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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제국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 Zenobia]

돈키호테 |2003.06.08 12:50
조회 4,249 |추천 0

시리아 팔미라―두로·시돈

 

◇팔미라(Palmyra)

 

‘사막의 신부’‘오아시스 도시’로 불리는 팔미라로 가기 위해서는 다마스쿠스에서 북동쪽으로 230여㎞나 달려야 했다. 성경 역대하 8장 4절에 “솔로몬이 광야에서 다드몰을 건축하고…”란 구절이 나온다. 솔로몬도 이 도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인 셈이다.

 

다드몰(타데몰르)은 후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팔미라’로 불려 오늘에 이른다. 중국과 인도의 문물이 중동에 수입되는 무역도시였으며 향신료와 비단,진주 등 사치품을 농수산품과 교환했다. “뜨거운 모래사막 한가운데 땅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환상도시 팔미라”라고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표현한 대로 사막 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동서를 잇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팔미라 유적을 보면 당시의 무역이 얼마나 융성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상가 형태 가게들이 이어져 있고 캐러밴들이 낙타를 매어놓고 쉴 수 있도록 한 시설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도시의 역사는 주변의 변화무쌍한 제국들과 역사를 같이 하다가 주후 1∼3세기 로마시대에 가장 융성했다. 현재의 유적들도 모두 이때의 것들로 추정된다.

 

팔미라는 272년 이곳을 지배하던 제노비아 여왕이 로마군에게 패배한 후 역사속에서 사라졌다. 16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유적이 세계사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11세기였다.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완전히 매몰돼 버린 것이다.

 

1930년 프랑스 탐사가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팔미라는 아직 발굴중이며 어디까지 얼마나 발굴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돌기둥으로 이어지는 옛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역사를 로마시대로 돌려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미리 도로를 설계한 듯한 정방형 길에는 극장 신전 시장 목욕탕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로마시대의 석조 원형극장은 현대의 오페라 극장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공명이 잘 되도록 설계됐다. 또 회합장소였던 아고라는 당시 토론문화가 얼마나 발달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대별로 묘지문화가 틀려 땅속에 묻었는가 하면 석조관 무덤,공동묘지,탑으로 된 무덤 등 다양하다.

 

팔미라는 솔로몬이 노래한 대로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같은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소였다.

 

두로와 시돈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두로와 시돈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크게 융성했던 항구도시들이다. 마가복음 7장 31절과 마태복음 15장 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곳을 방문하신 일이 기록돼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성읍들을 책망하시면서 고라신과 뱃새다를 두로와 시돈에 비교하셨다(마 11:21,눅 10:13∼14).

 

현재도 이 두 항구는 유적으로서가 아니라 항구도시로 그대로 존재,옛 유적들을 발견해 내기가 쉽지 않다. 두로는 구약성경(삼하 24:7,수 19:29)에도 등장하며 육지쪽을 ‘고대 두로’‘두로 요새’로 불렸다. 두로에는 두로 왕국의 유적이 남아있다. 다윗왕 때 두로왕 히람은 백향목과 기술자들을 보내 왕궁 건설을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건축술은 솔로몬의 건축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페니키아인들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시돈항 역시 금 은 주석 구리 등의 교역으로 부강한 도시였다. 시돈은 두로와 북쪽으로 40㎞ 떨어진 곳에 위치,고대도시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 시돈항에 가면 십자군 시대의 항구 유적이 남아 있다. 성처럼 지어진 이곳에 오르면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와 함께 한 성지순례는 시돈항을 끝으로 10일간의 여정을 마쳤다. 평소 가기 힘들었던 중근동 성지를 다녀왔지만 지난 1월말 당시 미국과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던 이라크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여권에 이스라엘에 다녀온 스탬프가 찍혀 있으면 입국이 안된다며 새 여권으로 바꿔야 했을 정도로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알력을 새삼 느껴야 했다. 연재하는 동안 성원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다마스쿠스=김무정기자 moojeong@kmib.co.kr  2003년 03월 30일 (일)

 

3,400년전 고도 문명 꽃피운 도성

 

 

 

 

다마스쿠스를 출발하여 약 240㎞쯤 달렸을 때 사막의 단색풍경에 익숙해진 눈에 갑자기 녹색의 울창한 야자수 숲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신기루가 아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에 도달한 것이다.

 

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대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샘에서는 수량이 풍부한 맑은 물이 바위틈 사이에서 솟아나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곳은 높이가 10m 이상 되는 종려야자와 대추야자 나무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가 되는 녹색의 이색지대다. 팔미라의 야자수는 고대부터 유명했다. 원래 이곳은 이름도 타드몰(Tadmor·구약의 다드모)이었다.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라는 뜻이다.

 

 오아시스 도시로 발달한 팔미라는 예로부터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하던 카라반(caravan)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고, 동과 서를 잇는 교역도시였다.

 

 

1928년 봄 시리아 해안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한 여인이 밭을 경작하다가 땅 속에 묻혀 있던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석판을 들어올리자 놀랍게도 그 밑에는 부장품이 가득한 고대의 묘실이 드러났다.

 

이 소식은 그 지역을 관할하던 관리를 통해 불란서 파리까지 알려졌다. 당시 시리아는 불란서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었다. 묘실에서 발견된 부장품을 조사한 불란서 고고학자들은 크게 놀랐다. 적어도 3000년은 된 고대 유물이기 때문이었다. 곧 고고학자 클로드 세페르(Claude Schaeffer)를 발굴단장으로 하는 고고학 팀이 그곳으로 파송됐다.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는 우가리트(Ugarit)의 발굴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고고학자로서 세페르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묘실의 발굴은 고대 공동묘지 발굴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고대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우가리트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는 평생을 우가리트 발굴에 바쳐 3000년 이상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우가리트 문명을 세상에 알려 준 공헌자로서 고고학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우가리트의 위치는 오늘날 시리아의 최대 항구도시 라타키아(Latakia)로부터 북쪽으로 10여㎞ 떨어진 해안 지역이었다. 봄, 여름이면 노란색 샤므라 꽃이 뒤덮어 오늘날은 라스 샤므라(Ras Shamra·샤므라 꽃이 피는 갑)이라고 불린다.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우가리트는 신석기시대까지 소급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성이다. 그러나 이곳이 도시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2000년경이었다. 우가리트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지중해의 섬 키프로스(성경의 구브로)와 한 교역이었다. 키프로스 섬은 고대부터 구리 생산으로 유명했다. 우가리트는 그곳에서 구리를 수입해 구리가 귀한 지역에 팔았다. 이러한 국제 교역은 우가리트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어 서기전 14∼13세기에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우가리트의 발굴자 세페르의 최대 업적은 궁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실문서를 보관했던 방을 찾아 낸 것이다. 그 방에서는 수천 점에 달하는 토판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가리트에서 발굴된 토판 문서들은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서 발굴된 사해사본과 함께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잠시 고대 시대의 문자 기록에 관해 살펴보자. 고대 근동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3000년대 후반이었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Sumer) 문명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문자는 그림 형태인 상형문자였다. 그러나 곧 쐐기 모양의 글씨체인 쐐기문자(설형문자·cuneiform)로 발전되었다. 설형문자는 고대 근동지역 전역에 널리 확산되어 사용되었다.

 

문자의 사용은 곧 토판문서를 만들어 냈다. 토판문서란 진흙을 물에 개어 책정도 크기의 진흙판을 만들고, 그것이 굳기 전에 대나무 같은 도구를 사용해서 글씨를 눌러 쓴 것이다. 이것을 햇볕에 말리거나 뜨거운 불에 구워 내면, 돌같이 단단해져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고대 근동지역의 왕실 문서 보관소 기록들은 대부분 이러한 토판문서다. 우가리트궁전에서도 이러한 토판문서들이 대량으로 출토됐다.쐐기문자 형태로 기록된 우가리트의 토판문서들을 연구한 고대 언어학자들은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는, 우가리트에서 사용된 언어는 그 지역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우가리트어(Ugaritic)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언어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와 동일한 셈족어로 두 언어는 언어학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다. 히브리어와 언어적 유사성 때문에 우가리트어는 오늘날 히브리어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구약학자들에게 우가리트어는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할 언어다.

 

둘째로, 우가리트 토판문서는 쐐기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알파벳(alphabet) 기록이다. 우가리트 사람들은 모두 30개에 달하는 자음과 모음을 고안, 이를 사용해 엄청나게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다. 이들 토판문서의 기록은 서기전 1000년대 후반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종교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지금부터 3400년전,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던 우가리트는 서기전 12세기 경 계속된 가뭄과 지진,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몰락했다. 그후 오랫동안 동면의 세월을 지나 세페르의 발굴에 의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제노비아[ Zenobia]은 누구인가?

 

팔미라(시리아)의 여왕.
국적 : 시리아

 

남편 오데나투스와 그의 아들을 모살한 뒤 자신의 친자 바발라투스를 보좌하여 국정을 지배하였고, 로마제국 동방의 여왕으로서 세력을 확립하였다. 남성을 능가하는 정력과의지의 소유자인데다가 뛰어난 미인으로서 ‘아라비아의 클레오파트라’라고 불렀다.장군 자브다를 파견하여 이집트를 영유하였고(270), 다시 소아시아 일대에까지 그 세력을 떨쳤다.

 

처음에는 로마제국에 협력하는 듯 보였으나, 아우렐리우스(재위 270∼275)가 로마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는 양자의 관계가 악화되어 이집트와 소아시아의 지배권을 잃었다. 그녀는 황제의 진공(進攻)을 안티오키아에서 막으려 하였으나 실패,다시 에메사의 패전으로 수도가 포위되었다.

 

그녀는 사산왕조페르시아에 구원을 청하려 하였으나, 유프라테스강변에서 체포되어 황제가 로마로 개선하던 날에 연행되어 시민 앞에서 공초(供招)하는 수모를 당하였다. 그 뒤 해금되어 아들과 함께 로마의 근교 티볼리에서 생애를 마쳤다. << 백과 사전>>

 

<<몰락의 원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역사가들은 이를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축한다)한 제노비아는 투구를 쓰고 말을 달리는 것이 취미였다. 그는 당당한 배포에 미모까지 갖춘 여걸이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동전에 주조된 그의 모습은 상당한 미모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왕이 죽자 왕위에 오를 왕자가 미성년이라는 것을 구실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노비아의 지나친 야심은 자신과 팔미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서기 272년 제노비아는 아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수여하고 황제의 어머니로 자처했다. 로마의 황제가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아우렐리안 황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성을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팔미라를 빠져 나왔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려는 순간 로마 기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는 황금사슬에 묶여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로써 팔미라의 영광은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욱이 11세기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후 사막에 몰아치는 모래바람은 팔미라의 유적을 모조리 모래 더미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오랜 망각의 시간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약 16만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엄청난 유적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직도 그 작업의 완결은 요원해 보인다. 팔미라에서 발굴한 유적은 전형적인 로마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내면적으로는 팔미라의 고유한 문명과 로마의 건축문명이 만나서 이룩한 독특한 문명이다. 사막의 도시 팔미라는 동양과 서양 두 문명이 만나 새로운 문명을 잉태한 문명의 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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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비아에 대한 전설>>

 

3세기 초 동부 시리아의 한 사막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그녀의 이 름은 제노비아였고 그의 아버지는 아라비아의 유목 민족의 추장인 삿파이,

어머니는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자처할 정도의 미인이었던 그리스의 여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과 재기를 겸비했던 제노비아는 커가면서 남자 못지 않 은 학문 실력과 외국어 그리고 남자도 타기 어렵다는 낙타를 장난감 다루듯 이 잘 탔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목 민족인 베두인족의 추장이었기 때문 YR 그녀 역시 성인이 되어서는 자연스레 베두인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 무렵 시리아의 사막에 수목이 울창한 오아시스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곳을 팔미라라 불렀다. 

대상(무리를 지어 떠돌아 다니는 장사 꾼)들이 필수적으로 들리는 교통의 요지였다.

 

중국의 비단, 인도의 보석, 페르시아의 융단과 진주, 아라비아의 향료 등 동방에서 다른 곳으로 향하는 물건들은 모두 이곳을 거쳐 가야만 했다. 물건들은 일단 이곳에 모여 장이 섰으며 1차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시 다마스커스나 로마 그리고 부유한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로 팔려나 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처럼 상업이 왕성하게 발달을 하자 시민들은 파르뮤라의 도읍을 방비하 기 위해 거리의 둘레에 총 연장 11킬로미터에 달하는 성을 쌓았다.

 

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 궁전과 신전은 물론 모든 건물에 정교한 조각을 새겨넣어 그야말로 환상적인 도읍을 만들었다.

 

사막의 한가운에에 이렇게 강력한 도시가 발달을 하자 로마인들은 팔미라의 부를 탐내어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점령하여 자신들의 땅 으로 편입을 시켜놓았다.

 

그러나 자유를 사랑하던 팔미라의 시민들은 비밀리에 힘을 키우며 독립 의 꿈을 가꾸어갔다. 그들 중 로마 제국으로부터 임명을 받고 파라뮤라의 통치에 관여하고 있던 젊은 아랍의 귀족 오데나토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비록 로마 제국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팔미라의 지도에 참여하였지 만 그의 마음은팔미라 (파라뮤라)의 재건에 있었다. 그래서 반란군을 지도하기도 했으며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제노비아를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제노비아와 결혼을 하고 팔미라에 있는 궁전으로 돌아왔다.

 

제노비아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어느 남자 못지않은 힘과 지략 그리고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고 훈련을 받음 으로써 막강하게 군사력을 키워 놓았다. 오래지 않아 제노비아는 스스로 훈련시킨 군대를 직접 통솔하게 되었다.

 

제노비아는 페르시아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로마 변경 수비대를 쳐 부수고 파르뮤라를 공격하자 남편을 대신하여 전투에 참가 하였다. 이 전쟁 에서 제노비아는 여장으로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남편인 오데나테스는 로마 황제로부터 총독이라는 작위를 내리며 제노비아를 칭송했다.

 

그 리고 동방의 지휘권을 오데나테스에게 넘겨주었다.

 

팔미라의 세력은 어느 나라보다 강대해졌다. 그러나 그 무렵 제노비아는 남편과 아들을 잃게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아 랑곳없이 일을 수습하고 스스로 동방의 여왕이 되어 팔미라의 시민들을 다스렸다.

 

그녀는 자신의 전투력을 어디다 쓸까 고민을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그녀의 먼 조상의 나라인 이집트였다. 제노비아는 정예 요원 7만 명을 데리고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다. 단숨에 이집트를 점령한 제노비아는 아들에게 이집트의 왕 자리를 주고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한때 파르뮤라를 지배했던 로마의 영토를 대부분 탈환하여 여장부 로서 이름을 한껏 드높였다.

 

제노비아는 나라가 부강해지자 궁전과 신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다. 오아시스의 제국 팔미라에 다시 상업과 무역이 화려 하게 꽃을 피웠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다. 틈틈이 군사를 훈련 시켜 점차 힘을 키워 나갔다. 어느 정도 힘이 세어졌다고 생각을 하자 로마 군은 팔미라를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사막에서는 파르뮤라 군대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로마에는 전쟁의 백전노 장들이 버티고 있었다. 승리에 도취해 팔미라 군은 무작정 로마군을 뚫고 들어갔다. 로마군은 작전을 쓰며 후퇴를 하였다. 그리고 팔미라 군이 승 전가를 부르며 편안히 쉬고 있을 때 로마군이 기습을 하였다.

 

결국 제노비아군은 팔미라 성까지 쫓겨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고 로마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제노비아는 할 수 없이 이웃 나라의 힘을 빌리기 위해 성을 탈출하여 말을 달렸다.

 

그러나 로마군이 그녀를 추격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체포가 되었고 팔미라성은 불바다가 되었다. 종말은 이렇게 처참하였다. 그 뒤 팔미라는 완전 폐허가 된 채 사막에 아주 작은 흔적만을 남긴 채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로마군에게 체포된 제노비아가 그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나 와있지 않다. 자신이 세운 파르뮤라가 파괴되자 식음을 전폐한 채 굶어죽었 다고도 하고, 로마군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로마 시내를 끌려 다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후에는 로마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설과 티벱 강가에서 다시 로마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진실인 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제노비아는 팔미라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여장부였으며 여왕이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현재에도 그 흔적은 당시에도 있었을 사막에 많이 남아있다.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오래 전에 어떻게 이렇게 발달된 문명을 가질 수 있었는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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