 자조 섞인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런 상태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그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부러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도 없는 형편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기둥을 뿜어대는 놈들을 상대로 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신호등이 달려 있는 조그만 사거리가 나왔다. 직진 신호등이 켜져 있었다. 혼은 오른 손잡이를 바짝 말아 쥐었다. 굉음을 토해내며 하야부사가 쏜살같이 질주해 나갔다.
   사거리 건너편은 왼쪽으로 굽은 도로였다. 군데군데 포장도 으깨진 험한 도로였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혼은 오히려 하야부사를 더욱 더 가속시켰다. 신호등은 황색 불로 바뀌어 있었다. 그 순간 교차하는 도로에 멈춰 있던 차량 한 대가 좌회전 신호도 떨어지기 전에 서서히 안쪽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지금 제동을 건다면 뒤이어 제 신호를 받고 좌회전을 시도하려는 차량들과 한데 뒤엉켜 버릴 게 틀림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대로 교차로를 통과하는 수밖에.
   신호는 이미 붉은 색으로 변환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야부사는 거침없이 뻗어나갔다. 신호가 바뀌기도 전부터 꾸물거리던 옵티마 운전자는 그제서야 총알처럼 질주해오는 하야부사를 발견하고는 급브레이크를 짓밟았다.
   '끼이익! 끽! 끼익!'
   옵티마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제동장치를 작동시켜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어느새 혼의 시야 가득 옵티마가 빨려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혼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았다.
   온몸이 모래가루처럼 부서져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각난 육신의 파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말았으리라. 그래서였을까. 혼은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아득함에 사로잡혀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고통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고통은커녕, 오히려 필로폰을 투여했을 때나 맛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쾌락적인 몽롱함이 그의 모든 세포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하긴. 그것이 쾌락인들 어떻고 고통인들 또 어떠랴. 이제 곧 허공을 붉게 물들인 살점들이 땅바닥에 흩뿌려지고 나면 그 때는 아무리 간절히 염원해보아도 고통 한 줌조차 맛볼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을.      
   혼은 자신의 모든 감각기능을 현재의 느낌을 탐미하는 데 쏟아 부었다. 지금까지의 삶에 후회 따윈 없었다. 그저 마음가는 데로 발길 닿는 데로, 그 때 그 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배팅하면서 살아왔다. 좀 이른 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죽는다해도 아쉬울 건 없었다.
  《이제 눈을 뜨셔도 됩니다!》
   부드러운 미풍과 같은 속삭임이 혼의 귓전을 어루만졌다. 드디어 이승에서의 모든 삶이 마감되고 저승으로의 인도자가 나타난 것일까? 혼은 감겨져 있던 두 눈을 서서히 열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을 낯설지만 신비로 가득 찬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세상은 전혀 낯설지도 않고 별로 신비감도 느껴지지 않는, 조금 전과 연장선상에 있는 세상이었다. 혼은 가드레일 쪽으로 향하고 있는 하야부사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계속 달려야 합니다. 혼님! 여기서 멈추면 모든 게 끝장입니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추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혼은 기어를 1단으로 내린 후 스로틀을 당겼다. 그와 동시에 기드온 전사가 내뿜은 불기둥이 방금 전 하야부사가 멈춰서 있던 지점에 폭사해 내렸다.
   지축이 뒤흔들리면서 하야부사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혼은 무게 중심을 움직이며 하야부사를 진정시켰다. 계기판은 어느새 시속 100km를 가리키고 있었다. 혼은 기어를 3단으로 조정하며 다시 스로틀을 열었다. 그의 바로 등뒤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속도계의 바늘은 순식간에 150km/h를 향해 치솟고 있었다. 혼은 재빨리 기어를 4단으로 상향시켰다. 몇 차례 에너지 파를 뿜어대느라 잠시 주춤했던 기드온 전사단 역시 다시 비행자세를 잡아갔다.   
  《혼님도 공간이동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죠? 방금 전 교차로에서, 충돌 직전에 텔레포테이션을 시도했습니다. 덕분에 제 생체 에너지는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았구요》
  「텔레포테이션?」
   말과 글로만 듣고 보아왔던 바로 그 텔레포이션이란 말인가? 지금 방금 그것이……? 직접 경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든 게 혹시 꿈은 아닐까?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이 느낌. 그래 이건 분명 꿈일 거야. 틀림없어. 확신해!
   혼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이것이 꿈이라면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단지 현실처럼 생생한 이 상황을 영화를 보듯 혹은 컴퓨터 게임을 하듯, 편한 마음으로 즐기기만 하면 그 뿐이었다. 한가지 궁금한 건 이번 꿈의 미션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혼은 핸들을 잡고 있던 왼손을 옆으로 쭉 뻗은 채 장풍을 쏘는 시늉을 해 보았다. 행여나 하늘을 가로지르는 저 두 사람처럼 무지막지한 불덩이를 쏘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손바닥에서는 불덩이는커녕 콧김만큼의 한 줌 바람도 뿜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꽁지에 불이 날 정도로 줄행랑을 치는 게 이 꿈의 미션이었다.

 

   춘천 샘밭을 지나자 이내 긴 오르막 길이 시작됐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버텨왔지만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오르막인데다가 구불구불한 곡선로라 시속 100km 이하로 속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가파른 배후령을 오를 즈음, 기드온 전사들의 에너지 파가 서너 차례 폭렬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혼은 하야부사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그들의 공격을 비껴냈다.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는데도 마치 등 뒤쪽 허공을 가르는 두 추적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건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하긴……. 꿈속에서야 무슨 일인들 불가능하랴?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이후에는 거의 꿈을 꾸지 않지만 철부지 꼬맹이였던 시절에 그가 가장 많이 꾼 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간혹 어떤 때는 슈퍼맨처럼 멋진 포즈로 날아 본 적도 있지만 열 번 중 아홉 번은 허공으로 점프를 해 자전거 페달을 돌리듯 부지런히 두 다리를 돌려야 간신히 조금씩 몸이 날아오르는, 어찌 보면 조금 불쌍해 보이는 그런 자세의 비행이 대부분이었다. 어찌됐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보다야 등뒤의 사물을 인지하는 게 좀 더 쉬운 일 아닐까?
  《사물을 꼭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를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톤으로 지글로가 말했다.
  《심안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마음의 눈이라는 뜻이죠. 인간의 눈은 사물의 피상적인 부분밖에 볼 수 없지만 심안은 피상의 본질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죠》
  「켁! 그럼 지금 내 심안이 열렸다는 건가요? 말도 안 돼……」
  《후후후. 물론 그런 얘긴 아닙니다. 저의 심안에 비춰지는 광경이 님의 망막에 투사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있는 거죠》
  「하하하……」
   잠시나마 자신에게도 초능력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는 들뜬 기대가 무참히 깨져버리는 순간이었다. 조금은 허탈했고 또 조금은 민망하기도 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혼은 오른손잡이를 힘껏 말아 쥐었다. 그러자 거대한 불덩이가 하야부사가 지나간 그곳을 굉음과 함께 덮쳤다.          
  「빌어먹을!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것 같군」
   하야부사의 속도가 현저히 떨어지자 어느새 두 명의 추적자는 바로 등뒤에까지 따라붙어 있었다. 그들이 팔이 대여섯 배만 더 길었어도 혼의 뒷덜미를 움켜쥘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뿌려지는 에너지 파라면 결코 피할 엄두조차 낼 수 없으리라. 이번엔 정말 운이 좋았다.
   눈앞엔 배후령의 정상이 올려다 보였다. 그곳만 넘어서면 내리막이 펼쳐져 있을 테니 다시 어느 정도 격차를 벌여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혼은 하야부사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배후령의 정상을 박차고 하야부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탁 트인 하늘이 두 팔 가득 혼을 끌어안으려 쏟아져 내렸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고 싶었다. 혼은 두 눈을 감고 상쾌한 새벽 공기를 폐 속 깊숙이 들여 마셨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망막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거대한 덤프트럭 한 대를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오 마이 갓!」  
   소양호 주변 어디선가 모래를 실어 나르는 덤프트럭인 것 같았다. 이른 새벽이니 거칠 것이 없다는 듯 덤프트럭은 무서운 속도로 배후령의 정상을 향해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덤프트럭은 정상을 박차고 날아오른 하야부사와 정면으로 질주해 오고 있었다. 녀석이 한 마리 매라면 고도를 높여 충돌을 면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그의 애마는 그저 매의 모양새만을 본 따 만들어진 기계덩어리일 뿐, 진짜 매는 아니었다. 중력의 법칙을 어길 수 없었던 하야부사는 덤프트럭의 전면을 향해 긴 포물선을 그리며 하강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 혼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 그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굳이 한가지가 있다면 아까처럼 지글로가 텔레포트를 구사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워낙에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상황이라 그 역시 미처 손을 쓸 겨를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렵다거나 떨리지는 않았다. 덤프와의 충돌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나게 될 테니 살갗이 터져 나가거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따위를 맛봐야 하는 일은 없으리라.
   "콰쾅! 콰콰쾅!"
   두 차례의 요란한 폭음이 연달아 귓전을 강타했다. 이제 잠에서 깨어  나면 모든 위험은 종료되어 있을 거라고 중얼거리며 혼은 서서히 눈을 열었다.
  「푸하하하……」
   주변을 돌아보던 혼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가 기대했던 오피스텔 내부와 침대 위의 자신이 아닌,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파란 하늘과 배후령의 중턱에 아무렇게나 멈춰서 있는 하야부사 위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미션이 완수되지 않아서인가? 왜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걸까? 그럼 조금 전 그 폭발음은 뭐지?'
   혼은 고개를 돌려 배후령 정상 쪽을 올려다보았다.
  「마, 맙소사……」
   배후령 정상은 거대한 화염에 뒤덮여 있었다. 그 화염 중심엔 폭발로 인해 걸레조각으로 변한 덤프트럭이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혼은 하야부사의 핸들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잠들어 있는 지글로를 무섭게 쏘아봤다.
  「당신인가? 당신이 그런 거냐구?」
   혼의 목소리에는 강렬한 분노가 실려 있었다.
  「그 알량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무 죄 없는 덤프트럭 기사를 죽인 게 바로 당신이냐구!」
  《아, 아닙니다. 분명히 저는 아닙니다. 조금 전의 공간이동으로 제 잠재의식 또한 완전한 탈진상태에 처해있습니다. 게다가 혼님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트럭이 저희를 덮쳐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그럼 지금껏 우릴 죽이려고 불덩이를 내뿜었던 저들이 우릴 살리려고 공간이동을 시켰단 말인가? 그리고 그 대신 자신들이 덤프트럭과 함게 폭사(爆死)했다는 얘기야?」
  《그건 결코 아닐 겁니다. 저들 또한 추격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고개 아래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트럭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쳐! 너도 아니고 저놈들도 아니라면, 내가 했단 말야?」
   혼은 지글로가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참사의 현장에 있었던 인물 중 공간이동을 구사할 능력을 갖춘 사람은 지글로와 두 명의 추적자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혼의 불신을 읽은 지글로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지금으로써는 그 어떤 대답도 혼의 분노를 삭혀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할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와 덤프 기사 중에 어느 한쪽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죽어야 사람은 우리야. 어찌됐든 넌 이 사태의 당사자니까. 그리고 빌어먹을 노릇이지만 나 역시 이 일에 이미 개입돼버렸고! 공간이동을 할 여력이 남아있었다면 저 덤프트럭 기사를 피신시켰어야지. 왜 딸린 식구들이 서넛은 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를 희생시킨 거냐구!」
  《죄송합니다만, 이제 곧 또 다른 추적자들이 나타날 겁니다. 이번에도 역시 자세한 설명은 제가 회복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개새끼! 저 사람은 형체도 없이 폭사했어. 너 때문에! 그런 데도 넌 아직도 니 한 목숨 챙길 궁리만 해? 주뎅이를 찢어 죽일 새끼!」    
  《제 목숨이 아까워서 이러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모든 건 이따 설명드리겠습니다. 이성을 찾아 주십시오!》
   어이가 없었다. 적어도 덤프 기사의 명복을 비는 한 마디와 그의 죽음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정도는 표출했어야 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만은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식의 발상을 혼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당장 아스팔트 바닥에 패대기를 친 후에 자근자근 짓밟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저항 상태인 그를 두들겨 주는 것만으로는 성이 찰 것 같지가 않았다.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기 위해 혼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곤 두 손으로 핸들을 거머쥐었다.
  「좋아. 네 놈이 회복되는 순간까지 네 목숨을 연장시켜 주겠어. 하지만 회복되고 나면, 넌 필히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하야부사의 뒷바퀴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연기가 아스팔트 위에 흐트러졌다. 클러치를 쥐고 있던 왼손을 조금 풀자 녀석은 화살처럼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됐습니다. 이쯤에서 세워주십시오》
   뱀처럼 굽이치는 산들 사이로 소양호가 드리워져 있었다. 오항리 뱃터를 지나 상류 쪽으로 1키로미터쯤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서 하야부사가 멈춰 섰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지글로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곤 천천히 소양호를 향해 미끄러져 갔다. 소양호의 중심쯤에 도달하자 그의 몸이 수직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물 속으로 잠겨버렸다.
   그건 정말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비록 두 명의 추적자들의 비행에 비하자면 거북이 걸음에 못지 않을 만큼 굼뜬 데다가 화려한 움직임 따위도 배제되어 있었지만 뭐랄까. 그 이상의 차원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아무튼 컴마 상태인 그의 비행에는 성지순례를 하는 수도사들과도 같은 엄숙함과 비장함이 베어 있었다. 
   하지만 분노가 극에 달해 있던 혼에게는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두 추적자와의 정면 충돌로 폭사하고만 덤프트럭 기사의 애꿎은 죽음에 대한 애도로 가득 차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그 몇 배의 크기의 분노로 탈바꿈해 갔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두 주먹이 불끈 쥐어져 있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우두둑'하고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은 생각했다. 어쩌면 오늘 이 곳에서, 두 번째 살인을 저지를 지도 모른다고. 물론 텔레포트를 구사하는 그를 상대로,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를 절반쯤은 죽여놓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강가 바위 턱에 걸터앉아 담배 한 개피를 다 피울 때까지 지글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검지 손가락 끝을 퉁겨 불똥만을 떨궈낸 담배꽁초를 바지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그가 사라진 강 한 가운데에서는 그 어떤 기미도 보이지 않았지만 혼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과 그, 둘 중에 한 사람의 운명이 다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등 뒤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일단 그의 몸 상태가 회복됐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별안간 목 디스크 중증환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돌아가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스텝을 밟아 뒤로 돌아서려고 시도해봤다. 하지만 두 다리는 마치 지구의 일부분이기라도 한 듯 땅바닥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두 팔을 움직여 보려고 했지만 그것 역시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온 몸은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일단 제 얘길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절 죽이시든, 살리시든, 맘대로 하십시오!」
   지글로는 미끄러지듯 혼의 몸을 통과해 그의 두어 족장 정도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서서히 혼을 향해 돌아섰다. 피투성이였던 얼굴과 만신창이였던 몸은 흙먼지 한 톨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해져 있었다.
  「갈갈이 찢겨진 걸레조각 같았던 니가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감쪽같이 회복될 수 있는 거지?」
   지글로는 자신의 등 뒤쪽 강 한 가운데를 가리켰다.
  「저 강바닥엔 제 소형 우주선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우주선 안에는, 파열되고 부러진 세포와 뼈를 재생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덤프 기사도 회생시킬 수 있다는 건가?」
   혼의 두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지글로의 얼굴은 당혹감으로 채색되어 가고있었다.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분해된 세포와 뼈를 재생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뇌와 심장이 모두 멈춰버린 경우라면 소생시킬 수 있는 확률은 제로라고 보셔야 합니다」
   잠시나마 기대로 부풀어 있던 혼의 미간이 심하게 구겨졌다.  
  「빌어먹을!」
   혼의 섬뜩한 두 눈이 지글로의 망막을 사정없이 급습해왔다.
  「네 놈의 모든 초능력을 동원해서 최대한 빨리 그 잘난 혓바닥을 놀려줬으면 좋겠어. 1초라도 먼저 네 놈의 머리통을 부숴 버릴 수 있도록 말야!」
   혼의 음성에는 지독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지글로는 시각이 아닌 심안으로 그의 살기가 무엇에 근거하는 지를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는 타인을 배려하는 무한한 인류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한번 호흡을 가다듬은 후 지글로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에 일말의 거짓도 없음을 로이 파멜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로이 파멜라가 누군데?」
  「저희 로이 성인의 시조이자 지구인의 마지막 후예이신 분입니다」
  「로이 성인의 시조이자 지구인의 마지막 후예?」
   혼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지구가 멸망이라도 해서 그 생존자들이 로이라는 이름을 가진 별로 이주해 간다는 말인가? 자넨 그들의 먼 후손이고?」
  「이해가 빠르시군요」
   지글로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너무나 담담했다. 그의 두 눈엔 그 어떤 사심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과 대답. 그것은 혼에게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게 이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유능한 사기꾼이 되려면 반드시 깨우쳐야 하는 필수적인 처세법 중의 하나 아닌가. 그 어떤 궤변을 늘어놓더라도 듣는 이로 하여금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섭리인 듯 여겨지도록,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하는 것.
   물론 지금까지 체험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다른 차원에 머물고 있는 특별한 부류의 인간이라는 건 알 수 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인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혼의 몫으로 남아 있었다. 그것을 판별해 내기 위해서는 절묘한 타이밍에 적절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들을 조합해서 모순은 없는지, 만약 모순이 있다면 그가 속이려고 하는 부분은 어떤 대목이고 그것으로 그가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간파해 내야 했다.
   혼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언제지? 지구가 멸망하는 때 말이야」
  「5개월쯤 후인 10월 말경입니다」
   혼의 두 눈이 빛을 발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각지에서 심심치않게 크고 작은 자연재해로 인한 재산과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는 있지만 지구 멸망을 우려해야 할 정도로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또한 동독과 소련이 붕괴된 후 강대국들의 냉전시대가 종식된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 세계 3차 대전으로 인한 인류의 멸망은 전혀 염려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수 십 년쯤 후라면 행여 모를까 5개월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전혀 가능성 없는 소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 본다면 전혀 가능성 없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혼은 그제서야 그가 독심술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처음 그를 발견했을 때 혼,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초능력에 관심이 많았던 과거의 사실까지 거론했었다. 혼은 입맛을 다셨다. 이건 자신의 모든 패를 펼쳐 보여주고 배팅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말씀드린 대로 모든 건 사실입니다. 9월이 시작될 즈음부터 지구엔 온갖 재앙이 몰아 닥치게 됩니다. 그 재앙은 환태평양 지진대의 왕성한 활동을 신호탄으로 하여 폭우로 인한 대홍수와 태풍, 혜성 충돌 등으로 전개됩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연일 엄청난 인명피해가 속출하지만 각 국 정부는 사망자 수가 얼만지 조차 집계해 내지 못할 정도로 인류는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자네의 선조들은 어떻게 살아 남았지?」
  「혹시 H M L H라는 조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H M L H'는 1년여 전에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인류애주의자들의 집단이었다. 'Human must love only human'의 약자를 자신들의 단체명으로 사용했는데 인간은 오로지 동류인 인간만을 사랑해야한다는 게 그들의 기초 논리였다. 그렇지 못하고 인류가 인류를 외면한 채 오로지 신만을 신뢰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역설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무신론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신의 존재는 긍정했지만 신의 선악(善惡)에 있어서 회의적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전 세계 각 국에 지부를 설치한 후 활발하고도 조직적인 선도활동을 펼쳤다. 그들의 주장은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이었기에 태동한 지 불과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인구의 5%에 육박하는 회원을 모집할 수 있었다. 일단 가입한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순회집회를 열어 자신들의 뜻을 전파하는데 앞장섰고 날이 갈수록 회원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혼 역시 공지천에서 열린 그들의 집회를 먼발치에서 지켜본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의 주장은 자신이 음악을 통해서 설파하고자 했던 것과 완전히 일치했고 그래서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혼의 음악이 그들의 주장을 차용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테니까.
  「한 1년쯤 전에 출현한, 반신주의자 집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1년쯤 전에 바깥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일 뿐 그들의 역사는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처음으로 조직을 형성한 건 '노스트라다무스'지만 말입니다」       
   혼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14살 때 일본인이 번역·해석한 노스트라다무스의 '모든 세기'를 읽었다. 
  「노스트라다무스라고? 지구의 멸망을 예언했던 그 노스트라다무스 말인가?」
  「그렇습니다. 시공을 넘나드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지구가 멸망하게 되는 5개월 후를 간접체험하면서 치를 떨게 됩니다. 그리고는 독실했던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반신주의 단체를 결성하게 되죠」
   '모든 세기'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던 그 날부터 혼은 며칠 동안을 절망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물론 지구는 21세기를 몇 년 째 건재하게 버텨오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빗나갔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1999년 지구 멸망을 단정지은 것은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니라 그 빌어먹을 일본인이었다. 그는 그 책으로 일확천금을 벌어들이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멸망이 당시 독자들의 생존 중에 일어나야 했다. 그래야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1999년은 그에겐 절호의 시점이었다. 역사가 입증해 주듯 세기말엔 각종 종말론이 들끓게 마련인데다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까지 가미시키면 책은 날개가 돛힌 듯 전 세계로 팔려 나갈 거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지구의 멸망을 간접체험한 것과 반신주의 단체의 조직이 무슨 관계가 있지?」
  「그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온갖 재앙에 죽어 가는 후손들의 절규를……. 그리고 그 재앙 속에서도 살아 남아 있던 얼마 되지 않는 생존자들을 하나 하나 찾아다니며 무참히 도륙하고야 말던 절대자들의 광기에 찬 조소를!」
   혼은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아득함에 사로잡혔다. 한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사실이었다. 그는 어느새 지글로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있었다. 
  「저, 절대자들? 시, 신이라는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는 얘긴가?」
  「원래는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둘로 분열시켰죠. 앙골모아와 가이아가 바로 그들입니다」 
  「아, 앙골모아……」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인류 최후의 날을 묘사한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는 '앙골모아'라는 존재 가 하늘에서 내려와 인류를 파멸로 이끌어 간다고 묘사되어 있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예언이었기에 지금까지도 그 이름은 혼의 뇌리에 생생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 그럼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이 정답이었다는 얘긴가? 인류는 신의 피조물이었다는 거야?」
  「창조된 다음 진화를 거쳤으니까 둘 다 맞는 정답이었다고 봐야겠죠」
  「그, 그런데 왜 자신이 애써 빚은 인류를 도륙했다는 거지? 도, 도대체 무, 무슨 이유로……?」    
  「후후. 이유 같은 건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겠죠」
  「그, 그저 그렇게 하고 싶…… 어…… 서……?」
  「처음 인간을 빚을 때 너희들의 운명은 여기까지다 하고 빚은 건지, 아니면 인간들의 끝없는 욕심에 회의를 느껴서인지, 그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저희들로써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어떤 이유에서건 인류는 그들에 의해 무참히 멸망되었고 지구인의 먼 후세인 저희들은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명제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혼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사고기능마저도 마비될 것처럼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먼지는 모르지만 날 마비시킨 그것 좀 풀어줄 수 있겠나? 좀 앉고 싶어서 말이야……」
  「그렇죠」
   지글로의 대답과 함께 혼은 그 자리에 '털퍼덕' 주저 안고 말았다. 그런 혼을 지글로는 안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배 필래?」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갑을 꺼내들며 혼이 말했다.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한숨처럼 긴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곤 허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위에 있는 것들이…… 지구를 멸망시켰다 이거지? 감히 나한테 허락도 얻지 않고 맘대로 날 학살했다 이거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병든 닭처럼 고개를 떨궜다. 도대체 그의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다른 건 몰라도 5개월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것만은,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절대자들에 의한 파멸이라는 것만은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혼은 생각했다. 적어도 인류에 의한 멸망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면 막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혼은 담배를 쥐고 있던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곤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혼의 시선 끝에 지글로의 두 다리가 걸려있었다. 혼은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렇다. 아직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구인들의 먼 후예가 자기 앞에 서 있다는 건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았다는 얘기 아닌가? 혼의 목소리엔 다시금 생기가 감돌았다.
  「자네 선조들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지?」   
  「미래를 예지할 수 있었던 노스트라다무스님은 지하 조직을 결성해 많은 사람들을 포섭했습니다. 그 중에는 당대에 막강한 파워를 행사했던 권력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죠. 조직원들의 첫 번째 임무는 전 세계에 산재해 있을 반신주의자들을 규합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과학자들과 재력가들을 주요대상으로 포섭작전을 전개해 나갔죠. 절대자들의 학살에서 살아 남으려면 그들이 지구에 현신하기 전에 지구를 떠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러려면 우주선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는 자본과 과학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으니까요. 그들의 판단은 적절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에 데자뷰라는 이름을 가진 우주선에 과학자들과 그들의 씨를 잉태할 여자들을 실어 보내는데 성공했죠. 그들은 십 수년간을 우주의 미아로 떠돌다가 우여곡절 끝에 로이라는 이름을 가진 혹성에 정착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이 지났죠」
  「후후. 내가 지금 2000년 후의 후손과 마주하고 있다는 건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하지만 믿고 계십니다」
  「크크. 정떨어지는 놈」
   갑자기 오른 쪽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최근 몇 개월 전부터 그를 괴롭혀왔던 편두통이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오른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으로 두통이 오는 부분을 '꾹꾹' 눌려가며 잇사이로 말했다.
  「자, 자네들이 아득한 과거의 지구로 돌아온 이유는 뭐, 뭐지?」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꾸고 싶은데?」
  「언제 두 절대자가 저희들의 존재를 눈치챌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벌써 인지하고 있을 지도 모르죠. 단지 움직이기가 귀찮아서 지켜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그들에 대항하기 위한 힘을 기르는데 전력투구했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물질도 1옥토미터 이하로 분해되면 다시는 재결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1옥토미터?」
  「10의 마이너스 24승 미터를 일컫는 말이죠. 세균이나 곰팡이의 크기는 약 1에서 2마이크로미터 정돕니다. 먼지는 0.0001마이크로미터만한 크기의 것도 있죠. 1마이크로미터는 0.001밀리미터를 의미합니다. 옥토미터는……」
  「오케이! 무진장 작은 크기라는 얘기잖아. 접수됐으니까 그 다음으로 넘어가」
   숫자에 취약한 혼이었다. 그가 오른 손을 가로 저으며 지글로의 미터법 강의를 중단시켰다.
  「저희는 절대자들을 1옥토미터 이하로 분해시키면 그들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됐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1옥토미터 이하로 분해시킬 수 있는 입자분해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거기서 말을 멈춘 지글로는 이런 민감한 부분까지 설명을 해야하는지 잠시 갈등을 했다. 그것은 로이 성에서도 극비중의 극비로 다루어지는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른 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문제는 입자분해파의 속도였습니다」
  「입자분해파의 속도……?」    
  「그렇습니다. 텔레포테이션, 즉 공간을 이동하려면 그 구성 입자들은 약 초당 500km 이상의 속도로 분해되어야 합니다. 시간이동의 경우에는 빛의 두 배정도인 초당 500,000km 이상의 속도로 분해되어야 하구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이동하려면 초당 250,000,000km 이상으로 분해되어야 가능합니다. 저희들의 과학력은 시공을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 있죠. 하지만 정확히 얼만큼인지는 측정할 수는 없지만 절대자들은 적어도 저희보다 배 이상은 더 빠른 분해속도를 구사할 수 있는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입자분해파로 그들을 소멸시키려면 적어도 파장의 속도가 그들의 분해속도를 능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수학에는 영 조예가 없는 혼이었지만 지글로가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는 접수가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지글로와 시선을 맞췄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 지구에 왔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과학자들을 미래로 데려가서 너희들의 과학력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거야? 그건 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아무리 그들이 뛰어난 천재성을 갖고 있다고 해도 너희들이 가진 지식에 비하면 조족지혈일 거 아냐?」
  「그게 아닙니다. 저희들의 지식의 일부를 과거의 천재 과학자들에게 전수하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원래의 역사로는 100년에 걸쳐 이룩할 일들을 수 십년으로 단축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설명을 듣기 전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의문들이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봄눈 녹듯 사라져갔다. 뒤죽박죽이었던 머리 속이 조금씩 정돈되어 가고 있었지만 편두통은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그 정도가 심한 이유는 뭘까?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들이 무더기로 입력되고 있는 탓에 뇌기능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일까?
  「아, 아까 그 놈들은 뭐지? 거, 무슨 전사단이라 그런 놈들 말야」
  「기드온 전사단이라고 교황의 통제권 위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비밀 조직이죠. 아까 보셨다시피 엄청난 E·S·P를 보유한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지금처럼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은 H·M·L·H가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 직후부터구요. 그들은 기독교의 부흥을 저해하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응징을 수행합니다. 현재로써는 H·M·L·H의 수뇌부나 맹렬 회원들을 암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죠. 물론 철저히 극비리에 움직이고 있죠」
  「근데 그 정도로 놈들이 세? 니들조차 꼼짝 못하고 당할 정도로?」
  「후후. 혼 님에게 창피한 모습을 보여드렸지만 그래도 전 로이 성 최고의 전사 중 하납니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기사단 전체가 달려들어도 제 솜털 하나 건드릴 수 없죠. 그들은 단지 사냥개에 불과할 뿐입니다. 절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따로 있죠」
   혼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 된장. 머가 그렇게 복잡한 겨. 갸들은 또 누군데?」
  「사탄 성인들입니다. 1,400여 년 전, 사탄 성으로 추방을 당하기 전까지는 그들도 로이 성 사람들이었죠」
  「추방?」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로이 성엔 철저히 종교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1,400년쯤 전, 그러니까 지구인들이 로이 성에 정착하고 난 후 600여 년이 지날 즈음, 몇몇 이탈리아계에 의해 종교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들은 안전지대 밖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며칠 가지 않아 맹수들과 독충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죠. 그 후 300여 년 뒤에, 이번에는 일본계에 의해 신사가 세워집니다. 정부는 그들을 잡아 들여 400광년 떨어진 죽음의 별, 사탄 성에 유배시키죠. 혹성의 조건 상 도저히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별인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 일부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생존해갑니다. 생존자들은 자신들을 핍박한 로이 성인들에게 보복을 꿈꾸며 종족을 번식해 나가죠. 과학력과 초심리학 분야에 놀라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요」
  「너희들과 비교한다면 어느 정도나 되지?」
  「과학력은 500여 년 정도, 그리고 초심리학 분야는 100여 년 정도 저희보다 뒤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실제적인 E·S·P파워는 사탄성인들이 더 막강합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는 말인가? 왜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 거지?」
 「사탄 성은 유독 게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을 유배시킬 당시에만 해도 그 유독 게스로 인해 일주일  내에 모두 사망할 것으로 분석했습니다만 끈질긴 생존력으로 살아남은 몇몇 인간들은 오히려 유전자 변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의 평균 E·S·P지수가 몇 배로 증대되는 기현상이 초래되었죠」
  「흐흐. 차라리 안전지대 밖 맹수들의 배를 불려주느니보다 못하게 된 셈이구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지글로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고 잠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좋아. 끝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지. 아까 공간이동을 시전한 게 네 놈이 아니라는 말…… 사실이야?」
  「그렇습니다. 솔직히 그 전, 사거리에서의 공간이동도 성공을 할지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구사한 것이었습니다. 그 고개에서는 공간이동은커녕 고개 너머에서 덤프트럭이 질주해 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할 수 없을 정도로 제 ESP는 완전고갈 상태였습니다」
  「마, 만약 네 놈이 한 짓이라면 기필코 네 녀석을 죽여버리려고 했어. 무, 물론 말도 안 되는 계획이겠지만……」
  「혼님의 그런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면 혹시 자네 편 누군가가 그곳 어디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가 지원을 해 준 게 아닐까? 내가 볼 땐 그게 제일 유력한 것 같아」
  「그건 분명히 아닙니다」
  「그걸 니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조금 전, 우주선 안에서 회복을 마쳤을 때 잠시 명상을 통해 그 때의 상황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푸헐. 그런 것도 가능한가?」
  「그 결과…… 저나 기드온 전사들에게서는 그 어떤 염파도 방출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 봐. 니 동료가 그랬을 거라고 했잖아」
  「그것 역시 아닙니다. 현장엔 두 명의 기드온 전사와 저와 혼님, 그리고 트럭 운전수밖에 없었습니다」
  「비, 빌어먹을……. 그, 그럼 갑자기 상승기류라도 형성돼서 덤프 위로 하야부사를 날려 올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분명히 ESP가 검출되었습니다. 바로…… 혼님에게서요!」
   혼은 휘둥그런 눈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뭐라고……? 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쉽게 말씀드려서 혼님이 공간이동을 시전하여 저를 살리신 겁니다. 과거 인지를 통해서 제가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험하게 지글로의 멱살을 움켜잡으며 혼은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돼!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렇는 거냐구?」
  「무슨 바람이 있어서 이렇는 건 결코 아닙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오직 진실만을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비, 빌어먹을 사기꾼 놈! 왜 하필 날 선택한 거야? 나한테서 얻어낼 뭐 있다고? 왜! 왜 하필 나냐구!」
   혼은 발작이라도 하듯 한참을 그렇게 절규했다. 그렇다가 오른 쪽 관자놀이에 손을 갖다 대며 나무토막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글로는 그런 혼을 부축하며 측은한 시선으로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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