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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과도둑 |2003.05.25 12:45
조회 615 |추천 0

비가 내리는 아침, 소리 없이 창을 타고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저 멀리 뿌연 하늘을 보면서 가슴 안엔 왠지 모를 서글픔이 자리한다.
‘지금까지도 잘 해 왔는데 왜 주저하고 있느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는데 왜 바보처럼 구느냐?’
 긴 한숨과 여린 탄식이 입언저리에서 자꾸 흘러나오는 지금, 내가 가야할 길이 도대체 어디인가 싶어 문을 두드린다.

 

  그녀를 만난 건 3년 전, 임시직으로 취직한 그녀가 처음 직장에 들어와 상사와 인사를 나누었을 때 모습이 역력하다. 위아래 까만 옷을 입고 들어선 그녀는 아직은 앳띤(그 당시 나이 24살) 모습이었다. 안경을 올려 쓴 모습이 조금은 고집스레 보였지만 동그란 얼굴은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자리했다.
 그녀가 눈에 들어온 건 3개월 후, 직장 근처에서 자취를 하던 그녀에게 ‘영화 구경’을 제의했다. 퇴근 시간이 5시,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7시에 영화 구경을 갔다. ‘JSA 공동경비구역’  영화구경은 그야말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007 영화 같았다. 이때부터 메일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외지에서 혼자 생활하게 된 그녀와 늙은 노총각(38살)인 나는 그때부터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매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며 데이트를 즐겼다. 나는 사랑에 빠졌다. 겨울이었기에 해는 짧아 만남의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나는 늦은 밤에 그녀를 바래다주면서 자연스레 그녀의 집을 들락거렸고, 처음으로 그녀와의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 후, 나와 그녀는 더욱 가까워졌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내용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의 내 마음이 흔들렸다. 때늦은 사랑의 불씨로 겨울은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그때 내겐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오기 시작했다. 누나가 재혼해서 만난 사람이 사업을 하면서 누나는 내게 보증을 서게 했고,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갚아야 할 보증빛은 7,000만원이 넘었다. 급기야 직장에 ‘봉급 압류’가 들어왔다. 상사에게서 받아본 채무용지는 4,000만원 이 빛을 일단 갚아야 했다. 누나는 빛 때문에 다른 곳에서 생활하면서도 어렵사리 1,500만원의 돈을 마련해 줬다. 동생은 1,000만원을 보내왔다. 나는 나머지 돈을 연금공단에서 대출을 받았고 결국 압류를 해제했다. 그래도 고스란히 2,000만원 이상의 빛은 남았다.
 이러한 사실을 숨길 수 없었던 나는, 그녀에게 사실을 말했다. 그녀는 나를 이해해 주었으며 내 아픔도 받아들였다.
 

 또 한 가지, 그녀가 우리 직장에 다니기로 계약한 것은 2년 6개월이었다. 물론 서면 계약을 한 것은 아니지만 묵시적인 약속이었다. 그런데 이 약속을 사장이 재임용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불러 파기를 했다. 재임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부장과 과장이 만류함에도 사장은 근무하는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일방적으로 해고를 하였다.
 ‘그녀를 떠나보내야 할까?’
 직장인으로 힘 하나 없는 곳에서 내게 던져진 물음에 나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퇴근해서 돌아온 아파트에 돌아와 많은 생각을 하였다. 답답해 베란다에 나가보니 그녀의 집이 보이고 또 사장의 집이 보였다. 내 생각은 이러했다. ‘그녀를 여기서 보낼 수 없다. 보내게 되면 나는 이제 영영 그녀를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사장의 집으로 갔다. 어렵게 말을 꺼냈고 사장은 내 심정을 이해해주고 그녀를 다시 임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해주는 걸로 끝났다면 내 원망스러움은 가셨을 테지만 결국 사장은 또 뒷통수를 쳤다. ‘조건’을 내었다. 나에게 부탁을 했다. 그녀를 임용할 테니까 자기가 제대로 못한 일을 해달라는 거였다. 그 당시의 나는 속된 말로 ‘이판사판’이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수락하고 말았다. 나로선 최선이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일마저 일어났다. 친한 몇몇 동료와 그녀, 이렇게 넷이서 낮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우리집에 와서 커피 한 잔까지 마시고 끝났으면 좋으련만 또 다른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때 내가 갔었으면 좋으련만 사장이 참석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지 않기로 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료와 함께 그곳에 갔다. 아뿔샤! 이미 술을 많이 먹은 그녀는 거기가 연신 받아먹은 술로 정신을 잃고 여자 동료에게 부축을 당해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집에서 회식이 끝나기를 바랬고 끝난 후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이 당시를 나는 많이 후회한다. 내 소심함이 사태를 그 지경까지 만들었으니.) 그녀는 방에 들어간 후, 사람들이 돌아가고 난 뒤 그 상황에서도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부리나케 그녀의 집으로 갔다. 이런, 그녀는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 곁에 누웠다. 그리고 어느 사이 시간이 흘렀나. 그녀가 나보고 큰일났다는 얘기를 했다. 집에서 전화가 왔었다는 얘기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그녀가 아픈 줄 알고 오겠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집은 여기서 차를 타면 1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곳에 있었다.
 얼른 시간을 보았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온지 30여분, 얼마 있지 않아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서 서성이며 그녀의 부모가 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눈에 띄면 안 되니까. 시간을 보며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의 부모는 오지 않았다. 1시간 반도 넘고 해서 안 오시려나 싶어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채 10분도 안 되어 그녀의 부모가 들이닥쳤다.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큰일이다. 나는 숨을 곳을 찾았다. 침대 바닥도 마당치 않았다. 결국 나는 3층 창문밖으로 나아가 배기통에 두 다리를 대고 창문틀을 잡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숨소리도 멎고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긴장하며 있었다. 그러나 이미 눈치를 채신 그녀의 아버지는 문을 열고 나를 빠니 쳐다보고 계셨다.
 “들어오게.”     
한참을 말이 없던 그녀의 부모님은 내게 몇 마디만을 하셨다.
“몇 살인가.”
“38입니다.” 내 나이를 속여가며 말했다.
“가게.”
나는 일어나서 집을 빠져 나왔다. 잠옷 바람으로 있던 그녀도 벽에 몸을 기댄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밤늦게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라고... 나는 오자마자 그녀를 부둥켜안았다. 아픔이다. 이 나이 들도록 나는 어찌 이렇게까지 밖에 살지 못했는가? 새벽이 오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더한 아픔을 가졌으리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신 후, 밤새 앉아서 벽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침식을 잊고 누워서 보내고... 

  이렇게 나는 겨울 내내 사랑을 만났지만 깊은 시련을 겪었다.
  
 그녀의 자취집은 직장과 가깝기도 했지만 워낙 낡고 허름해서 쥐도 돌아다니는 방이었다. 봄이 찾아오면서 그녀는 나와 상의해서 집을 옮겼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거리가 가까운 오피스텔로 옮겼다. 그래서 출퇴근을 같이 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녀와 반동거 생활을 하였다. 퇴근하면서 그녀를 내려주고 아파트에 와서 다른 동료를 내려주고 집에 올라갔다가 시간(저녁 식사, 또는 어둡거나 하면)이 되면 아파트를 빠져 나와 그녀의 집으로 갔다. 함께 잠을 자고 아침을 먹고 일어나 다시 아파트로 차를 몰아 동료를 태우고 그녀의 집앞으로 가서 태우고 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나는 그녀와 살면서 동료들과 소원해지기도 했다. 전 같으면 “술 먹으로 나와.” 하면 별 일 없어 나갔지만 그녀와 살면서는 사정이 달랐다. 나는 나이도 있고 그녀가 내 곁에 있는 시간도 많으면 2년, 짧으면 1년 밖에 없기에 내겐 사랑할 시간이 모자랐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전에 갖고 있던 내 생활을 버렸다. 공식적인 회식 자리 아니면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고 대신 그녀와 함께 인근 지역 대형 마트나  백화점, 영화관 등을 다니면서 사랑을 만들어갔다.
 여름에는 3박 4일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렌트카를 빌려 제주도를 돌아다니면서  ‘참, 내 삶에도 이런 아름다움이 있구나?’ 싶었다. 영화박물관에서는 전통복장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밤에는 신혼부부인 양 달콤한 밀회를 나누기도 했다.
 
 이렇게 여름이 가면서 내겐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자꾸만 그녀의 입에서 내년에는 이곳에 있지 않겠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 그녀가 처음으로 임신을 했다. 나는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그러나 임신테스트 결과 임신임이 확연히 나타났다. 그녀는 아이를 지우기로 했다. 나는 말을 못했다.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임신이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내심으론 ‘임신해서 애 하나 낳으면 내 곁을 떠나지 않겠지?’ 하는 생각에 ‘임신해라, 임신해라’ 하면서 성관계를 갖기도 했는데, 막상 임신하고 나니 판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나는 계속 그랬지. “내가 키울 게 낳아 줘.” 그녀의 입장은 확고했지만 그녀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 덜컥 아이를 낳아버리면 그녀로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발목을 잡혀버리고 마는 것이리라. 결국 나는 그녀의 입장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
 그녀의 보호자로서 내 이름이 올라갔다. 수술실에서 나온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슴속에서 계속되는 눈물을 보았다. 이것도 내 부족함에서 연유된 것이리라.
 집에 돌아와 그녀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을 땐 눈물이 났다. 아주 담담히 수술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아픔을 보았다. 더욱 아리고 속내를 찌르는 슬픔이 가슴 안까지 들어왔다.

 이미 그녀를 만난 지 두 번째 겨울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한동안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다. 그녀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정식직원’이 되기 위한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도서관으로 태워다주고 또 태워왔다. 집에 와서도 늦게까지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기다렸다. 겨울은 이렇게 조용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내 기원과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험에서 떨어졌다.
 
 연말 연시 모두가 들떠 있음에도 내 마음은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이제 그녀가 내 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아쉬운 시간에도 그녀는 내 곁에 없었다. 사촌 언니네 집으로 놀러간 지 며칠이 되었다. 간간이 오는 전화와 문자가 허전한 가슴을 달래주는 전부였다. 그곳에서 언니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혼자 있는 시간’이었지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나 또한 계속해서 술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술을 먹을수록 아픔이 폐부까지 스며온다.
 새해가 들어 그녀가 왔다. 반가움이 일었지만 서운함이 앞섰다. 그녀와 함께 포장마차로 갔다. 조개구이에 소주를 마셨다. 취기가 화~악 하고 올라왔다.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 안에선 풋풋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술잔이 비었다. 계산을 하고 나왔다. 전화 받는 그녀의 표정이 싱그럽다. 무엇이 좋은지.
 비틀거리며 집으로 갔다. 집앞에 다다렀을 때 나는 그녀에게 한 마디 한다.
 “내 곁에 더 있어 줘.”
 그녀는 그냥 웃음으로 대꾸한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차가운 콘크리이트 바닥에 주저앉으며....

 그리고 얼마 후, 두 번째 임신을 했다. 첫 번 째 임신이 있고 나서 조심했지만 또다시 임신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임신 3개월. 이번에도 나는 그녀의 중절 수술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2월 말, 아직은 설부른 햇살이 비춘다. 그녀가 이사를 갔다. 일단은 집에 가서 있고 조금 지난 후에 진로를 결정한다고 한다. 우선은 그간 벌어놓은 돈으로 공부를 한단다. 공부를 해서 떳떳한 직장을 얻겠단다. 그렇게 그녀는 갔고 나는 홀로 아파트에 남았다. 꿈이었나 싶다. 모든 게 휑하다. 집에 들어와도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그녀는 곧 결정을 했다. 대학가 친구들이 많은 곳에 가서 계속해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혼자 자취방을 얻은 친구와 함께 방을 공동으로 쓰기로 했고 짐을 옮겼다.
 이때부터 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차로 한시간여 걸리는 곳이긴 하지만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4월, 그녀와 나는 중대 고비를 맞았다. 그녀가 친척 언니네 집으로 놀러가면서 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또 그녀에게도 화가 났다. 나는 지난 일들이 생각나면서(겨울 이후, 그녀는 가끔 언니 친구(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음. 또 그녀는 여러 해 전에 채팅으로 만난 동갑내기를 좋아해 가끔 메일을 쓰고 만나러 가기도 함.) 이제는 내가 그녀를 자유롭게 해줘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을 했다.
 나는 몇 번인가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서 술만 마셨다. 눈물이 났다. ‘언젠가는 나를 떠나가겠지. 그런데 젠장, 이 아픔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녀는 나를 만나러 왔고 나는 피죽은 웃음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그렇게 소원해지면서, 그녀는 나와의 이별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난 후, 그녀는 나와의 이별을 만났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별의 아픔을 달랬다. 나는 한밤을 뜬눈으로 지샜다.
 이렇게 상처를 입고 보낸 다음 날, 나는 그녀를 찾았다.
 “나는 네 곁에 있겠다. 그리고 네가 떠나고 싶어할 때 나 떠나겠다.”

 그리고 6월, 월드컵이 시작됐고 그녀와 나는 월드컵 축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대전에서 열린 ‘이탈리아와의 8강전’, 서울 상암동에서 열린 ‘독일과의 4강전’에도 우리는 함께 하며 응원을 하러 다녔다. 그리고 성큼 여름이 다가섰다. 그런가 싶더니 가을, 겨울이 왔다. 그 동안 그녀는 주말마다 서울로 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12월. 그녀는 시험을 보았다. 두 번째로 치르는 시험, 그녀에게서 눈물로 쓴 문자가 날아왔다.
 ‘억울하다. 이런 문제를 내다니......’
나는 시험을 끝내고 나오는 그녀를 만나 위로하고 함께 술을 마셨다.
 이렇게 또 1년이 지났고 그녀는 다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1년을 지나면서 내게 남겨진 것 중 하나는 빚이었다. 이미 갖고 있던 빛 때문에 봉급에서 70만원 이상이 나갔지만 내겐 돈 쓸 일이 많았다. 아니 냉철하게 얘기하면 내 분별 없는 사치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 스스로에게 재수 없는 놈이라고 몇 번이고 얘기할 정도로 내겐 재수조차 없었다. 어렵게 동료에게서 얻은 차가 퍼지기 일쑤, 돈을 들여 수리했지만 여전히 계속 망가져 결국 연료비 생각해서 경유차로 바꿨는데 이 또한 내가 몰기 시작하니 망가지기 시작. 결국 지금 타는 차로 바꾸면서 자그마치 1천만원 넘게 들었다. 이 또한 빛이 늘어나는 데 큰 몫을 차지했다. 더하여 월드컵 관전을 위해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다. 겉만 포장한 채 자꾸 속을 상하게 했다.
 이런 이유로 빚이 늘어났고 급기야 2,000만원을 대출 받았다. 그리고 마이너스 통장에 쌓이는 돈. 기존의 빚과 합쳐 내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나기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2003년 5월, 그녀를 내 마음에 안은 지 2년 7개월이 되었다. 내 나이 이제 41살, 그녀의 나이 27. 내가 가진 건 아파트 한 채, 이 아파트를 팔면 빚이야 해결되겠지만 무일푼, 그나마 아직까진 튼튼한 직장을 갖고 있다.
 최근 들어 또다시 그녀가 채팅으로 만난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 그녀가 내게도 몇 번, 그를 좋아한다고 했다. 자기의 배우자로 적합하다나. 시집오라고 하면 얼른 가겠다나. 하지만 옆에서 지켜본 나는, 그 친구는 그다지 깊은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내 고민은 한 마디로 이렇다.
 그녀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나를 평생 함께 살아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편안하게 옆에서 자신을 살펴주길 바란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함께 할 또다른 사람을 염두에 둔다. 나는 빚이 있다. 선뜻 그녀에게 나서지 못한다. 무엇으로 그녀의 마음을 잡아둘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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